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마다 한강을 건너 출근한 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계절은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아침마다 한강의 풍경은 새롭습니다. 이 느낌을 언젠가는 글로 옮겨야겠다고 읽던 책 뒤에 '매일 한강을 건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라고 써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묵혀 두고 표현하지 못한 것은, 제 언어의 한계라기보다는 덜 숙성된 느낌을 옮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어' 이전에 '삶'이 우선인 것은, 삶이 무르익지 못하고선 언어가 무기력하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일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익숙함에서 새로움으로, 밀실에서 광장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가는 문명사적 사건이다. 아침마다 한강을 건너서 출근하는 일이 축복임을 겨우 알았다.(p.156)" 아침마다 한강을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겠지만, 강을 건너는 일이 '문명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김훈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 책은 김훈이 '한미한 초야에서 때때로 생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썼던 토막글'입니다. 다시 말해, 김훈 산문의 원류(原流)라 할 수 있는 시사 칼럼의 모음입니다. 책머리 글을 읽어보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그의 글을 출판사에서 묶어 저자의 동의를 얻어 출간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과거 신문지상에서 김훈의 글을 눈여겨 보지 못한 저로서는, 그가 본업(?)에 있을 때 썼던 글들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문지 위의 글도, 사람에 따라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글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지만 그의 글이 어떠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 또한 만만찮습니다. "그의 문장은 단호하면서도 은유적이고, 시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비약적이면서도 검박하다." 결국 이보다 더 김훈의 문장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책 표지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 연필로 글 쓰는 이는 컴퓨터에 자판을 두들기는 사람보다 기본적으로 한 수 위입니다. 연필로 글을 쓸 땐, 생각하고 글을 써야하지만, 컴퓨터로 쓸 땐 글이 생각보다 앞서 갑니다. 지우고 다시 쓰기가 연필로 쓰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지운 흔적조차 없습니다. 김훈의 글의 힘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생각하다가, 아직까지 연필로 글을 쓴다는 그의 글쓰기 습관도 한몫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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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그는 작가 이전에, 발 빠르게 현장을 누빈 신문기자였다. 그의 글에선 열심히 뛰어다닌 흔적만큼의 ''굳은살''이 박혀있다. 어쨌든 입지전적한 풍문에 의해 그의 소설을 접한 독자라면 탁월한 ''문장가''로서의 감탄을 얻을 것이다. ''인간'' 김훈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유효한 독서가 될 것 같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책 제목이 주는 암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공의 선상에 놓인다. 나는 이편이니, 너는 저편이냐는 식의 편가르기가 언뜻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관이 그런 것만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돈과 밥을 ''벌이'' 해야 할 사내이자 작가로서의 생사에 선 두려움으로 씌인 55편의 이 글들은 시대에 대한, 시대를 향한 우수와 통찰을 담고자 한 세설(世說)로 명명된다. 세상에 붙어 있는 말들의 ''힘셈''은 우리가 직시해야 할 말, 도덕적이어야 할 말, 휩쓸리지 않고 단호해야 할 말들을 허공에 젖게 만든다. 진실되고 정의로운 세상에 붙어 있는 말들은 권위적이거나 세속적이지 않아야 하는 관점에서 힘을 상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세상의 파열음은 과연 어느쪽일까? 곧고 팽팽하면 와해되기 쉬운 세상의 말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하였든, 세상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함은 나를 지키기 위한 공공연한 생존본능의 척도이며 무개(無蓋)한 인간으로서 자업자득해야 할 그만의 등식이다. 집단적이고 단발적인 정서에 편입하기 쉬운 세상의 도처는 그만큼 불안하고 불편한 질서로 넘쳐난다. 어느 한켠 암암리의 장막에 가려진 무질서가 있더라도 우리는 눈을 감고 입을 막으면 그만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이탈된 집단의 소외자로서 이기적인 방치심이다. 이래야 하는 세상바라보기는 참 안스럽다. 안스럽더라도 나 또한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버리고 마는 주눅감이 비통할 따름이다. 외형적 질서을 표방한 내형적 결함의 은폐는 옳곧지 못한 포식의 결과로서 비등의 거만(巨萬)이며 거만(倨慢)한 질서의 비탄일 것이다. 이 작태는 부정을 모르고 부정을 일삼으니 부정하기가 그지 없다. 이 거만한 부정들은 참된 도리로서 밀도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순진한 국민정서에 ''허깨비''로 전락된다. 모략 되어가는 정치판, 방조되고 어둑한 사회의 뒷 그림자, 시대 편향적인 문화의 협착들로 편승 되어가는 짐을 지게 된다. 책임 질 수 없는 책임가로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뭐라고 답할 것인가. 실제의 현실에서 가려 서고자 하는 것은 어찌보면 결국 무의미한 것이다. 읽히거나 설명되어지는 세상담론의 부여가 논의되기 이전에 우리는 기본에 입각해야 할 것만을 너무도 자명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이 편들 수 있는 대안으로서 세상을 향해야 할 것임을. 융통성을 거론하기엔 세상의 잡설이 너무도 많고, 작가의 말대로 정의로운 언설이 모자라 세상이 이지경인 것도 아닐 것이다. 