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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의 암흑기라면 거의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일제강점기를 말한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우리네 조상들의 삶은 일본의 전쟁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으며 세계2차 대전의 여파는 우리네 땅과 조상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나 아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흐름이었다. 이 책은 피터 드러커라는 한사람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통찰력 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며 제 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대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보고 있다. 이 무렵의 책들이 전체적으로 정치적인 색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한다고 보면 저자가 왜 이 책을 서술했는지 또한 짐작이 간다. 피터 드러커는 전체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포기하려는 위협에 맞서서 자유를 견지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또한 다지려 이 을 저술했다. 뒤에 그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 신회성과 타당성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가 어떠한 관점을 소유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반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기독교의 문제점, 전체주의 등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빠지는 수많은 오류중에서 사회적 경제적 분야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한 시대를 들여다 보았다. 뿐 만 아니라 그 분석을 토대로 앞으로 우리 미래를 일궈나갈 이들에게 우리들의 인생에서 피할 수 있는 재난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기르게 한다. 솔직히 이 책은 경제학을 공부하거나 하는 이들이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처칠의 절대적인 칭송을 받은 부분이 비단 경제에만 국한이 되거나 경제적인 시선에만 머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과거 우리역사의 암흑기에 세계역사속의 재앙들을 들여다 보며 무엇을 생각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오류를 알고 작가의 시선을 아는 정도에서 끝나건 작가가 원하는대로 미래의 재앙들을 피해가는 지혜를 배우건 말이다. 요즘처럼 바쁘고 스키밍(skimming), 스캐닝(scanning) 기법을 이용한 독서가 활발한 시대에 대놓고 정독을 권하는 책은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 책 첫 장부터 정독을 권하는 이 책의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바로 피터 드러커의 모든 사상의 토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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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실이든 이상이란 것은 없다.
아무리 좋은 이상(理想)도 시간이 흐르면 극으로 달하고 변질되기 마련이다. 종교든지 사상이든지 화려하게 꽃 피우는 시기가 현실 모태를 극(剋)하는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품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 왜일까? 사상이나 이념이 정점을 지나기 시작하면 조금씩 현실 불합리와 현실 괴리가 나타난다. 그것은 현실의 발전에 사상이 따라오지 못 하는 측면도 있고 현실의 불만을 새로운 이상(理想)세계라는 신무기를 만들어 기존의 질서와 대치하기 시작하는 신진 정치세력과 구 정치세력(특권세력) 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념들이 재포장 되어 돌고 돌며 생물계의 대명제인 진화가 인간 사회의 이념에도 인간과 같이 진화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전체주의(파시즘, 나치즘)가 생성 되듯이 꼭 진화란 것이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진화가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나라 현실에 불합리를 다만 그 시점에서 개선 또는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역자의 첫 문구는 “정독하기 바란다” 이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몇줄읽고 생각하고 몇줄읽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피터 더러커’가 그 나이에 그정도의 책이 나왔다는 것이 다만 놀라울 뿐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다. 추천 하고픈 책이다. 강렬한 사상의 흐름에 정신을 맞겨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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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역사책이라 말한이유는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알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입장에서는 역사나 경제에 큰 배경지식이 없었던 터라 다른 책들 보다 읽는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고 볼수는 있지만 그 시간이 또 걸린다고 하더라도 좀더 지식이 쌓이고 난뒤에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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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발명했을까..
피터 드러커는 아마도 타임머신을 타고온 과학자였던 것 같다. 그가 어떤 목적으로 과거로 가서 이러한 책을 남겼을까..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 이 '경제인의 종말' 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피터 드러커도 이름만 겨우 알 뿐이었고, 전체주의, 파시즘, 나치즘 역시 어렴풋한 개념만 잡고있을 뿐이었다.
역자에게 감사하게 되는 책
사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지식이 짧은 탓에 그의 글 그대로가 나에게는 진실이자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그에 대한 저항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역자에 대한 리뷰를 쓰고자 한다.
'나는 모순 되기 때문에 믿나이다.'
