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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지 오웰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그때 읽었던 책은 1930년대 경제공황의 시기 탄광지대 실업문제를 다룬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984]와 [동물농장]을 읽고선 오웰을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에 읽었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하게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을 읽으면서 갑작스레 오웰의 글쓰기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인 산문들을 뽑아 모은 [코끼리를 쏘다]를 읽었는데, 산문들을 읽을수록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나 오웰의 삶의 이력 등이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그의 전작읽기는 아니래도 몇 편의 작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첫 번째로 손에 잡은 것이 오웰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버마 시절]이다.
버마는 미얀마의 옛 이름이다. 예전에 국호가 버마였던 시절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의 발목을 잡았던 일이 잦아 미얀마보다는 버마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게 들리기도 하는 나라이다. 오웰은 우리식으로 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대영제국주의 경찰로 인도에 근무하는 것이었다. 당시 버마는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라 인도로 편입된 한 지방의 명칭이었고, 오웰은 버마에서 인도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했지만 제국주의의 허구와 억압에 회의를 느끼면서 5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그가 당시의 경험과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을 비판한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은 버마의 ‘카우크타다’라는 읍에서 벌어지는 영국인과 현지인들,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들의 일상의 삶을 통해 제국주의의 허상을 파헤치고 있다. 4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상 버마의 주도(州都) 카우크타다에는 유럽인이 일곱 명 거주한다. 그중 3명은 관리이고, 다른 3명은 목재회사의 주재원이며, 나머지 1명은 한 목재회사 주재소장의 부인이다. 즉 7명의 유럽인 중 1명만이 결혼을 했고, 나머지 6명은 모두 미혼인 셈이다. 카우크타다에는 이들을 위한 클럽이 있는데 현지인들에겐 회원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창한 곳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한 공지사항을 게시하거나, 회의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모여서 술을 마시거나, 잡담을 할 수 있는 공간일 뿐이다. 현지인들은 이들 유럽인들을 ‘푸카 사히브’라 부르는데, 이는 ‘위대한 주인 나리’란 뜻으로 인도의 피식민지 원주민들이 백인 지배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클럽은 인도제국에서 유럽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나 있었고, 그곳의 유럽인들을 푸카 사히브로 만들어주는 상징적인 장치이기도 했다.
서사의 축은 둘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플로리와 부모를 잃고 카우크타다에 와서 삼촌 집에 얹혀사는 백인여자 엘리자베스 사이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인 의사이자 교도소장인 베라스와미와 하급 치안판사 우포킨이 벌이는 주도권 다툼이다. 플로리와 베라스와미는 지배인과 피지배인의 관계를 떠나 친구인 까닭에 두 이야기는 끊임없이 서로를 간섭하고, 종내에는 서사를 비극적인 종말로 이끈다. 그들이 만날 때면 정치적인 성격의 논쟁이 자주 벌어지지만 논쟁의 모순은 항상 영국인은 반영국적이고, 인도인은 친영국적인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다른 영국인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기도 했다. 푸카 사히브가 현지인과 친구를 맺는다는 것은 스스로 푸카 사히브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라스와미는 영국인에 대해 광적일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영국인들의 생각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그는 현지인일 뿐이었다.
스무 살도 안되어 버마에 와 15년가량 지낸 35살의 플로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더 외로웠고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다. 철이 들면서 그는 영국인들과 그들의 제국에 대한 진실을 통찰했고,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자신이 소속되어 살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한 심한 증오였기 때문이다. 그런 플로리가 엘리자베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희망을 갖는다. 오갈데없는 엘리자베스를 카우크타다로 불러들인 것은 목재회사 주재소장인 삼촌과 그의 부인인 숙모였다. 할 일이 없어 빈곤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는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왔다. 엘리자베스는 플로리가 원주민들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고, 버마의 관습과 버마인들의 특성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불쾌했지만, 같이 사냥을 하고난 후 그가 청혼하면 승낙하리라 생각한다. 허나 플로리는 소심한 성격 탓에 청혼의 말을 하지 못하고, 엘리자베스는 카우크타다에 처음 파견된 헌병 베랄이 오자 급속하게 그에게로 마음이 기운다. 베랄은 카우크타다에 있는 모든 영국인들을 무시했고, 엘리자베스는 그와 가까워져 매일같이 클럽에서 춤을 추고 승마를 하며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허나 어느 날 베랄은 말없이 떠났고 엘리자베스는 다시 플로리에게 다가간다.
