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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말한다는 건 나와 관련된 대체불가의 누군가를 지금 내가 속한 이 사회로 영원히 호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 빈자리는 나의 시선에 의해 항상 비어 있거나, 비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사회로부터 획득하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 사회에 살아 있는 한은 말이다. 소설 속 '석희'도 그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을 비롯하여 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작가 최지월은 아주 세밀하게,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상실의 시간들>은 작가의 경험인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보편성의 반영인 것이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소설은 어머니의 49재에서 시작하여 100일 탈상에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끝'에 이어서 '278일'이라는 소제목의 장이 나오고 신부전이 악화된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304일'의 장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끝'일 수 있는데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끝'이 아니라 '계속'으로 적고 있다. '생(生)'과 '멸(滅)'의 보편적인 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류적 관점에서 '끝'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모든 부담, 말하자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회적 관계의 정리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면서 집안일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챙기는 일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이며 친지를 응대하는 일 모두가, 결혼하여 호주에 정착한 언니 소희와 제약회사에 다니는 동생 은희를 대신하여, 오롯이 둘째인 석희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하여, 소설 속의 '나(석희)'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상실의 시간들'을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준비된 흙 반죽에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꾹꾹 내딛는 도공의 발걸음과 흡사하다. 게다가 당뇨로 인한 신부전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는 틈틈이 무시로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덤처럼 주어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었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20대에 엄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43년을 살았던 아버지, 33년을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군인도 아니고, 가장의 역할도 끝이 났고, 아내마저 잃어 남편도 아니게 되었다. 소설 속의 '나'는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닥쳐온 자신의 소멸, 죽음의 서장'이라고 인식한다. 애써 담담한 척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나'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는 원주를 수시로 오가게 된다.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한층 느슨해진 관계의 틈을 메워야만 하는 산 자의 의무인지도 몰랐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치이면서 성장했던 '나(석희)'의 억울함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고스란히 따라붙었다. 슬픔마저 독점하려 했던 동생 은희와 아내로서 43년을 봉사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치부하는 아버지의 태도, 화장을 하겠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채 죄인인 양 몰아붙이는 교회 사람들과 친척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산 사람들간의 충돌이 '나(석희)'는 불편하다.
'나(석희)'는 엄마와 얽히고 설켰던 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공부를 잘 하고 재주가 많았던 학창시절 하며, 그럼에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여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과 자주 부딪혔던 일들이며. 집안 형편과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원주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던 일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방관자처럼 미미한 것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를 엄마가 죽고 난 후 '나(석희)는 100일 탈상까지만 아버지를 돌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고, 식기 세척기를 사 드리고, 반찬을 배달시키는 일은 순전히 혼자 남았을 때를 대비시키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언니(소희)와 동생 은희는 적적해 할 아버지 생각에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산 사람들에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어색하고 힘들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상실의 시간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강제하는 일인 동시에 그 삶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처럼 예행연습이나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으면 좀 좋으랴. 최지월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낯설고도 힘든 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순다섯 해를 살고 떠났던 자신의 어머니를 훌훌 털어내려는 듯, 어머니가 없는 새로운 삶에 이제는 적응해야겠다 결심이라도 하려는 듯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소설의 곳곳에 투영한다. 작가는 어쩌면 무디어가는 자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한 편의 소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잊혀짐은 언제나 훈련이 필요한 까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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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엔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젊음이, 이 찬란한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평생 건강하시리라 믿었던 아빠는 최근 몇 년 동안 3번의 수술을 받았다. 대쪽 같은 아빠가, 불같은 성미가 어느 순간 수그러들고, 조용해진 모습을 보면서 나를 대입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 것이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인가... 삶에 지나치게 고집부리지 않고, 순리를 따르고 싶지만... 죽음 앞에 혹,,, 욕심을 부리게 되는 건 아닌지 나를 뒤돌아본다. 평온한 아침 9시.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가 죽었어.”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의 응급실. 그곳에서 주인공 석희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소비하는 행태를 보게 된다. 무슨무슨 상조회의 고객이 아니면 죽은 사람을 마음대로 보낼 수 없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나니 신부전을 앓고 있는 노인이 된 아버지가 남았다. 평생 집안일은 해 본 적 없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권위적인 군인이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내로 산 엄마를 먼저 보내고서야 석희는 엄마를 돌아보게 된다. 호주에 있는 언니는 화상으로만 아버지를 보고, 바쁜 동생 은희는 회사 일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왕래할 수 없다. 작가인 둘째 석희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자주 돌보게 되면서 부딪히고 상처받기 시작하는데... 둘째이기에 받는 가족 내의 상처와 언니와 동생 사이에 치여 사랑과 내 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석희. 과연 그녀가 모질고 못된 것일까? 