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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인간 확성기 – 우리나라 집회에서는 ‘소리통’이라는 표현으로 이미 쓰이고 있습니다. p. 90 적이 나예요, 당신이에요? -> 맥락상 복수 you. 당신들이에요? 가 되어야. (보그지) p. 380 딸깍 소리 -> 맥락상 ‘클릭 소리’ p. 541 수노라 테일러 -> 수나우라 테일러 (한국에도 책이 번역된 저자) 읽으면서 든 생각들 메모
좌파 저술가이자 활동가 나오미 클라인은 예전부터 페미니스트 저술가인 나오미 울프와(가끔은 나오미 캠벨까지) 혼동되어 왔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둘을 구분 못 하고 바꿔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나오미 울프가 급 흑화되어(“토끼굴에 빠졌다”) 안티백신, 극우의 선동가로 떠오르고, 울프가 사고칠 때마다 나오미 클라인까지 억울하게 욕을 먹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내 상황으로 상상해보자면.. 모유수유, 자연출산, 공공일차의료 등을 강조하는 한의사인데, 어쩌다 보니 안티백서 목수정(또는 유사의학 신봉자 최민희)과 혼동되어, 목수정이 망글을 쓸 때마다 내가 멱살잡혀 끌려나가 욕을 먹는 미치고 팔짝 뛰는 상황 같은 것이겠다(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이다). 도플갱어 혼란을 바로 잡으려 할수록, 대중 머리 속의 링크만 강화되어 이도저도 못 하는 난처한 상황이 된다. 어쩌다가 전도유명한 변혁적인 저술가가 흑화되어 극우 선동가가 되었을까? 그리고 그 극우의 선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 역시 너무 궁금했던 이 문제를 나오미 클라인은 독할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러면서 본인의 마음 역시 가차없이 솔직하게 직시한다. 나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돋보이고 싶은 마음, 관심을 끌고 싶은 마음, 잘 해내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싶은 마음, 한심한 낚시에 혹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나에게도 저들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 너 있다.” 극우의 논리는 이미 좌파의 언어, 역사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전용해서 뒤틀린 거울상을 만들어낸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걸 거울 세계라고 부른다. 그 세계 속에서는 윤석열의 계엄이 민주주의이고, 계엄 반대가 파시즘이며, 의회의 견제가 의회의 독재가 되고, 서부지법 폭동이 민주화 항쟁이 되고, 대통령의 수사 방해가 대통령의 인권 보장이 된다. 내란 국면에서 나경원이 아주 많이 보여줬다. 이런 걸 피픽키즘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웃기고 얄팍하게 만드는 반비극의 힘. 그들이 말을 하고 나면 우리의 말까지 천박해진다. ‘백신은 나치’ ‘부정선거로부터 나라를 구하자’ ‘민주주의를 지키는 계엄’ 가자 지구를 폭격하며 '가자 해방' 우크라이나를 폭격하며 '우크라이나 해방' ‘남성이 역차별당한다’ 등.. (하지만 백신은 실제로는 생물정의(biojustice)이며, 안티백신이 파시즘에 가깝다.) 미국에서는 민권운동, 아파르트헤이트, BLM운동 등의 역사를 전용하고 왜곡하여 인용한다. (한국에서도 극우들이 자신들이 역사의 희생양이자 영웅이라며 5월 광주의 계승자라고 하는 서사와 5월 광주가 빨갱이라는 서사가 공존) 그 결과 사태를 진단하는 언어 청진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말문에 빗장이 채워진다. 핵심 어휘가 거울세계에서 끊임없이 학대당한다. 독일에 비스듬, 삐뚤, 비범 등의 뜻인 퀘르덴켄 Querdenken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대각선주의 운동이 되었다. 전통적인 좌우의 개념을 벗어나서, 총기옹호자, 기독교, 노동자, 여성, 자영업자, 대체요법 옹호자들 등 하나로 묶이지 않을 것 같은 부류를 하나로 묶어서 동일시와 혐오로 선동한다. 하나라도 약간 혹할 만한 논리가 있으면 ‘우리 편’이라고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행동 미션을 제시한다. (하지만 대각선주의 시위는 원자화된 개인이 잠깐 응집한 결과이며 ‘우리’가 없다.) 좌파가 자본주의와 정치카르텔을 정면으로 겨누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그리고 좌파끼리는 작은 차이나 표현 하나로도 매섭게 현학적으로 비판하는 사이에), 갈 곳 잃은 대중의 정의감은 엉뚱한 음모론을 쉬운 말로 끝없이 말하는 극우의 논리에 포섭당한다. 예를 들어, 빅테크의 감시기술과 여론 조작에 대한 불안과 분노를 좌파들이 제대로 끌어안고 IT 자본을 제대로 겨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이, 대중의 정동은 극우가 계속 설파하는 백신여권에 대한 불신으로 모인다. 좌파/중도가 정의를 포기할 때 정의에 대한 갈망이 일그러져 거울세계에서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좌파 학자는 음모론자와 어떻게 다른가. 악의를 지닌 강력한 세력이 비밀리에 세상을 조작하려 한다는 생각은 공통적이다. 근본적인 차이는 사실에 근거했는가, 뇌피셜에 근거했는가에 있다. 석유자본, 군산복합체, 제국주의의 한 줌 세력이 이윤을 위해 세상을 조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진지하게 다루기엔 가소롭고, 넘기기엔 심각한 음모론, 가짜 뉴스에 퍼져나가는 힘은? 그들의 거짓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 아마 이런 점에서 이 책을 나에게 권한 친구들이 나를 떠올렸겠구나 싶다. 거짓의 홍수 속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무엇을 붙들고 있나?