이 리뷰를 쓰고있는 지금 20만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있다. 나로써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국민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를 선출하였는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역사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처해있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뒤적거리게 된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텍스트로서 이 책을 선택한다면 현실을 바라보는 좋은 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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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의 종말을 읽고 피터 드러커라고 하면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지금도 책장에 있는 “프로페셜널의 조건”, “변화 리더의 조건”, “이노베이터의 조건” 들 이다. 이 책들은 상당히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이다. 하지만 피터 드러커라는 인물을 나의 머리에 깊이 각인 시키기에는 충분한 책들이였다. 피터 드러커는 경영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명이다.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사실 이 책이 언제 쓰여진 책인지 전혀 몰랐다. 단지 돌아가신 분의 책이 출간 되었다길레 무척 의아해했다. 또한 당연히 피터 드러커의 책이였기 때문에 읽어 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한 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책이 피터 드러커가 젊었을 때 쓴 책이였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은 지금 현재에 적용해도 될 만큼 충분히 현재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거의 반세기 전에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구 말이다. 피터 드러커의 통찰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특히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맹신하고 있는 “인간은 합리적이다.”라는 생각을 벌써 반세기 전에 파괴해버렸다는 것을 알고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합리성을 무기로 세상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합리적임을 과시한다. 하지만 웃긴 것은 자신의 합리성은 주장하지만 다른 사람의 합리성은 철저히 무시하고 있고, 자신의 이익과 합치되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논리적이라도 합리적인 사람인양 생각해 버리고 만다. 이런 것은 이 책에서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사람들의 생각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책은 매우 놀라운 책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 1차 경제 공황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적절하게 해석하고 있고, 그 해석된 결과는 지금까지 사용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피터 드러커라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책장에 있는 피터 드러커의 다른 책들도 다시 꺼내어서 곱씹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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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이라는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제인은 종말 했을까? 아니다. 길가는 사람중에 10에 9은 경제인일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인의 종말이라는것은 무슨뜻일까?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피터드러커가 자신의 첫번째 저서에서 엉뚱한 실수를 하게 된것일까? 그렇다면 이책은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였을것이 분명하고 7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출판되지 못하였을것이다. 과연 30살의 드러커가 말하는 경제인의 종말이란 무엇인지 들어가보자. 옮긴이의 해설에서 보면은 " 이책의 분석대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대공황시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양차대전 사이에 전체주의가 등장한 이유와 폭정 그리고 그것의 미래 전망에 대한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책을 읽을때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보는것하고 그당시의 시점으로만 책을 바라보는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것을 뜻할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책을 읽으면은 드러커의 생각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수 있으니 읽으실때 참고하시길~ 책은 전체적으로 파시즘, 나치즘, 전체주의를 중심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세계사와 철학분야에서 내가 그렇게 박식하지 못하여 나도 저것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보니 무슨뜻인지 흐름은 알수있었다.그러니 저런 개념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겁먹지 마시고 본인처럼 저 세가지 개념을 전체주의로 이해해도 무방할듯 싶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다르겠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체주의는 이념이 없다. 적극적인이념은 없고 부정적인 이념만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왜 지금(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드러커가 책을 펴낸 1938년이다)에 와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는것일까? 그당시 파시즘에 대하여 아주 잘표현한 문장이 있다. " 우리는 빵값이 내리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빵값이 오르기를 바라는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빵값이 그대로 있는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것은 나치가 책정하는 빵값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제정신으로 할수 있는 소리냐고 생각하였지만 그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은 대공황과 세계1차대전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너무나 큰 절망속에 빠져있었다. 너무도 큰 절망속에 빠져있는 경우에는 모순되는 사실을 믿고싶어한다. 큰 기적을 바라면서.. 자본주의의 붕괴로 인해 경제인은 종말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돈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거짓말임이 뻔한 사회주의 이론을 믿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악마로 인해서 큰 심리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대공황을 막을수 있으면 자유와 평등도 포기할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것이다. 그러한 대중들의 심리를 파악하여 구질서의 질서는 파괴하되 동시에 겉모습을 유지하는 파시즘이라는 마법사가 출현하게 된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이성과 과거를 부정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성공했던것이다. 주목해서 봐야하는점이 파시즘이 추구하는 비경제인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경제인의 사회라면은 전체주의는 비경제인의 사회라고 할수 있다. 자본주의의 실패로 전체주의를 내세운 파시즘들은 비경제적인 보상들로 모든 국민들을 만족시킬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국주의로 인하여 비경제적 보상이 가능하였지만 그들에게는 더이상 경제적인 자유나, 그밖의 자유들이 군국주의라는 명목하에 지배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과연 그것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포기할만큼 가치가 있는것이라고 생각했었던것일까? 