우포킨과 베라스와미와 싸움은 유럽인 클럽에 한명의 현지인을 뽑는 것을 두고 급박하게 진행된다. 플로리가 다른 영국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라스와미를 추천하자, 우포킨은 플로리를 모욕하여 그의 말의 신뢰를 떨어뜨리기로 음모를 꾸민다. 6주마다 한번 거행되는 예배가 교회에서 열리고 모든 영국인과 현지인 신자 몇 명이 참석하여 예배를 보는 도중, 우포킨의 사주를 받은 플로리의 전(前) 정부(情婦)였던 마 홀라 메이가 나타나 플로리에게 사기꾼이라 소리치며 돈을 달라며 난동을 부린다. 서둘러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플로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사정을 하지만 그녀는 냉담하게 돌아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플로리는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오웰은 이 작품에서 우포킨과 베라스와미로 대표되는 현지인 관료들의 수탈이나 부패, 혹은 친영국적인 행태 등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현지인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현지인들의 친영국적인 행태가 아니라 제국주의 영국의 허구성과 억압성이었다. 그들이 식민지에서 펼치는 제국주의적 통치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착취였고, 그들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현지인에 대한 경멸이었다. 오웰은 버마에서 일어나는 제국주의 통치행태를 목격하고 증오하지만, 그런 정치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곳에서 탈출하지도 못하면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플로리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어쩌면 작품 속 주인공인 플로리는 오웰 자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플로리의 절망적인 모습에서 산문 <코끼리를 쏘다>에 나타난 오웰의 모습을 연상했다면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일까?
오웰에 대한 호기심에 읽은 작품이지만 읽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오웰이 추구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라는 것에 의미를 둔 나머지 자꾸 오독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의 세상 또한 정치적, 경제적으로 제국주의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자꾸만 소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읽었던 오웰의 작품 모두가 현재에도 유효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구매하면서 오웰의 다른 책 두 권을 더 구입했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먼저 읽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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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두번째 발표작인 이 소설은 이전작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과 비교했을 때 인물, 사건, 배경 모든 면에 있어 허구의 성격이 보다 짙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역시 오웰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과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 주제는 바로 "제국주의의 허상"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이 아직은 이 책 하나뿐인데 '조지 오웰의 정치의식과 인간관'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영남대학교 박경서 교수의 노고가 담긴 귀중한 결과물이기에 30년째 중학영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판매량이 걱정되는 이 작품을 혼신을 다해 번역해주심에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오웰은 1946년에 쓴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나는 결말이 불행하고, 세부묘사와 빼어난 비유가 그득하고, 부분적으로는 소리 때문에 선택한 단어들로 만든 미사여구도 아낌없이 들어간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이 소설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기에 몹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손에서 태어난 자연주의 소설이라니. 또, 주요배경이 정글숲이 우거진, 아열대의 낭만이 살아있을 미지의 세계 '버마'라니. 오웰은 또 그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냈을까? 내용은 어둡더라도 곳곳에 냉소적인 유머도 적당히 깔려 있을 것이고 경치 묘사 하나는 끝내주겠지? 뭐 이런 예상들을 했던 것 같다.
총평부터 말하면 이야기만 두고 봤을 때, 이 소설이 어째서 번역판이 하나뿐인지 알 것 같았다. (응?) <동물농장>처럼 이런 저런 시대적 배경을 따지지 않더라도 단시간에 후루룩 읽어낼 수 있다거나 각 캐릭터들에 대해 연민,증오,애정 등과 같은 평범한 감정을 이입하거나 해서 단순히 재미로 읽을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문에 나처럼 오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면 일반독자들은 굳이 이 소설을 찾아 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자취를 좇는 과정에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므로 그 사실만으로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버마라는 나라와 영국,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기에 후반에 배치된 작품해설을 먼저 읽었는데 그것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물과 그들 각각의 행동, 그리고 사건 하나 하나에 의미를 찾으며 집중할 수 있었달까.