쉽사리 바뀌는 것은 어렵고 나날이 수심이 가득해지는 이 당대에 쏟아져야 할 말로서.. 세상질서에 새로운 희망을 예견하게 될 미래를 향한 궤도이탈로서 당대에 말을 거는 일은 가능한지, 그 당대를 향해 할 말이 나에게 있는 것인지 이 책은 그 소통력을 진단하고 있다. 작가가 느끼는 ''일인대 만인''의 싸움일 뿐인 이 고독의 만신창이로서 던지는 고통스런 질문 앞에 어떠한 말을 던져보아야 할지, 어떤 말이 유효한 것인지 나는 멍한 두려움을 앞세우며 할 말만 하는 자의 고백만을 늘어놓고 있진 않은지 내 자신부터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암담한 현실의 질문에 맞서듯 고심해야 할 책만은 아니다. 김훈의 시선이 던지는 세상의 평범함은 평범의 틀을 깨는 기발함과 통찰로서 깊이있게 번뜩거리며 충분히 흥미로운 대목이 많아 일상의 새로운 조우를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김훈의 글은 요즘 시대의 ''것'' 들로부터 일탈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삶을 살면서 그는 우리가 정당화하는 모든 본질을 그의 말대로 ''보편과 객관을 집어치우듯'' 조롱해가며 만신창이의 묵념으로 털어놓는다. 우리가 그의 글에 묵독하는 것은 그의 것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해 생명 가득한 언어와 신호를 길러냄으로서 그것은 온전히 새로운 다짐을 얻는다. 소리내어 읽던 음독의 시류에 그의 문장과 수식은 대범함과 화려함을 넘어 차갑고 단호하다. 한 작가의 단단하게 집도된 결빙의 심층으로부터 뜨거워짐을 느끼는 그것은 우리의 나약한 마음이며, 그간의 묵과된 편애와 편견을 향해 우리도 조롱을 펼치는 그것은 참지못한 용기이다. 독자의 시선도 결국 만신창이를 향하고 있는 것임에 뜨거움을 느끼는 것. 김훈의 글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적으나마 ''날'' 것의 진면목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존재를 형성하는 본질의 진위를 새롭게 가려 볼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말(言)은 현실이 아니라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인지요. 그래서 삶은, 말을 배반한 삶으로부터 가출하는 수많은 부랑아들을 길러내는 것인지요. 제가 겨우 말한, 저 젊어서 죽은 패륜아의 생애는 이 모순된 운명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는 일에 아무런 전략적 방편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찡겨 있는 삶과 말의 꼴을 확연히 보여주기는 할 것입니다. -「다시, 임화를 추억함」중에서 - |
|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었다. 우선 제목이 참 길다. 하지만 매우 땡기는 제목이다. 제목만 보기에는 일종의 편가르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듯 하고,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책 안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이것이 아니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가 원 제목이었는데, 출판사 측에서 책의 여러 글들을 아우르는 제목이 본 제목인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보다는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가 책의 메시지와 더 가깝다고 생각해 저자와의 협의하에 바꾼 것이라고 한다. 사실 내가 봤을 때도 원제 <아들아... >로 했을 경우 책의 첫 몇몇 글들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이후의 다른 여러 글들을 아우르는 제목은 되지 못한다. 저자는 본래 자신의 아들이 이 글을 봐주기를 바라며 썼던 것 같지만 그것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생각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달랐을 것이다. 책을 판매하는데 있어서도 본래의 제목보다는 나중의 제목이 훨씬 낫다. 나 또한 본래 제목을 달고 있었더라면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 김훈은 본래 한국일보 기자였고, 나중에는 시사 주간지 기자를 지냈다. 그리고 나이먹은 지금에 와서 쓴 소설 <칼의 노래>가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안 심사 기간 동안에 청와대에서 칩거하며 읽은 책이라 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며 엄청난 판매부수를 올리게 되었다. 물론 순전히 대통령이 읽은 책이라해서 이만큼의 판매가 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 책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으로 인해 김훈은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뒤늦게 독자들에게 다가간 셈이다. 나는 <칼의 노래>는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 <현의 노래>는 읽었다.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은 확실히 개성적인 그만의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소설가 중에서도 자신만의 문체를 지닌 소설가는 드물다고 본다. 그런데 김훈은 그의 첫 소설에서 그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다른 여타 소설들을 잘 읽지 않는 나도 <현의 노래>를 통해서 그의 문체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소설을 쓰기 전에 언론기자 생활을 하며 써두었던 칼럼모음집인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도 그 문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은 굉장히 짧지만, 힘이 있고, 은유적이면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이고, 삶에 기반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문장은 고대 중국의 고전 속 문장을 읽는 듯 이리저리 휘돌아다니며 정곡을 찌른다. 아마도 그의 이런 짧고 강한 문장은 오랜 기자생활을 하면서 익히게 된 습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이성적이지만 '머리'에 기반하기보다는 '가슴'에 기반하고 있다. 이 말은 어찌보면 모순적이다. 보통 머리로 사유한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가슴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감성적이라는 뜻인데, 그는 분명 '가슴'으로 사유하면서도 그의 문장에는 이성적 논리가 담겨져있다. 그의 모든 글들이 그가 발로 직접 뛰며 경험한 것들이고,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는 넓고 깊은 사유를 전개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나의 가슴을 자극한다. 