자유보다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평등이 절실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7장 "전체주의 - 기적인가 혹은 신기루인가? "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전체주의는 긍정적인이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떤것들에게 반대하는 이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유대주의와 전쟁을 성스럽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적으로 만드는일을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전체주의는 계급과 경제적인 자유가 없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였을때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결정권자가 적다는데 많은 문제점을 가져온다. 예를 들면 전에는 기차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경우 가까운역에 역장이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이제는 중앙관리자에게 의견을 물어서 처리해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소비가 되었다. 전체주의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만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생긴것이다. 전체주의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이념의 발생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대안이 없어서 기존의 가치와 사상에 반대하기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등장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유럽사회가 혼란한 시기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그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야망을 달성하는데 쉽게 한걸음 더 나아갈수 있었다. 대공황이 없었다면 과연 히틀러의 나치가 힘을 얻고 군사력을 증강시켜서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킬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수 있다. 드러커의 미래전망을 보면은 놀랍게도 결과론적으로 봤을때 일치하는것들이 많다. 물론 틀린것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과 의견으로 미래의 결과를 도출해낸다는것은 정말 대단한일이라고밖에 할수 없다. 드러커의 30살의 나이로 이렇게 많은 사실들을 알았다는것과 그것들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것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책이 그의 첫번째 저서엿다는 사실이었다. 첫번째 저서치고는 너무 논리적이고 산만하지 않은 그만의 확고한 신념이 책속에 매력으로 묻어나왔다. 개인적으로 남는 아쉬움은 책을 100%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사회에 대한 기본지식과 어느정도의 기본철학의 숙지, 그리고 대공황과 1차세계대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는 그래도 다행히 독일과 러시아에 대한 배경지식이 조금이나마 있어서 독일과 소련의 이야기가 나왔을때는 막힘없이 읽을수 있었다. 추가로 이탈리아에 대해서만 조금더 알았다면 이책에서 얻은 깨달음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드러커의 책중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완독한 첫번째 책이었다. 그만큼 두껍지만 흥미롭게 읽었다는점이다. 그리고 옮긴이가 서두에서 말한것처럼 정독하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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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형성은 언제나 당시 현실과 대비해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모순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상에 가까운 구체적인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마다 제한된 지역적인 공간에서 현실체제가 가지는 한계로부터 나타난 문제가 사회의 체제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체제과정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시대 다른 농도에 따라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통된 이상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여러 방법과 형식으로 체제를 담은 주의(ism)를 만들게 된다. 주의의 탄생은 사상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사상이라는 명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 의도된 여러 해석에 따라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여러 사상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에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주의(ism)에 대해 대중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반감과 혐오를 느낀다면 쉽게 말해 모든 사상적 근거를 거부하고 모두 부정하고 싶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주의)가 갖는 확실한 명분의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특징은 바로 이와 같이 모든 사상의 부정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전체주의가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고 소멸되어가는가?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은 바로 전체주의의 내용과 전개과정 그리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모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제가 전체주의의 기원이라 해서 전체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패러다임에 편승하려는 저작이 아닌 전체주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와 같은 체제가 구축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여러 정황과 전개과정에서 논리를 도출하는 피터 드러커의 정치서적이다. 피터 드러커의 이 서적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 종결이 가져다 준 이미 마련된 결과에 대한 성과주의에 집착한 의례껏 하는 분석 대상이 아닌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과에 대해 구조적인 산출물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미 구조적 분석이 마친 상태로 이 체제가 어떤 귀결점으로 향할지 명백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약 70여 년이 흐른 지금 관점에서 봐도 전혀 퇴색하지 않는 그의 통찰력이라는 면에서 이견이 없다.
그렇다고 경제인의 종말인 이 책이 단순히 피터 드러커의 뛰어난 통찰력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너무나도 단정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표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현실분석에서 오는 예견된 결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가 이 책의 주된 목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시대 다른 형태로 전체주의의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고 그런 방향으로 이해를 돕고자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거시적인 시각에서 성립된 논리 전개에 전체는 공감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박하고 싶은 부분은 현실의 시각에서 과거를 평가하는 역사관에 입각한 해석이다. 하지만 과거에 묶인 역사관에서가 아니라 분명한 것은 프로파간다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와 경제인이 가지는 개념의 포괄성이다.
