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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처럼 화악 끓어올랐다가 또 다른 주제로 그 뜨거운 열기가 바로 옮겨져만 가는 우리네 문화계에서 이 책도 ‘느림’에 대한 사람들의 (혹은 매스컴의) 관심이 커지면서 하나의 열풍을 몰고 오며 화악 달아올랐던 책이다. 또한, 다른 열풍이 그랬듯,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갑게 식어버린 책이다. 그 때 읽으려고 손에 집었다가 알수 없는 이유로 몇 쪽 보다 다시 내려놓았지만, 또 어떻게 연이 닿아 손에 집게 되었다.
기대를 하고 집어든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도 그 기대와 벗어나지는 않았다. 폄하하는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신변잡기적 요소가 가미된 수상록 성격의 에세이집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에도 이 책이 그리도 많이 판매고를 올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게 된 이유를 책의 내용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다시말해 한국 사회의 이상한 과열현상이 만들어냈을 뿐이다. 출판사가 그 열풍을 몰았을런지는 모르되, 마케팅의 승리이다.
책속의 글귀처럼 ‘맹목에 빠지지 않고 한 발자욱 뒤로 물러나 관조하는 여유를 갖는 것’은 수많은 마켓팅과 각종 열풍과 신드롬, 그리고 유행들 사이에서 쭉쩡이들을 버리고 옥석을 가리는 데에 있어 소중한 방법이 될 듯 하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 책 역시도 옥석을 고르는 그 잣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가 좋지 않다고 비판한 문화의 그 '흥분'에 대해서도 적어놓고 있는 이 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흥분의 최정점을 누렸고, 그로 인해 저자는 많은 돈과 한국에서의 사회적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이 역설을 과연 저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인상깊은구절] 우리가 그런 곳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로 문화의 진보 정도를 측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촉박한 시일 속에서 급히 서둘러 일하는 버릇이 있고, 형식적으로 프로그램만 채우는 경향이 짙은데다가, 페스티벌 횟수를 늘리는 일에만 급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어디서나 팔리고 있는 책을 금방 산다거나, 어느 전시회가 개최되지마자 달려가는 일이 거의 없다. (중략) 이런 작품들은 질 좋은 포도주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좋아지기 마련이다. 맛볼 가치가 없는 것들은 모두 밑으로 침전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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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매사에 대응하는 것이 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느려지고 있다는 의미는 식사하거나 걷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부터 업무처리방식도 변해서 눈앞에 닥친 일을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나던 젊은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야 책꽂이 한 귀퉁이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눈길이 가게 된 것은 아마도 일상이 느려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쌍소는 ‘느림’이 “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진다.(10쪽)”고 고백하고 “나만의 리듬에 맞추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조용히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고 감히 그들에게 정중히 부탁하고 싶다.(17쪽)”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자들은 그들만의 에고이즘에 갇혀서, 느림보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고, 그들의 특기는 느림보들을 완전히 녹아웃시킨 뒤 문 밖으로 몰아내고 만다.(22쪽)”고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저 또한 삶을 바쁘게 살아낼 때는 타인을 배려하는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요즘 세상에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살다보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지만 나름대로의 스타일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한국에서 오셔서 같은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자주 모여 세상사는 일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삶의 여유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모임에는 불러주시곤 해서 왕따까지는 아니라고 위안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모임에서 빠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분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의 주제 가운데 가장 끌리는 부분은 ‘한가로이 거닐기’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41쪽)”라고 한가로이 거니는 것을 정의하고 있는 쌍소처럼 한가롭게 걷는 것은 생각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원고청탁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제가 정해지는 경우는 글 전체의 윤곽을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주제의 범위가 커지면 글머리를 잡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게 됩니다. 그럴 때면 양재천 산책에 나서서 평소보다 느리게 걸으면서 써야 할 글에 담아야 할 내용을 다듬어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쌍소처럼 소설의 주인공과 함께 산책을 하는 능력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쌍소의 독특한 시각에도 마음이 끌립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죽음 이외에 무엇을 기다릴 수 있을까? (…) 깊이 살펴본 죽음이 결코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남은 생에 대한 유일한 행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면 (…)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신의 은총뿐이다. 이유도 없이 우리 안에 확신으로 자리잡아 온 그 소망만이 우리를 죽음이 가져온 두려움과 낙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88쪽)” 하지만 이러한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구하려는 노력을 쏟은 사람에게 분명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통된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 죽음마저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쌍소는 느린 삶의 중요한 요소를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라는 큰 제목 아래 작은 제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라는 제목에서는 느린 삶의 문화 사회학적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두 개의 큰 주제 사이에 ‘리듬의 교체’라는 막간의 시간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극단에서 무대를 정리하기 위한 막간시간을 지루해할 수도 있는 관객들의 관심을 잡아두기 위한 막간극처럼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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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
솔직히 현대를 살아가는 정상적인 아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책의 제목만으로도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에 느리게 살자니 말이다. 느리게 산다는 말은 왠지 낙오자나 실패자가 된 것만 같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 포기하고 적당히 살자는 말인가?