나오미 클라인을 괴롭게 하는 도플갱어인 나오미 울프 외에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크리스티안 노스럽도 흑화되었다는 것을 이 책 보고 알고 놀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조금 보다 때려치웠지... 그때도 느낌이 쎄-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나랑 안 맞는 것 같았다.) 잘 기능하고 활기차고 강한 몸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으로 건강마초 쪽으로 흐르게 되는 것 같다. (이래서 저속노화선생을 볼 때 우려가 드는 것이다.) 코로나 때 건강마초, 면역마초들이 보였고, 한의사들 중에도 꽤 있었다. '코로나는 감기일 뿐이고, 내가 면역계를 튼튼히 하는 한약도 잘 먹고 운동도 잘 하는데 걸릴 리가 없지. 걸릴 리가 없는데 남들에게 옮길 리도 없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별로 없었지만, 이런 취지에서 마스크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유럽에는 많았다. '이렇게 건강하고 청정한 몸이 긍정적인 활력 말고 다른 걸 낳을 리 없는데, 내가 왜 마스크를 써야 해? 내가 남들에게 병을 옮길 리가 없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자신의 아이에게 백신 접종이나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하게 사랑스럽고 건강한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해치는 감염원이 될 리 없다. 지금 내 아이를 모욕하는 거야?'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파시즘과 통한다... 건강하고 청정한 몸이 있다는 생각은 곧 나약하고 불결한 몸이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획을 인식하고 만들어내고 약한 사람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하는 게 파시즘이다. 유대인이나 신대륙 선주민, 코로나에 취약한 유색인종과 노인들에게 그런 차별의 시선이 실제 차별과 살육으로 이어졌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쓸어가는 판데믹을 환영하기까지 했다. 영국 왕 제임스1세는 선주민들을 대규모로 죽게 한 신대륙 판데믹을 ‘황홀한 역병’, 1707년 캐롤라이나 주지사 존 아치데일은 인디언 대량사망을 하늘의 축복이라고 했다. 유사과학 인종주의자들은 태즈메이니아 등의 원주민들을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렀다. 솔즈베리 영국 총리는 pre-dead 상태, 즉 어차피 멸종 직전의 상태이므로 대량 살육은 그걸 조금 앞당길 뿐이라고 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가려내는 갈라치기는 신경다양성 아이들에게도 파멸적이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말의 어원인 한스 아스퍼거는 원래 붉은 빈에서 하일페다고기크 원장으로 자폐아들을 있는 그대로 다양성을 존중하고 전인적으로 대하는 혁신적인 접근을 하던 인물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몇 달만에 급격히 전향, 타락하여 ‘자폐증적 사이코패스’라는 낙인을 남발하고 두 살 영아마저 암 슈피겔그룬트 클리닉에 보내서 죽였다. 일부 “작은 교수들”(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자폐아들)만 살 가치가 있다고 했다. 자폐 스펙트럼 커뮤니티에서 아스퍼거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나타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완벽한 몸에 대한 집착은 아이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진다. 아이를 자랑할 만한 분신, 브랜드 확장판으로 본다면 아이의 장애는 기획한 청사진을 망치는 불청객이 된다. 완벽한 아이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이 있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기 마련이다. (체인질링에 담긴 생각)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를 교정해서 정상 또래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집착은 일종의 학대가 된다. 이런 부모 중 하나는 아들을 제압해서 강제로 조용하게 한 뒤 ‘그 소중한 순간에 아이는 정상 또래와 분간할 수 없다 indistinguishable’고 썼다. 존재 자체를 가리고 처리하고 감춰야 하는 압박. 