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점을 보고 난 뒤. 그 뒤가 더 궁금했다. 속빙점은 빙점의 속편이다. 하지만 원작보다 나은 속편없다고 하지만, 이 책은 빙점의 주제의 결말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그만 또 내릴 정거장을 2정거장 지나쳐버렸다. 빙점읽을 때도 그랬는데 정말 몰입의 재미를 줬던 책이다. 처음 이 책을 들으니 빙점에서 이어지는 인물들과 스토리가 너무나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은 너무하는 것 같은 인물 설정, 조금은 억지스러운 인물 설정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하지만 누구하나 불필요한 인물이 없을 만큼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했다. 계속되는 사랑과 갈등. 하지만 그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때로는 추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애절하고, 부끄럽워 숨기고 싶은 사랑이다. 왜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을 하지만 그것에서는 아름다움이 나오지 못할까 한번 생각해게 했다. 너무나 그 갈등이 계속 된다. 어디하나 맘 놓고 읽을 부분이 없긴 하지만 내가 정말 기대했던 이 책의 주제에 대한 해결책이 책을 2/3정도 읽고 나서야 준코라는 인물을 통해서 겨우 시작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우명한 기독교 작가로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라는 사람보고 읽은 책이라서 그 작가의 알려진 주제를 보고 싶었다. 너무나 상투적일것 같다.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면, 하지만 오히려 끝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나에게 더 많은 설레임과 간절함을 주었던 것 같다. 거의 마지막읽을때는 그냥 내가 요코가 되는 기분이었다. 빙점과 속빙점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요코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첫째로 아름다움을 가졌기때문이고, 둘째로 마음도 이쁘다는 것이고, 셋째로 주인공으로 문제해결의 열쇠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죄를 항상 느끼고(물론 자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살 수 있을 까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마음이 그녀에게 있었던 원죄를 벗고 기쁨으로 가게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죄가 있지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특히 그런 그가 작은 정의감을 가질 때. 그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야구치라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그의 편지글을 보면서 일본의 뜻있는 지식인 들의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진정한 사나이이고 인간이었다면, 그때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죄없는 사람들을 감싸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 손은 그 임부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코의 생각에서 뜻잇는 지식인에서 나아가 진리를 추구하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돌을 들어 칠 자격은 오직 예수 한분에게만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지 않았다. 예수는 다만 따뜻하게 용서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인지는 이책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가페적인 희생적인 내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그런 사랑일 것이다. |
|
참 멋진 소설도 많고.
재미있는 책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라기보다는 그냥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인 듯...
아직 빙점을 읽고 있는 중이라 정확한 내용을 다 파악하지는 못 했지만
빙점을 읽고 있는 중간에도 속빙점의 내용이 궁금해서 이리저리 펄럭여봤다 .
이 책도 역시나 단숨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또 며칠동안 나를 꼼짝 못 하게 할 게 뻔하다.
그래도 기다려진다.
|
|
몇년 전 읽었던 빙점은 나에게 최고의 소설 중 하나이다. 지금에야 속 빙점을 찾아읽게 되었다. 속편은 보통 실망스럽기 마련인데, 이 책이야말로 빙점의 마무리를 지어준다. 속 빙점을 읽지 않고서는 빙점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는 옮긴이의 말에 공감이 간다. 빙점이 인간이 짓는 죄와 파멸에 대해서였다면 속빙점에선 그 이후를 말한다. 파멸에서 끝나는 보통의 소설과 달리 그 이후 재생과 용서에 대해 잘 그려낸 작가는 보기 드물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팬이 될수 밖에 없다. 책이 전하는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와 더불어 문장의 표현력까지 빛이 나는 책이다.
빙점에선 의사 아내인 미인인 나쓰에가 남편이 출장간 사이 남편 병원의 무라이라는 잘생긴 의사가 집에 찾아오는 걸로 시작한다. 나쓰에는 응접실에서 무라이에게 밀회 비슷한 연애감정을 느낀다. 그때 세살 짜리 딸 루리코가 응접실로 와 엄마에게 칭얼대자 나쓰에는 무라이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딸을 쫓아내고, 혼자 밖으로 나간 루리코는 그만 목이 졸려 피살된채 발견된다. 이 모든 걸 알게된 남편 게이조는 아내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딸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자식을 데려와 키우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쓰에의 딸에게 쏟는 애정은 요코가 딸을 죽인 살인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끝나버린다. 사실 요코는 살인범 사이시의 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는 자신의 출생에 절망해 약을 먹고 자살을 꾀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채 빙점은 여기서 끝난다.
속 빙점은 독자들이 요코를 죽이지 말라는 엄청난 성화에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사이시의 딸이 아니란 사실도 알게되었지만 요코는 곧바로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 것이 절대 아니다. 어느 날 요코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연설문을 백지로 바꾸어 버리는 등 갑자기 못되게 자신을 대했던 나쓰에와의 관계도 갑자기 변할수 없었다. 속편에선 요코의 친모 게이코의 가족과 요코를 사랑하는 나쓰에의 아들 도오루와 그의 친구 기다하라의 삼각관계, 또 루리코의 살인범 사이시이 딸 준코도 등장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요코가 썼던 유서의 한 줄 "저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합니다." 로부터 속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출발한다.
