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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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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의 삶을 풍자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미국 중산층의 교양 없는 속물 배빗의 이야기다. (솔직히 살면서 속물 근성 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속물 근성 없이 세상을 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속물 근성에 치를 떠는 경우가 생기는 걸 보면 아마도 그 속물 근성이라는 요소는 인생의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배빗은 자기 삶을 위해 그 근성을 버리지도 못하고 살아가기에 좋은 말을 들을 수 없는 인생을 채운 사람일지 몰라도, 외로움을 같이 안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모습에, 전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했다고 하지만 시대를 거슬러도 변한 것 같지 않은 인간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쓴 웃음을 지으며 읽게 하지만, 이야기가 흐르는 과정이나 결말을 보고서도 그 쓴 웃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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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당시의 미국은 금주법으로 인해 함부로 술을 만들지도 마시지도,공급하지도 못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집단이 밀주를 통해 수입을 만들곤 했다. 여기에 경제대공황이 있기 직전의 시대라 중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당시 시대가 정확하게 어떠했는지는 이전까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지만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배빗>을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당시 중산층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느껴볼 수 있었다. 중산층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묘사와 비교적 큰 사건 없이 대화와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반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재미는 줄어들었을 지 몰라도 소설의 기능 중 하나인 사회에 대한 묘사나 제대로 된 현실반영 만큼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제목인 '배빗'은 영어사전에도 등재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는데,영어사전에는 '배빗'이 '취미가 저속한 사람,스스로 중산층인 체하는 저속한 실업가',즉 '속물'이라는 뜻으로 나오고 있는데,이 작품에서의 캐릭터 '배빗'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작품 속 '배빗'이 이런 캐릭터인 것이다. 작품에서 '배빗'은 중산층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주인공인 조셉 F.배빗은 부동산 중개업자로,중서부의 허구의 도시 제니스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 점점 싫증이 난 배빗이 자신을 이해해주는 여성과 몰래 만나기 시작하지만 금새 들통나고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당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적인 것임을 알려줌과 동시에 배빗 캐릭터를 통해 벗어나려고 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중산층의 고착된 구조를 보여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배빗과 아내,배빗과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통해서 배빗과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배빗의 잘못된 선택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과정에서도 싱클레어 루이스는 비교적 담담하고 전개해나가고 있는데,이런 담담한 전개 때문에 오히려 배빗의 행동이나 말이 다른 인물들에 대해 더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배빗이 잠시 외도를 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구조를 통해서는 몸은 그럴려고 했지만 마음만은 그러지 못하고 마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미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어떠한 문학적 기교나 표현 없이 그 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고 선명하게 묘사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90 여 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읽어야 할 세계명작으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당시의 중산층이나 지금의 중산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면 작품 한 편이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새삼 느끼게 만든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치있는 명작을 읽게 되어서 조금은 어려운 느낌도 들었지만 기대만큼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2013/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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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에서 꺼내든 이 책은 꼭 가벼운 벽돌 같았다. 노랑색이 예뻐서 읽고 싶다가도 손에서 두툼한 두께가 가늠이 되면서 내게 잠깐 왔다가는 책이 되면 어쩌나 싶어 읽기를 주저했다.
책을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얼마 전에 이 책을 소개했다. 고전이라 어렵다는 생각에 흘려들을 수 있었겠는데 그날은 이 책의 작가 루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또렷이 들렸다. 그의 아버지와 형들은 의사다. 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집안에서 루이스는 홀로 글을 쓰는 일을 했다. 후에 미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게 되는데 그런 영광스러운 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아버지와 그 가정은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로 그의 평생이 불행했고, 끝 또한 안타깝게 마쳤다. 그의 안타까운 삶의 배경을 들으며 라디오에서 소개하는 루이스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사실적인 글을 읽어보고 싶었다.
