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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더 굴곡진 결말을 기대했는데, 예상 외로 힘없이 끝나버렸다. 허무하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좀처럼 읽는 법이 없는 역자해설까지 읽었다. * 러시아 내의 사회적 흐름과 정세에 맞물려 쓴 소설이라고 하니 새롭게 보였다. 앞으론 역자해설을 좀 더 챙겨봐야겠다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아마 안읽겠지.. * 드디어 다 읽었다. 도선생 시리즈... 그동안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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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패륜적인 아버지 표도르와 네 아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표도르 까라마조프는 두 번의 결혼으로 세 아들을 얻었다. 그는 아들들의 양육은 남의 손에 맡겨놓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살았다. 첫 부인은 남편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다가 가출하여 객사했고, 두 번째 부인은 공개적으로 창녀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난잡한 생활을 하는 남편으로 인해 정신병으로 죽고 만다. 첫째 아들 드미뜨리는 경솔하고 과격하며 색욕이 강하고 인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난봉꾼으로 성장했다. 둘째 아들 이반은 자부심이 강하고 신중한 자연 과학도로 지적이며 무신론적 인간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매우 혐오했다. 심성이 고운 셋째 아들 알료샤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인근 수도원의 덕망 높은 장로 밑으로 들어가 수도사의 길을 밟고 있었다. 집 안에는 표도르가 동네 백치 여자와 장난삼아 관계를 맺어 얻은 서자 스메르쟈꼬프가 하인이자 요리사로 살고 있었다. 늙은 하인 그리고리 부부의 손에서 자라난 스메르쟈꼬프는 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 세상 전체를 증오했다. 장남인 드미뜨리는 아버지와 유산 문제를 담판 지으러 왔다가 아버지가 점찍어 둔 동네 늙은 상인의 첩인 그루셴까에게 반하게 된다. 둘째 이반도 형의 약혼녀를 사랑하게 되고, 셋째 알렉세이는 이러한 아버지와 형들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그루셴까와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무엇보다 돈이 절실했던 드미뜨리는 죽은 어머니의 유산을 아버지에게 요구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거절한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극에 달했던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살해당하게 되고 드미뜨리는 친부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된다. 1. 드미뜨리 드미뜨리는 겉으로 보기엔 참을성 없고 과격하기까지 한 그저 형편없는 건달에 불과했지만, 그의 내면은 순수했다. 언젠가 슬쩍한 약혼녀 까쩨리나의 돈 3천 루블 중 일부를 탕진하고 그 돈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도둑’이라는 죄스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아버지 집을 빠져나오면서 때마침 마당에 나온 그리고리 영감을 엉겹결에 절굿공이로 치게 되는데, 자신을 길러 준 그리고리 영감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책하며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이른다. 그를 체포하러 들이닥친 경찰을 통해 그리고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순간 드미뜨리는 ‘다시 살아남’을 경험한다. 그가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순간이다. 비록 아버지의 살인에 대해서는 죄가 없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것만으로도 ‘유죄’가 됨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리고 심문을 받던 어느 날 꿈속에서 본 불쌍한 아귀(餓鬼)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드미뜨리는 <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시베리아로 가야만 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모두 선과 악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존재이다. 때로는 악하지만, 때로는 선을 추구한다. 그 이중성으로 인해 내면은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고통이 좀 더 나은 ‘인간다움’으로 나아가게 하는 다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2. 이반 세 아들(스메를쨔꼬프를 제외한) 중 가장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던 건 이반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대한 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살인한 일에 그도 공모했으며 동조한 것이라 몰아세우는 스메르쟈꼬프의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도 사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망상 속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마주하며 괴로워한다. 살인을 기대했던 마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뒤에 숨어 있는 비열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명료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그의 내면에서,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외롭게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했다. 3. 알료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가 노년에 얻은 막내 아들과 동일한 이름의 알료샤. 도스토옙스키는 겨우 3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떠나보낸 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작품 속 알료샤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세 형제 중 유일하게 맑고 순수한 영혼을 소유한 막내 아들 알료사. 그에게는 두 형들에게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알료샤는 겨우 네 살 때 어머니를 잃었지만 그 후 평생에 걸쳐 <마치 정말로 어머니께서 살아서 내 앞에 서 계신 것처럼> 어머니의 얼굴과 그 부드러움을 기억하며 살았다. 소설의 에필로그 마지막에 소개되는 소년 일류샤의 장례식날 이야기에서. 친구를 떠나 보낸 나머지 친구들은 죽은 일류샤를 기억하며 좋은 어른이 되겠노라 다짐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알료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설령 그런 악한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장 냉소적이고 잔인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일류샤를 묻어 준 일과, 그가 죽기 전에 베풀었던 사랑과, 이렇게 큰 바위 옆에서 우의를 나누었던 일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이 순간만은 착하고 훌륭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는 비웃지 못할 겁니다. 또한 아름다운 추억이 우리를 커다란 악으로부터 지켜 줄 겁니다.” 좋은 기억이 나를 지켜준다. 사람이 떠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추억이며 사랑이다. 사랑했던 기억만이 삶과 죽음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사랑의 기억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만한 엄마의 삶을 살아내고 싶다. 4. 