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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영미 작가로는 세익스피어에 비견될만큼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20세기 영어권 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쉬운 편이라고 말하는 더블린 사람들을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읽거나 번역본을 바꿔가며 읽었고, 심지어 영문판까지 들쳐보았는데, 오래전에 정규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고, 팟캐스트로도 파일이 남아있는 영미문학관에서 30여회에 걸쳐서 방송한 팟캐스트 방송과 펭귄 클래식의 해설이 도움이 되었다. 더블린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일단 제임스 조이스가 애증어린 마음으로 그려나간 더블린을 수도로 가진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당시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정치지도자 파넬의 죽음으로 카톨릭 민족주의자들이 품고 있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산산조각난 현실 앞에 식민통치의 그늘과 만성적 부조리의 상징이 된 카톨릭 종교, 그리고 열뜬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환멸을 제임스 조이스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았다. 조이스는 이 작품집을 개별 작품의 연속으로 읽지 말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줄 것을 바랬다. 얼핏 보면 단편집 같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 스스로가 '마비'라고 명칭한 커다란 주제로 모아져, 일관된 지향점을 갖는다. 18세기 초만 해도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만큼 명물 도시로 자리매김했던 더블린은 연방법의 적용을 받아 그 위치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식민적 약탈적 통치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 가족의 쇠퇴와 맞물리면서, 작품과 시대와 개인을 연결시킨다. 그가 말하고 있는 더블린의 마비란 무엇인가. 궁핍과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타락하고 무능한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 마비된 진실, 마비된 존엄성, 결국은 마비된 아일랜드 정신이기도 하다. 첫 작품인 <자매>에 이어, <어떤만남>과 <에러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이었던 유년기 소년은 <이블린> <경주가 끝난 후> <두 건달> 등을 거치며 차차 청년기의 소년 소녀로 바뀌고, 마지막 <죽은 사람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성격이 바뀌면서 주인공들은 더블린 사회의 여러 층에 포진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위치의 다른 삶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더블린의 만성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준다. 만나고, 허세를 부리고, 술마시고, 그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무료하고 단순한 일상의 지속은 조이스가 보여주고자했던, 닦아내고 윤내지 않은 진실 그대로의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독자로서 우리는 <자매>의 죽은 신부가 왜 마비되었는지,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그것이 혹시 매독이라든가, 혹은 어떤 성적 타락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타락한 노인은 음흉하고 저질적인 모습으로 다시 소년들의 일탈을 그린 <어떤 만남>에서 나타나, 아이들에게 섬뜩하게 성적 희롱을 하고 위협한다. <에러비>를 짝사랑한 소년은 무관심한 어른들에 의해 소녀와 가까와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아마도). 그렇게 도시의 모퉁이를 돌면 재회하게 되는 인물들의 더블린 내에서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내밀한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작은 일상들, 동전 한 잎, 술 한잔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이것은 200년전 더블린의 모습이지만은 않다. 선거를 앞둔 한 지역 사무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다룬 <위원실의 담쟁이 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이 윗사람에게 당한 수모를 시계까지 팔아 술집에서 허세를 부리며 팔다가 망신을 당한 후 집에 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 화풀이를 하는 아버지를 다룬 <짝패들>, 보잘것 없던 친구가 도시(런던)에서 성공해서 돌아오자 자괴감을 느끼는 <작은 구름>, 직업도 없이, 돈도 없이 술을 얻어 빌어먹는 다니는 건달 둘과 하녀와의 약탈적 관계를 다룬 <두 건달들>, 찬 딸을 결혼시킬 목적으로 은밀한 계략을 읽을 수 <하숙집>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배경만 바꾸어 그대로 플레이해도 다를 바가 없을, 쌍둥이 같은 자화상이다. 그렇다, <위원실의 담쟁이달>에서처럼 선거철이 되면 얼마 안되는 푼돈을 벌기 위해 표를 모으러 다니고, 무용하고 무의미한 정치적 대화를 하는 사람들, 자기보다는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팔자를 조금 고쳐보려고 악을 쓰고 다니는 부모들, 출세한 친구와 출세하지 못한 친구와의 재회 속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갭,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처럼 서로 등처먹고 사기치는 세상, 바로 어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왜곡된 거울에 비쳐 미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더블린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음산하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쳐보는 거울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궁핍하고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한푼의 동전과 한 잔의 술에 팔아버리고 마비시켜버리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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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조이스 자신이 도피자이고, 더블린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더블린 사람들이여야만 했다. 그 스스로가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블린을 배경으로 선택했다'고 밝힌 것은 다른 의미 없이 문자 그대로이다. 