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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청년의 군 입대 성장기 혹은 연애소설이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영리하고 나름 복잡하다. 역사적 사건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반란의 주동자이자 실존 인물인 뿌가쵸프를 미워할 수 없게 묘사한 소설의 마지막에는 '~카더라'로 끝내면서 교묘하게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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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 위에 농도가 다르게 그려진 여인의 형상, 그리고 빨간색 하트,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눈길을 달리는 말 두 필이 끄는 마차. 그림은 눈보라를 헤치고 달리는 마차는 마샤를 향하는 것이라 말해준다. 책표지 그림은 화사하고 따스하고 사랑스럽다. 아름다운 표지이다. <대위의 딸>은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읽어보고 싶은 유일한 책이었다. 이야기는 아기자기하고 동화적이며 수목드라마를 보는 듯 긴장감과 함께 연인이 이어지길 바라는 간절함 속에 읽게 된다. 무참한 전쟁이 생략된 덕분일 것이다. 실상은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립이 얼마나 끔찍했겠는가.뿌쉬낀은 참혹한 전제정치에 대항한 뿌가쵸프의 반란, 그로인한 내전이라는 비극을 유쾌하게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은 좀 더 알고 싶다 였다. 빙그레 웃음지으며 <대위의 딸>을 재미있게 읽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로맨틱 드라마는 이 <대위의 딸>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뿌쉬낀이 생략한 반란과 내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의 독서>를 읽은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그 내용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대위의 딸>을 읽고 <청춘의 독서> 5장 <대위의 딸>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그렇지만 <대위의 딸>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연애소설로 위장한 역사소설이며 정치소설이다. 푸가초프의 반란과 참혹했던 내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농노제도와 차르의 전제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한 혁명적인 소설이다."(<청춘의 독서> 99쪽) "그는 <대위의 딸> 곳곳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진보적 견해를 매우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노출시켰다."(<청춘의 독서> 105쪽)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가 실시되던 동토 러시아에서 인간의 자유를 노래했다."(<청춘의 독서> 112쪽) <청춘의 독서>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위의 딸>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뿌쉬낀의 삶과 당시 역사의 이해가 없다해도 보편적 인간존엄에 대한 작가의 의지는 읽혔겠지만 그 혁명성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는 미로노프 대위의 딸입니다."(<대위의 딸> 182쪽) 이야기는 뾰뜨르 안드레이치를 중심으로 그려진다. 배 속에서부터 근위대 중사로 등록되어진 그리뇨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반 군대로 배속된다. 그리뇨프는 요새로 가던 길에 만난 나그네에게 길을 안내해준 고마움에 대한 작은 성의를 베푼다. 그 나그네는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고 요새가 함락된 후 그리뇨프는 살아남게 되지만 반란군이 진압된 후에 반란진상조사 위원회에 소환되었다가 시베리아 종신 유배형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여지껏 유쾌하게 흘러오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마샤(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나서서 그리뇨프를 구해내는데, 만약 마샤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 아니었더라고 예까쩨리나 여제의 마음을 살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마샤의 '대위의 딸'이라는 것은 명예이지 거창한 신분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그리뇨프와의 첫 만남에서 대위의 부인 바실리사예고로브나의 딸의 처지를 한탄하듯 하는 말은 그들의 가난한 형편을 드러내고 마샤는 그리뇨프가 보는 데도 그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이야기 속 그들은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반란군 뿌가쵸프가 요새를 함락시킨 후 사람좋은 미로노프 대위 부부의 처형이 끔찍한데 이를 제외하면 뿌가쵸프는 굉장히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뇨프는 마샤의 활약으로 풀려난 후 뿌가쵸프의 처형을 보게 되는 데 그리뇨프를 발견한 뿌가쵸프는 고개를 숙여 보인다. 뿌가쵸프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벌인 반란에 대해 회한이나 후회같은 것은 없는 농노의 해방을 위한 정당한 일이었음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되었는데 이는 작가가 뿌가쵸프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그려내는 모습을 통해 혁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대위의 딸>은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가 모두 살아움직이는 듯 생생하고 제 역할을 맡고 있어 유기적으로 엮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을 갖고 있다. 그저 동화적이고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환타지처럼 보이기까지하는 이 이야기는 기계장치의 신에게 의지하듯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뇨프의 발자취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전진하고 사건은 해결되어 나간다. 철 없는 그리뇨프를 사람을 만들고자 시골 요새의 군대로 보낸 아버지의 뜻대로 그리뇨프는 이 여정을 통해 점점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위의 딸>은 전제정치에서든 반란군체제 아래서든 개인 삶의 자유와 인간존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어떤 대의명분이든 그 위에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느껴졌다. 차르 니꼴라이1세는 뿌쉬낀의 삶에 들러붙어 끈질기게 괴롭혔다. 뿌쉬낀에 대한 집착적인 검열, 검열, 검열. 이렇게 검열을 받으면 때려치울 마음도 들 것 같은데 나같은 범인이 아니기에 검열도 뿌쉬낀의 창작열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차르는 뿌쉬낀의 미모의 아내를 넘보기까지 하고 뿌쉬낀을 시종보로 임명해 인간 존엄을 모욕한다. 차르 옆에서 교태를 감추지 않는 어린 아내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이었겠는지... 이쯤되면 작가고 뭐고 다 집어치우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리고 38세에 맞은 어처구니 없고 허망한 죽음은 21세기의 독자에게도 놀라움과 한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뿌쉬낀은 살아생전의 명성만큼 풍족한 삶을 영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은 받았지만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랐고 결혼 후에는 빚에 쪼들려 살아야 했다. 