1920년 배빗은 아내와 세 자녀를 가족으로 둔 40대 중반의 가장이다. 부동산중개인을 하고 있으며 그의 삶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다. 가정 내에서는 배빗은 감정적이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는 도덕적인 삶을 지향했으며 자신이 속한 단체 어느 곳에서나 성실했고 열정적이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책의 초반부터 거의 끝까지 배빗은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시달린다. 능력 있고, 완벽한 집을 갖추었으며, 교회, 파티나 협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그다. 도대체 그의 불편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독자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에게서 눈에 띄게 보이는 말과 행동은 의외로 가부장적이고, 위선적이며, 속물적이다.
이 책을 보려면 당시가 어떤 시기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략적으로 미국의 1920년대는 호황과 불황이 있던 시기였고,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대립했으며, 보수와 진보간의 특히 노동자와 사업자의 관계 갈등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배빗]이란 책의 배경으로 당시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배빗과 주위의 모든 이들은 호황을 즐기며 단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그 모습을 저자는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배빗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수성가한 스타일이다. 그렇게 성장하며 자신의 지위나 평판이 상위층 사람들과 같이 나아지길 기대했고 그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간다. 가문이 좋고 상류층 위치의 이들에겐 열등감을 느꼈고, 자신보다 상황이 낫지 않은 이에겐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속으로는 비웃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처음엔 내가 왜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중년 남성 배빗의 상황이 여성인 나는 이해가 안 됐고, 갈등과 번민 속에 빠지며 추태를 보이는 그의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 책을 고전읽기책으로 선정한 라디오 방송의 작가들은 대체로 여자들이고 젊을 텐데 왜 하필 이 책이었던 건지, 그들은 이 책에서 독자들이 무엇을 보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소개했을까? 나는 계속 왜 이 책인지 질문했다.
배빗은 친구 폴을 통해 갑작스럽게 자신의 지지대가 없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찾으려 떠난 여행에서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정리했다. 더 이상은 남이 보는 시선과 남들이 쥐어주는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시각을 믿고 행동해 보기로 한다. 나는 배빗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남들의 협박에도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려 했던 모습에서 배빗의 용기에 감탄(?)했다. 한편으로 배빗은 그동안 갖고 있던 도덕적이고, 성취지향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자유롭고 솔직해져서 남들이 탈선으로 볼만한 행위들에도 빠져든다.
그의 짊어진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깨닫기까지 얼마나 그가 시대와 상황의 꼭두각시로 답답했을지 헤아려 봤다. 그런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자신의 선택을 따라 살아가기에 중년의 길은 순탄하지 않다. 도시의 힘이란 이름으로 한 인간의 존재를 억누르고 냉정하게 내던지는 사회현실을 루이스는 아래 문장으로 잘 표현했다.
방랑자를 길들이는 도시의 힘은 엄청나다. 도시는 거대한 산이나 해안을 침식하는 바다처럼 냉소적이고 침착한 성격을 유지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이면에 본질적인 목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배빗은 가족을 등지고 산간 오지의 조 패러다이스와 함께 지냈고, 진보주의가 되었으며, 제니스에 도착하기 전 날 저녁까지만 해도 자신이나 도시가 더 이상 예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지 열흘 만에 그는 언제 떠났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p.384-385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유지해야 할 사업이 있었다. 자신을 버티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배빗이 주관을 따른 대가는 실제로 자신의 팔을 자르고 귀를 베어가는 것처럼 그와 가족, 그의 지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이전의 배빗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던 배빗은 마지막에 다른 대안으로 자신의 주관을 표현했다. 이건 책에서 확인하시길.
