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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태정관 제도(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서 태정대신과 좌우대신이 존재) 아래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한 참의(參議)와 행정부의 부처들로 구성된 내각(성료) 체제를 구축하고 이러한 체제를 중심으로 제도 근대화를 꾀한 것이다. 1. 사법 개혁 : 1872년 사법성을 중심으로 사법 제도 근대화 추진 2. 교육 개혁 : 1872년 9월, 학제 공표를 통하여 전국의 모든 아동에게 기초교육을 실시하면서 소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체제 구축 3. 종교 정책 : 1868년 신불 분리령으로 신도와 불교의 영역 분리, 1871년에는 사찰 소유 토지 반환령 선포, 1873년 기독교 해금 4. 지조 개정 : 전국의 토지를 농지와 택지, 상공업지로 구분하고 전국 일률 과세 표준 확립 5. 군대 개혁 : 1873년 징병령 공표를 통한 모든 성인 남성에게 3년의 병역 의무 부과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개혁은 분명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큰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지조 개정은 높은 세금으로 인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야기하였고, '천민 해방령' 역시 사족과 농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진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불만을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여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는데, 문제는 이러한 불만이 정부 내에서도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개혁의 내용은 누구나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했지만, 문제는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가모리는 非삿초(사쓰마와 조슈) 세력을 규합하여 해외 군사 원정까지 계획하고 있었으니 '정한론(征韓論)'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써 일본 내부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이고의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의 다툼으로 정국의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정한론(征韓論)'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데, 먼저 '정한론(征韓論)'에 대하여 반대하는 관점을 생각해야 한다. 언뜻 전쟁을 반대하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선순위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근대화 정책의 우선 순위를 감안하여 나중으로 미루자는 것이지 아예 조선을 공략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시점 역시 일본 내부에 근대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해외 군사 원정을 통하여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의 역사에서 꾸준히 대륙으로 진출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있었지만, 1870년대 초반의 일본은 그러한 주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한론(征韓論)'은 그들이 진행하던 근대화의 성과를 점검하면서 동시에 내부 단속을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일본의 민중들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애국자로 치켜 세웠으며 이후 삿초 세력에 의한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자 정부에 대하여 비판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 추종세력들인데 영화에서도 그들을 상당히 미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일본 민중에게 사이고 다카모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이후 행보는 이 시리즈의 11권의 '서남전쟁(세이난 전쟁)'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정한론(征韓論)'은 그 주요 내용은 조선의 정벌에 관한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일본 내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니 그것이 바로 1874년의 '사가의 난'이다. 이 난은 사가현 출신의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의 주도로 일어난 반란인데, 정국을 주도하던 삿초(사쓰마와 조슈)에 非삿초파가 반기를 드는 양상이었으니 '정한론(征韓論)'은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적 이외에도 일본 내부의 치열한 세력 다툼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사가의 난'은 정부에 의하여 토벌되고 에토 신페이와 시마 요시타케는 처형을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정한론(征韓論)'을 반대하던 당시 삿초 세력들이 1년 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다음에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는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면 일본 내부의 '정한론(征韓論)'의 실체와 그에 대한 반대 세력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강화도 조약을 이끌어 낸 '운요호 사건'은 어떻게 전개가 된 것일까? 단순히 일본의 배가 포격을 실시하여 이에 놀란 조선이 조약을 맺은 것으로 봐야할까? 이 책에서는 '운요호 사건'을 자세히 다루는데,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먼저 일본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열강과 중국으로부터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점에서 그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1875년 5월, 일본은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완력 행사에 대하여 서양 열강의 양해와 지지를 미리 확보하였다는 점은 훗날 일본이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통하여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을 상기키시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하여 1875년 9월 일본의 운요호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다. 승무원 50명에 암스트롱포 4문을 갖춘 250톤급 포함이었던 운요호는 9월 21일 오전 초지진을 초토화 시키며 무력 시위에 들어간다. 다만 운요호의 전력으로 강화도 상륙은 쉽지 않았기에 영정도 앞바다로 뱃머리를 돌렸고 이후 육전대(해병대) 병력 22명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가에 방화를 저지르고 조선의 영종도 수비대를 공격하게 된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전사 35명, 일본군은 부상 2명이 전부였으며 민가가 약탈당하게 된다. 400명의 조선 수비대가 22명의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당시 일본과 조선의 전력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하여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서 고종이 친정을 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이러한 도발에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고작 하는 것이라고는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미 일본은 청나라의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고 실제 청나라는 내부적으로 조선을 도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홍장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회담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관. 조선은 자주국가로, 일본과 평등하게 교류한다. 서로 존중하고,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 규약으로 영원히 친하게 지낸다. 제2관. 양국은 서로 사신을 파견해 양국 예조, 외무성에서 각종 시무를 논의토록 한다. 사신의 주재 기간은 재량에 맡긴다. 제3관. 양국 간 외교 문서는, 일본은 일본 글자로, 조선은 한문으로 작성한다. 제4관. 왜관을 혁파하고, 새로이 개항장을 정한다.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이 사정에 맞게 장사하고 거주할 수 있도록 한다. 제5관. 부산 이외에 두 곳의 항구(원산, 인천)를 더 개항한다. 제6관. 일본 선박의 조선 근해 조난 시, 조선 측에서는 그 구난에 최선을 다한다. 제7관. 조선 근해의 암초에 대한 근대적 해도가 없어 모두에게 위험하기에, 일본 배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측량, 조사할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일본은 개항장에 일본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설치한다. 제9관. 양국 백성은 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도록 한다. 제10관. 일본인이 개항장에서 죄를 범하면 일본으로 압송해 재판토록 한다. 제11관. 6개월 안에 별도의 통상조약을 맺는다. (이후 7년여간 조일 무역은 무관세 상태) 제12관. 이상의 내용을 양국은 성실히 이행하고 영원히 준수해 친하게 지내도록 한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으로부터 공격받고 그들과의 외교를 위하여 뒤늦게 [만국공법]을 번역하여 조약을 맺는 데 있어서 대등한 위치를 얻고자 노력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는데, 조선은 아예 그런 노력조차 없었으니 '조일수호조규'는 대부분 일본의 의도대로 체결된 것이었다. 문구상으로는 특별히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항목은 조선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든다면 조선을 자주국으로 표현한 것은 추후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때 청의 영향력을 배제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해안 측량 조사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제10관의 내용은 치외법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조선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관세의 개념에 대해서도 무지하였기 때문에 무관세를 특별히 문제로 삼지 않았지만, 이는 일본과 조선의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손해였다. 결국 조선은 쇄국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의 첫 등장의 파트너가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불행이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조선 내부의 사정 역시 변화와 갈등이 뒤따르게 되는데, 기존의 수구파와는 반대로 개혁을 부르짖는 젊은 개화세력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국외적으로는 열강의 반열에 들고자 조선에 대한 물리적인 압박을 통하여 결국 '조일수호조규'까지 체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근대화라는 커다른 흐름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이제 쇄국의 빗장을 꺾은 조선은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교가 된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로 치닫게 되었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이러한 흐름을 조선이 아닌 일본과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으니 이 시기를 보다 객관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는 서로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설명되거나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역사에 대하여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은 시선으로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정확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책으로 그러한 부분을 보완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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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라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일본과 옛 정복지를 다시 제국을 유지하려는 청. 근대화의 길목에서 '일국'을 건설하기 위한 두 국가의 승부수에 동아시아가 들썩인다! - 책 표지 내용 中에서 -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그들의 역사이다. 지금까지 교과서(내가 배웠을 당시의 기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정식 역사로서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건은 어떻게 보면 우리와는 별개의 국지적인 그들 내부의 사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현재 동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876년 3월, 일본은 '폐도령(廢刀令)'을 발령한다. 이름 그대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어서 1876년 10월, '질록처분'을 발표하는데 이는 그동안 사족에게 지급되던 녹봉을 채권화한 금록공채로 나눠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이 두 가지의 조치는 사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애초 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것은 사쓰마와 조슈를 비롯한 각 번의 사족(사무라이)의 봉기로 인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과 신분제도 철폐에 의하여 사족이 설 자리와 특권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니 수백만에 달하는 사족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10권에서는 그러한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정한론'과 같은 대외 정벌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폐도령'과 '질록처분'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폐도령'은 사족(사무라이)의 상징인 검을 휴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예 사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질록처분'은 사족의 경제력을 무너뜨리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더구나 막부를 몰아내고 현재 정부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 사족들에게는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대한 분노는 증폭되었으며 급기야 곳곳에서 사족의 반란이 터져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부분은 개혁으로 인하여 소외되거나 특권을 빼앗기게 된 계층의 반응이다. 조선의 지배 계층은 소위 양반으로 불리우는 사대부였으며 일본은 바로 사무라이였다. 1895년 조선 역시 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 상투를 자르라는 지시인데, 이는 일본의 '폐도령'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에서 상투는 유교질서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되어 양반의 반발을 야기하였고, 일본은 칼의 휴대를 금지함으로써 사족이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었다. 다만 조선은 두 차례로 시행된 '단발령'이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배층인 양반 또는 사대부는 칼이 아닌 붓으로 상징되는 세력이었고 또한 유교적인 질서에서 반란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단발령'에 분노한 조선의 민중들이 당시 총리대신인 김홍집을 거리에서 몽둥이로 벌집을 만들어 죽이는 과격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불만이 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만이 을미의병을 통한 항일 운동의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단발령'이 친일 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기에 그 배후 세력을 일본으로 보고 그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반발 세력은 칼로 상징되는 사족들이었다. 당시 메이지 유신의 내각의 주요 인물들인 기도 다카요시(조슈 출신), 오쿠보 도시미치(사쓰마 출신)도 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사족들의 반발을 예상하였음에도 그들은 사족의 신분 철폐와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조선의 양반과 사대부가 반발은 하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에 반하여 일본의 사족들은 그들의 상징인 칼을 뽑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질록처분'이 발표되자마자 구마모토에서는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과 현령(도지사)을 살해하였고, 정부 역시(정부의 요인들 역시 사족 출신이니)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한다. 이러한 반란은 이후 일본 곳곳에서 발생하는데, 조슈와 사쓰마에서 일어난 두 반란 사건은 각각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꽤 상세히 다루게 된다.