그 가운데 지독한 검열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끊임없이 했고 3년 동안 공을 들인 <대위의 딸>을 죽기 1년 전에 완성했다고 한다. <대위의 딸>에 대한 감동은 주저없이 뿌쉬낀의 다른 작품을 선택하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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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마지막 소설이자 역사소설. 러시아 문학의 최대 고비는 언제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이름들의 향연이다. 많은 출판사에서 대위의 딸을 번역했지만 석영중님의 번역은 믿고 읽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름들에... 된소리까지... 어느게 맞고 틀리고의 문제보다는 푸쉬킨-뿌쉬킨...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더 햇갈리다. 하지만 번역의 퀄리티 때문에 이 부분은 양보해야만 했다. 처음 예브게이 오네긴을 읽고 너무나 만족했었고 그래서 푸쉬킨의 다음 작품을 선택했고 역시 많은 사람들의 추천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우리에게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러시아 문학이 많이 알려졌지만 푸쉬킨의 작품들도 읽어본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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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리뷰. 리뷰입니다. 이런 고전문학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고명환작가의 추천 부르짖음으로 꽤 많이 사서 읽어보고 있어요. 기본적인 아주 기초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해답들을 이렇게 알려주는게 고전문학의 가치인것 같습니다. 알렉사트르 뿌쉬킨 열린책들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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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푸쉬킨의 "대위의 딸"입니다. 대위의 딸은 1773년 예멜리얀 푸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 중편 역사소설로 귀족 장교와 대위의 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청년 장교 표트르 안드레비치는 요새로 가는 길에 농부의 도움을 받고 토끼가죽 외투를 건네며, 요새 사령관의 딸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척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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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 푸쉬킨의 소설 대위의 딸에 대한 리뷰입니다. 러시아 소설은 사실 등장인물들 이름의 압박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대위의 딸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재미있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번기회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다른 역사소설이라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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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글은 처음 읽어본다. 대위의 딸은 장편이길래 골라봤다. 사실 러시아 소설들은 등장인문들의 이름이 너무나 장벽이라서 읽기가 힘든 편인데, 특히나 이전에 나온 책들은 표기법이 지금의 책들과는 달라서 (푸쉬킨 - 뿌쉬낀) 된소리 이름들 때문에 정말이지 이만 저만 산통이 깨지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은 재밌었다. 러시아가 국적인 유명한 작가들은 많지만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어딘선가 듣기에 푸쉬킨이라 하던데, 과연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어렵지 않으면서도 있어보이고 재밌게 쓰는 건 능력이다. 다른 푸쉬킨의 글도 읽어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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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나 죽어서나 최고의 대접을 받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사실 죽은 뒤의 기분을 논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폐가 있다만, 생각해보는 것이 재미있다. 푸쉬킨 정도로 글을 썼으면 아마 내적인 확신도 했을 것 같다.(또 사회의 성공이 보증도 해주니 말이다.) 나는 이 소설과 다른 주제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호흡을 가진 스탕달의 적과 흑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사랑의 추구(성공과 실패의 결과에서 온다기 보다는)라고 주제를 낭만적으로 크게 잡는다면 같은 계열인지도 모르겠다. 날카로운 눈에 의할 때 둘 사이의 차이점이 많다고 해도 말이다.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높은 오락성이라는 공통된 층위에서 두 도시 이야기가 준 개인적 실망과 비교했는데, 왜 하나는 그토록 유쾌한데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지 고민해본 독서였다. |
| ㅊ푸쉬킨 단편소설 <대위의 딸>과 <푸가체프의 난>을 바탕으로 18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정교한 세트와 의상으로 되살린 작품.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몇 달 전, 피오트르 그리노프 장교에게 혁명이 잔인한 사업이 될 거란 말을 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만일 누군가가 마샤 미로노바에게 몇 달 후의 운명-살해당한 부모님, 연인과의 이별, 그녀의 사랑을 차지하고자 혈안이 된 알렉세이 슈바브린의 포로가 되는 것-을 알려 줬더라면 그녀는 공포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탈옥수 푸가체프도 자신이 “페터 3세”라는 이름을 달고 러시아 국토의 반을 피로 물들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푸가체프는 또한 자신이 여제와 국민들에게 자비를 구했으나 결국 망나니의 도끼에 의해 목이 날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피로 얼룩진 농민들의 폭동이 시작되고, 분노는 마을과 도시, 사람들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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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유일한 장편소설.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한 소설은 철부지 귀족의 사랑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듯이 전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정치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반란군에 대한 묘사들에서 그들이 어떤 무자비한 일을 당했는지를 알수 있다. 혀가 잘리고 나무막대를 달아놓은 포로, 코가 잘려나가 반란군 장군 등 소설의 줄거리나 결말, 그리고 중간중간 묘사들은 잔인한 반란군을 말하고 인자한 여제를 말하고 있으나 사실 어디에도 훌륭한 귀족의 모범은 없다. 주인공을 향한 반란군 대장의 의리와 인간적인 면, 그리고 그들 반란군들에 대한 설명은 밑바탕에 깔려있는 또 다른 하고자 하는 이야기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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