나오미 클라인은, 자신도 이러한 잣대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재능이 넘치는 사랑스러운 소녀를 이런저런 대회에 내보내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를 보는 순간, 저 아이는 그대로 두어도 빛날 텐데 굳이 광을 내서 트로피로 자랑해야 할까 하는 거부감이 든다고 쓴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녀가 내 눈 앞에 있다면 완벽의 올림픽에서 경주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을 나 역시 참기 힘들 것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일부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완벽의 올림픽에서 완승한다 해도 애초에 아이들이 참가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게임이다. 하지만 나라고 내 아이가 바로 그런 아이라면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망이 안 생길까? 페북에서도 자식 자랑(이러저러한 내세울 만한 스펙, 학교)을 하는 글들이 보인다. 자기 아이가 아이큐가 얼마 나왔다거나... 얼마나 똑똑하다거나... 나 자신도 겪었던 끔찍한 게임이다. 게임에서 1등을 해도 못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1등을 할 만한 자질이라면 부모가 침을 흘리면서 몰아부치고 싶을 수 있다는 것도 납득이 간다. (부모가 나르시시스트 성향이라면 더더욱) 아이가 학업 면에서 평범하고 그런 아이를 보는 것이 편안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나 자신이든, 내 아이든, 그 누구든 상품으로 보지 말아야지. 발레에 대해서도 조금 복잡한 마음인데 마음을 좀 들여다봐야겠다. ----------
더러운 독재자들과 가해자들이 죗값을 치르지 않는 것을 보면 돌아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나오미 클라인.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돌아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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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 전체에게 옆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라고 말한다. "어쩌면 여러분과 다르게 생긴 사람, 여러분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 어쩌면 여러분과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 이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잘 알지도 못하는 옆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것처럼 싸울 수 있습니까?" 청중은 큰 함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감동 이상을 느꼈다. 변화를 느꼈다. -----------
캐나다에서는 100여년 동안 (최근까지도) 천주교계 기숙학교에서 선주민 아이들을 강제 입학시키고 학대를 가하고 심지어 살해하기도 했다. 그 무덤들이 새로이 발굴되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가 늑장을 부려 선주민 커뮤니티에서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땅을 빼앗고 아이들을 빼앗으면 그 공동체는 영원히 파괴되고 착취와 수탈은 더 쉬워진다. 이것이 바로 서구 문명이다. ------------
개인브랜딩에 대해 저거 아닌데...라고 생각하다가도 애매하게 넘어갔는데, 이 책을 읽고 브랜드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 브랜딩의 기원을 안다면 도저히 개인브랜딩을 그렇게 발랄하게 외칠 수 없다. 브랜딩은 아프리카에서 납치해온 흑인들에게 간단한 활자인쇄를 목적으로 만든 철제 기구를 고문 수단으로 써서 노예주를 표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예주 이름을 노예 피부에 지져서 영구적으로 흉터 낙인을남기는 것이다. 개인브랜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셀프상품화로 본인이 수익 대부분을 챙겨가는 장점이 있고 개인 역량 강화와 구분되기 어렵기도 하다. 자본가에게 거의 뺏기지 않고 본인이 브랜드가 되는 것이 뭐가 나쁘냐? 이에 대한 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 본다. 브랜딩을 하게 되면, 우리는 뭘 안/못 하게 될까? 브랜딩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면, 결국은 낙인이다. 스스로를 낙인찍으면 그 족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은 이걸 하는 존재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저걸 하는 존재로 유동적으로 흐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상품으로서의 나에 붙들리면 스스로를 늘 제3자의 착취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나를 평가하고 이윤을 추출하는 내가 있고, 본연의 내가 따로 있다. 스스로가 도플갱어를 만들어내는 내적 더블링이 일어난다. 이런 자아분할은 필연적으로 소외를 낳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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