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작가 한강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 주는 최선의 말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소설 『소년이 온다』를 발표한 후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저 말이 단지 그녀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극도로 민감한 감수성과 폭력에 대한 극한의 예민함이 작동하고 있어서, 나는 사람이 과연 저렇게까지 예민하고 섬세해질 수도 있구나를 생각하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자면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고기가 구워지는 모습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겠나.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그 비극을 직접 겪은 게 아니라 해도, 그는 마치 제 일처럼 힘겨워하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경하’는 친구 ‘인선’의 새를 구하러 제주도로 떠난다. 인선의 제주도 집에 홀로 남겨진 새 ‘아마’는 누군가 물을 주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다. 경하는 극심한 눈 폭풍을 뚫고 아마에게 가는 와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에 처한다. 정말 그 새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할 존재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152면) 그러나 우리는 경하에게 왜 아마를 구하러 가느냐고 묻지 않아도 이미 안다. 경하를 대신해 한강이 직접 대답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며칠째 물을 마시지 못해 조금씩 죽어가는 새를 상상하는 일이란, 그에게 또한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세상의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이러한 이분법은 손쉽고 명확하다. 어떤 고통 앞에서 그것이 내 것이냐 타인의 것이냐를 따질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냉철한 판사가 된다. 만일 내 것이라면 그 고통은 과장되기 쉽겠고, 남의 것이라면 축소되거나 많은 경우 무시될 것이다. 요컨대 나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간단히 압도한다. “바람이 몰아쳐 들어온다.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츰 마비되어, (…)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바깥으로 빠져나간다.”(122면) 새의 고통과 인선의 고통은 내가 직접 겪고 있는 맹렬한 추위와 두통 앞에 무력하다. 경하가 병원 로비에서 손/발가락이 절단된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도 그렇다.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피하고 싶”(32면)었다거나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256면)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가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을 넘어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만 해도, 고통은 언제나 충분하다. 타인의 고통까지 받아들일 공간이 우리 안에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한강의 소설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거나 혹은 반문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스스로의 고통만큼이나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인물들이 여기 있다. 눈 폭풍 속으로 새를 구하러 가는 경하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학살 증언 자료집과 관련 기록물을 수년간 모았던 인선의 어머니도, 그 기록물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던 인선도, 그리고 학살당한 이들을 생각하며 가끔 멍하게 환상에 빠져 지냈던 그녀의 아버지도, 다들 절망적이고 뭔가에 실패한 삶을 살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이들이다. 마치 그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고통은 내게도 고통스러워요. 그러니까 ‘제주 4 3’과 ‘보도 연맹 학살’ 사건은 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저 인물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면/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이 썼다고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한 대목이다. 사람이 죽으면 종을 울리던 관습에서 저 제목이 탄생했다. 이 시에서 존 던은 누가 죽었기에 종을 울리는가 궁금해하지 말라고 전한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라는 대목이 설명하듯, 누군가의 죽음은 곧 내 일부의 죽음이므로, 종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울린다는 것. 이 유명한 시와 한강의 소설은 썩 닮아 있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라는 순진한 분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결국 살리지 못한 새를 보며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196면)라고 비정하게 묻는 일은 너와 나의 고통이 철저히 각자의 것에 불과하냐는 물음과 같다. 과연 그런가. 70년 전 그 섬에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겪었던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걸까. 작중 경하와 인선이 하려는 작업(아흔아홉 그루의 나무를 들에 심어 먹을 입히고 그 위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일)이 대답을 대신한다. 그들은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상업적 목적이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받으려고 그 작업을 한다. 둘은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 나갈 때마다, 거기에 먹을 칠해 나갈 때마다, 그리고 그 위에 눈이 한 송이씩 쌓일 때마다 고통받을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문당했고 아무 이유 없이 총살당했는데, 도저히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듯이, 마치 고통받는 것이 그들의 마땅한 의무인 듯이. 작품 2부에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어떤 산속 바위에 대한 전설이 언급된다. 착한 일을 해서 혼자만 살아남게 된 여자가 있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해일에 휩쓸려 죽는데, 이때 그녀에게는 산중턱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만 살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여자는 어김없이 뒤를 돌아봤고, 결국 그 자세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는, 그런 전설. 