『더블린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은 종교적이며 비종교적이고, 허무적이되 허무만을 좇지 않았으며, 도시를 보여주고 있지만 도시의 세련됨은 찾아볼 수 없는 마비라는 안개에 둘러싸인 은밀한 상징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더블린 사람들』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아니라 더블린 그 자체일 것이다 ㅡ 더군다나 이는 「위원회 사무실의 담쟁이 날」에서 하인스가 암송하는 <파넬의 죽음>만 보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가 있다. 조이스가 고독과 허무에 익숙했던가? 그가 발광한 적이 있었나? 아니면 두 다리가 결박되어 정신적으로 더블린을 벗어날 수 없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이든 간에 그는 일단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초로 시행되어야만 할 병의 자각을 충실히 한 셈이다. 적어도 환상에 매달려 욕망이나 환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으니.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더블린의 한 독자가 초판 부수를 모두 사들여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이스가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망명했다거나 가톨릭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은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시도한 은밀한 것들을 들춰내는 방식은 썩은 환부를 도려내지는 못할지언정 각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려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때로 『더블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으레 결말의 증발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어차피 모든 단편의 귀착점이 특정한 하나의 점(그것을 지향했더라도)을 향해 있지는 않겠다는 견지를 취했으므로 그것이 아무리 모호하든 비난의 대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가 『더블린 사람들』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묘사 외에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늘 따라다니는 '에피퍼니'라는 수식어의 의미 또한 명백하지 않다.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더블린 사람들』이 갖는 의미를, 『율리시스』 읽기를 두려워하기에 앞서 도전할 만한 과제라고 여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단편 「죽은 사람들」이야말로 조이스의 멋진 시작점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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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문학작품들에는 작가가 의도하여 사회를 반영하여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회의 모습이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블린 사람들>은 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몇백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가 20세기 초 독립되고 난 후,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강한 민족주의 정신이 팽배하게 되고 그것은 문예부흥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민족주의의 최정점에서, 더블린 출신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점점 마비되고 세속적이 돼가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올바른 가치를 깨우쳐주고자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반들반들하게 닦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기회를 주기 위해 썼다고 그는 이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짧은 단편들 여럿이 담겨있는 <더블린 사람들>에는 이처럼 아일랜드 사람들과 역사를 비추는 장면들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 <애러비> 속에서 주인공에게 꿈같은 공간이었던 '애러비'는 알고 보니 천박하고 공허한 공간이었고, 그는 결국 분노와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은 구름>에서는 아일랜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유럽에 대한 동경만으로 살아가는 '더블리너'의 모습이 그려진다. <짝패들>에 나오는 한 아버지의 초상을 통해서 많은 시간 동안 지배당해왔던 아일랜드의 모습과 그 사회 속에서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가족 안에서는 그러한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그린다. 또한 탐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던 작품인 <어떤 어머니>와 행복을 꿈꾸며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 도피처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블린> 속에서 종속적인 여자들의 모습도 드러낸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이러한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다. 과장되지 않은, 현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글속의 주제를 독자들이 해석하게끔 한다. 이렇듯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텍스트들의 특성상, 작가가 비판하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지식 없이 메시지를 해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급한 단편들 이외에도 많은 글속에서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힘썼던 인물과 '문예부흥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정보들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므로 그냥 작품만 읽고 넘어간다면 약간은 심심할 지도 모른다.
예쁘게 포장된 그림이 아닌, 마비되고 우울한 한 시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단편집이지만, 누구보다도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전해주려 했던 작가의 상황이 연상된다. Dubliner의 이야기지만, 사회 속에서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인 듯 하다. 짧지만 강한 임팩트가 있는 소설들이,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 강하게 남는다.