처음 이 책을 집어 든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나 자신도 느림의 미학을 어느 정도는 동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극히 논리적인 사람에게 무척 약한 편이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도 그 사람의 논리가 내가 반론을 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만 하다면 바로 수긍이 돼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논리로 날 굴복시키라고. 그러면 아무 말없이 따르겠다고. 내가 난데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책이 과연 논리적으로 나를 굴복시켰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이 지극히 논리적인 어조로 반론할 여지없이 나를 굴복시켰다면 내가 피에르 쌍소의 주장에 머리를 숙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전혀 아니다.
그의 글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얘기다. 피에르 쌍소의 팬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의 글은 무척 체계적이지 못할 뿐더러, 문체도 정신없다. 결코 화려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책을 덮는 순간까지 한마디의 나른하고 긴 설교를 들은 느낌이다. 기분이 상쾌해진다거나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뿌듯함. 마치 그럴듯한 저녁을 한껏 먹고 난 후의 나른한 포만감. 나는 이런 것이 독서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일수록 읽고 난 후에 무언가 온 몸에 차오르는 충만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맑은 공기 속을 헤치고 조깅을 한 것 같은, 또는 그 후의 샤워 같은, 상쾌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전혀 개운한 책도, 포만감을 주는 책도, 나른함을 주는 책도 아니었다. 물론 이 책이 소설은 아니지만 문학과는 다른 나름의 카타르시스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번지수가 너무 틀린 기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면에서는 완전히 실패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난 뒤, 책을 덮으면서 느낀 기분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찜찜함’ 이었다. ‘찜찜함’, 그다지 문학적이거나 고급스러운 단어는 아닌지 모르겠지만 독서를 마친 직후의 기분은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좀 더 덧붙이자면, ‘석연치 않음’, ‘혼란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 처음의 ‘혼란’은 ‘공포’와 비슷한 감정으로 변했다. 책 한 권을 읽고 이런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또한 그러한 변화가 일반적인 독서의 후유증과는 양상이 매우 달랐다는 것이 다시 한번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남기면서 나는 모든 감정을 접고, 피에르 쌍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옳았는가 보다.
그렇다. 느리게 산다는 것. 결코 획기적인 발견도 아니고, 실천하는 데에 고도의 기술력이나 자본이 드는 행위도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또한 결코 아니다.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나는 혹은 우리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해왔다는 것이다. 여유로움. 느긋함. 나른함의 행복을 말이다. 덜 갖는 것, 양보하는 것, 나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행복한 일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뒤쳐지고 있고, 나만 이렇게 느리게 가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이 괴롭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느꼈던 찜찜함이 아마도 이런 연유일 게다. 마음속에서 알고는 있었지만, 애써 부인해오던 사실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달려서 더 높이 오르려다 보니 무시하려고 노력했던, 사소하지만 작지 않은 행복들. 마음속에선 원하지만, 머릿속에선 바보짓이라고 비웃었던 일들. 그래서는 안돼는 거라고, 그렇게 살았다가는 낙오되고 세상에선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 그러므로 ‘악(惡)한 것이다’라고 억지로 정의 내렸던 일들을 ‘느림’이란 단어로 미화시키면서 찬양해 버렸다. 나 역시도 동경했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피에르 쌍소는 용감하게 ‘바른 일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석연치 못한 마음들은 그의 용기에 대한 부러움이며, 나의 당당하지 못했음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왜 내 마음속의 생각들을 당당히 옳다고 주장하지 못했을까 하는 질책이었다. 입신을 위해서 자신을 속여왔던 데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런 감정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억지로 부정해 오던 가치들이 고개를 들자. 수십년간 쌓아온 가치관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과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인가.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은 후회하지 않을 만한 것인가.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실은 아직 답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리라.