이 전설은 타인의 고통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가거나 뒤돌아본 채로 돌이 되거나. 그러고 보면 폭설이 내리는 밤의 숲속에서 눈 속에 둘이 함께 눕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의 결말은 뒤돌아본 대가로 돌이 되고 만 저 전설 속의 여자와 흡사하지 않은가. 경하와 인선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작중 경하가 말한다.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241면)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언제나 뒤를 돌아보겠다는 것이지, 돌이 되어 죽고 싶다는 게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아픔들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겠다는 것이지 그 아픔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게 아닌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시인들의 책무란,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천안함, J 선생님께」)이라 쓴 문장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자란 비극을 잊지 않거나 잊지 못하는 자다. 나의 고통 앞에 너의 고통이 잊혀지는 게 아니라,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만들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게 하는 것. 그렇다면 뛰어난 작가란 오래 슬퍼하고 영원히 아파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들이 약해서 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울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무력하게 고통받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사력을 다해 고통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고, 작가 한강이 그렇다. 그들은 얼마든지 더 울고 더 고통스러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뒤돌아보다 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아픔들과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은 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망각하지 않겠다는 것은 끊임없이 고통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영원히 고통받으며 서 있겠다는 것은 처연한 체념이 아니라 결연한 의지다. 절단된 손가락의 봉합 수술을 받은 인선은 삼 분에 한 번씩 봉합된 자리에 바늘을 찔러 넣어야 한다.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 계속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40면) 삼 분마다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선의 처지가 왜 안쓰럽기보다는 감동적일까. 아마도 작가 한강의 모습이기도 할 그의 모습에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고통의 의무를 짊어진 자의 결연함을 본다. 무려 칠십 년이나 지난 일인가. 아니, 칠십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계속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신경이 죽어 버린다는 저 말처럼, 우리가 제주도의 비극을 기억하며 계속 고통받지 않는다면 역사의 한 부분이 죽을 것이다. |
|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어렸을 때 친구에게 처음 선물 받아 펼쳐보았던 책으로, 그 당시 부커상을 수상하여 막 유명해진 참이었다. 그땐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때였고, 다독을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1부는 물 흐르듯이 문장만 넘겨 읽었고 2부는 문장을 넘어오는 역겨움 때문에 채 읽지 못했다. 책을 덮은 후에는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 포르노적인 묘사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뜻 모를 거부감이 피부를 타고 올라오더라. 그러다가 문득,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졌다. 내용이 역겹다던 감상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6년 전보다 아는 것도, 느낀 것도 많아진 지금 읽으면,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하게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여전히 내용은 역겹고 불쾌했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은, 그 불쾌함의 원인이 명료해졌다는 것이다. 영혜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는 그의 가족이나, 그를 이해해 보려 한 적도 없으면서 전과 다른 낯선 면을 발견한 양 놀라던 남편이나, 그를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본인의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려 애쓰던 그의 형부가, 불쾌함의 원인이었다.
1부와 2부가, 그러한 불쾌함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영혜의 행동이 제멋대로 해석된다는 점이, 오히려 현실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영혜를 미쳐가는 사람으로 여기는 남편의 시선과 본인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시켜줄 뮤즈로 여기는 형부의 시선은 전부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맴돈다. 인혜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3부의 마지막에서야 결국, 영혜의 숨죽인 몸부림은 조금이나마 이해받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인혜도 영혜와 같이 손찌검을 맞는 딸이었고, 수레에 매달린 개였으며, 이해받지 못하나 그 어떤 것이든 감내해야 했던, 식물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만 보였던 세상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쌓아올려진 제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것마저 한계에 다다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흉내만 내고 있던 거라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데 흉내만 내느라 진짜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삶이라면, 짐승처럼 포효하느니 속으로 움츠러들어 흙과 하나가 되고 싶어지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지만, 끝까지 완독하기 너무 힘들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영혜에게 쏟아지는 모질고 냉정한 시선들, 폭력적인 시선들이 문장을 넘어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이해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숨이 막히고 맥이 빠지는 것들이었다. 현실의 몰이해와 손가락질이 그대로 재현되는, 허구의 것일 텐데도 결코 허구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 감각들을 그대로 받아내는 건 참 고된 일인 것 같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이 발화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라는 시선이 따라붙는 건 언제쯤 바뀔까. |