더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물건들에 좀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이려고 잠시 더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바자 중심부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들고 있던 1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주머니 속 6펜스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전시장 끝에서 누군가 불이 나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홀의 윗부분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나는 허영심에 속고 놀림당한 어리석은 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내 눈은 괴로움과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43p, 애러비)
늦가을 붉게 타는 석양이 풀밭과 산책로를 비추고 있었다. 석양빛은 흐트러진 옷차림의 보모들, 벤치에서 졸고 있는 늙은 남자들 위로 친절하게 황금빛 먼지를 뿌리고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 - 소리를 지르며 자갈길을 달려가는 어린이들과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 - 위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했고 (인생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그러자 슬퍼졌다. 미묘한 우울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느꼈다. 이것이 수많은 세대들이 그에게 물려주었던 지혜의 핵심이었다. (91p, 작은 구름)
차가운 어둠 속에서 붉은 불빛들이 아늑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언덕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쪽 공원 벽의 그림자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타락한 은밀한 사랑에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청렴함을 곱씹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삶의 축제에서 추방되었음을 느꼈다. 한 인간이 그를 사랑했었던 것 같았지만 그는 그녀의 삶과 행복을 거부했다. 그녀에게 불명예, 부끄러운 죽음을 선고했던 것이다. 그는 벽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 그가 빨리 가버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153p, 가슴 아픈 사건)
게이브리얼의 눈에 관용의 눈물이 고였다. 그 자신은 어떤 여자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감정이 사랑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눈물이 더 많이 고였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다른 모습들도 가까이 있었다. 그의 영혼은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 접근 했었다. 그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깜빡이는 그들의 존재를 의식할 수는 있었지만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도 회색빛의 알 수 없는 세계로 사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죽은 자들이 한때 지어내고 살았던 확고한 세상 그 자체도 점점 줄어들어 사라지고 있었다. (303p, 죽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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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15편의 단편 소설집입니다. 언뜻 보면 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같지만, 이 작은 이야기들이 퍼즐처럼 엮여서 결국 '인생'이라는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합니다. 한 도시 안에서 아등바등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진짜 현실을 아주 솔직하고 실감 나게 그려낸 책입니다. 『더블린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은 단계로 보여줍니다. ① 어린 시절의 혼란과 첫 좌절: 순수함이 세상의 비루함 앞에 무너지는 순간 ② 청춘기의 욕망과 방황: 탈출을 꿈꾸지만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자유 ③ 성인의 무기력과 좌절: 반복되는 일상 속에 거세당한 꿈과 열정 ④ 중년 이후의 체념과 반복되는 삶: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깊은 허무 이 흐름 속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지만, 결국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합니다.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마비’예요. 하지만 굳어버린 건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는 더블린이라는 도시 자체가 꽉 막혀 정체되어 있고, 오히려 그 삭막한 도시가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있죠. 마비된 도시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그렇게 마비된 사람들이 다시 도시를 채우는 지독한 악순환입니다. 