준비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한 번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데... 나도 1남 3녀 중 둘째 딸이다. 위아래로 치이는 게 장난 아니었던 나는 그래서 둘째 특유의 날카로움과 이기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 일단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을 빼앗기지 않았고, 추진하려 마음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고집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내 모습이 인정사정없고, 냉정하고 차갑다고 말했지만 어찌 보면 그건 살기 위한 내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나는 따스하고 편안한 스타일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첫인상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유순하고 착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끔 엄마는 말씀하신다. “그래도 부모 생각하고 큰일에 척척 돈을 쓰는 건 너뿐이라고.” 자잘한 정은 없을지도 모르는 나지만 그래도 부모님 앞에선... 든든한 딸이고 싶은 나였던 모양이다. 친정 근처에 살지 않는 나에게 어느 날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장염에 걸려 거의 초죽음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것. 그 정신없던 하루를 아빠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혹 그런 아빠를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던지...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일주일 가까이 입원 치료 후 지금은 좋아지셨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슬퍼할 짬도 없이 장례식장에는 몇 명의 사람이 오고, 하얀 국화꽃은 어떻게 할 것이고, 사진과 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든 것이 돈과 연관되어 일을 진행한다. 석희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를 위해 돈을 쓰는 게 인색하다. 100명도 오지 않는다며 가장 작은 방으로 정하고, 육개장과 반찬 그리고 떡과 과일도 가능하면 적게 그리고 생략하려 한다. 죽은 사람 앞에서 더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내내 씁쓸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혹 내가 먼저 죽게 되면... 호화롭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돈 때문에 인색하게 날 보내지 말아 달라고... 또한 죽음은 죽음 자체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까지도 말소당해야 죽음이 완성된다는 말에 마음 한 켠이 아파온다. 사람의 죽음은 신체의 기능 정지라는 자연의 현실과 사회적 인격의 소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련의 사건이다. 죽은 사람에겐 정지한 몸의 현실에 맞춰 정신을 조정할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그걸 해줘야 한다. (17) 죽음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절차들이 쉽지 않다. 이런 절차마저 끝나고 고인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 공허함은 어떤 빛깔을 띠게 될까?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는 세 명의 딸들. 그리고 남은 아버지가 안쓰럽기만 한 첫째와 셋째 딸. 정작 곁에서 자잘한 일을 도와주는 건 둘째 이면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식들도 모두 같은 양의 사랑을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어떤 것이 효도인지, 이제는 효도의 정의도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석희가 아버지에게 사전 의료의향서를 건네는 과정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연명 시술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 조금은 잔인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식들도 죄책감이나 부담감이 덜 할 테니까.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내 죽음 자체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 없다. 하지만 내 죽음에 대해 글로 써서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야 남은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 “혹 엄마가 죽으면....”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남편에게 장례관련 문제로 넌지시 얘기했을 때 아이들의 두려운 표정을 봤으니까.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이를 먹으면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멀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멀게만 느껴질 수 있는 죽음이지만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났을 때의 상실감을 가능하면 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잘해야겠다. 좋은 기억이 더 많은 가족으로 남고 싶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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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고 해가 지듯, 아름다운 꽃은 언젠가 시든다. 우리 삶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요즘은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보니 그런 이야기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사람이 본래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그래도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슬프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어서 슬플까. 가끔 죽은 사람 마음을 알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까지나 알 수 없겠지. 자신이 죽었을 때 알 수 있을지도. 혹시 그것을 알게 된다 해도 남한테 말하기 어렵겠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 이 세상과 저세상은 이어져 있지 않다. 만약 두 세계가 이어져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다 해도 한 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언제간 맞게 될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생각만 해도 우울하고 슬프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은 자기 부모의 죽음을 맞는다. 어릴 때는 부모가 죽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부모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둘레에서 어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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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엄마의 부재를 상상할 수 없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본(죽음) 경험도 없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다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한번 태어난 엄마도 한번은 죽는다. 나도 언젠가 죽게 되겠지. 알고 있다. 알면서도, 상상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아직은... 아마 엄마의 부재가 현실이 된다면 그때는 인정할 수 있을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죽음을 인정하며 애도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지금 이 소설이 그렇다. 소설이 아닌 다큐로 읽힌다. 어떤 상황을 바로 옆에서 취재하고 기록한 느낌이다. 저자가 직접 경험했거나 아주 가까이에서 간접경험 하지 않은 이상 이런 내용을 쓸 수가 있을까 의심이 든다. 불과 한 달 전 내가 심각하게 경험하고 생각했던 장면을 활자로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누군가의 죽음, 그 이후의 시간을 기록하고 추억하던 주인공의 모습에서 죽음이 아니어도 경험할 수 있는 똑같은 시간을 보게 된다. 죽음 이후의 시간을 앞에 두고 겪는 지독한 현실이 죽음을 애도할 여유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은 죽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죽은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은 뒷수습해야 한다. 그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 되어야 하므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 마무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남아있을 뿐이다.