먼저 조슈에서 발생한 '하기의 난'은 마에바라 잇세이가 주동이 된다. 그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출신으로서 인의를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참의로서 메이지 정권의 주요 멤버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정책 중 하나인 징병제에 반대하였으며 이 와중에 벌어진 조슈 기병대 해산이 결정되자 기병대는 소요를 일으켰지만, 같은 조슈 출신인 기도 다카요시는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 93명을 모두 처형한다. 평소 인의를 중시하던 마에바라 잇세이는 그러한 기도의 처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조슈로 귀향한다. 유신의 거물이자 쇼카손주쿠의 대선배였던 마에바라는 조슈의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그는 규슈의 사족 반란에 동참하여 '순국군'을 조직하여 거병하게 된다. 1876년 이들의 거병은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제압되고 12월 3일 마에바라는 사형을 선고받고 결국 참수당하게 된다. 또한 쇼카손주쿠 학생 다수와 요시다 쇼인 가문 사람들이 반란에 연루된 데 책임을 지고 교장이었던 다마키 분노신이 할복하게 된다.
'하기의 난'의 주동자인 마에바라 잇세이가 쇼카손주쿠 출신이었다는 점과 이 사건으로 인한 쇼카손주쿠의 몰락은 현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산파 역할을 했던 요시다 쇼인과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의 실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저자 역시 쇼카손주쿠가 작은 동네 서당이며 요시다 쇼인 역시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현재 '쇼카손주쿠'가 메이지 유신의 태동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사실 마에바라 잇세이 역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곳 출신이라는 유신의 인물들 역시 어떻게 보면 깊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쇼카손주쿠는 이후 내내 작은 서당과 같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하기의 난' 이후에는 아예 폐교하게 된다. 하지만 이토와 야마가타로 대변되는 조슈 출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미화로 '쇼카손주쿠'를 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일본 우익 정치의 본가라는 위상을 견지하게 된다. 현재 이곳은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위치하는데, 현대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이곳을 성역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 역시 바로 이곳 야마구치현 출신이었고, 2015년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면서 더욱 일본 우익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쇼카손주쿠'를 마치 근대화의 대명사로 긍정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분별력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기의 난'도 사족의 반란 중 제법 규모가 있었지만, 이 책의 부제인 '서남전쟁'은 사쓰마에서 일어난 사족의 반란이다. 이름에서 이미 '난(亂)'이 아닌 '전쟁'을 쓰고 있는 것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쓰마 지역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축으로 사족들이 굳건히 단결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873년 10월, 정한론파는 결국 내각에서 축출되며 사이고 다카모리 역시 고향인 사쓰마로 귀향하게 된다. 사이고의 영향력 때문인지 그가 낙향하자 600여 명의 사쓰마 출신 정부 관리와 장교 역시 사직하고 그를 따랐으며, 근위대 사령관과 근위대의 절반 병력 역시 함께 사직하게 된다. 가고시마로 귀향한 사이고는 사쓰마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사쓰마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같은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조슈와 타협하여 사족을 압박한다고 평가를 받는 것에 반하여 사이고는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 받았기 때문이다. 사이고 일파는 사쓰마 곳곳에 사학을 설립하여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정부에서 파견된 가고시마 현령마저 사이고에 동조하게 된다. 점점 세력을 규합하던 사이고는 사족들의 마지막 희망으로 자리하게 된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러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적어도 당시 사쓰마와 사족들에게는 그렇게 비춰졌을 것이다.(반대로 같은 사쓰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877년 2월 사이고는 거병을 하며 '서남전쟁'이 시작된다. 이들의 병력은 무려 1만 2천이었으니 그동안 발발한 사족의 반란과는 그 결이 달랐다. 이들은 가고시마에서 출병하여 구마모토를 점령하고 후쿠오카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적극적인 공세로 임하게 된다. 하지만 구마모토는 끝내 사이고에게 점령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사이고는 배후에 구마모토를 두고 후쿠오카에서 내려온 정부군과 결전을 벌이게 된다. 꽤 대등하게 싸웠지만, 결국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에 재정비를 마친 정부군에게 사쓰마군은 그대로 밀려나고 1877년 9월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던 많은 사족들이 전사 또는 자결로 그의 뒤를 따르면서 결국 1877년 9월 24일 '서남전쟁'은 종료된다. 이로써 사족들의 반란은 잦아들면서 일본은 좀 더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1878년 내무경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나 가가번의 사족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사족들의 반란의 완벽한 종식은 좀 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서남전쟁'으로 대변되는 사족들의 반란은 개혁이라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지배층이 사족이었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이룬 것도 사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내분이 일어났으니 개혁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가능함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폐지하고 몇몇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도정치 세력과 일정 부분 연대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였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체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꼭 피를 불러야만 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득권층과 타협하면서 기존의 테두리 안에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혁신과 개혁을 내세우면서 기존 정권을 비판하고 새롭게 정권을 장악하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는 현재 우리의 역사를 보면 개혁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픽요가 있다. 그러고보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에서 과연 '성공한 개혁'이라 불리울만한 것이 있었던가?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 불리우는 지역은 청나라 말기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수의 이슬람 민족과 세력들에 의하여 분할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의 좌종당은 이홍장과 '해방새방(海防塞防) 논쟁'을 벌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좌종당은 신강지역을 수복하여 육로로 유입되는 열강의 세력, 특히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새방(塞防)'을 주장하였고, 이홍장은 과거 열강이 강력한 함대로 중국에 진출하였으며 떠오르는 강국인 일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해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좌종당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좌종당은 막대한 지원을 통하여 재무장을 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이홍장은 해군 증강에 차질을 빚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이홍장의 입장에서 좌종당에 지원되는 자금이라면 당시 일본 해군의 3배에 해당되는 함선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그의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훗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하는 결과로 나오게 된다.
어쨌든 좌종당은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1875년부터 1876년까지 신강 원정 준비에만 몰두하게 된다. 당시 신강은 야쿱 벡이라는 인물이 이슬람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는데, 그는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권모술수로 신간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차례로 정복한 상황에서 그는 러시아와 영국, 심지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받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 책에서는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당시의 역사를 보다 폭넓게 살펴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조선과 영국의 무력 분쟁으로 치닫지 않았고, 점령이라기 보다는 불법 주둔의 형태였으며 당시 영국은 의외로(?) 거문도 주민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의료 혜택도 제공하였으니 섬 주민과 영국 해군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영국이 거문도를 점유한 이유는 그 타겟이 조선이 아니라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가 한반도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예 거문도를 점령하여 경고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19~20세기 초에 영국과 러시아는 전세계 곳곳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의 내륙 지배권을 놓고 다툰 것을 '그레이트 게임'이라 부른다.
영국은 러시아가 점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주요 식민지였던 인도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반대로 러시아 역시 인도에서 영국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두 국가의 세력 다툼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간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 것도 이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는데, 야쿱 벡의 신강 역시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영국령 인도에서 신강을 차지하자니 파미르 고원과 카라코람산맥 등 험난한 자연 지형 때문에 공격이 쉽지 않았고, 러시아 역시 청나라와 영국의 눈치 때문에 신강을 간단히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야쿱 벡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영국과 러시아에 등거리 외교를 제안하여 정권을 인정받았으며, 또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 받으면서 내부의 이슬람 세력 역시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좌종당은 야쿱 벡의 정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원래 그곳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으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홍장과 논쟁까지 벌이면서 추진한 원정이었기에 그로서는 꼭 신강 지역을 차지해야 했다.