조이스는 이 숨 막히는 굴레가 아일랜드의 뼈아픈 역사나 현실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줄거리 가난에 찌든 삶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자신을 구원할 남자의 손을 붙잡지 못하는 여자, 런던에서 출세한 친구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고 마는 남자, 경제력이 있는 남자를 유혹해 결혼으로 옭아매려는 모녀, 짝사랑하는 누나에게 줄 선물을 사러 동전 몇 푼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소년…… 비틀린 욕망과 가치를 잃어버린 사랑을 품고 사는 그들이 적나라하게 비추는 메마른 현대인의 초상. [1] 유년기: 순수의 상실과 첫 번째 마비 인생을 갓 시작한 소년들이 죽음, 타락, 위선적인 어른들을 마주하며 현실의 벽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① 자매(삶의 시작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 소년은 죽음을 앞둔 플린 신부를 바라보며 ‘마비’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신부의 죽음 이후, 어른들은 그가 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한다. 빈소에서 소년은 해방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이후 신부가 성배를 깨뜨린 사건 이후 정신적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② 어떤 만남(일탈의 꿈 → 불안과 현실의 체험/영국식 교육과 억압에 대한 비판도 내포됨) 소년과 마호니는 학교를 빠지고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기대했던 자유는 곧 지루함으로 바뀌고, 들판에서 만난 낯선 노인의 기묘한 말과 행동은 불안과 두려움을 남긴다. 결국 소년은 수치심을 느끼며 돌아온다. ③ 애러비(환상 → 허무로 붕괴) 소년은 친구의 누나를 위해 ‘애러비’ 바자회에서 선물을 사주려 한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시장은 이미 활기를 잃었고, 상인들의 태도 또한 냉담하다. 그 순간 소년은 자신의 감정이 허망한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2] 청년기: 선택하지 못하는 삶과 경제적 예속 떠나고 싶은 욕망은 간절하지만, 두려움이나 경제적 빈곤 때문에 결국 제자리에 묶여버리는 청춘들입니다. ④ 이블린(도피를 꿈꾸지만 선택하지 못함) 이블린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랭크와 함께 떠나려 한다. 그러나 출발의 순간, 가족과 과거에 묶여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남는다. ⑤ 경주가 끝난 후(외국에 대한 동경 → 경제적 종속) 지미 도일은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화려한 세계를 경험하지만, 카드 도박에서 돈을 잃는다. 이는 아일랜드가 외국 자본에 종속된 현실을 상징한다. ⑥두 건달들(착취의 구조가 내부에서도 반복됨) 코를리와 레너헌은 하녀를 속여 돈을 빼앗는다. 이는 식민지 사회에서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3] 성인기: 무기력과 자기기만 결혼, 직장, 일상의 굴레 속에서 꿈을 포기하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성인들의 이야기입니다. ⑦ 하숙집(결혼 = 감정이 아닌 거래) 무니 부인은 딸과 하숙인의 관계를 이용해 결혼을 강요한다. 도런은 체면과 죄책감 속에서 결국 선택을 강요받는다. ⑧ 작은 구름(이상과 현실 사이의 무력함) 챈들러는 성공한 친구를 보며 꿈을 꾸지만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결국 가족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⑨ 짝패들(억압된 분노 → 가정폭력) 패링턴은 직장에서 받은 모욕을 풀지 못하고 결국 더 약한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⑩ 진흙(변화 없는 삶 = 죽음과 같은 상태) 마리아는 할로윈 놀이에서 ‘진흙’을 집지만 이를 숨긴다. 이는 그녀의 삶이 이미 정지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⑪ 가슴 아픈 사건 (자발적 고립 → 되돌릴 수 없는 후회) 더피는 관계를 끊고 고립을 선택하지만 그 결과를 뒤늦게 깨닫는다. [4] 공적 삶: 사회적 부패와 이중성 정치, 문화, 종교 등 더블린의 시스템 자체가 얼마나 속물적이고 부패했는지 조명합니다. ⑫ 위원회실의 담쟁이날( 정치적 이상 → 무기력한 현실) 선거운동원들은 과거 파넬을 추억하지만, 현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문다. ⑬ 어떤 어머니(문화조차 욕망의 도구) 어머니는 딸의 공연을 이용해 돈을 얻으려다 오히려 기회를 망친다. ⑭ 은총(형식적 신앙과 타협) 종교적 회개가 이루어지지만, 진정한 변화는 없다. ⑮ 죽은 사람들(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가브리엘은 아내의 과거 사랑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눈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 위에 내린다. 깨달음은 오지만 삶은 바뀌지 않는다.
이 책은 각각의 단편 소설 모음이 아니라,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설계한 '인생 축소판'을 담았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늙어가는 동안 어떻게 서서히 현실과 타협하고, 결국 무기력하게 굳어가는지(마비되는지) 그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줍니다. 작가가 직접 언급한 "꼼꼼한 천박함의 문체"가 차갑게 뇌리를 스쳐 갑니다. 인생을 억지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대신, 사람들의 속물근성이나 꽉 막힌 일상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있어요. 첫 단편 속 어린아이와 마지막 단편의 죽은 자가 묘하게 맞닿아 있는 구조를 보면, 마치 거대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인생의 순환을 짚어내는 듯합니다. 결국 『더블린 사람들』은 100년 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똑같은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현대인들의 자화상과도 같습니다.