|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읽고
한강은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로, 일찌감치 ‘한국 현대문학의 기수’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이렇게 촉망받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기회에 그녀의 작품이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소설가가 왜 굳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소재로 새롭고도 위태한 도전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197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80년 5월 광주는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광주 태생으로서의 한강은, 이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책을 쓰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녀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섬세한 표현력에 담아내려 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책을 읽으니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이 책은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을 달리 하여 80년 5월의 광주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했다. 또, 평상시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미시적 관점에서 이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도, 현장감 있는 묘사와 살아있는 듯한 표현은 책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이 뚜렷하면서도 가슴이 아린 것들로 가득하다.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41년전 광주의 봄을, 작가는 충분히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 독자에게 박진감과 감동,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명저를 남겼다. 나라를 위해 두렵고도 장엄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던 시민들의 존재만 잊지 않는다면, 이 책은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귀중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17쪽.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이 문단을 읽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번도 열사들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이것은 열사들이 목숨바쳐 지켜내려한 나라가 결국 그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은숙 누나’의 명쾌한 대답이다. 17쪽.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명징한 표현에는 작가가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듯했다. ‘은숙 누나’가 말했듯이, 당시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의 일부가 아니라, 권력욕에 눈이 먼 장교의 졸개들이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군인들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애국열사들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더욱 부각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76쪽.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학생들의 강한 민주화 요구에도 사복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탄압하였다. 이 장면을 찬찬히 읽어내려 가며, 문득 KBS 〈대화의 희열 2〉이라는 토크쇼 8화에서 80년 ‘서울의 봄’에 관한 자신의 경험과 소회를 밝히던 유시민 작가가 생각났다. “근데 11시 반쯤인가 됐는데 라디오에서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딱 발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왔구나. 이제는 덮치겠구나. 이제는 도망가야 해.’ 그래서 우리가 한 대엿 명 정도 있었는데, 남자들, ‘야, 도망가자. 이제 여기도 들어올 거야.’ 그러고 문을 타 여니까 밖에서 쇠사슬을 뜯고 있는 거야. (중략) 근데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거야. (중략) ‘여기도 왔어요, 빨리 도망가세요.’ 그러고 끊고 나오는데 딱 잡혔지. (중략) 그냥 이단 옆차기 바로 날아오고, 권총 딱 대고. ‘너 누구야. 이름 뭐야.’ 그냥 유시민이라 그랬지, 뭐라 그래.” 이 소설과 유시민 작가의 이야기는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일이 전라남도 광주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졌던 것이 80년 5월이었다. “제가 스무살 때 학생운동 이런 걸 하고, 유인물을 뿌리러 다니고, 데모를 하고, 이렇게 시작했을 때, 저는 될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중략) 그때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하면 못 해.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근데 왜 해야 된다고 생각하냐면, 너무 못나 보이잖아, 그냥 있으면. (중략) 못 이길 거 같은데, ‘에이 못 이겨.’ 그러고 그냥 가면, 너무 비참한 거야. (중략) 세상을 이렇게 해서 못 바꾼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걸 한다고요. 나를 지키려고요. 내 스스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비천하다, 비겁하다 이런 느낌을 안 가지고 살고 싶은 거지. 아니, 내 책임이 아니에요, 유신 체제 이런 거. 나는 그냥 그런 세상에 왔을 뿐인데.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근데, 그냥 가면 그런 감정을 계속 느낄 거 같애, 자기 비하의 감정을.” 군부독재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 쓰여진 대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변모하는 데에 있어서, 그 공을 민주화 운동에 몸소 뛰어드셨던 분들께 돌린다.