엄마가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을 기점으로 이 기록은 시작한다. 언니 소희는 호주에 있고 막내 은희는 바쁘다. 로맨스소설 작가인 나(화자, 석희)는 그나마 시간이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아버지의 수발과 장례 이후의 정리를 맡는다. 아버지는 당뇨병 환자다. 만성 신부전과 녹내장, 고혈압, 신장 결석도 있다. 아직은 거동이 가능한 노인이지만 혼자서는 뭘 하지 않는다. 밥 한 끼 차려 먹지도 않는다. 평생 군인을 직업으로, 그 위엄만이 전부로 알고 살아온 사람이다. 아버지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돈이 드는 일만 피하려 할 뿐 진정 슬퍼하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를 석희가 감당한다. 자신이 사는 서울과 아버지가 사는 원주를 오가며, 자신과 전혀 성격이 맞지 않는 아버지를 보살핀다. 당분간이 될지 영원히 그럴지 아직은 모른다. 식기세척기를 들여놓고, 청소서비스를 부른다. 당뇨 조절을 위해 저염식 반찬 배달을 시킨다.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일상이 짜증 나지만 참는 셈이다. 아직은...
궁금할 것이다. 심장마비로 죽은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 그 이후의 상실감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나도 궁금했다. 지독한 슬픔과 감당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릴 거로 생각했다. 제목 그대로 상실의 시간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모양으로 그려질 거로 기대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이상이라면 저자가 풀어내는 이 상실은 현실이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숨이 멈췄다고 죽음이라 말할 수 있나 궁금하게 한다. 사망을 확인해주는 의사의 사인과 장례절차를 거쳐야 하고, 묘지를 쓸지 납골당을 쓸지 정해야 한다. 고인의 종교에 맞는 장례를 치러야 할지 유가족의 종교에 맞는 장례를 치러야 할지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죽은 이의 물건을 정리해야 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떠오르는 기억을 붙잡거나 흘려보내야 한다. 명절에 차례나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상의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상을 차려야 하는지 언쟁도 해야 한다. 완전한 죽음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누군가의 죽음은 한 사람이 떠남으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남은 사람의 삶까지 흔든다. 그 이별이 슬퍼서만은 아니다.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버겁다. 그래서다. 아버지의 삶을 책임지듯 감당해온 엄마의 부재는 남은 사람들의 감정싸움과 와해, 대비해야 할 현실의 문제를 가져온다. 그 문제를 석희는 묵묵히 해결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 주체가 되는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변할 거라 기대할 수도 없다. 엄마의 죽음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페이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직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걸 말해줄 사람이 없다. 엄마가 죽은 후 듣게 되는 생전 엄마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다. 석희의 엄마는, ‘나의 엄마’일 때와 다른 사람과의 교류에서 보이는 모습이 달랐다.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텐데. 엄마가, 엄마가 된 데는 탄생에서부터 소녀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엄마로 살아온 역사가 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엄마가 끝난다. 삶이 끝난다.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석희. 어쩌면 저자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장면이 그렇게 흘러간다. 과거의 시간을 기억할수록 물음표만 늘어가고, 정신 차리면 현실의 문제가 압박해온다. 상실의 시간은 이런 것인가.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하는 시간일 뿐인가. 눈을 뜨면 대책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피해갈 길도 없다. 마주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슬픔도 현실도...