느리게 산다는 것.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무척 간단한 일이다. 게다가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처럼 과중한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만성피로에 비타민과 피로회복제를 끼고 살 필요도 없다. 또한 세상이 지금처럼 정신없고 각박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나친 편의를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들은 사라질 것이고, 인류는 여유와 느긋함 속에서 유례없는 평화를 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 인류가 모두 이런 결단을 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전 인류가 동시에 인생관을 바꾸어서 생활태도가 변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설사 그런 상태가 일순간 찾아온다고 할 지라도, 단 한 명의 인류가 조금 더 앞서 가겠다고 한 발짝을 뛰는 순간, 느림의 평화는 일시에 무너진다. 잡은 게를 넣어두는 통에는 뚜껑을 씌울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한 사람이 앞서 나가기 시작하는 순간 전 인류는 그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다시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느림의 철학이 전 인류의 교과서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인생 지침으로서는 어떨까. 전 인류가 이런 인생관을 같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느림’의 삶을 사는 것은 말이다. 물론 훌륭하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떤 애연가의 담배끊기 결심과 같다고 본다. 물론 끊을 수만 있다면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HEAVY SMOKER들의 금연이 십중팔구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담배를 끊고 비흡연자가 된다는 것은 이전에 담배가 주던 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한다는 말이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고들 말하지만, 애연가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금연하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는 담배각의 표어처럼 금연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전에 담배가 주던 안도감, 정신적 의지, 오락성 등의 장점을 포기해야 한다. 애연가들에게는 그것이 건강보다도 훨씬 중요하므로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느림’의 삶, ‘여유로움’의 삶.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위해서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인생의 몇 가지 목표들, 심지어는 궁극적인 인생의 골인점으로 삼았던 것들까지 모두 쓸모 없는 것들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룩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업적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루려고 애쓰는 것들 모두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모델로 삼았던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도 일순간에 바보 같은 짓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만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얻기 위해 지금까지 수십 년간 노력해 온 것들, 그리고 그러한 수십 년간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얻어 온 것들. 과연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느림의 철학’은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말아야 하는 묵계(墨契)라고 하겠다. 우리는 모두가 이상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은 말 그대로의 이상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현실이 된 이상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이성에 대한 이상형이 있지만 결국 그런 이상형과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에 단지 그런 상황을 꿈꿀 뿐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피에르 쌍소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생은 ‘느리게’ 사는 인생이리라. 아니 될 수만 있다면 대다수 인간의 이상적인 삶이리라. 유유자적한, 느긋한, 여유로운, 쌍소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빈둥거리기’.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피에르 쌍소는 ‘느림의 삶’이 가능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도, 지금까지의 인생관을 버리고 느린 삶에 동참할 마음이 들만큼 논리적인 설득을 펴지도 못했다. 단지 서로 이런 얘기는 하지 말기로 되어있었던 건데, 약속을 깨고 그 얘기를 해버렸다. 다 그만 두고 이제 숨 돌리고 살자고. 이것이 처음 느꼈던 당혹스러움, 불쾌감, 두려움의 원인이다. 그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제 이 어지럽고 말끔하지 못한 글을 마무리 지어야 겠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은 내 생각을 정리해 보면,
하나. 모든 인류는 느리게 사는 삶을 동경하고 있다. 둘. 모든 인류는 그러한 삶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셋. 그러므로 이 사실은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말하지 말아야 하는 묵계이다. 넷. 피에르 쌍소는 이 책에서 그 약속을 어겼다. 다섯.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나는 당혹스러움과 언짢음을 느낀다.
어쩌면 억지일수도 있겠다. 아니 억지라기 보다는 사견(私見)이라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이 글은 완전한 나의 생각일 뿐이다. 세상에 정답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찌되었건 나는 쌍소가 무언의 약속을 어긴 반칙쟁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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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은 왠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상의 변화 속도에 맞춰 살아야만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바쁘고 빠른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안겨 주며,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쉽게 지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고자 하여도, 대개의 경우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생각으로만 그치고 나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느리게 산다는 것’은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가 필요하며, 아울러 바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용기’가 전제될 때 실천할가능한 방식이라고 하겠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부과된 효율과 성과를 무시할 수 없기에, 통상적으로 ‘느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그러한 분위기임에도 저자는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을 선택했고,그러한 삶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저자가 실천했던 삶의 방식을 소개하면서, 또한 독자들에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로 출간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나 역시 여러 해전부터 ‘느리고 불편하게 살자’라는 생각을 품고, 일상에서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기에 저자의 