야쿱 벡은 청의 좌종당에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청나라 정부에 화친을 요청한다. 즉, 청의 한 지방으로 복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역시 그러한 요청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좌종당은 중간에서 이러한 시도를 차단하며 무력으로 진압하게 된다.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따진다면 야쿱 벡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좌종당은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결국 무력으로 신강을 수복하게 된 것이다. 좌종당의 이러한 정벌은 신강 지역을 수복하면서 동시에 위구르 세력을 복속시켰지만, 문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는 점이다. 애초 야쿱 벡 정권을 인정해 주었다면 러시아와 영국이 그 지역을 공략하지 않기로 한 이상 그곳으로 러시아가 청나라로 진출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비용을 이홍장의 주장대로 해군에 투자했다면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가 그리 간단히 전멸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에는 '정원호'와 '진원호'라는 거함이 있었고, 일본은 끝내 이들 전함을 격침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예산 문제로 인하여 이들 두 거함에 재대로 된 탄약조차 탑재하지 못하여 해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좌종당의 선택이 오히려 중국의 입장에서는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지역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자원은 현재 중국이 이곳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이루어질 정도로 눈독을 들일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지역이며 최근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과도 맞닿아 있는 곳이니 좌종당이 이런 점까지 감안하였다면 혜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여파로 인하여 이후 중국이 일본과 치룬 전쟁에서 무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서남전쟁'과 중국의 '위구르 봉기'는 그 시대는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살펴보아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역사이기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 특유의 만화로 이해하기 쉽게 다루면서 동시에 저자의 예리한 해석이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배우거나 접하는 역사에서는 쉽게 살펴볼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분명 유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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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2 : 임오군란과 통킹 위기]는 일리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힘겨루기를 하게 된 청과 1882년에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1884년 베트남을 놓고 벌어진 청불전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애초 이 시리즈를 읽게 된 이유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저자 역시 비록 제목은 '한중일'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역사보다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 좀 더 많은 양을 할애하였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12번째 책에서는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과연 내가 이 시기의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임오군란'은 수박 겉핥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임오군란'을 신식군인인 '별기군'의 창설에 따른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 민씨 세력에 의한 세도 정치에 대한 불만, 흥선대원군의 정권 복귀에 대한 야심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해 왔다. 특히 2년 뒤인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과 비교되면서 수구세력 내지는 위정 척사파에 의한 사건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이 책의 13권에서 '갑신정변'을 다룰 예정인데, 이 시점에서 과연 개화파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갑신정변' 역시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종래의 그러한 '임오군란'의 원인과 배경을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으로 다룸으로써 조선 후기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고 '임오군란'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읽는 이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하여 '임오군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후기 군대를 통한 조선의 자화상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면서 이전의 조선의 군대는 구식 군인으로 묘사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임오군란'을 단순히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과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먼저 당시 조선 후기 군대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하여 이 시기의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시기의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한 5군영 체제의 조선 군인들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이들 군졸은 서울 자택에서 도성 각지 근무처로 출퇴근하는 도시 샐러리맨이었고, 군사 직무와 도성 경비 외에도 나라에서뭔가 사람 쓸 일이 있을 때마다 불려 나오는 만만한 인력이었습니다. 그리 빡세게 작업하는 군졸들의 급여는 관아 심부름꾼과 비슷한 수준. So, 서울의 군졸들은 근무 외 시간에 각종 노가다나 도시 근교 농업을 부업 삼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습니다. (중략) 군졸들은 나름 공무원 파워와 조직력, 머릿수를 갖췄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이 걸린 일이면 상당한 야료를 부릴 수 있었다. - p. 232 ~ 234 中에서 -
위의 설명대로라면 조선 후기의 군인들은 그래도 서울 서민 체계에서 가장 위세 등등한 조직력을 과시하면서 도서의 밑바닥을 주름잡고 있는 세력이라 볼 수 있다.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라에서 급여가 지급되고 몇몇 이권 시장에도 개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쇄국정치의 시행에 따른 군사력 증강 정책으로 인하여 군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구식 군인에 대한 대우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구식 군인들이 바로 흥선대원군 세력의 핵심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고종은 궁궐 경비 병력인 숙위군을 무위소로 개편해 국왕 친위대로 삼고, 진무영을 폐지하며 대원군이 늘려놓은 군 전력을 감축하여 친흥파 군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81년에는 5군영을 폐지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 체제로 중앙군을 개편하였으며 군 수뇌부는 민겸호를 비롯한 민씨 일족이 장악하게 된다. 별기군 역시 근대화를 위한 신식군인의 창설로 볼 수 있지만, 이 역시 구식 군인에 대한 견제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구식 군대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는 상황에서 고종은 1873년 청전의 사용을 폐지하면서 극심한 재정 부족을 겪게 되었고(청전은 상평통보의 구리 함량이 1/3이었기에 흥선대원군이 들여와서 청전과 상평통보를 같이 유통시킴으로써 통화량을 확대하였지만, 고종은 청전을 폐지함으로써 통화량이 1/3으로 다시 축소됨) 이후 흉년이 지속되면서 조선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의 세금은 수로를 통한 조운선으로 운반되는 쌀이었는데, 조운선의 운항 역시 파행이 지속되면서 군대에 대한 급료 지급은 더욱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를 통하여 급여에 대한 구식 군대의 불만은 조선 후기의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 역시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 나눠 준 쌀의 태반이 모래와 겨가 들어있었으니 중간에서 이를 착취한 민씨 세력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게 된다.
2. 흥선대원군의 가세 1873년 실간한 이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군인들의 반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전에도 정계 복귀를 노리던 대원군은 몇몇 음모를 진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고종의 세력 강화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사실 고종으로서는 친정 이후에 여전히 위정척사파의 눈치를 보면서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의 외교에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고종의 형이었던 이재선(이복형)을 복위에 올리고자 진행되었던 위정척사파의 음모가 탄로나면서 이제 고종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에게 역적이라는 주홍색 글씨를 새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선의 군대가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니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곧바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임오군란'은 단순한 구식 군인의 불만이 아닌 조선 후기의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이던 세력들의 대리전으로도 볼 수 있다.
3. '임오군란'이 촉발한 국제정세 '임오군란'은 청의 무력 개입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면서 진압된다. 일본 역시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이제 조선은 대놓고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바로 도성에 청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병자호란에서 청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조선에 청의 군대가 배치된 적이 없었는데, 열강들로부터 잠식당하던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진압한 이후 아예 조선에 군을 배치한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청의 보호국임을 천명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은 아직 청과의 전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되어 조선에 대한 주도권 다툼에서 살짝 발을 빼게 되었으니 당분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공고히 되는 상황이었다. 이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세력들이 왜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지에 대한 배경이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이러한 내용들은'임오군란'에 대한 내용들은 이 사건이 단순히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상황에 대한 상징 및 방향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내가 어렸을 적에 접했던 책들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이기에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고정되어 있지만 어떻게 연구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사건이 달리 보여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연구가 그저 과거에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다각적으로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서 '임오군란'에 대한 모든 해석과 설명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책에서 고종이 구식 군인에 대한 조직적인 숙청으로 불만을 야기하였다는 점을 논하고 있지만, 과연 조선 후기의 고종이 진행한 군 개혁이 꼭 대원군 세력에 대한 견제로만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대원군 세력에 대한 견제만을 위한 것이라면 친흥파 군 수뇌부만 숙청해도 충분한 일이었기에 굳이 대대적인 군 조직에 대한 체제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또한 실록에도 급여를 받고 불만을 터뜨린 군에 대한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히려 구식 군대가 충분히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겠다고 옹호한 기록이 있었으니 고종의 친정 이후에 진행된 군에 대한 정책은 개혁의 측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임오군란'을 그저 2~3줄로 서술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사건 중 '임오군란'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리뷰를 쓸 수 있게 된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리뷰에서는 아예 다루지 않았지만 '임오군란'을 제외한 청나라와 베트남의 역사가 은연중에 당시 조선은 물론 오늘날의 외교 정세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들 역시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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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조선파 K-국뽕 독일인 오페르트, 그는 왜 남연군 묘 도굴과 시신 탈취를 계획했나? - 독일제국은 비스마르크의 언플에서 시작됐다? 보불전쟁의 결말은? - 불평등조약으로 평등조약을 만든다? 청과 일본의 자강두천 수호조약 줄다리기 - 광성보가 조선군의 피로 붉게 물든 그날, 참패는 어떻게 승리로 남게 되었나? -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령, 번주님들은 왜 대대로 이어온 영지를 순순히 바쳤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9 : 블러디 선샤인 신미양요]는 위와 같은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미양요는 물론 그 일이 일어나기 전후의 전세계의 상황을 잘 정리하여 요약하고 있는데, 이는 신미양요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꽤 광범위한데, 리뷰에는 신미양요에 초점을 맞추고 그간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미국이 조선으로 시선을 돌린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1866년 8월, 조선에서 사라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실종 사건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평양의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조선군의 화공으로 불타버렸는데, 미국은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여러 루트로 알아보다가 결국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70년 말,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천명하였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조선의 개항을 목적으로 아시아 함대를 파견한다. 우선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시키고 청을 통하여 조선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하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은 미국의 통교 요청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미국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여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당시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조선의 상황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알 수 있다. '병인양요'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신감과 독일의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적개심으로 미국과의 교섭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조선의 의도를 확인하고 1871년 5월, 조선 원정 계획을 발동하고 5월 16일에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5월 23일 영종도에 진출한다. 당시 미국의 전력은 해병대 병력 650명을 포함한 1200여 명의 병력과 프리깃 2척, 슬루프 1척, 연함 포함 2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남북전쟁 이후 대대적인 군비 축소로 인하여 당시 조선으로 출병한 미국의 함대는 남북전쟁 때 쓰던 구식 전장포였으며 병력 역시 한양까지 공격하기에는 어림없는 병력이었다. 이는 미국의 원정 목표가 외교에 중점을 둔 것이었으며, 무력은 조선에게 미국의 힘을 과시할 정도였던 것이다.