오랜만에 엄마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엄마에게 상조보험에 가입하자는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참 생각하던 것을 말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동안 상조보험에 대해 사기성 짙은 얘기만 들어온 터라 의심만 가득했는데, 좀 더 세세하게 알아보고 상조보험에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꽤 됐다. 한 달의 병원생활에서 느낀 것은, 어차피 같은 비용이 들어간다면 한꺼번에 대신 처리해줄 곳을 찾아야겠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것을 처리하라고 수시로 불러대며, 그때마다 뭔가를 확인하고 사인하고 돈 내라고 번거롭게 하는 것에 지쳤다. 이번 일로 배운 것은 정말 많다. 의료비가 왜 그렇게 나오는 것이며, 어디까지 보험적용이 되고 어떤 부분은 비보험이며, 어떤 부분에서 의료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지도 알았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하는 건지, 여러 가지 배웠다. 반면, 그 모든 일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귀찮다. 위장병은 도졌고, 일상은 마비됐다. 같은 일을 두고 같은 비용이 들어야 한다면 이걸 다 해결해줄 곳을 미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말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그 상황이 닥치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분주하고 정신없을 것이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은 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환자나 망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누워있으면 된다. 모든 것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그 몫도 사람마다, 서 있는 위치마다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남겨진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다. 평범한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평범한 죽음은 그런 모습이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보통 사람이 보통의 삶에서 겪는 보통의 죽음, 막대하고도 흔한 진짜 죽음, 평범한 죽음’을 그리고자 했다던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그대로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겪는 평범한 일상의 기억과 죽음, 죽음 이후의 모습이 적나라했다. 너무도 현실적인 상실의 기록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공감을 안 할 수가 없다.
영원할 것 같은 인생도 끝이 있다. 삶이 주어지고, 살아가고, 그 끝에서 만나는 죽음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삶도 찰나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란 말을 썼나 보다. 이제 우리의 삶은 소멸할 시간에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일까. 한때 한 사람의 존재가 당연하였다면 앞으로 다가올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소멸도 당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죽음이라 명명하고 이어지는 슬픔에 부딪혀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아직 살아있는 나를 위해,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내 앞에 닥친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별수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현실에 맞는 슬픔을 겪어야 하니까.
석희가 표현했던 대로 엄마의 죽음 이후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새롭고, 낯설고, 익숙하고, 지나가고. 그렇게 흘러가며 견디고 겪는 게 인생인 것처럼 들린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가 될 오늘을 살아가는 것뿐이란 말인지... 인생의 당연한 한 장면을 상당히 길게 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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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들중에서 유난히 죽음에 대한 책들을 많이 읽는 것 같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돌아온다거나, 죽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는 기적같은 일들을 겪는 이야기를 읽었다. 이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기적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받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은 제19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 최지월 작가의 『상실의 시간들』이다. 이 작품은 엄마를 갑자기 잃고 난뒤 100일간의 시간들을 말하는 작품이다. 물론 그 시간들은 엄마를 잃은, 상실의 시간들을 견뎌온 자의 감정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일상 생활을 해야만 한다. 엄마를 잃은 그 시점에서 모든 걸 멈추고 싶지만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소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들이 '나는 어떻게 살라고'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어 너무 슬프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빈자리를 어떻게 견딜까에 대한 안타까움 들일 것이다.
엄마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지 49일째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마가 갑자기 죽었는데도 둘째딸인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자책감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마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딸들은 저마다의 마음의 깊이로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슴을 치며 운다. 반면 엄마의 장례 비용이나 기타 비용들에 돈을 쓰려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울지 않고 무표정으로 대처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마땅찮다. 우리 딸들은 너무 슬픈데, 아버지의 엄마에 대한 감정은 어디까지 였을까.