#더블린사람들 #제임스조이스 #영미장편소설 #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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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를 때는 단일 국가다. 영어로 잉글랜드로 할 때와 United Kingdom는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영국으로 생각하지만 각기 다른 국가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합쳐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영어권 국가일 뿐 각자 다른 국가로 전쟁을 최근까지 했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각자 살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서로 축구 경기 할 때보면 으르릉거린다. 월드컵할 때도 서로 각자 국가팀으로 출전한다. ![]() 남자에게는 역시나 여자를 만나는 것만큼 흥미진지하고 익사이팅한 일은 없을 듯하다. 제임스는 극장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다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시니코였다. 텅빈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다고 말한 시니코가 한 말을 대화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여러 연주회에서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시니코 부인이었다. 서로 몇 번의 만남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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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애도 추천도서가 수십권 쏟아지고, 읽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보장받는 고전들이 넘쳐나는 요즘 한 작품을 두 번 읽는 다는 경우는 대략 두가지에 속한다. 일이던가 아님 진짜 재미있던가. 더블린 사람들은 두가지 모두다. 재학시절 복수전공으로 깍이느학점을 만회하기 위해 원서로 진행되는 수업전에 번역본을 읽었고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게 된 것은 20대 시절 강의 시간에 접했음에도 이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은 다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지배를 받았었고 그런 점이 우리의 문학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챕터별로 읽자면 딱히 커다란 에피소드가 기승전결로 펼쳐지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마음이저리고 공감된다. 개인적으로 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eveline은 이런저런 도전앞에서 흔들릴때마다 떠오른다. 사랑하는 연인이 타고 있는 배에 한쪽발을 걸쳐두고 망설이는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외침과도 같은 종소리에 연인도, 자신을 옭아매는 삶의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린다. 20대 때는 그게 계속 못마땅했다. 그치만 지금 읽었을때는 그때와는 달랐다. 결국 어쩔수없는 운명이 아닌 선택이었던 것이다. 종소리가 엄마의 외침처럼 들렸던 것은 누군가 자신을 말려주기 바랐던 마음이었던게 아닐까하는 열린 사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마흔의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우유부단하다고 느낄런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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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 어떤 우울함도 발을 딛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끔찍한 기근, 피의 일요일이 남긴 지독한 상처, 1990년대의 대호황, 다시 닥쳐온 어려운 경제 상황. 아일랜드를 이렇게 요약하곤 합니다. 1847년의 대기근으로 800만 명의 인구 중 200만 명이 죽었고, 200만 명이 이민선에 올랐습니다. 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끊임없이 독립 전쟁과 테러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의 아일랜드는 말 그대로 암울한 곳입니다.
비록 22살에 더블린을 떠나긴 했지만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제임스 조이스는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면서도 늘 자신의 영혼은 고향 더블린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내가 더블린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것은 세계 모든 도시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말이다. 그 세부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인 『율리시스』와 『더블린 사람들』에는 20세기 초반의 더블린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더블린 사람들』은 그가 더블린을 배경으로 쓴 15편의 단편들을 묶은 것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로 암울하고 피폐해진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더블린 사람들』은 평소 알고 지냈던 신부의 죽음을 목격하는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자매」로 시작해 어릴적 자신을 좋아했던 한 소년의 죽음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죽은 사람들」로 끝납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이 함께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특히, 「죽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남편 게이브리얼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열린 무도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원칙을 갖춘 세대가 우리 곁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진지하고 새로운 사상에 매우 열설적입니다. 그리고 그 열성은 방향을 잃었을 때조차도, 제가 보기에는, 대체로 진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옛날 생각, 젊은, 변화, 오늘 밤 우리가 여기에서 그리워하는 얼굴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그런 슬픈 기억들이 많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생각들만 하고 있으면 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일을 계속해 나갈 용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는 살아 있는 의무, 살아있는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과거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 밤 이곳에 어떤 우울한 도덕도 발을 딛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번잡함과 소란으로부터 잠시 동안 떨어져 이곳에 모였습니다." (p.274~276)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당시 아일랜드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습니다. 또, 친영파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인물들이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데, 「죽은 사람들」의 게이브리얼은 친영파 신문에 문학 칼럼을 쓰고 돈을 받는다며 오랜 친구로부터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을 떠날 당시, 그의 마음을 반영한 이야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더블린 사람들』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와 함께 더블린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율리시스』를 읽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다는 말도 있듯이, 『율리시스』가 호흡이 너무 길어서 막상 시작하기 두렵다면 짧은 호흡의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더블린 사람들』로 시작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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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읽어보고 싶었던 작가 중 한 명이었으나 난해한 이야기와 방대한 분량의 장편 <율리시즈>,<피네건의 밤샘>이라는 작품 때문에 선뜻 내키지 않았던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이번에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도 그의 더블린 시리즈 3부작 중 첫번째인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15편의 단편을 수록한 작품인데,수록작 대부분에 삶과 죽음의 공존,부조리한 삶과 배경 등 암울하고 쓸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소재들이 들어가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단편집을 다 읽고 후기 부분을 읽으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과 동시에 왜 제임스 조이스가 이 작품을 쓰면서 그렇게 암울하고 쓸쓸한 느낌을 가지도록 하게 했는지도 알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의 과거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보다는 더 긴 몇 백 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이 작품을 쓴 시기와 엇비슷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독립하게 되면서 아일랜드만의 민족주의가 나타나고 문예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일랜드의 유명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포함되었지만 제임스 조이스는 이런 운동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 생각하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15편의 단편들 모두가 더블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그저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갈 수 있는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생각 외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물론 스토리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읽히는 작품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후 작품들인 <율리시즈>,<피네건의 밤샘>과는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다. 그 작품들이 시간과 의식의 흐름과 함께 인물과 그 주변인물,상황의 설명을 비교적 자세하게 하고 있고 또한 인류의 역사를 방대하게 풀어내려고 했던 치밀하게 세세한 묘사와 설명에 중점을 두려고 하고 있다면,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비교적 사실적인 설명과 묘사에다 아일랜드의 역사적인 사건들까지 첨가해놓았기 때문에 쉽게 읽힘과 동시에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 작품이었다. 공감으로까지 번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선 부근까지는 갈 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 작품이었다.