내가 흔히 알고 있는 권력을 가진 이들,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어하는 정치인들, 보수의 길을 선택하기로 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들도 배빗과 같이 오랫동안 설키고 엮여서 끊을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이다가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는 처지까지 이르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들의 의견과 같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감시의 눈을 발동하고 철저히 소외하며, 최악까지 몰아세우는 한 무리들의 잔인한 행위가 소름끼쳤다. 그런 모습이 지금이라고 없을까? 우리가 잘 아는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그 어느 때보다 누리고 있다고 하나는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모습은 있다. 나와 다른 이들과는 절대 나누고 싶지 않는 자신의 파이를 쥔 그 사람들이 있다. 권위를 향한 그들의 탐욕과 억지 그리고 비상식적인 부분들은 여전하다. 루이스는 그런 면들을 잘 통찰했고, 그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은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나도 배빗과 같은 중년에 들어섰지만,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배빗을 통해 볼 수 있다. 누군가 내 선택과 신념에 끼어들어서 내 자유가 박탈당했을 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언가가 선택되었을 때, 그리고 그게 인생으로 지속되었을 때 인간은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도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과 판단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빗을 통해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어떤 것이 나의 삶을 통제하기 전에 나 자신을 잃지 않고, 표현하는 행위들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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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은 왜 나쁜가. 속물이 되지 않겠다면서 속으로는 속물의 근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속물이 아닌 사람은 절대로 모를 일이다,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지. 또 완전한 속물도 고민을 할 일이 없다. 문제는 어중간한 속물이다. 속물을 경멸한다고 하면서 일정 부분 속물 속성을 끌어 안고 사는 사람. 나 같은 사람.
소설은,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기본적인 소개글을 안 보고 배빗이라는 이름이 지닌 뜻조차 모른 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비꼬면서 눈 흘기면서, 측은해 하면서 읽을 수 있었을까. 끝내 호감이 생겨 나지 않았던 이유가 미리 방어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게 결국 배빗 속에서 나를 만나고 말았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내가 싫어졌기 때문인 건데.
1920년대가 배경인 소설이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셈이다. 미국에서 그랬다는데 지금의 우리와도 별 다를 게 없다. 이 속성은 본능처럼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하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따르곤 하겠지. 나를 남과 구별짓고 싶은 마음은 무엇이고, 또 남들과 같이 만들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 걸까. 잘 산다는 건 어떤 것이고, 어찌하여 잘난 척 하고 싶어지게 된 것인지.
소설을 읽은 내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 것, 이 또한 나의 버리지 못한 속물 근성 한 일면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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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은 몇 편 읽어 보지도 않았지만, 그만큼 번역된 책이 너무 없어서 안타까운 작가 입니다. 비정한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사회상을 파헤치는 글을 쓰면서도 이야기 속에 항상 슬슬 웃음지을 수 있는 맛이 살아 있어서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배빗”은 배빗이라는 중산층 내지는 중상류층 쯤 되는 부동산 중계업 하는 미국인 중장년 남자의 일상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책을 펼쳐 보면, 이 미국인이 일어 나서 일하고, 자고,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과 이웃, 친구들을 만나고 여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하나 하나 보여 주는 것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가 사고를 치거나 본인이 바람을 피우는 등의 적당한 수위의 사건을 일으키는 갈등이 좀 섞여 있는데, 그렇게 약간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건조차도, 일상에서 마주칠 만한 빈도로 나오다가 끝납니다.