영종도 부근에서 정박한 미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외교가 목적이었기에 다시 조선의 관리를 통하여 입경 목적을 알리는 서찰을 보내지만, 5월 31일 주청 미국 공사 로가 조선으로부터 받은 답변은 통교 거부와 함께 철수요청이었으니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871년 6월 1일, 2척의 미국 포함이 손돌목에 진입했을 때, 조선의 포대는 일제 사격을 가하지만 딱히 미국의 함선에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다. 조선의 주력 대포가 홍이포와 블랑기였는데, 이들 대포는 수백년 전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투를 할 때 사용한 것이었으니 구식무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반하여 미국의 대포는 비록 남북전쟁에서 사용하던 낡은 무기였지만, 조선의 무기에 비한다면 압도적인 화력과 살상력을 갖추었으니 조선은 애초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6월 1일의 첫 교전은 미국이 잠시 물러나면서 종료된다. 그리고, 미국은 다시 서신을 통하여 조선에 통교를 요구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무시하면서 오히려 강화도에 병력을 더 파견하게 된다.
결국 6월 10일 미국의 본대는 강화도 침공을 개시하였으며 초지진과 덕진진을 간단히 제압하고 해병대를 상륙한다. 그리고, 어재연이 지키는 광성보로 향하게 되는데, 결국 조선은 본토에서 전투를 하면서도 내륙에서는 미 해병대와 바다로는 미 해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니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6월 11일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은 패배하게 된다. 치열했지만 일방적인 전투였다는 사실은 그 결과가 말해준다. 미국은 단 3명이 전사(부상 10여 명)한 것에 반하여 조선군은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을 포함하여 243명이 전사를 하였고, 100여 명 자결, 20명이 포로로 잡힌다. 비록 미국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조선의 처절한 저항에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조선군을 포로로 잡으려고 하였지만, 대부분 자결하였고, 조선의 정부는 조선의 포로 교환에 일절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무려 100여 명이 자결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전투에 책임을 지고 지휘관이 자결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의 병사들마저 자결을 한 이 상황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는 당시 조선이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 양인을 악마와 같은 끔찍한 존재로 백성들에게 각인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확실히 조선군과 조선 정부의 대응은 미국의 상식 밖이었다. 전투에 패배했다면 무기를 버리고 포로가 되어야 하는데, 흙과 돌을 던지면서 처절하게 대항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선군과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는 조선 정부의 태도는 미국의 계산에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결국 미국은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애초 조선 원정의 목적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한 후에 외교적인 관계를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조선은 신미양요를 통하여 척화의 의지를 더욱 강화한다. 전국 각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으며 신미양요를 조선의 승리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성적으로 바라본다면 조선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오히려 당시 조선의 기득권은 국가 수호와 척화를 주장하며 내부를 단속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연평해전', '백령도 포격 사건', '천안함 사건'을 정확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제목과 달리 저자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 좀 더 초점을 맞추겠다고 천명한 시리즈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기에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라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대부분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9권에서 다룬 신미양요를 보면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고대의 역사가 아닌 조선 말기의 이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생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신미양요를 미국의 침입과 이를 격퇴하는 역사로 봐야할지 내부 결속과 기득권의 오판으로 빚어진 핏빛 참사로 봐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는 조선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후자의 평가에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1871년 조선의 신미양요. 시기적으로는 3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일본이 메이지 유신 단행과 이후에 보여준 행보를 감안한다면 조선이 미국과 전쟁을 벌인 신미양요를 과연 일본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1871년 일본은 '폐번치현'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신분제를 폐지하며 중앙군을 조직하며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상황이었으니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격차의 차이는 1875년 강화도에서의 일본의 무력 시위와 이듬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가 바로 '강화도 조약'이니 그 상세한 과정은 10권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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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점과 재치있는 표현이 돋보이는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타이틀의 1권은 본격적인 이 시기에 대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중일 역사'에 대한 각국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19세기 이후의 한중일의 세계사를 다루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한중일 세계사'라는 타이틀에 대한 자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과연 중국과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타이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동안의 역사책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한 부분이기에 흥미롭다. 물론 그 당위성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책들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보여지는 부분은 누구나 쉽게 그러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라는 점이 돋보인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한중일로 표현되는 세계사는 지엽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동아시아의 대국으로서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중국이 맞닿은 국가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인도, 서아시아와 같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중일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할까? 동아시아의 가장 끝쪽에 존재하는 섬나라이기에 우리와 비슷한 관점일 수 있지만, 서양에 의한 근대화가 먼저 이루어지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脱亜入欧)'론처럼 일본의 시선은 아시아 역사의 일부가 아닌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로 향해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일본의 행보는 아시아보다는 유럽과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러한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중일 세계사'는 한국의 시선에 맞춘 비보편적인 관점일까?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으로 하여금 이 시기의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기에 한국은 약소 국가로서 열강의 침략과 더불어 결국에는 일본에 합병되는 암울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암울한 시기가 오히려 한국을 통하여 중국과 일본을 밀접한 관계로 맺어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한중일 세계사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제시한다. 3국의 근대 이후의 역사는 결국 한중일이라는 카테고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기에 한중일 세계사에 대한 3국의 관점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필요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시기의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라는 점에서 살아있는 역사로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서양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세기 동아시아를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1권은 바로 그 시작점에 대한 배경과 진행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기존의 책들과 달리 색다른 표현으로 그러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면테크 전성시대'라는 소제목을 통하여 영국의 확장을 설명하는 이 부분은 영국의 산업의 발전이 어떻게 중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영국은 면화가 아닌 모직에 주력해 왔다. 면화라는 것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방의 목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이전에 양털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직물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섬유라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의 원인 역시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 산업과 관련이 있다라는 부분과 후일 영국에서 발생하는 인클로져 운동 역시 바로 이러한 모직 산업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면화가 수입되면서 영국은 인도로부터 그 원료를 수입하여 그것을 가공하여 수출을 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결국 산업 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면화로부터 실을 얻고, 그 실로 옷감을 짜야하니 자연스럽게 방적기와 방직기가 개발되고, 이로 인하여 점점 공장화가 이루어지면서 영국에는 산업 혁명이 도래하고, 영국이 만든 면직물은 인도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결국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영국의 면직물에 의하여 자국의 면화 산업이 몰락을 초래하고, 영국은 자신들이 생산하던 면직물을 팔기 위하여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중국에 대한 영국의 무역이 그들의 예상과는 판이하게 흘러갔다는 점이다. 중국으로부터 차와 비단을 수입하면서 자신들의 면직물을 중국에 수출하려는 그들의 계산은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공장화를 통한 대량의 영국 면직물이 중국에 대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여 충분히 자신들의 수입을 만회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으나, 인도와 달리 중국의 면직 산업은 비록 가내 수공업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막대한 인구를 감안한다면 그 생산량은 영국의 생산량을 초과함으로써 오히려 저렴하였기에 영국은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러 나라들로 분리되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인도와 달리 중국은 청나라에 의한 강력한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기계로 면직물을 생산하던 영국을 가내 수공업으로 오히려 압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무역 불균형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국은 바로 아편을 생각해낸다. 사실 아편전쟁은 역사상 가장 비도덕적인 전쟁으로 일컬어진다. 당시 영국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것이 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아편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국이 중국으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영국과 달리 그러한 아편 수출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영국 홀로 주도적이었다라는 점에서 역시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중국에 군대를 파견할지의 여부에 대하여 고민하던 영국의 모습은 내부적으로도 아편 수출에 대하여 부담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국 외무부 장관인 파머스턴의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결국 이 비도덕적인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되고, 중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임칙서 이후의 파견된 대신들의 무능으로 인하여 결국 영국에 굴복하게 된다. 다만 영국의 목적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무역의 판로 대상이라는 점에서 청나라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는 고난의 연장선이긴 하지만.