의도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타인의 시각에서 '느리고 불편한 삶'으로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즐거움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먼저 ‘느림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치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싶’어하는 마음가짐이 사람들의 삶을 빠르고 바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로 인해 저자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문화 속에서’ 그것응 여유롭게 향유하기보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 때문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절감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을 통해서 ‘느림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임을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저자는 먼저 첫 번째 항목으로 내세운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하여’자신이 실천했던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가로이 거닐기’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 그리고 때로는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지거나 몽상과 다름 없는 ‘꿈꾸기’를 시도했던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무언가를 빠르게 처리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기다리기’와 ‘내 마음의 시골 고향’을 품고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것도 느림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안내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글쓰기’와 일상에서 ‘포도주 한 잔의 지혜’를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을 제시하기도 한다. 각각의 항목들을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내며 에세이 형식으로 채우고 있기에,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느림을 실천하기 위한 저자의 삶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에 '리듬의 교체'와 '과정, 유토피아의 충고'라는 항목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지만, 실상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하여' 저자가 실천햇던 방식을 소개하는 항목에서 그 미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실상 이러한 항목들은 저자가 경험에 기반하여 추출한 것이기에, 독자들로서는 자신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느림의 항목’들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느리게 산다는 것’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지를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한꺼번에 갖출 수 없다면, 실현가능한 조건들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그 시간을 온전하게 자신을 위해 보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실천해 보도록 하자. 하나의 조건이 갖춰지게 되면, 그로부터 조금씩 자신만의 시간과 조건들을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하게 추진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에,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그러한 방식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처럼 ‘느리게 산다는 것’을 일상에서 만끽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여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울러 ‘느리게 산다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 그러한 자세를 통해 즐겁고 행복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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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소요(산책)라는 말이 있다. 옛 우리말로는 '바장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목적 없이 거닐며 다니는 일을 의미한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주변 사물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이리라. 사물과 하나가 되어 주체도 객체도 사라진 상태, 그것을 소요라 한다면 피에르 쌍소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말하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느림'은 정확히 이런 동양적인 소요의 정신과 통한다. 지은이에게 느림이란 무엇인가? 그에게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13쪽)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빠름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파시스트적 속도'에 맞서, 그는 '시간의 재촉'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제시한다. '빨리빨리'라는 강박관념에 젖어,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현대인에게 지은이의 이런 이야기는 어쩌면 눈 먼 자의 독백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한가롭게 거닐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간직하라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가당찮은 일인가? 그런 삶의 방식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는데, 마음의 고향을 가슴 속에 품은 채 항상 절제(모데라토 칸타빌레)된 자세로 모든 것을 기다리라고? 그나마 열려있던 숨구멍이 완전히 막혀 오리라.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외친다. 느림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며, 더욱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용감하게 맞서는 방식이라고. 그렇다면 가장 현대적인 도시(파리)에서 가장 현대적인 삶을 즐겼을 그가 '느림'의 방식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의 이기 가운데 지은이가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인터넷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면 인터넷은 현실세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추상적인 세계, 곧 삶의 실존이 없는 세계이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위한 도구들만이 있을 뿐이다!’(86쪽)라는 말처럼, 그에게 인터넷은 도구적 이성이 첨예하게 실현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정조는 속도이며, 이 속도의 우열에 따라 공간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익명화된 공간에서 ‘접촉’이 아닌 ‘접속’이 이루어지고, 모든 대상들이 순식간에 정보로 변해 정보의 홍수를 이루는 곳, 지은이가 바라보는 인터넷의 세계는 바로 이런 곳이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대사회의 은유로 연결된다. 따라서 '느림'에 대한 찬양이 강렬할수록 인터넷으로 상징화된 현대세계는 그에게 변화해야 할 공간으로 떠오른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정조였던 빠름에서 한발 물러나 '느림'의 방식으로 그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한다. 속도라는 현대의 조류에 젖어 잃어버린 우리의 참모습을 추억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밝혀둘 점이 있다. 