종이도 네 귀를 들어야 바른 이유
114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양심. / 그래요, 양심.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중략) /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9년간 학교에서 배운 ‘5.18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10.26 사태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듬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1979년 12.12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참극’이다. 이 말만 들으면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잘 요약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저 문장에는 광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교에서 흔히 배우는 거시적 관점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제공하는 미시적 관점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재해석한다면, 곧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 시민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제히 봉기한 민주화 운동으로, 이때 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거대한 민중의 한 지체로서 참여했으며, 이는 양심과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시민 불복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 소설의 본문을 통해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한 개인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 개인은 어찌 보면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일지라도, 그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 때 창조해내는 시너지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정의를 례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사회의 변혁이나 개혁을 통해 바꾸고자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또, 그렇기에 용감하고 대담하다. 그렇기에 위대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답을 찾지 못한 질문도 더러 있다. 가령, 한강이 왜 이 책을 집필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감히 추측컨대, 작가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나 생활 속 행동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 자신이, 한강이라는 사람이 80년 5월 고향에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또 그 비극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미약하면서도 강인했는지를 알리고 싶었기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무거운 시대극으로만 치부되어 고리타분하고 읽기 힘든 책이 될 수도 있었으나, 작가의 탁월한 표현력과 묘사력은 이 책을 논픽션 보고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례로, 제2장 〈검은 숨〉에서 ‘나’는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혼이 되어 묘사한다. 57쪽.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이 장면에서 한강의 거침없는 표현력을 엿볼 수 있었고, 또 그녀의 상상력에 감동받았다. 죽은 육의 살아있는 령이 자신의 주검을 빠져나와 그것을 보면서 본인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 소설의 전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또, 앞서 2문단과 3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근현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였고, 개인이 섣불리 하기 어려운 행동을 민중 속에서는 그들 각자가 어떻게 실현하는지를 생생히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고, 그러면서도 인물 간의 관계가 복잡하지 않아서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광주의 모습과 개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퍽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플 정도였다. 평소에 당신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관계없이, 이 소설은 당신을 푹 빠지게 만들만한 매력이 흘러넘친다. 시대극으로서도, 소설 자체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기에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표현이 다소 거칠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소설의 사실성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1장 〈어린 새〉에서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 ‘동호’는 군인의 총에 맞아 중학교 3학년 16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말 그대로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임에 틀림없다. 제2장 〈검은 숨〉에서 서술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요절한 청년으로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광주의 민주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누구보다도 강한 양심과 행동력을 갖추었던,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들이다. 그런 그들이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 줄기의 빛이 되어’. |
|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중간중간 역겨운 장면도 있었으나, 기득권의 향취에 무뎌진 목소리를 화자로 둔 것은 날것의 역함을 직접 느끼고 그것이 얼마나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작가의 의도로 여겨 견딜 만했다. 그러나 그의 문체와 글의 짜임은 어딘가 무겁고 우울한 느낌을 내뿜었고, 책을 읽는 동안 삭아버린 분노로 인한 깊이 없는 무력함에 빠져들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다른 책인 <작별하지 않는다>를 집어 든 것은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깨어지기 쉬운 것들이 나의 호기심을 미약하게나마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나는 작가가 쓰는 이야기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약자의 편에 서서 권력자들이 지워간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는 일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할까. 그렇게 잊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한 명의 자취가 여러 명의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감화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 역사가 다시 조각조각 맞추어진다면, 그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약자들은 언제나 목소리가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니, 제목에서부터 외치고 들어가는 망각의 거부는 얼마나 큰 힘이 될까.
부끄럽지만,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단어 한 톨만큼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이끌어내는 서사의 힘이 너무나 강해서 평소 책을 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사건의 전말이나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는 일이 드문 나조차도 관성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은 간단한 사건의 기록은 제주 4·3 평화 재단인데,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잘 압축해놓았으므로 사건의 면모를 간단히 확인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어쨌든, 이렇게 일방적으로 잔인한 학살이 같은 피와 살의 총과 칼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끝없는 죽음을 반복하는 기억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옥죄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래도 분노란 것이 마냥 삶을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분노가 식어 넘쳐흐르던 용암이 검은색 딱지로 덮인 대지가 되면, 그 땅을 딛고 우뚝 서 훨씬 단단해진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속에는 여전히 붉고 노란빛을 머금은 용암이 주룩주룩 열을 토해내겠지만, 차갑게 식은 땅은 생명이 살아갈 터지가 되리라.
한강 작가는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의 고통을 과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통은 경험하지 못하는 부류의 것들이기에, 적나라하게 파헤쳐 진 아픔과 핏물은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고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한다. 내게는 그러한 첫 고비가 1부의 인선의 봉합 수술 부분이었다. 동시에 감탄하게 되고 마는 첫 부분도 동일했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40p)." 이야기의 심부를 꿰뚫는 문장이어서, 주제를 감싸는 핵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우아해서, 그리고 앞으로 책을 읽으며 다가올 고통의 힘겨움을 미리 맛볼 수 있어서.