인류 사랑 vs 실천적 사랑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공상을 할 때는 흔히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 정신에 빠져들기도 하고, 만일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사람들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를 걸머지겠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 없으며, 이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있게 되면, 그의 개성은 바로 나의 자존심을 짓누르고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하루만 지나면 나는 그를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나의 보편적 사랑은 한층 타오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공상적인 사랑이다. 많은 사람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한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천적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다. 그것은 평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노동이며 인내이기도 하다. 내가 추구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내가 행할 수 있는 실천적 사랑은 무엇일까?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것, 있는 그대로를 수용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보여주어야 할 참사랑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인정일 것이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불안감 속에서 누군가를 끝없이 증오해야만 했다. 인류에 대한 거대한 사랑, 그것을 이기는 것은 지금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한 작은 선행이다. 5.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 자유보다 기적 “인간은 하느님보다는 기적을 찾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인간은 기적이 없는 한 무력한 존재이므로 수없이 반역자, 이교도, 무신론자가 되면서까지도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적을 창조해 내고, 또 심지어는 마법적인 기적, 황당무계한 기적에 매료되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네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겠다>고 소리 지르며 조롱하고 놀려 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소. 당신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오. 당신은 단번에 인간을 영원히 공포에 떨게 할 권세 앞에서 드러나는 예속적인 노예들의 환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을 열망했던 거요.” p.449 조시마 장로가 죽은 후,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던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시체 썩는 냄새에 코를 막으며 불쾌해한다. 눈에 보이는 기적에 매료된 채 살아가면서, 그것을 신앙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생각해 본다. 정해진 공식과 틀 속에 갇혀 반드시 일어나야 할 기적을 기대하며 사는 삶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인간다운’ 삶인지. - 내가 확신하는 것 <왜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상상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가정하는 겁니까?> 드미뜨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를 따라, 그들의 선입견을 따라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존속 살해범으로 낙인찍혀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정의를 외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 내가 확신하고 있는 ‘신념’이다. 그것이 빗나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기적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어 버린다. 죄 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정의로웠기 때문이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그것이 때로는 사람을 찌르고 상처 입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내가 확신하는 게, 때론 아닐 수도 있다. 6. 까라마조프적인 ‘나’ <사람들은 악행을 증오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걸 사랑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의인의 타락과 그의 수치를 보고 싶어한다. 공명정대한 사람의 타락과 치욕을 좋아하는 법이다.> 타인의 악행을 좋아하고, 그들의 수치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타인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악이다. 책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살고 있는 ‘드미뜨리, 이반, 알료샤’를 만났다. 때로는 부끄럽고 치졸한 모습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지극히 인간적인 나,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내가 사랑해야 하는 나’.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존재적 가치를 갖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하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어서 무너진 가정, 그것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뿐이다. 그 사랑을 배우고 싶다. 살아내고 싶다. 무지하고 무감각하던 나의 내면을 일깨워 주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묵묵히 나의 친구가 되어 준 까라마조프 형제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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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저 , 이대우 역 , 열린책들 아직 읽지를 않았는데 리뷰를 어떻게 쓰냑오요,,, 씌앙,,, 확실한 건 이 작가님 작품은 이거보다 죄와 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이걸 읽을 거란 거임. 죄와 벌이다 먼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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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권입니다. EBOOK으로 구매했는데 좋네요. 종이책으로 보면 두껍기도 하고, 글자가 좀 빡빡하기도 해서 보기 좀 힘들었을텐데요. 편한대로 조율해서 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번역도 워낙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열린책들 출판사가 좋다고 하니 마음에 들고요. 전자책으로 볼까 하다가 PC로 봤는데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도 자주 볼 것 같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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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 러시아에 다녀와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갑자기 살아났다는 작가에 대한 배경을 읽고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장편답게 인물 한명한명에 대한 심리묘사가 뛰어났고 내 주변에서 봤다면 쓰레기라고 생각했을 표트르 빠블로브스키또한 한명의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