요코는 불륜으로 자신을 낳아 버린 친모 게이코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을 괴로워 한다. 또 기다하라와 도오루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용서한다는 기다하라의 말에 요코는 의문을 느끼게 된다. 용서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게 되는 걸까? 또 용서를 구했어도 용서받지 못한 기분은 왜일까. 요코는 과연 인간이 용서를 해 줄 수있는 주체인지 확신할수 없다고 느낀다. 요코는 게이조와 준코의 조언과 성서의 구절을 통해 진정한 용서와 구원의 의미를 깨닫는다. 인간의 용서는 완전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줄거리와 인물을 통해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상깊은 것 중의 하나인 도오루와 기다하라의 사랑이다. 요코를 좋아하는 두 남자의 배려있는 순수한 사랑은 자기 욕심만 채우고 금방 식어버리는 이기적인 모습의 젊은이들을 반성하게 한다. 또 게이코의 남편 미쓰이의 편지에서 아이를 몰래 낳은 아내를 용서하는 이유에 대해서 읽고 다시한번 남을 정죄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죄 없는 자가 저 여자를 돌로치라는 예수님의 말처럼 죄에 있어서 떳떳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큰 교만이 없다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빙점은 어느 누가 읽든 진정한 배려와 성숙한 인간의 모습과 삶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
이 책의 전작이랄 수 있는 <빙점>을 읽고 나서, 의레 하던 대로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 중 어느 한 네티즌이 나쓰메가 참 밉다며 그녀에게 분노하는 글을 쓴 걸 보았다. 하지만 <빙점>을, 그리고 이 책 <속빙점>을 읽으며 나는 나쓰메를 마냥 미워하거나 그녀에게 마음놓고 분노할 수가 없었다. 그녀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 어두운 내면의 모습들이 내 안에도 역시 동일하게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웅크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을 하며, 감히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나는 그 글을 쓴 네티즌에게 우월 의식을 느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즉,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네 안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너보다 적어도 나는 나의 죄를 '안다'는 데서 한 차원 높은 곳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함으로써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으로 인해 교만의 죄를 저지르게 된 셈이다. 죄를 의식한다는 것이 또다른 죄를 저지르는 빌미가 되었다는 셈이, 그리고 그런 인식에서조차 죄지을 꺼리를 찾아내어 마음껏 즐기는 내 모습이 참 어찌보면 우습기조차 하게 허탈하다.
인간이 다 이렇다 .. 고 이야기한다면, <나 개인의 죄>를 <인류 보편의 죄>로 치환시키며 그 안에 숨어들어 비겁하게 나를 변명, 합리화하는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 사실이 인간은 다 그렇다. 인간의 내면에는 미우라 아야꼬가 제목으로 이야기했듯 빙점과 같이 차갑고 어두운 본성이 뱀이 또아리를 틀듯 도사리고 있다. 추적하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연의 죄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끝까지 추척하노라면, 이 책에서 계속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노골적으로 까발리어 드러내며 보여주듯이 인간은 결국 죄인이라는 것만이 남는다.
기독교에서는, 죄에 <최고>라는 표현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큰 죄, <최고>의 죄를 폭력이나 살인, 간음이 아닌 <교만>이라 이야기한다. 가장 구원받기 힘든 사람 역시 살인자나 강도, 도둑이 아닌,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라 이야기한다. 사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비기독교인만이 이 명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기독교인은 누구나 이 말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진리를 뼛속까지, 실존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흔치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잘 모르면서 적고 있다. 이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는 어찌 보면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가장 구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법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선하다. 선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친절하다. 가족을 사랑한다. 사람을 아낀다. 일을 열심히 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게이조처럼, 외적으로 볼 때 한 번도 '이것이 죄!'라고 할 법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선하다고 여긴다. 또한 어쩌면 요코처럼. 바로 그 인식 때문에, 그는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 남들보다도 멀리.
기독교는 어찌 보면 역설의 종교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는 기독교의 역설을 선명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 시대의 바리새인은 지금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선하게 살았으며, 그 시대의 새리는 지금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악랄하게 살았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이야 시대차가 있고 문화차가 있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바리새인의 기도와 새리의 기도는 어쩌면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기도에 각각 판결(?)을 내리셨을 때 사람들은 경악하고 이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일 터이다.