혼자 남은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뇨 때문에 아버지는 저염식 식사를 해야했다. 그동안에는 엄마가 아버지의 식사를 책임졌지만, 이제 엄마가 없으니 누군가는 아버지의 식단을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는 걱정 말라며 혼자 잘 살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엄마가 살아 있는 그 때처럼 모든 것이 갖춰졌을때의 이야기이다. 군인으로 평생을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신 아버지, 연금이 있지만 만약 큰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그 병원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누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보살필 것인가 이 모두는 고민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자식들에게 나이든 부모는 늘 걱정의 대상이다. 만약 한쪽 부모님이라도 돌아가셨으면 그 걱정과 고민은 배로 늘어난다. 우리집 같은 경우도 엄마가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 혼자서 지내신다. 그게 몇 년이 되다보니 아버지도 혼자 잘 지내시고, 직장생활도 잘 하신다. 하지만 홀로 있는 시간이면 늘 전화를 하신다. 외롭고 쓸쓸하신가보다. 조금 더 신경 써드려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행동으로 잘 옮기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럴까. 『상실의 시간들』속 둘째딸인 석희가 아버지에 대해서 걱정하고 자주 방문하는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엄마 없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 계셔 자주 못보지만 그래도 병원에라도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석희가 엄마 없는 시간들을 견디듯 우리도 그 시간들을 견딜 것이므로, 마음이 무거워져 왔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부모를, 특히 엄마를 잃어 본 사람이라면 석희의 이런 감정들을 오롯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그 시간들, 상실의 시간들을 견뎌온 감정이 묵묵히 적혀져 있는 글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는 느낄 일이므로 석희의 감정이 나의 감정처럼 깊게 이입되었다. 상실의 시간들을 겪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위안을 받을 것이며, 이제, 언젠가는 겪을 우리는 이렇게 시간들을 견디는구나, 훗날에 느낄 상실의 감정들을 미리 느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처럼 일상을 살아간다. 슬프고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처럼 소소한 일상속에서 엄마와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시간들을 묵묵히 견디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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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육체적 소멸 뒤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엄마가 죽었다고 해서 엄마와 나의 관계까지 사라질 수 없다. 내게 엄마는 영원한 엄마인 것이다. 그래서 소중한 이의 죽음을 인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엄마가 오늘 사라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므로. 죽음을 예측하는 투병생활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엄마를, 아내를, 친구를 쉽게 떠나보낼 수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인가 늦은 밤이나 새벽에 걸려오는 친족의 전화엔 죽음의 소식이 있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은 침울하고 비통하다. 부모, 자식, 형제의 죽음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러했다.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장례가 끝나고 엄마의 무덤이 생겼을 때에도 죽음은 손님처럼 여겨졌다. 직장으로 돌아와서야 죽음이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 엄마를 죽여야 했다.’ (72쪽)
엄마의 사십구재로 시작하는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 속 주인공 석희는 그 사실을 아주 빨리 알아차렸다.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생의 일부라는 걸 말이다. 심장마비로 죽은 엄마를 발견한 아버지의 신고로 응급실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보고 석희는 오열하지 않았다. 죽음을 애도할 틈조차 없었다. 넋이 나간 아버지와 동생을 대신해 사망신고서부터 장례에 필요한 준비물은 끝이 없었다. 외국에 사는 언니는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지난 생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일과 동시에 한 사람의 소명 과정을 천천히 들려준다. 석희는 엄마의 죽음 이후 100일까지 신장질환과 당뇨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한다. 석희는 죽음 이후에야 직업군인의 아내이자 세 딸의 엄마로 살아온 한 여자의 생과 마주한다.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를 최고로 여기고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엄마의 자리는 너무도 컸다. 때문에 마냥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 스스로 병원 진료와 식사를 챙길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100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거기다 여전히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실재를 확인한 것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을 겪을 순 없다. 살아 있는 상태로 동시에 죽을 수는 없으니, 살아 있는 순간엔 살아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엄마의 죽음이 우리에게 왔듯이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 것도 우리고, 아버지 유골을 가지고 국립묘지에 가야 하는 사람도 우리다.’ (209~210쪽)
작가 최지월은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삶에 스며드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엄마를 애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하는 자매의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남겨진 생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경비를 제시하는 자녀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도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다. 누구나 죽음을 통해 강력한 삶 의지를 확인한다. 결국 죽음은 삶의 다른 이름이며 확장일 뿐이다. 진정한 애도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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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전에 엄마가 죽었다. 심장마비. 향년 65세. (p.12)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이 글쓰기의 계기가 된 것이고, 엄마의 죽음, 혹은 죽은
엄마에 대해서 쓰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작품은 죽은 사람과 남은 사람들의 사이가 아닌
남은 자들 사이의 참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기록으로 읽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가장 참을 수 없고 모욕적으로
느껴진 건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이런 말이었다.
“네
아빠 어떻게 할 거냐? 네 아버지 혼자 못 산다. 빨리 재혼시켜
드려라.”