결국,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제주 4·3 사건과 작별할 수 없게 된다. 작별이란 얼마나 편리한 회피인가. 맞서 싸울 용기가 없어서 상대를 위한답시고 돌아서서 잊는다면 정말 편안할까. 살아가는 이유마저 잊어버리고 죽은 자와 다를 바 없게 되진 않을까. 그래서 산송장이 되기 전에, 기억하리라 외침으로써 악몽의 숲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린다. 작별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는 감히 공감할 수 없는 고통이 조금이나마 식을 수 있도록 돕는다. 떠나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두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차갑지만 온기를 머금은, 사람을 얼려 죽이는 눈과는 다른 종류의 눈송이 결정들이 이루어낸 함박눈일 것이다. 그 눈은 땅 아래 묻힌 억울한 혼들을 어루만지고, 검게 칠해진, 사람 키를 훌쩍 넘은 나무들을 뒤덮고 이 땅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
|
소설은 몰입이 잘 되는 장르다. 감정이입이 잘 된다. 그렇다보니 문학 작품 중 어둡거나 폭력적인 분위기의 작품은 꺼리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작품, 따스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작품을 편식하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다룬 작품이나 범죄 관련 작품은 피하곤 했다. 읽지 않겠다, 라는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니다. 막상 다음 책을 골라 들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어느새 내 손에는 밝고 경쾌할 듯해 보이는 책이 잡혀있다. 특히 사실을 기반으로 한 역사 소설은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할수록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 싫어 더욱 피하고 싶다. 이것도 외면이라면 외면일 수 있겠다.
그런 내가, 한강의 신작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5.18을 배경으로 한 소설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소설의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구매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없다. 그래야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내 마음 깊은 곳의 부채감이 아주 조금이라도 상쇄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왜 부채감을 갖고 있는가.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는 것이 양심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5.18을 다룬 소설 『꽃의 나라』(한창훈)를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분노를 기억한다. 전혀 반대 지역에 사는, 역사의 흐름 선상에서 나의 인생이 조금도 겹치는 부분이 없는 사건이건만,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마치 내 손으로 그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숨어버리고 싶고 부끄러웠으며 아팠다. 쉬쉬하던 5.18을 어느 정도 양지로 끌어올렸을 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해의 광주는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에 의한 좌파 세력의 폭도때문이었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보다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다. 누가 들을새라 입을 먼저 막아버리고 싶다. 그때의 광주를 지나온 사람들이 듣게 될까봐 가슴이 콩콩 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로 돌아와서, 이 소설을 읽다 심호흡을 위해 책을 몇 번씩 덮었다. 안 그러면 머릿 속으로 훤히 그려지는 장면에 압도되어 총알이 내 머리를 관통하고 칼집이 내 뱃속을 휘저어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피를 콸콸 쏟아내고 발가벗긴 내 몸이 그들의 손에 유린되는 것 같았다. 일곱 명이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1. 너에게 가자.(동호) 정대가 온다. 소년이 온다. 또다른 소년에게로.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정대의 손을 놓치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동호는 열여섯 까까머리 중학생임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시민군의 허드렛일을 돕고 실려오는 시신들의 신상을 정리한다. 실은 정대를 기다린다. 그리고 정대 누나 정미를 기다린다. 사춘기때 모락모락 피어나는 첫 사랑, 정미 누나는 어디로 갔을까. 정대는 어디로 갔을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광주는 지금, 피바다다. 광주 시민은 과녘이다.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이며 가차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라는 왜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가. 심지어 임산부에게도 총을 쏘았을까. 왜 죽였을까?
2. 왜 죽였지,(정대) 넋이 되었지만 형체도 없는 몸뚱아리지만, 왜 죽였을까. '너에게 가자' 하는 순간 한꺼번에 숨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너는 죽었다. 너도...... 죽었다.
3. 다만 너를 기억했다.(은숙) 불 하나 켜지지 않는 캄캄한 도시에서 울려퍼진 총성은, 너를 떠올리게 했다. 난간을 붙들고 떨고 있던 까까머리 동호. 너를 챙겼어야 했다. 은숙은 고작 세 살 어린 동호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다. 끝까지 그곳에 남지 않았음을, 지금 혼자 살아있음이 죄스럽다. 은숙의 삶은 장례식이 되었다.