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면직 산업이 어떻게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상세한 과정이 무척 흥미롭다. '산업 혁명 - 제국주의 - 서세동점'이라는 흐름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에 도움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상황은 간략하게나마 난학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쇄국 정책을 고수한 에도 막부의 외교 정책을 통하여 일정 부분 해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기에 훗날 개항의 과정과 연계하여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시리즈의 3권의 가제가 '국화와 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내용들은 3권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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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6권에서 막부의 제2차 조슈 정벌은 1866년 쇼군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1867년 1월 30일, 고메이 천황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인 무쓰히토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메이지 천황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이미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음을 알기에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짧은 기간에 무수히 많은 사건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실제 이 책의 대부분은 이 짧은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를 하고 모리 가문이 많은 봉토를 삭감당한 채 조슈 지방으로, 시마즈 가문이 사쓰마 지방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이들은 변방의 번 취급을 받다가 이제 격변의 시대에 주축 세력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면서 막부 타도였다. 1867년 1월 1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30세의 나이고 정이대장군, 즉 쇼군으로 취임하니 요시노부는 이제 조슈와 사쓰마와 같은 도막파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미 선대의 쇼군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는데, 그가 쇼군에 취임하였으니 조슈와 사쓰마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고메이 천황이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였다는 점이다. 분명 '존왕양이'와 '도막'을 주장하는 조슈와 사쓰마로 기울어야 할 것 같은데, 천황이 오히려 막부를 지지하였다는 점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황 입장에서 일단 조슈와 사쓰마는 반란을 일으킨 역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동안 실무를 막부가 담당하였고, 요시노부 역시 교묘하게 천황을 떠받들고 있었으니 고메이 천황으로서는 굳이 막부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고 무쓰히토가 15세의 나이로 천황의 자리에 오르니 분위기는 급변한다. 일단 메이지 천황이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지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에 이미 '대정봉환'을 통하여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치게 된다. 이는 막부체제의 멸망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막부에게 상당히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통치권을 줘도 교토의 조정은 그동안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결국 막부에게 의존할 것임을 꿰뚫어 봤기 때문에 '대정봉환'을 단행했던 것이다. 실제 '대정봉환' 이후 교토의 조정은 오히려 친막부파가 득세를 하였고, 막부는 여전히 일본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것도 천황을 등에 업고 통치를 하였으니 형식적인 부분에서만 막부가 사라진 것이지 이는 삿초(사쓰마와 조슈)가 원하는 막부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닌게 아니라 '대정봉환' 이후 삿초는 그러한 문제를 꿰뚫어보고 크게 반발한다. 비록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 체제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각 지방 영주, 특히 강대해진 조슈와 사쓰마 번의 영주들을 조정의 정책을 정하는 회의에 참석시켰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쓰러져 가는 막부의 희망처럼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정봉환'으로 오히려 명분을 획득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 세력으로부터도 그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사쓰마와 도사, 히로시마, 에치젠, 오와리의 5개 번의 병력은 1868년 1월 3일 새벽에 왕궁을 점거하였고, 어전 회의에서 이와쿠라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단행한다. 개혁의 주된 내용은 막부의 완전한 폐지였으니 막부로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열강의 지지와 교토 조정의 친막부파를 동원하여 어전 회의를 다시 장악하면서 이 쿠데타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사쓰마 번은 1868년 1월 17일 막부의 중심인 에도 성에 방화를 저지르면서 막부를 자극하였고, 결국 막부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에도의 사쓰마 번저를 전소시키면서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다. 이를 빌미로 결국 요시노부는 1868년 1월 25일, "사쓰마 징토의 표"를 선포한다. 이로써 1868년(무진년), 전쟁의 막이 오르니 이것이 바로 '무진전쟁(보신전쟁)'이다.
영리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최대한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도막파에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쓰마 번은 게속 막부를 자극하였고 막부 내부에서도 무력을 주장하는 상황이었으니 요시노부 입장에서는 피하려던 전쟁의 상황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비록 2차 조슈 원정에서 막부가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막부가 동원한 병력은 막부의 주력군이 아닌 여러 번의 군대를 모은 것이어서 실제 막부가 패배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진전쟁'은 육로로는 막부군 1만 5천이 오사카에서 교토로 진군하기 시작하였고, 바다로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신식 해군이 나섰으니 '무진전쟁'은 곧 직접적인 막부의 참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기세 앞에 도막을 주장하는 신정부는 막부의 위세에 관망의 분위기가 나타났다. 조슈의 군대는 아직 교토에 입성하지 못하여 소수의 선발대만 존재하였고, 도사 번은 이번 전쟁이 사쓰마의 단독 도발에 의하여 벌어진 것이기에 참전을 거부하였으니 막부의 1만 5천에 대항하는 교토의 병력은 사쓰마 번의 3천을 포함한 4천 정도의 병력이 전부였다. 누가봐도 막부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868년 1월 27일 무진전쟁의 실질적인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러한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게 된다. 초반부터 막부의 선봉은 붕괴되었으며, 심지어 막부의 사령관 다카가와는 총성에 놀란 말 때문에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막부군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미 시작부터 막부군은 사기가 저하되었고, 실제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이 승리를 거둔다. 더구나 신정부군은 천황의 깃발인 '금어기'를 앞세우면서 전진하였으니 명분에서도 막부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관망하던 세력들은 대거 신정부군에 가담하면서 막부에 등을 돌렸으니 막부로서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막부는 무력으로 다시 저항하려고 하지만 문제는 그토록 유능한 모습을 보였던 요시노부가 오사카에서 에도로 탈출하면서 이제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가 신정부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애초 요시노부는 무력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재림이라 평가받던 그도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이에야스와 같은 결단력이 부족했으니 막부는 이제 200년 넘게 이어오던 그 명맥이 끊길 상황이었다.
결국 1868년 4월 7일, 에도 성 개성 협상 타결이 되면서 에도에 대한 무혈 입성이 결정되었으며, 4월 26일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당주를 5살의 이에사토에게 내주고 미토로 낙향하여 은거하였고, 5월 3일 신정부군이 에도 성에 무혈 입성을 하면서 결국 도쿠가와 막부의 260년의 통치 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비록 막부의 수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물러났지만, 여전히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세력'이 저항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역적 2호로 지명된 아이즈 번주의 가타모리는 동북지역 번들과의 연합을 주도하였고, 에도 한복판에는 쇼군 호위를 명목으로 '창의대'가 등장하였으며, 막부의 신식 해군을 이끌던 에노모토 함대 역시 신정부의 함선 반환을 거부하면서 신정부의 저항 세력과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선조'를 비롯한 막부의 신식육군인 '전습대' 역시 북상하면서 우쓰노미야 성까지 점령하면서 저항의 의지를 내비치게 된다. 또한 신정부군에 투항하려다가 그들의 가혹한 동북지방에 대한 정벌에 분노한 센다이가 이끄는 14개의 열번이 아이즈 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이제 동북지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센다이 번은 일본 전국시대 유명한 무장이었던 다테 마사무네의 가문이 다스리던 지역으로서 나름 자존심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를 대하는 신정부군은 무례하였기 때문에 센다이 역시 아이즈에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신정부군의 동북 지방 원정은 '아이즈 전쟁'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지역은 쇼나이 번과 같이 적극적인 열강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조슈와 사쓰마와 같은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지만, 이외의 번들은 구식군대였다. 비록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용맹하였지만 이들 지역은 차례로 신정부군에 의하여 격퇴되면서 1868년 10월 28일, 센다이 번 항복, 11월 6일, 아이즈 번 항복. 마지막으로 11월 9일 쇼나이 번의 항복으로 '동북 전쟁(아이즈 전쟁)'은 마무리된다. 전쟁의 결과로 이들 지역의 번들은 대부분 봉토가 삭감되는 '개역'을 당하게 된다. 또한 원래 이 지역에서는 좌막 세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도막 세력과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 서로에 대한 피를 부르는 보복과 복수가 이루어졌으니 1868년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신정부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하였고, 메이지 천황이 1868년 11월 막부의 본거지였던 에도에 입성하니 이제 막부는 일본의 역사에서 그 명맥이 끊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은 이제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우는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근대화의 끝이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일본 역사를 너무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근대화와 같이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인 이들의 역사 역시 우리로서는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본의 방식이 꼭 맞다고는 볼 수 없으나, 당시 조선은 이러한 변화 자체를 아예 겪지 않기 위하여 체제 유지와 결속만을 최우선으로 하다보니 개혁과 변화에 뒤지지 않았던가?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혁과 변화는 생각지도 못한 반대급부를 마주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 막부의 멸망과 무진전쟁]을 읽어 본다면 우리로서도 염두에 두어야 할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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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다. 역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의 흐름으로 볼 수 있는데, 1894년에 벌어진 이 사건은 그러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선 정부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그리고 동학이라는 종교적 신념 등이 원인이 되어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였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고종의 성급한 결정으로 인하여 청과 일본이 조선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은 바로 이 사건들의 흐름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서술과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연구는 객관적인 자료와 사실을 통하여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역사관이 등장하고, 과거에는 정설로 여겨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뒤집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이 부족하거나 유실되는 경우라든지 팽팽한 대립으로 확실히 상대방을 납득시키지 못하여 현재까지도 논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역사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도 이런 부분은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김옥균을 이 시리즈에서는 친일파에 가깝게 묘사한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그 부분을 어떤 사료를 참고하였는지를 밝히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역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동시에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리뷰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리즈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관계가 두 사건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 와중에 고종은 둘 사이의 파워 게임에서 그냥 묻어가는(?) 존재로 등장할 뿐이었다. 