처음에는 남자주인공인 플로리가 오웰이 제국경찰 시절의 본인 모습을 투영한 캐릭터가 아닌가 했지만 (일부 녹아 있기도 하겠지만) 최종적으로 드는 생각은 플로리 자체가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대상을 은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야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기에 취향,지성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에서 몇 안되는 유럽인, 게다가 버마에서는 쉬이 마주치기도 힘든 '백인여자'라는 이유로 플로리가 아내로 맞으려 무던히도 애썼던 엘리자베스라는 인물도 있다. 그녀에게서는 상황에 따라 자기 잇속만을 챙기며 처신을 달리하는 모습에서 모양새야 어떻든 정신승리를 통해서라도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려 드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또한 플로리의 정부인 버마 여인 '마 흘라 메이'는 결과적으로 플로리를 죽음으로 내모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지만 그의 사후 매음굴에서 일하며 한 때 유럽인의 정부였던 시절, 동족을 하인으로 부리며 안락한 생활에 빠져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버마인이면서도 버마인을 폄하하는 의사 베라스와미와 결은 다르지만 개인적 영달을 위해 기꺼이 매국의 길을 택하는 부류와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플로리의 죽음은 '제국주의'라는 정치 사상의 죽음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 역자는 미국의 문학 비평가 '어빙 하우'라는 사람의 말을 빌어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하는 주인공 플로리의 죽음이 '개인의 이상이 정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절되고 그 결과 개인이 소외되고 희생되는 모습을 주로 다룬다'는 측면에서 전형적인 정치소설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최종 정리는 고세훈 고려대교수가 쓴 <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라는 책의 2장에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나와 있기에 함께 읽으면 좀 더 명료해질 것 같지만 이 책에 실린 박경서 교수의 맺음말 중에서 간결하게 정리된 것이 있기에 옮기며 이만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결론적으로 <버마시절>은 버마 원주민들에게 가하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러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보편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탐색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다. 즉 피지배자들은 물론 지배자 자신들조차 자기 파멸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죽어 가는 플로리처럼 제국주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에 항거를 하는 이든, 혹은 클럽 회원처럼 그 메커니즘에 봉사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든, 거기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파멸하거나 타락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제국주의라는 현실 세계는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만, 그 본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예쁜 표지. 버마가 아시아 국가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위치가 어디인지 몰랐는데 중국 아래쪽 국경과 맞닿아 있었고 인도와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소설에서 계속 버마를 두고 인도정부를 언급해서 완전히 붙어 있나 생각했었는데 정작 지도에서 찾아보니 인도와 버마 사이에는 방글라데시가 떡하니 끼어있어 붙어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이 책의 해설에는 1886년 1월 1일부로 영국이 하나의 나라였던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다고 나와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에서 지칭하는 '버마'는 국가명이 아닌 지역명이었던 것이다.(오! 놀라워!)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버마시절>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그 때는 제국주의고 뭐고를 떠나 오웰이 말한대로 지극히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소설'로 읽어보고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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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작가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르포 문학 작품이다. 아직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전 아서 블레어라는 본명으로 불리던 시절에 작가가 오늘 날의 미얀마, 당시에는 버마라 불리던 곳에서 대영 제국의 하급 관리로서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며 느끼고 관찰한 기록들이다. 식민지 인도의 하급 관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빼어난 학업 성적으로 명문 귀족들만 다니는 이튼 스쿨에 진학하여, 당시의 뿌리깊은 신분제 사회의 위선과 거짓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본토를 떠나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로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버마 생활에서 그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식민지의 비참함을 직접 목도하고 철저한 좌파 리버럴리스트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깨우쳤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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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스타일의 문학 작품.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가려도 그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을 읽어 본 독자라면 바로 조지 오웰을 떠올릴 법한 책이다. 정치, 사회적 풍자가 군데군데 섞여있는 상당히 정치적인 책이다. 이걸 또 소설답게 풀어내는 건 정말 조지 오웰이기에 할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버마에 대해, 인간의 탐욕에 대해 생각해보는 책이다. 고도화된 문명은, 정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묻는 것 같다. 읽으면서 좀 답답하기도 하고. 조지 오웰의 소설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때나 다 그시대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아 신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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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르포를 좋아합니다. 소설도 정말 좋아하고요. 장르 구분 없이 조지 오웰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온 모든 글을 좋아합니다. 이 책도 여러 번 종이책을 구입할까 생각하다가 이북이 나와 있다는 걸 알고 고민 없이 구입했어요. (열린책들 복 받으세요. 민음사 너희들도 본 받도록 합시다.) 조지 오웰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가 지독한 역사의 한가운데로 걸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을 당시의 회고록과도 같아요. 그만큼 지독한 현실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소설의 탈을 쓴 현실 그 자체, 조지 오웰이기에 더욱 뜻깊은 책입니다. |
| 조지오웰은 다양한 경험의 소유자이다. 전쟁도 참여했었고 기자로도 활동한 그야말로 그 시대의 격동을 몸소 살로 느끼며 세계를 누빈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가끔은 자전소설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허구와 실화를 넘나드는 듯한 사실적인 글을 쓰는 소설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