4.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시민군) 양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다.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죽음은 각오했지만 내 손으로 남을 죽이진 못했다. 그들이 시민을 죽이던 군인이었음에도, 나에게 총이 있었음에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군인들을 향해, 결국 총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쐈다. 그것도 시민군들 중 가장 어린 중고등학생을 향해, 그것도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일렬로 걸어오는 아이들을 향해. 살아있다는 것이 이렇게 치욕이 될 줄은.
5.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선주) 그때 동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더라면, 왜 아직 나에게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오지 않을텐데. 학살과 고문 이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다. 선주는 껍데기만 남았다. 계엄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던 마지막 저항의 밤에 트럭을 타고 메가폰으로 '불을 켜주십시오, 함께 나와 싸워주십시오.'를 외쳤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되었다. 몸을 증오한다. 도망간다. 더 안전한 곳으로. 그런데 자꾸만 따라온다. "누구야, 누가 오는거야." 소.년.이. 온.다.
6. 엄마 저쪽으로 가,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꽃 핀 쪽으로(엄마) 동호의 유언이다. 막둥이 동호. 그늘을 싫어했던 동호. 내 손을 이끌고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다며. 그런 우리 막둥이가. 죽었다. 몇 십년이 지나 할머니가 되었지만 얼마 전엔 동호의 뒷 모습을 보았다. 동호 따라 나섰건만 이름이 안불러진다. 바로 뒤에서 부르면 분명이 돌아볼 우리 막둥인데. 결국, 막둥이는 사라졌다.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7.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윤) 동호의 둘째 형님의 부탁이다. 윤은 유년의 열 살을 보낸 그 집을 떠올린다. 윤의 집은 동호네에게 팔렸다. 그리고 윤은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데 열살 때를 기억한다. 서울집에서 어른들이 나직나직 나누던 그 해의 광주 이야기를. 그리고 몰래 보았다. 광주의 이야기가 담긴 참혹한 사진들을. 그리고 쓰기로 했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해. 그때의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나눠달라고 했다. 남은 삶을 장례식 치루듯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날의 광주를 말해달라고 읍소했다. 윤은 어느새 80년 광주 현장에 갇혔다. 군인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총검을 휘두른다. 다행히 꿈이다. 꿈이었다. 2013년에 1980년 광주를 드나든다. 고통이 손가락 끝에서 심장을 조여온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213p)
이 소설을 읽으며 나에게 전해질 고통의 강도에 대해 미리 상상했다. 믿고 싶지 않을 사실들에게 대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미리 마음을 단련하고 소설 읽기에 임하고 싶었다. 초연한 마음으로 80년 광주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읽어내려가리라 다짐했었다. 실은 자신 없었다. 그리고 한 두 장 넘기지도 못한 채 단단히 먹었던 마음들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고통의 서막은 시작되고 있었고 차라리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힘들어 해버리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끝까지 읽어나갔다. 이 소설은 소년을 중심에 놓고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서술해나간다. 그 점이 독자를 더 힘들게 할 것 같다. 그 어린 것들이 총을 들고 벌벌 떨면서도 나서야 했던 여러 사연들의 사열은 소영웅주의도 아니었고 과잉 공명심의 발로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문체는 아마도 시적일 것 같다. 이야기 중심의 서사라기 보다 심리적 표현에 치중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심리학서 느낌이 강하다. 그러면서 큰 줄기의 서사가 힘이 있다. 비록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이 소설을 읽음으써 일말의 부채감을 내려놓는다.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라도 그렇게 했을까. 인간의 잔학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더 이상 알기 싫다. 이미 역사 속 한 마디에 있는 5. 18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에. 그러나 우리는 고작, 이런 소설을 읽으며 느낄 비현실적인 고통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책을 사서 읽는 것이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 잘했어. 읽기 잘 했어. 그리고, 절대 잊지마. 그날의 광주를.
|
|
고통 3부작으로 불리는 책을 읽었다. 꿈을 꾼 이후 채식을 하게 된 '영혜'를 중심으로 이뤄진 세 장편은 그의 남편과 동서와 언니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내가 읽기에 화자 셋의 고통이라기 보단 영혜, 영혜의 주변, 언니의 고통이라고 생각된다. 직접적인 고통과 간접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의 느낌을 표현한 것만 같다. 실제로 없을 법한 것도 아닌지라 이해가 가는 것과 동시에 불쾌하다. 개중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은 한 번 읽고서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작가가 무엇을 적고자 했는지 전달은 되지만 그렇기에 다신 보고 싶지 않다.