실제 [명성황후]라는 드라마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흥선대원군과 그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명성황후의 갈등이 주요 내용이었으며, 고종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원래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치밀한 계산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는 점을 감아난다면 고종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 별다른 무리가 없어 보인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적장자인 이재면(고종이 왕으로 지목될 무렵에 19살) 대신에 차남인 이영복(훗날 고종)을 선택한 것도 당시 그가 12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왕의 나이가 어릴수록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흥선대원군의 계산이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던 고종이 왕이 된 것이니 고종은 왕이었지만 아버지의 위세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개 숙인 고종을 옆에서 부추긴 인물이 바로 명성황후였고, 나중에 흥선대원군을 실각에 기여한 인물이 바로 그녀였기에 이후 벌어진 권력 투쟁의 주인공을 바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그러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고종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비록 흥선대원군의 계산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조선의 일인자는 엄연히 고종이었다. 점점 성장하면서 고종 역시 자신의 권력을 뒤찾고 이후 그것을 유지하는 집념의 인물로 이 시리즈에서는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명성황후의 비중이 그리 크게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종이 갑신정변 시기에는 정변을 통하여 민씨 세력을 척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싣고 있으며, 친정을 선포한 이후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을 권력의 라이벌로 철저히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임오군란 이후 청으로 압송된 흥선대원군을 청이 명성황후가 아닌 고종을 압박하는 수단(귀국시키겠다는 협박)으로 자주 언급되는 점(과거에 내가 읽었던 역사서에서는 오히려 명성황후가 청이 아닌 러시아를 가까이하자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겠다고 압박했던 것으로 서술)과 일본 역시 고종을 압박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과 그의 적장손(고조의 조카)인 이준용을 정계에 복귀 및 진출시킨 것 역시 고종이 왕권을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고종의 대처에 영향을 끼친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연이어 승전을 거듭하여 전주 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자 고종은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이 기존의 민란 또는 동학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과 결탁된 정치적인 의도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과거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 생활을 한 것이나 동학농민운동 와중에 흥선대원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소문이 고종을 자극한 것이었다. 비록 홍계훈을 대장으로 경군(수도병력)을 파견한 상태였지만, 지방군의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입성하여 흥선대원군을 옹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결국 해서는 안될 일로 이어지는데, 바로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엄밀히 농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고종의 그러한 결정은 성급한 것이었다. 비록 동학농민군이 전주성까지 점령하였지만, 이후 홍계훈이 지휘하는 전주성을 포위하여 전봉준을 압박하였고, 전봉준이 성밖으로 돌진하였지만 잘 무장된 홍계훈의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고 오히려 전주성에 갇힌 상황이 되었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자 전봉준에 대한 지도력에 의문이 동학농민군 사이에서 생겨났으며, 농학농민운동은 곧 진압될 상항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불안감에 결국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사실 이 요청도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종이 요청한 것인지 아니면 민영휘와 같은 친청파 대신에 의하여 벌어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과거에는 후자에 가까웠지만, 최근에는 고종이 주도적으로 요청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를 뒤흔드는 단초가 이 시리즈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의식하여 왕권을 위협받던 고종이 성급히 청에 지원 요청을 한 것으로 서술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에게 점점 승기를 잡아가던 관군의 상황을 보면 확실히 고종의 결정은 성급했다. 결국 청나라가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자 일본은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병력을 파병한다.
1894년 동시에 조선으로 파병되었지만 청과 일본의 입장은 천양지차였다. 청은 조선의 요청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실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아산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당시 전주성에 있던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군한다면 다음 목적지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가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파병 목적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었음에도 오히려 제물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병력을 주둔시킨다. 곧 벌어질 청일전쟁의 육상 전투가 왜 충청도의 성환(아산근처)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청과 일본의 병력이 파병되었지만, 정작 동학농민군과 조정은 1894년 6월 10일,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 6월 11일, 전주성에서 출성한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조정에 폐정개혁안 12개조 제출) 결국 청과 일본은 실질적인 목표였던 동학농민군 진압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청은 일본에게 동시 철수를 요청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 파병을 이토 히로부미의 표현대로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면서 청을 자극한다. 조선의 궁궐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청의 동시 철수 요구를 거절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양분하자고 제시한 것이다. 당연히 청으로서는 받아들일 가치가 없는 것이었기에 이홍장은 이러한 일본의 자극에 분노한다.
노련한 인물인 이홍장은 이러한 일본의 도발에 대해서 쉽게 전쟁을 결정하지 못하지만, 젊은 황제였던 광서제에 의하여 개전을 선포하고 그대로 일본의 노림수에 걸려들게 된다. 일본은 이미 조선의 조정을 장악하였기에 조선에게 지원을 강요하면서 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성환에 있던 청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의하여 쉽게 격파되었고, 이후 9월 15일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도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 육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된다. 이어 벌어진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는 동아시아 최강이라 평가받던 청의 북양함대가 일본과의 해전에서 타격을 입고 퇴각한다. 정원과 진원이라는 북양함대의 상징적인 두 거함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수병의 질적 차이에 의하여 퇴각한 이 전투는 일본 해군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것이다. 이로써 청일 전쟁의 전장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으로 변경된다.
이런 과정을 보면 동학농민운동은 많은 의미를 갖지만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바로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대처 과정에서 고종을 포함한 조선 정부의 성급한 결정이 그 원인이다. 그동안 일본은 내부적으로 체제 강화 및 내실을 다지면서 명분을 얻고자 호시탐탐 조선의 상황을 주목하는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바로 그 명분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조선은 꼭 필요했다. 다만 오랜 기간 청나라의 영향권에 있던 조선이 그런 일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일본 역시 열강의 눈치를 보면서 쉽게 조선을 장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 체결된 텐진조약과 그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으로의 파병, 그리고 청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도하였으니 이제 대륙으로의 무력 진출이 명분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5 :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서 다룬 이 두 사건은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쓰여진 내용도 무조건 모두 정설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과거에 정설이라 여겨지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쓰여졌고, 현재에는 그런 새로운 관점이 정설로 자리잡아가는 상황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우리의 역사는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사건임을 반증하고 있으니 이 책을 시작으로 이 사건들을 다룬 다른 역사서도 읽다보면 이 시기의 역사관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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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은 두 번의 양요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만약 그 당시에 쇄국이 아닌 문호 개방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정하곤 한다. 그리고,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성공하여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역시 이 시기의 역사를 접할 때마다 자연스레 등장한다. 과정과 그 속도가 달랐지만 중국과 일본이 각각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서 홀로 변화의 바람을 무시하던 당시 조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대부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젊은 급진 개화주의자들을 응원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이전에는 그랬다. '갑신정변'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혁을 통하여 발전을 꾀하자는 그들의 주장과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게 된다면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갑신정변'은 물론 그 사건을 주도했던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점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하여 수많은 자료를 통하여 깊게 파고들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갑신정변'의 막전 막후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1884년의 '갑신정변'을 그 이전의 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수구 세력 강화의 단초가 된 1882년의 '임오군란'에 대한 반동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3년 김옥균은 차관을 요청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다. 이미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류하던 김옥균은 조선 역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1883년의 일본 방문은 실제 그가 '갑신정변'의 결행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차관 요청은 물론 정변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국내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 추진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굳이 조선을 놓고 청과 대립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이러한 소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의 재야 세력은 김옥균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1882년 조선에서 터진 '임오군란'을 계기 삼아 국외 문제에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질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옥균과 같은 모험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국외의 큰 혼란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 재야 세력의 대표인 일본의 자유당 지도자 고토 쇼지로는 김옥균을 북돋우면서 온갖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지원은 구체적인 것은 없었고 두리뭉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갖고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김옥균이 단순히 일본의 지원만을 굳게 믿고 충동적으로 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 공사관에서 병력을 제공하였지만 그 병력은 대략 150명 정도의 소수였기에 그것만 믿고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국내에서 나름의 준비 과정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집권 세력인 친청 세력, 즉 민씨 일파에 맞서 군사력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실 군권은 집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개화파가 그에 맞서 군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개화파에 속하던 윤웅렬(개화파 윤치호의 아버지)이 이끌던 함경도의 북청군 470명을 거사 2개월전인 1884년 10월에 입경케 하여 친군 후영에 속하게 됨으로써 얼추 사대당과 개화당의 군권의 상황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아래 표를 보면 사대당의 병력이 약간 많지만, 해방영은 서울 밖의 경기도에 주둔하는 병력이니 거의 균형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군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정변에 대한 국내에서의 치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 주도하고 있던 원세개의 청군이 문제였다. 