이렇듯 <죄인됨의 인식>의 테마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기독교의 그야말로 정수에 속해 있는 몇 안되는 테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는 여기서 이 정수라는 단어를, 만일 펜글씨라면 펜을 꾹꾹 눌러가며 종이가 눌리고 번져가도록 진하게 무게를 담아 썼을 것임을 강조해두고 싶다. 획 하나하나에 무게있는 추를 하나씩 달고 싶달까. 이 인식이 없다면 사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은 일종의 껍데기뿐인 허울이요 <회심>과 <구원>은 공중에서 부유하는 힘없이 흐물거리는 그림자같은 단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자가 다른 죄를 저지른 자를 용서할 수 있었던,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는 ㅇㅇㅇ의 편지 또한 비슷한 역설과 주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가 여타의 사람에 비해 죄가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깨달았던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죄 역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긴밀하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성경에 나오는 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받은 자는 적게 ......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참으로 큰 책이다. 얼핏 아침드라마처럼 보이는 자극적인 소재들과 얼핏 미니시리즈처럼 보이는 흥미진진한 전개와 재미 속에 구원과 인간, 죄와 용서라는 심오한 주제를 무거운 닻처럼 내리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가, 누가 죄인인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죄와 죄인됨의 인식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등. 결코 하루 아침에 나오지 않았을, 어쩌면 미우라 아야꼬가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병상에서 지내며 하루 하루 곱씹고 숙성시켰을 깊은 성찰에서 나왔을 진중한 주제 의식이 이 책을 결코 가볍게 다루거나 한 두 마디 말로 간단히 정리해버릴 수 없게 한다.
죄와 용서의 문제는 인간의 역사의 페이지가 끊겨지지 않고 쓰여지는 한, 없어지지 않을 유구한 문제인 동시에 일상에 휩쓸려 쉽사리 주목하게 되지 않는 주제인 동시에 인간의 구원에까지 연결되는 긴요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단지 문제의 제기에서만 그치지 않고 구원을 제시하는 미우라 아야꼬는 분명 흔치 않은 작가다.
책에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너무나 커서, 뭐라고 글이라도 써서 정리를 하고픈 마음에 부족한 논리와 글을 옹알이하는 심정으로 써보았지만. 아직도 마음 속의 회오리가 채 가라앉질 않는다. 죄와 용서란 참 심오한 문제인것 같다.
역시 예술의 진수는 익숙한 풍경을 익숙하지 않게 보여줌으써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익숙하지 않게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 같다. <죄>나 <구원>,<용서>나 <죄인됨의 인식>의 문제는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발만 살짝 담그고 있더라도 흔하게 들려오는 이야기인데, 마음에 새로운 종이라도 쳐진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뒤로 하고, 이 책은 무지하게 재미있다. <빙점>과 비교해서는 다소 떨어지는 속도감이 재미도 한 풀 꺾이게 하는 것 같다만은 그건 어디까지나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아만 보이는 재미를 지닌 <빙점>과 비교해서 그런거고.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해 보았을때 이 책은 무지하게 재미있으니, 그거 하나만 기대하셔서 읽어보셔도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게 되시리라 생각한다.
꼭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내 인생의 책에 <빙점>에 이어 <속빙점>도 추가다.
<덧붙임1> 다만 제발 부탁이니 등장 인물 소개를 수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인물소개에서 스포하지 마세효 ㅜㅜ <덧붙임2> 아무방송사 드라마피디님!! 빙점을 리메이크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주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근영이 딱인것 같근영 .. <덧붙임3> 결말이 확실하게 딱 선을 그은 듯 나온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 요코는 (삐~)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난 이 결혼 반댈세." 흑 .. 요코 너 후회한다. |
|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빙점에서 저자는 갈등과 자성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속편에서는 마치 미리 의도한 것처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인공이 요코로 바뀌어 진행됩니다.
이제는 요코가 자신의 두 어머니(키웠으나 박해했던 어머니와 혼외정사로 임신한 다음 낳았으나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저자는 전편과 달리 기독교 신앙을 표면에 노출시킵니다. 일본은 신교와 불교가 주이고 기타 종교들도 함께 인정되어 통계(스스로 인정한 복수의 종교)에 의하면 인구보다 더 많은 신도가 있습니다. 물론 인구 센서스에서는 대폭 줄어들어 다른 나라와 비슷한 비율의 신자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10%이상이나 인정받지만 실제로는 1% 미만입니다.
아무튼 저자는 자신의 신앙인 기독교를 2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CS 루이스가 아는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글을 쓴 것과 대조가 됩니다. 이 시도는 글 전체와 어우러져 있으므로 분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반감이 있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다지 껄끄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적과 흑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변덕이 심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어서 분개했었습니다. 사실 이 소설도 같은 시점에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러한 불쾌감이 없었습니다.
차이가 뭘까 생각해 보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에 대한 기대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번역자 때문일 수도 있겠죠. |
|
미우라 아야꼬의 소설 <빙점>을 읽고 얼마 안있어 연달아 읽은 소설이 <빙점>의 후편인 (속) 빙점이다. <빙점>의 성공은 미우라 아야꼬를 무명의 보통사람에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빙점>은 잘 쓰인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물간의 심리묘사나 인간 내면에 기생하는 악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이정도로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담은 소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거기다가 소설 읽기의 흥미 차원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를 두루갖춘 빼어난 작품이란데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