채식주의자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 읽고 또 읽었다. 마치 내가 꾼 꿈 같아서, 내가 겪은 실제 일만 같아서. 그 감각과 두려움이 너무나 생경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영혜는 이러한 꿈을 겪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온전히 자신만 느끼고 두렵기 시작한 꿈을 어떤 사람이 멀쩡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삼분의 일 가량은 영혜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을까. 극단적이지 않았더라면 영혜가 정상의 범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영혜의 변화는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되고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날고기를 씹던 것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짐승이었을까. 내가 그랬나. 나는 그럼 사람인가 짐승인가. '채식주의자' 속에서만 바라본다면 영혜가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조차도 저순간만큼은 내가 역겨웠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나는 결국 무엇인지.
영혜는 숨쉴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영혜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영혜 자신만으로 본다면 결코 영혜는 미치지 않은 것이다. 숨쉬고자 하는 마지막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몽고반점
외골수인 형부가 무엇을 찍고 싶었는지, 무수한 꽃과 잎들 속에서 어떠한 장면을 담고 싶었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벗어난 형부의 욕망은 더욱 더럽고 추악하다. 어쩌면 전부 내던질만큼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형부는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예술을 앞세워 채운 성적 욕망은 계속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무 불꽃
영혜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었다. 미친 사람이 영혜였기에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영혜로부터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인 지아가 방어기재가 되지 않았더라면 언니도 영혜처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언니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영혜의 모습이.
주변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환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과 극단의 조치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자신의 원하던 것의 답을 찾았다. 해방의 길을 얻었다. 그와 반대로 언니는 혼돈 속으로 집어던져졌다고 생각한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읽고 나면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누가 가장 '고통'인가. 그건 아무런 해답을 얻지도 표면적인 방어기재로 인해 찾지도 못하는 영혜의 언니이지 않을까.
영혜의 언니가 '정상'이라는 범주 속에서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고통이라는 숲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길 바란다. |
|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접했을 때, 표지의 아름다운 꽃들과 감수성 넘치는 제목 때문에 소나기 같은 성장소설인가 했다. 크게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맨부커상 수상작가인 한강작가의 저작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첫 장을 펴자마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슬픈 기억을 담담히 묘사한다. 내가 동호였다면, 내가 그곳의 시민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여러 차례 반문해 보았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잊지 말아야 할 슬픈 역사를 문학의 형태로 남겨주신 작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부디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공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여수에 내려오면서 한강 작가님의 책 ‘소년이 온다’를 가지고 왔다. 기차 안에서도 오후 시간 카페에서도 숙소에서도 이 책을 읽었다. 한강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어보는데 ‘작가’는 정말 글을 쓰는 게 다르구나를 느끼며 문체에 감탄하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갔다. 5.18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소설을 읽으며 계엄군의 잔인성에 인상이 찌푸려질 때가 많았다. 그들이 인간의 생명을 짓누르면서 보이는 무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매 장이 인상깊었지만 그 중에서 나의 마음 속에 가장 남은 문장은 책 95쪽에 있는 다음 문장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질문이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잘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그저 오늘 사랑하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싶고 재밌는 프로를 보면서 웃고 싶고 단 과일을 먹고 싶고 자녀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통의 일상을 함께 하고 싶은 것. 그것이 인간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 아닌가. 내가 그렇다면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살고 싶다면, 내가 죽기 싫다면, 내가 총에 의해, 칼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인간인 다른 사람들을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죽어도 되는 것처럼, 고문받고 찢기고 베이고 피가 나도 그리고 그 피가 멈추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매 장이 슬펐지만 마지막 6장을 읽을 때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수의 한 책방에서, 조용한 그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래서 그 아픔을 미처 함께 헤아릴 수 없음에 송구한 마음 뿐이지만 자녀를 가져본 적도 없는 내가 생각해도 마음이 미어졌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그 슬픔.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가슴에 자녀를 묻어야 하는 그 아픔, 후회, 눈물. 꽃 피는 쪽으로 걷자고 하던 그 예쁜 아이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음에 나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받고 싶은 따뜻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고 내가 받고 싶은 존중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다. 상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방도 원할테니까. 그리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 권력, 명예, 내 욕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다. 사람의 생명이다. 나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야 한다면,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맞다. 내가 내려놓아서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이 고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고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 싶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총칼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신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해주신 그 모든 발걸음에, 그 희생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깊은 슬픔과 아픔을 담은 작품으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상처와 치유,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작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한 개인의 고통이 아닌,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그려내며,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의 길을 찾아가는지를 조명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작별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간 이들과 그 흔적이 우리 삶에 끊임없이 머물러 있는 여정을 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소설을 쓰는 주인공 경하의 꿈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덤에 물이 차오르고, 무덤들이 쓸려가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지 못하면서 꿈에서 깬다. 이런 꿈을 꾸는건 자신이 쓰고 있는 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하.