그는 얼마전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성을 굳이 말하자면 '중도 우파'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그는 또한 그들은 물적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좌익과 좌파가 세상을 맡아선 안된다고 하며 물적토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우익이라는 주장을 폈다. '중도좌파' 혹은 '좌파자유주의자'의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물론 그의 이런 발언들이 못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세상을 꾸려나가는 것은 낭만주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책에는 김훈이 그 당시의 크고작은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여, 혹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주변의 일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느끼고 감동받은 것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다. 때로는 욕을 하듯 강렬하게 퍼붓기도 하고, 때로는 죽은 듯 고요하게 사색을 전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글들에서 느껴지는 바는 '생생함'이다. 그는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아직 그의 머리와 가슴은 기운이 넘치고, 그의 문장과 글은 살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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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김훈의 소설은 싫다. 김훈의 에세이는 좋다. 김훈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표현이나 여성 캐릭터는, 내게 갑갑증을 준다. 김훈이 에세이에서 보여주는 세상을 보는 시각은, 내게 신선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더 이상 김훈의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훈의 에세이는 하나씩 챙겨가며 찾아 읽어야 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아직도 펜을 꾹꾹 눌러가며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 김훈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게 노동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당연할 법한 그 치열함, 그의 글에서는 그 치열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의 시각에서 나는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기자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시사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하지만, 그보다 그의 여행 속에서 만난 '한 개인'을 '특별한 누군가'로 발견하는 작업이 내게는 더 인상적이다. 진정으로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사랑이 있구나, 하고 절로 느낌이 온다.
다시 책 제목을 곱씹어본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해 작가가 뭐라고 말했지...? 작가는 이쪽 저쪽 가르는 시각이 대체 누구의 시각이냐고 물었다. 광어냐 도다리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이 보기에 눈이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느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오히려 다른 곳(이빨의 유무)에 있으니, 그들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도 편가르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냐고 묻는 편가르기는 어쩌면 웃기는 짓인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인상깊은구절] p27 이 시대의 '개혁'은 수많은 사람들을 제도 밖으로 추방해야만 가능하다. 이미 함께 강을 건너갈 수는 없게 되어있다. 개혁과 추방을 통한 재건론은 명석한 경제논리를 갖는다. 그 경제논리의 과학성은 거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명석한 과학은 추방당한 사람들의 삶을 설명하거나 표용하지 못한다. 개혁의 경제논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그들을 침묵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치매에 가까운 비과학이다. 밥과 인간의 관계는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미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 관계는 다만 실존적인 것이다. p39,40 여자의 몸을 이처럼 사회 전체의 노리개로 삼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이영자에게 쏟아지는 이 사회의 도덕적 분노가 두렵다. 이 분노는 폭소와 야유를 동반한, 즐거운 분노로 보인다. 이영자에 대한 분노는 사회정의도 아니고 언론의 자유도 아니며 민주주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폭소를 동반한 분노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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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는 철지난 세상얘기를 하는 통에 반정도 읽다고 그냥 넘겼다. 지금 옷로비나 신창원검거얘기를 어떻게 읽어.
후반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세이들이다. 이명원은 김훈글이 뱀처럼 흐물흐물?해 싫다고 하지만, 또다른 이는 왠지, 그냥 싫다고 하지만 김훈이 글을 잘 쓰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산문을 마치 시쓰듯이 쓴다. 한마디 한마디 허투로 하지 않는다. 말글대로 원고지에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들에서 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되더라.
'자전거', '축구'에 대한 그의 나름대로의 썰은 명문이다.
황석영이 명문은 엉덩이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김훈이 그런 거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