먼저 프로파간다의 측면에서 보면 반파시즘에서 품고 있는 환상이라고 하여 언론에서도 나치를 비판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반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악랄하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세뇌적 선전활동을 통해 나타난 결과로도 보지 않는다. 나는 다만 프로파간다가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선동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말하고 싶다. 즉 이미 집단적 사고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수단적 의미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 물론 프로파간다가 권력의 통제에 놓이게 되면 조작되거나 의도된 수순에 의해 더욱 파괴력을 갖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반복되다 보면 진실이 되어버린다.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현대에 더 큰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기제임에도 틀림없다. 20세기 초반일 때는 대중적 호소력이 확산되는 데 시간적 틈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시간보다 앞선 파급력이 대중적 호소력을 강화시키는 데 20세기 초 보다 훨씬 시공간적으로 초월하게 되었다. 또한 자아의 판단 준거도 무분별한 정보 때문에 쉽게 부화뇌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를 끊임없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과 없이 받아드리면서 판단 준거가 퇴색해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판단 준거를 프로파간다에 둘 수밖에 없게 되며 의존하는 만큼 프로파간다의 영향력은 비례해서 끝없이 커진다.
한편 경제인의 종말이라는 말에서 오는 의미를 살펴보면 경제인 개념의 한계적 의미를 가진다. 경제적 자유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려는 자본주의와 계급 없는 사회로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려는 사회주의의 근간인 경제인의 내용이 그것이다. 두 주의가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경제인의 개념은 사회에서 자신만의 역할과 위치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경제인의 활동이 경제적 자유가 변증법적으로 평등과 연결되지 못함이 증명되자 결과적으로 경제인이라는 개념이 붕괴되었다는 의미다. 피터 드러커는 현실에서 정당성과 타당성을 띤 어떤 구조화된 개념과 의식 그리고 체제를 구성하던 경제인의 개념이 붕괴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경제인의 개념에 대한 붕괴라기 보다는 일시적인 혼란 상태에 있었다고 본다. 자유와 평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체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지 그동안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화 되어 있던 경제인이라는 의미가 붕괴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붕괴가 아닌 일시적으로 가치에 대한 혼란에 사로잡혀 잠시 퇴색했을 뿐이다. 한계적 의미를 가진 경제인의 가치를 비경제적 특권이라는 대용가치가 등장하면서 구분점으로 활용 됐기 때문에 경제인 개념의 붕괴로 비추어질 수 있다. 붕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혼란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무방비 상태인 경제인이 심리적 위안을 삼을 수 있고,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상 실현을 위한 대용가치가 전체주의이다. 따라서 경제인의 붕괴라기 보다는 비경제인 개념의 확장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경제적 만족 보상이 아닌 훈장, 칭찬, 사회적 위신 즉 비경제적인 특권으로 경제적 결핍을 보상해주겠다는 원칙이 바로 전체주의가 파고든 부분이다. 전체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살펴보면 사회유기체설이 강하다. 사회적 불평등을 합리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으로써 사회라는 기제 안에서 지위를 보상받는 개인의 기능적인 측면에 정당성을 부여 했다.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경제적 목적을 단 하나의 사회적 목적에 종속시켰다는 점이다. 체제는 완전고용이 용이한 군수산업으로 바뀌게 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준군사적 조직이 중요한 생활 영역을 제공하게 된다.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분리하기 위한 행위였다. 결국 계층구조화를 촉진하게 되어 상사의 명령 수행 즉 명령과 지시가 원활한 조직적 행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체주의가 그 자체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전체주의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쉽게 말해 리셋(reset)의 의미가 컸다는 점에서 본연 자체로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 어떤 유전적 오염과 성질 없이 정당성을 내포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그 자체로 순결한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여타 다른 사상은 불순물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이른다. 다시 말해 세부적인 시행원칙으로 발전한 것이다. 결국 내부의 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외부의 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지닌 기존 체제에 대한 우월성으로 이루어져 나타났다.
일련의 이와 같은 전개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두 사상이 유럽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존적 구심점 역할을 한 두 사상이 한계를 나타내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본질은 체제 전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념적 경계의 충돌에 있다. 한 지역, 한 국가, 한 민족에 의해 단계를 거친 정반합의 논리로 체제의 한계가 저마다 같은 공간 다양한 사상의 충돌에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대상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에 살던 피터 드러커의 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0세기 초 다양한 이념의 대립과 혼란한 상황 유럽 중심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상황과 전개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무엇보다 피터 드러커는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를 포함하는 전체주의의 내용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주의의 진행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증상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가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기다려 이론적 분석을 가하려는 때늦은 행위가 아닌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다시 말해 사건의 흐름과 추이를 파악하여 본질에 대한 해석이 주효했다는 점이다.