이 책의 가장 눈에 뜨이는 장점은 도시에 사는 중년 남자의 삶을 이야기로 풀어 놓는 관찰력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920년대, 그러니까 90년전의 미국에서 나온 이야기 입니다만, 이미 그 때 지금까지도 각종 영화와 TV물에서 무던히도 반복되고 있는 “중년의 위기”에 나올 법한 소재를 다 풀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수법도 경쾌하고 요즘 느낌에도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소설이 벌써 1920년대에 이렇게 할 이야기 다 하면서 나왔는데, 더 이상 뭘 말할 게 있다고 그 동안 미국에서는 “중년의 위기”를 다룬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왔나 싶었을 정도 였습니다. 여기에, 주인공이 보수적인 아저씨로 모순을 보이는 행동을 하다가, 또 갑자기 멋있는 척 할려고 진보 흉내도 냈다가 하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라든가, 성실하고 양심적인 시민인냥 행세하지만 추한 부도덕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등등에서 읽기 재밌는 풍자도 잘 들어 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20년대 금주법 시기에 술을 구해 마시며 농담을 낄낄거리는 주인공과 그 이웃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목은, 21세기 한국의 평범해 보이고 피곤하게 사는 직장인이, 직장 동료와 어울리는 술자리에서 지저분한 소리를 주절거리며 점차 취해 가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넉넉한 분량에 비해 일상 묘사로 가득 찬 책이다 보니 극적인 사건은 약한 편이고, 결말도 이런 부류의 “중년의 위기” 이야기에서 아주 흔히 보이는 방식으로 적당히 마무리 짓기 위해 벌린 내용을 봉합해 내는 수법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맛은 부족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역시 1920년대, 앞선 시기에 나온 소설로서 이런 뒤에도 많이 써먹을 만한 수법을 찾아 내서 결말을 냈다는 것도, 지금 시점에서 보면 뛰어난 발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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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빗/싱클레어 루이스/이종인/열린책들 배빗(Babbitt) : 교양 없고 속물적인 인간[영어 사전] 미국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싱클레어 루이스의 대표적 장편소설이다. 저자가 37세가 되던 출간된 책으로서 1920년대 미국 중산층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기본 속성에도 용수철과 같은 복원력이 작용하고 있을까? 한번 굳어진 습관과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는 성자의 회개에 버금가는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제니스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공화당 당원에다 장로교 신자이고 엘크 보호협회 회원이며 부동산 중개업자인 조지 F. 배빗은 미국 중산층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성실하게 노력하여 쌓아올린 재산과 지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사회적인 활동과 명성에도 관심이 많아 가끔씩 이웃과 어울려 파티도 즐긴다. 소란스런 도시를 떠나 부인과 아이들을 버려두고 조용한 곳에서 혼자 낚시를 즐기는 꿈을 꾸던 배빗은 친구인 폴 리슬링과 단 둘이서 메인주의 한 호숫가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한다. 그는 늘 생각했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 이 모든 것으로부터> 웅변으로 명성을 얻고 부동산 협회의 부회장에 올랐지만 마음속에는 늘 일탈을 꿈꾼다. 아내가 여동생 집으로 떠나 있는 2주 동안, 타니스라는 미모의 여자와 어울려 새벽까지 이어지는 만취상태의 음주와 광란의 파티를 벌이며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술이 깨면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지만 밤이 되면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도시가 파업에 휩싸이자 파업을 찬성하는 진보적 입장을 펼치던 그는 모범시민연맹에 가입 권유도 거절한 채 진보적인 의견을 굽히지 않다가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고 사업마저 타격을 받는다. 도시 전체에서 외톨이가 되고 만 배빗은 두려움을 느낀다. 아내가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게 될 무렵에야 타니스와 그 무리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모범시민연맹에도 가입하여 열렬히 활동하는 처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때야 비로소 이때까지 자신이 행한 일탈과 행동에 대한 실체를 확인한다. 그는 더 이상 흥청망청 놀아나는 밤 따위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밤을 아쉬워할 순간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년의 무기력한 안정이 닥쳐오기 전 마지막으로 벌인 최후의 일탈이었음을 씁쓸하게 깨달았다. 그는 싱긋 웃었다. <제기랄, 파티가 계속되는 동안은 즐거웠지!> 배빗의 일탈 욕망은 많은 중년 가장의 마음일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직장을 오가는 지겨운 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 훌쩍 떠나버리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지만 그것은 배빗이 늘 꿈꾸던, 아름다운 소녀와의 꿈속에서의 밀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마다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쓸쓸한 마음을 술로 달래 보지만 깨고 나면 더 큰 공허와 부끄러움만 남지 않던가. 이제, 교양 없고 속물적인 인간이라는 배빗의 사전적 의미는 수정되어야만 마땅하다. 배빗 :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욕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의 체념과 고뇌. 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인다고 하였다. 가장으로서의 무게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 넘어 어디서나 꼭 같은 모양이다. 배빗이 느껴야 했던 삶의 무게가 나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