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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 처음 이 책을 사려고 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제목에서 소로가 작은 강이나 길, 아니면 헨리 데이빗 소로인지? 사서 보니 영어제목 “Down the River”, 책을 펼치니 소로와 강 둘 다 등장하였다. 한 자연인이 생각하는 소로와 대자연속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이 책을 강, 강 여행, 강의 목소리, 절망에 대한 해독제라고 한다. 4대강으로 시끄러운 우리나라 과연 우리에게 강은 무얼까? 흔히 생명의 젖줄이라고 표현하지만, 진정 이런 대접을 해준 적이 있을까? 그냥 우리에게 물을 주는 의미 이상으로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이런 나를 부끄럽게 한 작가의 말 “어떻게 자연의 혈류를 이루는 강이 그저 빌어먹을 ‘자원’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는가 ”, 그래 나도 수자원이란 개념을 받아들였는데. 읽으면서, ‘월든’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소로가 미국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로라는 시골의 평범한 인물 결국에는 그 인간의 내면이 겉모습에 드러나게 되어, 개성을 피부로 뚫고 빛을 발한다. “우리에게 소로는 교외의 코요테 같은 존재였다.” 동시대인들에게 인정 받지 못한 소로지만, 아직도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기억되고, 그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소로는 “모든 권위를 항상 의심하라.” 말한다. 지금이야 정말 갖기 어려운 좋은 정부 “가장 좋은 정부는 아무것도 통치하지 않는 정부이다.” 갖기와 잘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 ”언제나처럼 나는 죄책감을 느끼려고 애를 썼다. 이번에도 나는 실패했다.” 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부터 실천하자. 그리고 사회로 그리고 국가로. 그의 자연을 노래하는 목소리는 아름답고, 사회에 대한 비판도 훌륭하지만, 저자의 목소리가 마냥 옳지는 않은 것 같다.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이주자들을 모두 붙잡아 좋은 라이플과 탄약상자를 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멕시코인들 고유의 문제는 그들 고유의 방법으로 해결하게 하라. 국경을 이민자들에게 무제한으로 개방했다가는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활은 후아레즈, 과달라하라, 멕시코시티, 산살바도르, 아이티, 인도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미국적이고, 편협하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자연 사랑은 우리가 본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새들의 모습 “매의 날개와 몸통과 영혼은 기류의 흐름 속에서 완벽한 평형을 유지한다.”과 자연을 대하는 그의 모습 “나는 직접 만지고, 입 맞추고 안을 수 없는 것은 절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영속성 “우리의 나무는, 우리가 있든 없든 여전히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는 모습들을 일깨워준다. 우리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의학전문가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새로운 약품이나 화학요법이 아니라 맑은 공기, 맑은 물, 신선하고 가공되지 않은 음식, 왕성하고 자율적인 신체활동이다.”이 아닐까? 점점 자연을 멀리하는 삶에서, 우리의 본성은 자연을 원하고 있다. 이런 자연은 “그곳에서 살다가, 때가 되면 그곳에서 죽는다. 땅은 반세기 동안 나를 먹여 살렸다. 내 몸은 땅에게 빚지고 있다. 빚은 갚아야만 한다.” 우리의 끝조차 책임져준다. 이 책은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찬양하는 글은 아니다. MX계획에 대한 반대, 크렘린과 국방성의 대결 속에서 양 국가, 아니 전세계 사람들이 공포를 떨어야 하고, 국가의 권력 “감시 당하고, 지시를 받고, 어디를 가든 밤낮으로 단속 당하는 것을 꺼린다면 범죄나 불법적, 비도덕적 의도를 가진 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우리들,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과 공포 때문에 MX에 반대한다. 반대는 저항으로 이어진다. 저항은 원칙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손들의 삶에 미칠 영향(끔찍한 악몽)을 비판하는 것으로 “안전하거나 ‘허용 가능한’ 체내 방사능 수용량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극도로 적은 양도 민감한 사람에게는 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이다. 이런 저항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방사능은 현실이다.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 전능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 단 한번의 항거가 한 인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 땅에 많이 건설되는 원자력 발전소나 핵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 이 좁은 땅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갈지 걱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낭비와 소비를 줄이지 못하는 한 이 원자력발전소를 피할 수 있을까 이제는 농업이 아닌 농업 비지니스, 인간이 땅을 길들임에 따라 인간도 길들여져야 한다. “문화는 느끼고 생각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동물로 진화해 온 인간을 농업과 산업의 노예로 만들려고 해왔다.” 또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특정 엘리트들에게만 모험과 자유를 제공한다. 우리의 현실이다. 과연 누구를 위해 농사를 짖고, 그 많은 비료며 농약은 다 어디로 가겠는가? 흔히 하는 말 인과응보. 현대의 정부와 문화를 비판하지만, 이런 배경에는 그의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미국의 현실을 “미국에서는 적어도 모험의 자유만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은 산과 황무지에 대한 자유마저 앗아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자유라는 것의 의미도 동시에 죽어버리지 않을까 두렵다.”에서 자연에 대한 권리와 저항을 역설한다. 무한성장을 목표로 하는 경제의 탐욕 속에서는 수많은 교묘한 방법과 이기심들이 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그나마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자연 그 중, 국립공원들 사실 국립공원의 편의시설은 탐방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상업시설이 아닌가? 국립공원에 필요 없는 것들을 모두 없애라. 단 한 줄로 요약한다. “인간환영, 기계출입금지”, 넘치는 사람들 훼손되는 자연 “인간은 너무도 많고, 그랜드캐니언은 단 하나다.” 우리는 깨어나고 자연에 주의를 기울여야 “소로가 콩코드 주변 숲에서 우주를 발견했듯, 감각이 깨어있는 자라면 누구든 어떤 자연의 장소에서도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존재의 정수야말로 미지를 상징하며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한다. 