김옥균이 믿는 것은 일본 공사관의 지원 병력은 150명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국내의 병력 숫자를 맞춰도 청군이 개입한다면 거사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왜 이 책이 '갑신정변'을 '청불전쟁'과 제목으로 묶여있는지 보여준다. '청불전쟁'은 베트남의 주도권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주요 전장은 청나라와 베트남의 접경 지역과 대만이었으니 조선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 전쟁이 1884년 8월에 시작되어 1885년 4월에 종료되었기에 '갑신정변'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갑신정변'의 시작과 끝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의 병력을 1500명만 남기고 철수시킨다. 김옥균의 입장에서 이는 정변을 일으킬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1500명의 청군도 무시할 수 없지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은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청군의 개입이 어려우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 '청불전쟁' 당시 프랑스는 일본에게 물밑으로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으니 청나라로서는 조선에서 쉽게 병력을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청불전쟁'의 개전은 김옥균의 개화당 세력에게 정변의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심지어 수구세력은 개화당의 군사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윤웅렬의 북청군을 다시 함경도로 복귀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결국 개화당은 1884년 12월에 거사를 감행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거사에 지침하지 말라는 입장이었기에 일본 공사관은 소극적으로 임했지만, 일본 공사는 정부와 일본의 재야 세력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김옥균의 강력한 설득과 고종의 밀지를 명분으로 공사관 병력을 거사에 제공함으로써 우정국 낙성식에 맞춰 진행된 거사는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청불전쟁'의 시작이 김옥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전쟁의 정황은 결국 김옥균에게 패착이 된다. 프랑스의 우세로 진행되던 전쟁이 점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원세개는 조선에서 일본군과 충돌하더라도 청과 일본의 대규모 확전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과감히 병력을 동원하여 거사의 진압에 개입함으로써 결국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면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순식간에 역적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하여 '갑신정변'의 막전막후를 알게 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의 생각과는 큰 괴리감이 생겨났다. 젊은 엘리트들에 의한 개혁의 상징이라 여겼던 '갑신정변'은 그 과정에서 다수의 문제점을 보여주었기에 그 목적이 정말 구한말의 개혁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인 점과 정변 후 세조가 그랬던 것처럼 수구파의 고위 관료를 살해한 점 등은 그들의 거사를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거사에 성공한 이후 12월 6일 그들이 발표한 [혁신정강]에서 '대원군의 조속 귀환'이라는 내용이 조항에 포함된 부분도 이들의 거사가 마냥 젊은 엘리트들의 구국을 위한 결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무리하게 권력 장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의 거사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정책 추진을 위한 권력 장악은 필요한 것이고, 비록 실패하여 제대로 그들의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지만, [혁신정강]의 내용을 본다면 적어도 당시 조선에서 개혁을 통한 구습의 타파를 실행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본다면 그들의 거사가 성공하였더라도 그 혁신이 이루어졌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혁신정강] - 대원군의 조속 귀환과 조공 폐지 - 탐관오리 징벌 - 만민평등. 양반 문벌 폐지 - 지조 개혁 - 내시부 폐지 - 지방 환곡 모두 폐지 - 규장각 폐지 - 경찰 제도 도입 - 해상공국 폐지 - 각종 옥사를 재조사하여 억울한 자들 방면 - 친군 전후좌우 4개 영을 1개 영으로 통합 - 국가 예산 관리는 모두 호조로 통합 - 6조의 대신, 참찬들의 국무회의가 내각으로서 국사 총괄 - 6조 외의 번다한 중앙 부처는 모두 폐지
이 책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면서 흥미로운 가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바로 거사를 고종이 묵인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에 조선이 비록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국왕이 존재하는 전제국가였기에 김옥균 세력이 나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고 하더라도 고종의 허락 내지는 묵인이 없었다면 거사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가설을 언급한다. 즉, 고종은 개화당을 이용하여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을 제거하는 이른바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실제 거사의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일족은 거사 다음날 고종을 만나려다가 개화당에 의하여 살해되거나 정권에서 축출당하였으니 마냥 허무맹랑한 가설은 아니다. 실제 고종은 성인이 되어 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고 훗날 청나라에 억류되는 것을 방관하였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던 '청불전쟁'이 어떻게 '갑신정변'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이 사건들에 대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더불어 역사가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어떻게 아우르면서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간 '3일천하'라는 표현 때문에 '갑신정변'을 상당히 드라마틱한 사건으로만 이해했지만, 그 배경과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치밀한 전개에 의한 역사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한 또 하나의 수확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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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려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중국을 굴복시키고, 일본과는 나중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일동맹(이 조약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적인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을 맺으면서 동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조선은 딱히 영국과 그다지 큰 접점이 없었는데, 이는 영국의 입장에서 조선이 청에 비하여 경제적인 이점이 없었으며, 일본에 비하여 정치, 군사적인 협력을 맺을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청의 주선으로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긴 하였지만, 영국은 조선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영국이 1885년 느닷없이 조선의 섬을 점령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거문도 점령 사건'이었다.
도대체 영국은 갑자기 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었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은 이 사건을 당시 고종의 '인아거청(引俄拒淸 :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서술한다. 조선은 1884년 7월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수교하였는데, 1884년 12월 '갑신정변' 이후 이를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고종은 1885년 서상우와 묄렌도르프를 비밀리에 일본에 파견하여 주일 러시아 공사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하여 협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시점에 러시아는 이런 조선의 요청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당시 곳곳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조선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영국은 이러한 흐름을 인지하고 러시아의 조선을 통한 극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하여 바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은 영국의 입장에서는 침략이 아닌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 과정은 악랄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다.(사실 영국을 누가 그런 명칭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신사의 나라'로 이미지 세탁을 한 것이지, 그들이 식민지에서 벌인 행위를 안다면 결코 '신사'와는 거리가 먼 '불한당'에 가까웠다.) 거문도의 섬 주민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하였고, 민가의 여자들과는 일부러 마주치지 않도록 훈령까지 내리면서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 오히려 섬 주민 입장에서는 영국 해군을 반기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문도의 속사정과는 달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국에 대하여 불법적인 섬 점령에 대하여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물론 영국은 그러한 조선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섬에서 철수하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훗날 영국은 점령 후 22개월만인 1887년 2월에 철수한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뒤늦게 조선에 주일 공사관의 스페이에르를 조선에 파견한다. 하지만 이제 조선은 영국은 물론 청과 일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기에 앞서 러시아 교관 파견과 영흥만 조차를 통한 러시아의 밀약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조선은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보해야 했고, 고종의 '인아거청'의 일환으로 러시아와의 협력을 꾀하던 묄렌도르프는 1885년 7월 청의 압력에 의하여 물러나게 된다. 결국 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발로 추진되었던 '인아거청'에 따른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은 '거문도 사건'을 촉발하면서 조선이 세계 열강의 분쟁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영국과 러시아는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대립하는 상황이었는데, 조선도 그러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을 끌어들였던 청은 물론 훗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일본마저도 영국의 행보에 불안감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조선의 상황은 외교를 잘 활용한다면 중립국 내지는 세력 균형을 통하여 독립을 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만, 결론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지 못했다.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외교가 통하는 것이지 조선은 이전부터 청의 영향력에 놓여 있었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해외 진출을 위하여 조선 점령이 필수였기 때문에 그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의 태국은 동쪽으로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인도차이나를 석권한 프랑스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인도와 미얀마를 점령한 영국이 있었는데, 단순히 이들 강대국의 사이에 있어서 독립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태국 역시 캄보디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힘이 있었기에 결국 그것을 상실하였지만, 어느 정도 힘이 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인정을 받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조선은 그럴 힘이 없었기에 청과 일본, 러시아가 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자 하였고,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게 각각 인도와 필리핀 지배를 서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고종의 '인아거청'은 오히려 열강에 이용만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빌미로 조선에 오히려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하였지만, 청의 원세개와 주 조선 영국 총영사의 '제2차 조러밀약사건'에 대한 폭로(사실 이는 실체가 없었다고 한다)로 인하여 당장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국과의 대립에 부담을 느껴서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영국은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훗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이후 극동 지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다시 조선에 접근하고 이는 '러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거문도 사건'은 외교를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조선의 미약함을 보여주면서 세계 열강에게 조선을 주목(결코 좋을 것이 없는 주목)받게 한 사건이었다.