죽은 사람이나 남은 사람에 대한 일말의 예의라는
것도 느낄 수 없는 무례라고 잔인한 말들. 죽은 사람 앞에서, 오랫동안
투병하다 숨을 거둔 사람 사람과 그 가족들 앞에서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무례함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아무도 나에게 엄마가 죽었으니 밥을 못 챙겨
먹어 죽겠구나,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은희도 그러 말은
듣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아버지뿐이었다. (p.55)
40년
가까이 함께 산 부부의 긴 세월은 밥 못 먹어 굶어죽을, 실현 가능성이 적은 미래의 문제보다 무의미하고
쓸모 없는 것인가?
나를 붙잡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찢거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의 무례에 치가 떨렸다.
‘죽은
사람은 죽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의 논리. 그 논리 하에
정당화되는 모든 무례들은 살았다는 것 자체를, 인간이란 존재를 무척 혐오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은 엄마의 죽음만큼이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건 꼭 누군가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상황이 벌어지고 입장이 달라지면, 그냥 꼬인다. 입장 따라 이해가 다르고, 이해따라 마음이 갈라지는 거니까. (p.278)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으면 남은 사람들은 함께
애도하고 서로의 슬픔을 위로해줄 것 같지만, 희한하게도 남은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다. 그 어떤 순간에도 상실의 슬픔은 개별적인 것이지 공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될 수 없다. 같은 아픔을 겪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다르고 그 입장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고, 그러면 마음이 갈라진다. 모든 게 뒤죽박죽 꼬인다.
‘상실’의 시간보다는 ‘트라우마 이후’의
삶이 더 고통스럽고 괴로워지는 이유이다.
내가 겪은 슬픔은 오롯이 나의 것일 뿐 그 누구도
그것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태어날
땐 태어나느라고 고생이고, 살면서는 병들고 늙어가느라 괴롭고, 죽을
땐 죽느라고 무섭다. 고통만이 인생’(p.207)이란
걸 깨닫게 된다.
달라진 건 엄마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모든 것들이 대참사 대학살의 현장이 된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순간 순간 그 기억을 반복하듯이, 그로 인해 삶이 점점 폐허가 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지만, 그 삶은 그저 큰 동공, 빈 구덩이일 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49일째, 49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100일의 탈상 뒤 ‘(끝)’으로 소설을 끝내는 것 같지만, 278일과 304일의 에피소드를 추가한다. 죽음 이후의 삶에도 끝은 없다. 남은 자들의 삶은 계속되니깐.
찰나생 찰나멸. 그러니 할 수 없나? 고작해야 찰나뿐이니, 힘껏 살아가는 수밖에. (계속) (p.311)
최지월이
‘(끝)’이 아닌 ‘(계속)’으로 이 소설을 끝낸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체험하는 역사란 이런 게 아닐까. 모순과 불합리의 회오리. 선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는 거창한 것들에 둘러싸여 어떻게든 살아남는, 살아가는 일. (p.230)
내 이마엔 흉터가 있다. 난산 끝에 겸자로 겨우 끄집어 내며 생긴 상처가 흉터가 되었다. 미숙한
의사의 실수였는데,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뇌 이상으로 평생을 안고 갈 큰 장애를
입을 만큼의 치명적인 상처였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신체에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지만, 이마에 남은 흉터는 죽을 때까지 그때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에 충격이 가해져
발생한 흉터인 트라우마 역시 운명적으로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비록 상처는 아물지언정 흉터는
없어지지 않으니까.
작가가 ‘상실의 시간’이라고 단수형을 쓰지 않고 ‘시간들’이란
복수형으로 소설의 제목을 삼은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엄마의 죽음은 단 한 번의 사건이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 그러니깐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들—우리 가정은 사랑으로 충만하며, 나는 그 가족
구성원들의 한결같은 지지를 받으며, 가족들은 내 영원한 울타리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 그래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차츰 차츰 균열이 가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과정들 모두가, 순간 순간 상실을 경험하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의 시간들’에
느끼는 고통과 비참함은 죽음에 이를 만큼, 혹은 죽음을 생각할 만큼 치명적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삶은 지속되고, 그렇게 상실의 시간들이 거듭된다는
점에서 흉터는 영구적인 게 되는 것이 된다.
까뮈의 『이방인』을 연상시키는 “49일 전에 엄마가
죽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이런 남겨진 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수모와, 삶에서 겪는 모욕들을 잘 포착해낸다.