이념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다만 불씨로 남아 있는다. 자신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집단을 기다리면서 언제나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 자체로 내성을 키우면서 말이다. 피터 드러커가 이러한 불씨를 경계한 이유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을 강력추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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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의 종말. 과연 경제인이란 무엇일까? 피터 드러커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 치하의 모습에서 어떻게 광기가 사회를 지배하는 가를 제대로 목격하였다. 그가 본 광기에 대해 그리고, 그 광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나치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바로 경제인, 다시 말하면 개인의 자유를 믿는 그런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지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 또한 이렇게 경제인이 죽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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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작성되고 1939년 제2차세계대전 직전에 발표된 책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 등장에 대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예견을 그린 책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의 저급과 피터드러커의 정의법에도 익숙치 않아 핵심을 잡기에 버거우며, 오랜 옛 책을 현재에 분석한다는 것에 대한 중압감도 적지 않다. 솔직히 이 책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어쩌면 확신보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마감할 것이라 예상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29년 대공항을 겪으며 나타난 유럽적 현상(드러커는 파시즘을 유럽에서만 있을 것이라 단언한다)으로 파시즘을 설명하고 있다. 유럽사회의 가치로 인식되어진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한 노력으로 사회상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인간모델을 제안하고 분석한다. 영적인간, 지적인간, 경제적인간으로 사회와 함께 성숙된 인간모델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장의 한계극점에서의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 배경을 인간모델의 심리상태에서 끄집어 내고 있다.
영적인간으로 종교적 구원이라는 신념은 자본주의 질서와 사회주의 질서의 성장에 의해 붕괴되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지적인간은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며 자유평등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부르조아계급의 탄생이라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이 역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은 불가능함을 확인한다. 그리고 경제인으로 옮겨오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마르크스주의 계급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약속은 자본주의라는 타도의 대상을 전제로 하는 상황에서의 실현성만을 유추 할 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행에서의 답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계성으로 노동조합주의로 전락을 의미할뿐임 확인한다. 자본주의 역시 경제의 확대와 성장은 사회적 목적(자유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 믿었지만, 계급의 분화와 이로 인한 대중의 빈궁화를 낳게 되며 자유와 평등은 거리가 먼, 또 공황으로 인한 실업의 공포를 통해 경제적 자유마저 포기하였으나 그 대안은 발견되지 못하는, 좌절은 극에 달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인간모델의 한계성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정점에 다다르며, 이러한 군중의 허무심리에 근거하여, 전체주의는 등장한다. 합리성을 상실당했기에 과거를 부정하고 거부했던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져들었던 것이며, 전쟁과 실업을 추방한다면 자유도 평등도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시민의 심리를 추동하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라 평가한다.
전체주의가 목표로 하는 비경제인 사회는 새로운 인간모델로 경제인을 대처할 영웅적 인간을 전체주의의 집중을 위한 목적을 위해 유대인 박해를 수단 삼는다.
새로운 인간모델로 경제인이 아닌 비경제인을 모델 삼으며 전체주의의 모습은 성장하고 실업없는 사회를 위해 모두가 빈곤해지는 것을 당연시하는 상황을 연출 필연적으로 군이란 시스템을 통한 계급의 통솔을 이끌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더라도 그 내부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는 빈약한 사상적 기반으로 이끌어지는 모습으로 전체주의를 예견한다.
이 책이 분명 정치서적이란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러한 파시즘의 본질적 이해를 정치 사회적 불안전성에서 밝히는 점은,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성에 대한 명쾌한 답은 해답하지 않고 있다. 이 후 그의 다른 저서에서 밝히는 지식노동자와 지식경영으로 인간모델의 새로움을 제시하였다.
이 책을 보며, 그의 안목이 놀랍다. 당시 파시즘.나치즘 전체주의에 대한 현상은 알 수 있고,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었지만, 그 바탕의 상태와 전체주의를 가능케 하는 동력을 밝히지는 못했던 것에 대한 그의 접근법이 놀랍다. 사회가 갖는 인간본성에 대한 개념은 그 사회의 본질에 걸맞는 사회의 모습으로 규정한다는 그의 발상은 기존 경제체제중심의 접근과 차별되는 새로운 접근법이 되며, 도식적 이해가 아닌, 인간 내면으로의 사회의 이해의 접근과 새로운 인간모델은 어떻게라는 문제의 출발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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