경하는 사진작가 인선에게 자신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영상 작업을 할 계획을 세우지만 돌연 영상 작업을 멈추겠다고 한다. 하지만 인선은 그 의견을 듣지 않고 계속 작업을 해나가게 된다. 어느날 병원에 있는 인선에게 연락이 온다. 인선은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집에 홀로 남겨진 새, 아마가 물과 먹이 없이 보낸 며칠 때문에 죽을까 걱정을 하게 된다. 인선은 경하에게 지금 당장 제주도 집으로 가 새 먹이주기를 부탁한다. 경하는 거절하지 못하고 제주로 향한다. 제주는 폭설로 인해 앞을 내다볼 수도, 한발짝 내딛기도 힘든 상황. 그런데다가 인선의 집은 정류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정말 그 새가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할 존재인지 스스로도 의문을 갖게된다. 무엇이 그녀를 폭설과 강풍이 몰아지는 위험한 순간에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는지... 왜 거절하지 못했는지... 인선은 왜 자신에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했는지...
새는 단순히 인선의 애완동물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상처를 대변하는 존재로, 그녀의 내면 깊은 곳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에 도착할 무렵 입원 중인 인선에게 전화를 걸지만 다급한 조무사의 대답만 남은채, 인선의 행방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끊긴다. 인선이 끝내 완전한 회복에 이를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의문이 남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상처와 회복이 결코 단순히 끝이 나는 과정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 같다. 치유의 여정과 불확실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지를 준게 아닐까 싶다.
제주도 인선의 집에서 알게되는 인선의 가족사,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전말.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대규모 학살과 찾지 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찾아낸 그날의 기록들. 그 기록들을 모으며 더 아파했을 날들...
개인의 상처와 고통뿐만 아니라, 집단이 함께 겪은 역사의 상흔을 다루며 진정한 치유와 화해의 의미를 묻는다. 이 책은 개인과 사회가 공유하는 트라우마가 어떻게 서로의 삶에 깊숙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작별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든다.
소설에서 인선의 가족사가 얽힌 제주 4.3 사건은 우리 사회의 집단적 아픔과도 맞닿아 있다. 인선이 떠안고 있는 상처는 그녀 개인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4.3 사건은 국가의 탄압 속에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희생된 비극을 담고 있으며, 여전히 그 상처와 후유증은 한국 사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선과 경하가 함께 알아가는 이 사건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작별은 단순히 과거와 단절하는 일이 아니라, 그와 함께 걸어가는 일임을 이 책은 시사한다. 인선의 삶 속에 남아 있는 고통과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경하의 삶 속에도 그러한 흔적이 남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는 기억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가는 여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듯, 작별하지 않는다는 상처와 기억, 치유의 의미를 담아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작별이란 단순히 어떤 관계의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야 하는 무언가임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한다.
우리는 때때로 완전한 작별이 불가능한 상처와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에 놓여있다. 이를 어떻게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 갈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먹먹함을 남기는 그런 책!
|
솔직히 소설의 중반부 까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느리고, 서술의 흐름이 왔다 갔다 해서 다소 지루하고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제주 희생자들의 아픔이 마치 내 가족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만약 처음 기대했던 대로 4·3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 전개되었다면, 흥미롭기는 했겠지만 어딘가 뻔한 역사소설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작가의 독특한 서술 방식과 문체 덕분에,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 서사를 넘어 진정한 문학적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중첩된 세계 속에서의 존재들
이 책은 독특한 서사 구조와 감각적 묘사를 통해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이 중첩된 복잡한 상태로 전체 소설이 구성되어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고, 서로 다른 장소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모호한 경계에 머물러 있다. 양자역학의 슈뢰딩거의 고양이 처럼, 관찰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 고양이의 생존 혹은 죽음 중 하나로 결정되는 것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