우리의 열린 마음으로 그 자연을 모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연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풍경 속에 푹 빠진 우리의 모습, 자연의 일부가 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도시의 콘크리트 숲에서 우리는 어떤 관경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반성 “까다로운 결벽성, 유약함에 가까운 내향성 때문에 나는 안락하고 안전하며 풍요로운 요람 속 20세기 중산층 미국인의 삶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런 저자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현대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조차 내게는 아주 힘든 일로 보인다. 하지만, 자연에 서면 우리는 아마 과거와 좀 더 생생히 연결되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진정한 보물은 인간의 영혼에 있다. 자연(강 여행)의 상업화 모험은 언제나 탐색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다 만들어 놓고 그저 자리 하나에 앉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멋진 것은 강 여행사업 그 업계사람들이고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이 사업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서 강의 낭만과 모험도 이젠 멀어지지 않을지. 우리에게 “영혼 해야 만 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발견했다.” 이런 곳을 발견하고, 아는 순간이 올 수 있을지. 우리의 환경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것이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자연을 뚜렷이 편애하는 신에게 인간이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야외야 말로 우리 모두에게 있어 태초로부터의 진정한 집이다. 자연으로 나아가서 온 몸을 활짝 열고, 깊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존재를 느껴보라. “인간애에 묶인 인간 가족이 ‘슬픔의 강’의 황금빛 협곡들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과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저항, 시대에 저항하는 투사이며 자연을 사랑하는 환경보호운동가이며 작가이다. 아주 개성이 강하고 상당히 미국적인 글이다. 대부분 그의 글은 자연에서의 경험에 기반한 글들이기에 우리에게도 아주 큰 울림을 미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점점 자연에 대한 예찬은 사라지고, 그것을 정복(?)하는 인간에 대한 예찬이 커지고 있는 시대, 과연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면서도 그렇게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고, 우리가 자연 위에 우뚝 선 존재로 여기는 교만함이 지배하는 현재. 인간의 짧은 식견으로 자연을 변형하는 일 과연 옳은 일이지,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과연 얼마나 인간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와 같이 읽으면 이해가 더 잘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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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이 신조어에 시대가 휘둘리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한동안 잘 먹고 잘 살기, 즉 물질적 풍요를 통한 유족한 삶 향유라는 뜻으로 이 용어가 쓰여지더니 요즘은 일상의 번잡한 굴레에서 벗어나 느림과 하강, 생태적 삶 실현 등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생활 양식으로까지 의미 범주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로의 삶과 내면세계를 벤치마킹 하고자 하는 에드워드 애비의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는 트랜드에 부합하는 저작이라 할만하다. 인위가 아닌 유유자적한 삶, 강물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에 의탁하는 모습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애비를 따라 읽으며 소로를 함께 강을 내려가다 보면 웰빙이라는 시대의 유행이, 우리의 지향이 얼마나 지적 허영인지, 정신적 사치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부대끼며 살아내어야 하는 실천적 삶이 아닌 상징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좇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시대가 만들어낸 몽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생태적 삶은 그렇게 편안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냉혹한 법칙이 예외 없이 지배하는 조야하고 불편한 것이다. 애비 가족이 살았던 애리조나주 투산의 집 주변처럼 멧돼지가 내려오고 전갈과 방울뱀이 집안까지 들어오며 모래 먼지가 뒤덮는 야성적인 공간에서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 보호막도 없는 상태에서 나약한 인간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버텨내어야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애완용으로 길들여진 집개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안락과 평온을 탐하는 통속적인 자들이다. 그런 우리가 코요테가 출몰하는 야생에서 무방비로 지내기란 너무도 두렵고 힘겨운 것이리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통속적 의미로서의 웰빙(well-being)이라는 상징적 관념에 빠져 대책 없이 느림과 하강과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요즘의 유행을 읽는 함의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애비의 삶에 비추어보자면 많은 부분 그것은 몽환이요 아편이자 정신적 유희인 것이다.
진정한 생태적 삶은 안락과 평온을 얻으려고 해서는 실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애리조나 투산의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자기 연민-천박한 슬픔-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나무를 심으며 후일을 기약하는 야성의 삶을 살았던 애비와 1세기 전 콩코드 숲에서 지난한 불편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던 소로우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이문재 시인의 말-나는 생태주의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처럼 아마도 나는 야생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소로우는 죽기 직전에 일체의 진통제와 수면제를 거부하면서 나른한 꿈 속에 빠지기보다 명료한 정신 상태로 최악의 고통을 견뎌내는 편이 낫다고 했다소로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