지은이는 ‘과거로의 회귀’만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현대성의 첨단인 인터넷을 비판하는 뿌리에는 인터넷과 같은 속도의 장치로 인해 사라져버린 덕목들, 이를테면 이 책의 구석구석에 등장하는 자유, 여유로움, 안락함, 부드러움, 인내심, 조화, 숭고함, 그리고 풀 한 포기에 대한 찬양 등과 같은 지금은 잊힌 덕목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덕목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를 통해 우리의 현대성을 새롭게 정립해 보려는 것, 이것이 지은이가 ‘느림’을 통해 성취해보려는 참다운 의도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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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2학년 때였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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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전.. 한창 이 책이 화제가 될 때 사 두고는 읽지 않고 있었던 책. 고등학생에게 '느리게 사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아 메꾸고 싶은 심리 때문인지, 한창 바쁜 시간에 틈틈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듯이 천천히, 책의 구석구석을 음미하며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느리게 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효과적인 이유는, 그 방법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 아닌, 책을 읽는 행위 자체도 느림 속에서 가능하게끔 만들었던 문체 때문이지 않나 싶다. 그 정도로 이 책은 편안하고 느리다. '인간의 불행은 단 한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을 취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글이 시작되기 앞서 인용된 파스칼의 이 글귀를 읽자마자 순간 가슴을 탁 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느림의 방법들.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권태를 즐기기, 꿈꾸기, 기다리기.. 등은 한번쯤 이 책을 떠올리며 꼭 해보고 싶다. 마치 비온 뒤의 햇빛을 맘껏 즐기는 일처럼,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바쁘게 빨리빨리를 강조하며 사는 것이 능력인 양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책인 동시에, 개개인의 삶속에 어떤 생활 철학을 심어줄 수 있는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처럼, 한가로이 교정을 거닐어볼까? 아니, 내일 하루는 손목에 찬 시계를 빼놓고 지내보아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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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2주일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중에 하나 였던것 같다. 독자 리뷰에 책이 지루하다고 많이 나와 있지만 휴대하기도 간편하고, 내용도 왠만한 책보다 좋다. 2달전에 백화점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2권을 구입했는데 1권 배타고 있는 연인?의 책갈피가 있었다. 매우 평화로운 느낌을 받았다. 나도 그런곳에서 1주일 만이라도 쉴수만 있다면...^^고등학교 올라오고 책읽을 시간이 많이 없어서^^아직 못읽고 있다. 여름방학때 시간나면 꼭 읽고 싶다. 나는 한번에 5권정도의 책을 번갈아 가면서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책(물론 좋은책)에 있는 지식은 정말 대단하다. 시간이 많은 분들께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많은 삶의 태도를 고칠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느낄수 있었다. 느리게 산다는것은 절대로 게으른 것이 아니다. 단지 그때그때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기억속에 남길수 있게 될수 있다. 느림의 미학을 알게되면 그때의 순간을 언제든지 되새길수 있다. (나는 기쁠때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이 책은 내용과 구성이 매우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얻는게 많을 것이다. (여유로울때 읽는게 좋을 것 같다)
고등학교 들어오고 책읽을 시간이 많이 없어서 매우 안타깝다. 중학교때는 몰랐는데...대학교가서 많이 읽어야 겠다. 마지막으로 책을 사랑하자! 책에 길이 있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를 이같은 광기와 상스러운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곧 절제라는 태도이다. 절제는 합법적인 야망을 지니고 살아갈 때,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악한 악마들을 쫓아낼 필요가 있다. 사실 소유와 능력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 보다 좀더 고귀한 삶은 자세들이있다.만일 내가 나 자신의 가치를 확신 한다면, 굳이 사회적 위치를 구분해주는 흔적들을 쌓으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
| 빠르게만 돌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관조에 잠기거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 보거나, 사물이 저절로 생겨나도록 내버려두는 태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여유와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이 책은 과연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빨리 돌려 무엇을 얻는 것이며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작가 피에르 쌍소는 우리 인간 삶의 감성적이고 시적이고 정서적인 면에 서서 느림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느린 시간 속의 많은 것들, 우리가 가치를 두었던 일상적이고, 감성적이고, 자연적이고, 인간을 따스하게 하고 진정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 그 의미를 느끼게 하는 일들을 즐길 것을 권유한다. 한가로이 걷기, 자연에게서 상처 치유받기, 남의 말 들어주기, 느긋한 휴식 즐기기, 꿈꾸기, 추억 더듬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갖기, 사색하기, 평온한 상태로 자기 내면과의 대화시간 갖기, 글쓰기, 포도주 한 잔 음미하기, 절제의 미 실행하기, 따스한 마음갖기 등이 그것들인데, 이런 것들을 향유하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 준다. 여기서의 느림은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향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불행을 치유하는 일종의 삶의 지혜이다. 쌍소는 또한 자신의 느림의 철학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글 전체를 통하여 느릿느릿 카메라가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듯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 풍경 등을 느긋하게 그리고 철학자답게 꼬치꼬치 세밀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넘기는 와인처럼, 그리고 마침내 쉽사리 그에게 공감하도록 만든다. 학식이 있는 사람이건, 학식이 없는 사람이건 간에 인간 삶의 사소하고 간단하고 단순한 것들을 통해 정말로 오감을 즐겁게 하고, 육신을 쾌적하게 하고 정신을 충만하게 하는 재량을 펼치게 한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이 시대에 도대체 어떻게 나만 홀로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어쨋든 이 책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느림의 철학이 주는 마음의 여유는 한 번쯤 가져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꼬득임을 당할 것 같다. 바쁜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부추기는 시대에 더욱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우리 이제부터 쓸데없이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 바쁨보다 마음을 평온함으로 이끌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게 하는 일들을 즐겨보는 게 어떨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