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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 해를 써온 어금니 네 개를 들어내고 틀니를 끼우던 날, 아버지는 생전 보도 않던 신문을 갖다 달라 한다. TV 일일 연속극에 빠진 어머니 옆에서 지갑에 꼬불셔 둔 '로또 복권'을 꺼내 돋보기 안경알 너머 잘디잔 당첨숫자들을 맞추는 내 아비. 평생 뭐 하나 공(空)으로 얻지 못한 이 사내는 1만원 들여 긁은 5개 숫자 조합 중 한 개 이상 맞춘 게 없다. 그 옆에는 '혹여나 싶어' 힐끔거리다 '역시나 꽝'인지라, "그런 헛지랄은 뭐 하러 하는교?"라며 한 두름 잔소리를 퍼붓는 그의 아내, 한 여자가 있다. 늦지 않게 사그라질 어느 육신의 징조와 끝내 닿지 않을 욕망의 잔재를 보며, 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다. 그날 따라 마루에 걸린 거울에 우연히 스친 내 얼굴이 부쩍 나이 들어 보였을 뿐…. 각박한 밥벌이의 노독을 알코올 기운을 빌려 푸는 것 말고 별다른 취미 하나 없다, 내 아버지는. 꼭 그런 날 밤이면 자주 '손자/녀 얘기' 다음 대목에 곧 들이닥칠 죽음에 대한 예감을 덧붙이곤 한다. 그를 보며 필멸의 존재가 꿈꿀 불사의 욕망을 가늠하는 것은 분명 불경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속치 못할 모든 존재의 가장 유구한 욕망은 존재(감)의 계속적 유지-불사의 욕구-가 아닐까? 숫한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과 죽음의 제례들이 '죽음'이라는 기이한 경험과 시체 부패의 역겨움을 긍정키 위한 자기 보존적 방어술이었던 것처럼. 그렇다면 생식에 대한 충동 역시 '잉태와 출산을 통해서 가사(可死)적인 존재가 불사성과 접촉을 하'기 위한 무의식의 욕동일 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자식이라는 혈연적 동일체뿐 아니라, 명성이나 영광 역시 시간의 급물살에 제 존재감이 망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고. 물론, 이것만으로 사랑과 성적 행위의 모든 면면을 말쑥하게 포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 또한 안다. 그러한 불사의 욕망, 그 향연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할 징검돌이 하나 있다. 그 위태로운 다리의 이름은 '에로스(사랑)'이다. 결여된 욕망을 투사하는 행위인 에로스의 역동성은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자적인 성격에 기인한다. 그런 만큼 '에로스'의 속성은 번뇌와 혼돈을 떠 안고 있다. 플라톤의『향연』에 나오는 에로스의 탄생 비화는 이러한 사랑의 실체를 꽤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축하하는 신의 잔치에 참여한 풍요의 신 '포로스'가 술 취해 뻗어 있을 때 궁핍의 여신 '페니아'가 겁탈해서 낳은 자식이다. 포로스의 자식을 가진 대가로, 자신의 밑바닥 처지를 벗고픈 상승욕구로 인한 계산된 임신이었던 것.
하지만, 이 번잡한 혼돈의 굴레를 기꺼이 감내하는 것은 에로스 이후의 결과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에로스 자체'에 이미 연속성의 욕동이 내재해 있다. 바따이유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 한다"고 진단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욕망은 결여에 기생할 수 밖에 없으니, 제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결여감들을 계속 재생해야 하는 운명이다. 간혹 에로스가 풍기는 미약은 이 구속마저 아름답게 치장하지만, 모든 사랑은 변덕스런 휘발성 물질! 내가 에로스를 쉽사리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폼새로 사는 것은 단독자의 한계를 조금 훔쳐본(혹은 봤다고 여기는) 죄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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