'인아거청'과 '조러 밀약설'과 더불어 이 책에서 다루는 '방곡령'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과거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수탈에 대한 개념으로 '방곡령'을 이해하였는데, 최초 '방곡령'이 실행된 1889년은 아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거나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거기에 담긴 의미를 설명한 이 책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쌀과 콩과 같은 곡물을 수입하였는데, 일본 상인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곡물이 일본산에 비하여 최대 3배까지 저렴하였기에 조선에서 수입하여 자국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물가 폭등이라는 부작용이 있었고, 흉년에는 곡식이 부족하게 된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곡령'을 쓸 수 있었는데, 이는 지역내의 곡물을 관외 반출을 금할 수 있는 것이었다. 1889년 5월과 9월에 각각 황해도와 함경도 관찰사는 방곡령을 선포한다. 그 해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지역의 곡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포되었다.
문제는 '방곡령'으로 인하여 일본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면서 발생한다. 일본 상인은 입도선매 형식으로 미리 값을 치룬 상황에서 나중에 곡물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 곡물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게 되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에 손해를 보면서 다시 되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방곡령'을 시행하기 이전에 미리 일본에 통보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선포하여 일본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어서 그것을 조선이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란은 쉽게 합의를 보지 못하여 두고두고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인 분쟁으로 남게 된다. 또한 '방곡령'이 곡물 부족에 의한 조치가 아닌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뒷이야기도 있다. 즉, '방곡령' 선포에 따라 어쩔 수없이 조선에 싼 가격으로 일본 상인이 되판 곡물을 관아에서 매입하여 다시 비싼 가격으로 시중에 풀었다는 것이다. 1889년 함경도에서 '방곡령'을 선포한 관리가 탐관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의도가 다분히 있어 보이지만, 그 해에 흉년이 있었기에 이런 의견은 공식화되지 않고 10년 후에 신문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로 나오게 된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4 : 거문도 Crisis와 방곡령]은 전공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교과서로만 간단히 접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거문도 사건'으로 드러난 조선의 무력한 상황과 반대로 이 시점에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제 열강과 점차 대등한 조약을 체결하며 성장하는 일본의 상황은 장차 조선의 앞날에 먹구름이 다가올 것임을 예상할 수 있어서 암울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암울함이 과연 이 시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조선 후기와 마찬가지로 같은 강대국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이들 사이에서 정교한 외교를 통한 국익의 극대화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따라 감정적인 외교 정책으로 인하여 국익과 국격 모두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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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역사책을 읽으면서 정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힌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기간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왕권은 하염없이 약해져만 갔으며, 온갖 자연재해는 물론 탐관오리의 수탈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고, 대규모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상황에서 유교는 별다른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양반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배타적인 성격으로 새로운 학문의 도입을 통한 변화마저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863년 고종의 등극과 함께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게 된다. 세도정치의 철폐와 더불어 기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히 획기적인 개혁 정책들이 다수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변화가 고종에 의한 것이 아닌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살아있는 대원군인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왕의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행보는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상갓집 개'라 불리울 정도로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족으로부터 천대받으며 비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에 왕족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세도정치를 장기간 유지하기 위하여 세도가에서는 똑똑한 왕족을 역모죄로 처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사가 없던 헌종의 뒤를 이은 인물은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이었으며, 철종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살아남기 위하여 이하응은 가슴에 품은 큰 뜻을 철저히 감추면서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했고, 왕실의 어른인 신정왕후(조대비)와 미리 입을 맞추게 된다. 안동 김씨는 마땅히 왕으로 추대할 왕족을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신정왕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으로 지명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었다. 여기에서 이하응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를 왕위에 올림으로써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게 된다.
이러한 치밀한 과정을 거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였으니 조선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 7권이 거의 유일하게 조선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유 역시 바로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조선 후기의 큰 변화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러한 과정에서 딱히 피바람이 불지 않았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은 명목상 김병국과 김병학과 같은 일부 안동 김씨는 물론 풍양 조씨의 인물들도 함께 정치에 참여시킨다. 여기에 그동안 소외되었던 전주 이씨를 대거 불러들이고, 또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남인과 북인 계열의 인물들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고종이 왕으로 등극하였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이 컨트롤 타워가 된 셈이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초반부는 분명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문란해진 삼정(三政)을 바로잡기 위하여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 대한 개혁을 실행하였으며, 1971년에는 서원 철폐령을 내려서 47개를 제외한 1000여개의 서원을 없앰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준다. 1864년부터 1871년까지의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확실히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개혁정책조차 장기적으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지적한다. 삼정(三政)의 개혁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보완한 수준에 그쳤으며, 서원을 철폐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조선은 유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양반에 의한 지배 체제는 굳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역시나 기득권층의 관점에서 현상 유지 내지는 안정에 그친 것이었고, 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뜻하지 않게 열강의 침략을 받고 또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국가의 부의 크기를 확장하는 단계였음을 떠올려 본다면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그저 찻잔 안의 태풍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반기에 이루어진 흥선대원군의 실정은 이후 조선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상당히 뼈아픈 것들이었다. 그 시기에 굳이 경복궁을 재건하여 왕권의 권위를 드높인다는 생각 자체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광해군도 임진왜란 당시에 총명하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전쟁 이후에 대규모 왕국을 지으면서 민심을 잃었는데, 흥선대원군은 화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원납전 강요, 당백전 발행 등을 통하여 결국 경복궁을 완성시켰으니 이는 조선의 명줄을 더 앞당긴 결과가 되었다. 민심이 이반한 것은 물론이요 조선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보더라도 앞서 이루어진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과연 백성과 조선의 장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개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취하면서 조선의 시계를 더욱 뒤로 되돌리게 된다. 청나라와의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곧 조선이 두만강을 경계로 청나라가 아닌 러시아와의 국경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전세계 곳곳에서 부동항 확보와 남하정책을 취하던 러시아가 곳곳에서 영국과 충돌하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러시아가 조선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국내의 천주교 교인들을 통하여 프랑스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유연한 외교적인 전략보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성격이 짙었지만, 훗날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흥선대원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천주교인들이 확실한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에 접근하였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힘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이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고, 오히려 흥선대원군은 그를 견제하려던 세력으로부터 외세와 결탁하였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하여 결국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면서 척화를 내세우게 된다.
1866년 발생한 병인박해로 인하여 중국에 주둔한 프랑스의 로즈 제독 휘하의 극동 함대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있으니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프랑스의 극동 함대는 척후선 3척을 조선에 보내고, 이들은 강화도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성 근처의 양화에 이르게 된다. 조선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서 정중하게 떠날 것을 요청하고, 프랑스는 불법적인 조선의 영내 침입을 강행한 이후 중국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극동 함대는 강화도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의 시작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역사서적에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열강의 침입에 맞서 조선이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두 전투 모두 패배에 가까웠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강화도에 있던 각종 서적과 문서를 약탈당하였으며, 신미양요는 미국의 전사자는 전무하였지만, 조선의 강화도 수비진 수백명이 사망한 전투였다. 다만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어 이후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이 책에서도 병인양요에 대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것을 프랑스의 극동 함대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 진실을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는 조선보다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의 식민지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베트남과의 전투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중국에 남은 극동 함대는 전력적인 측면에서 그리 크지 않았고, 실제 이들의 목적 역시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도를 공격하여 한강으로의 수로를 차단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열강들이 엄청난 규모의 시장으로서의 중국과 막대한 광산에서 대규모의 은을 제련하는 일본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조선이 그다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의 부는 중국과 일본에 비한다면 크게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호랑이를 잡는 포수들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프랑스를 압박하는 데 성공하여 그들이 물러가게 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제대로 된 정규군이 없어서 호랑이를 잡는 포수를 동원하였다는 점과 프랑스가 사용하는 후장식 소총과 조선이 사용하던 화승총이 무려 수백년의 간극이 있다는 점은 조선의 암울한 사정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병인양요 이후에 흥선대원군 역시 국방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모하지만, 제대로 현실에 적용된 것은 전무하였다. 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였고, 내부적인 역량 역시 스스로의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른 상황이었다. 이에 반하여 비록 나중에 실패로 돌아가지만, 중국의 양무운동은 적어도 그 규모에 있어서 중국의 부(富)가 여전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일본 역시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근대화의 속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에 의한 변화의 크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에서는 조선의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다소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 병인양요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평하면서 일본에도 그러한 사실을 공유해주지만 당시 일본은 오히려 막부의 육군은 프랑스 출신의 교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본의 입장에서 병인양요에서 승리하였다는 조선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다음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이 막부와 도막을 부르짖는 번과의 내부 갈등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는 과정과 중국의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에서 어떤 결실을 맺는지를 다루지 않을까 예상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8권은 나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7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