그의 더블린 시리즈 첫 작품의 출발은 이렇게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데부터였다. 그러면서 한 개인과 그 주변인물,상황 등에 집중하는 일명 '에피퍼니'로 설명되는 독특한 문학적 기법과 동시에 이제는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려 했던 과정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비록 후자의 작품이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작가가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그 시도만으로도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이 작품이 나온 지 정확하게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우연인지 아닌지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이 조금 난해하다고 생각된다면 이 작품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01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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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문학세계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을 짧다. 올해 알라딘 머그컵에 새겨진 문구인데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절로 수긍이 가는 멘트다. 올 한 해도 작년과 같이 세계문학을 많이 읽으려고 계획을 세워놨는데 올해는 과연 몇 권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은 계속 읽으면서, 아직 접하지 않는 작품을 많이 읽어보고 싶다. 특히 작품이름이나 작가의 이름은 무수히 들어봤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작품에 대해서. 그 중 후자에 대표되는 작가가 바로 제임스 조이스다. 목침같은 두터운 두께를 자랑하는 <율리시스>가 甲이다. 책을 사는 사람은 봤어도 읽었다는 사람은 손에 꼽으니 말이다. 우리 집에도 벌써부터 사놓고도 책장 한켠에 자리 잡은 <율리시스>가 있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신하게 꽂혀있는 이 책이 언제쯤 빛을 볼 수 있을까하고 있던차에 올해 제임스 조이스 단편 소설집인 <더블린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문학의 첫 시발점이자 출발선상에 놓여진 작품이기에 그의 문학세계를 폭넓게 맛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세기 문학사에서 빼 놓은 수 없는 작가,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은 작품 구성이나 문체가 색다르다. 다소 무거운 주제로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소년에서 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성장의 과정과 죽음을 통해 인간의 삶을 통찰하고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과 호기심, 환멸에 대해서. 작가마다 인간의 생과 사를 통해 인간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같은 주제라 할지라도 그들이 쓰고 있는 문체가 달라 저마다 다른 느낌을 주고 하는데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은 조금 카메라 렌즈가 주인공들을 가깝게 클로즈업 하는 것이 아닌 풍경 속에 주인공들의 모습을 찍는 것처럼 조금 멀리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공교롭게도 이전에 읽었던 책이 <헤밍웨이 단편선>인데 그의 단편과는 달리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은 안개가 낀 것 같은 몽롱함이 자리 잡는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면 <더블린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통찰해 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주지만 세세하게 제임스 조이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디테일한 부분은 모호하다고 역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도시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그가 그려내고 있는 삶 속에서도 우리가 정체되고 느끼지 못한 부분을 작가는 천착하고 있고, 그것을 그려내고 있지만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한 단면이라고 치부하며 지나가는 일상이라는 것을. 움베르토 에코처럼 조이스를 읽는 것이 순수한 즐거움의 결정체와 마주하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그의 작품이 모호하기만 하다. 나에게는 아직 그의 작품은 먼 그대인것 인지. 조금 더 음미하며 <더블린 사람들>을 생각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