트라우마 이후의 삶은 이토록 비참하고 매일이 대참사와 대학살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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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을 읽어보게 되었다. 읽은 바로는 역시 삶을 가까이서 다룬 줄거리가 매우 큰 흡입력을 주고 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현실감있게 그려낸 인상적인 소설로 이 책을 쓴 저자인 최지월의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게 살아있어서 마치 드라마의 각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소설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긴 하지만 적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 그 당시로 돌아간 흐름은 자연스러워서 드라마스페셜로 다뤄져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퇴역군인으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버지, 언니인 소희는 결혼 후 호주로 이민가서 잘 살고 있고, 동생인 은희는 물신양면으로 밀어준 덕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자 화자는 둘째딸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홀로 아버지를 챙기면서 자신의 본업에도 충실하고자 한다.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전개에선 어떤 과장이나 우연이 없고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원주라는 지역을 주무대로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는데 군사시설이 밀집한 곳이라 아버지의 퇴역군인이라는 설정이 잘 맞아떨어진다.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자신있는 부분을 쓰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끄러웠던 것 같다. 가족은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 지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몇 일만 떨어져 있어도 그 부재는 매우 크게 다가온다. 남은 가족 중 하나는 그 빈자리를 메꿔야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한다. 근데 실질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주인공이 전부인 것 같다. 언니인 소희는 해외에 살기 때문에 늘 붙어있을 수 없고, 동생인 은희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로 늘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꽤 지났음에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고 별 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하고 가장 기본적으로만 갖출려고 한다. 장례절차부터 비용까지 상세하게 씌여져 있어서 현실에서 닥친다면 이들과 같을지도 모를 것 같았다. 가족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고 작가의 첫 장편소설임에도 안정적인 흐름과 많은 생각이 교차하면서 만약 나라면 이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늘 죽음이라는 소재는 누구나 겪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만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라고 믿지만 이 소설은 현실 속에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각자의 삶에 충실하며 살지만 때로는 이별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모른 채 지나친다. 죽음 이후의 삶도 우리가 끌어안고 가야 할 일이다. 최근 수많은 사람들의 사망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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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최지월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책은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이어져오는 시간들이 어떻게 다가오고 흘러가는지를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이야기는 엄마의 사십구재부터 시작해 100일 탈상 전까지로 이어지는데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두렵고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부모의 죽음이, 그것도 갑작스럽게 다가온다면 슬픔을 제대로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현실적인 과업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가장 친밀하게 맞닿아 있던 엄마라는 존재가 없어진 후에 균형감각을 잃고 흔들리는 가족들 간의 갈등도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와 어느 하나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그들 각자의 목소리에 모두 공감하며 어쩔 수 없음에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엄마 없으니까, 엄마 역할 하느라 힘들지?”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나는 엄마 역할 같은 건 하고 있지 않다. 아무도 엄마 역할은 못 한다. 내가 하는 건 딸 노릇이다. (248쪽)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 아래 처하지는 않지만, 우리 대부분의 가족은 주인공의 가족과 비슷한 구조를 이룰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빠, 나 그리고 형제에게까지 어느 한 사람의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있어 가장 나를 잘 이해해주고 아껴주며 보듬어주는 존재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은 누구 하나 더 아프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남겨진 구성원 모두 그들을 제일 아껴주던 사람을 잃은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와중에 가장 잔인하게 느껴졌던 것은 그런 큰 역할을 하는 존재가 죽은 상황 속에서 유가족들이 해야 할 임무가 끊임없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당장 장례 절차를 밟아야 하고,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위로의 인사와 그간 있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들어야 하고 대답해야 하며 선택해야 한다. 너무 큰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하려는 의도인 마냥 가족들이 겪어야 할 현실적인 절차들을 지나 시간이 갈수록 슬픔은 더 짙게, 그리고 사방에서 그 사람의 빈자리를 느끼며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책 속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처음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음에도 너무나 태연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결국엔 아내의 죽음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한 행동이었음을 알게 될 때 또 다른 연민과 그 사람의 고통이 어떨지 가늠할 수 없는 무거움이 느껴진다.
나는 언제나 그냥 나일 수밖에 없었다. 좀 삐뚤어지고 모나고 작은 자신인 채로, 그 어떤 심각하고 진지한 일에도 연루되지 않고, 작은 일에 집착하고, 사소한 욕망들을 간직하면서, 가끔 황당무계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겪고, 이 세상이 생겨먹은 그대로 굴러가는 데 몸을 싣고, 나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살면 안 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187쪽)
어느 순간부터는 죽음을 말할 때마다 ‘잊혀진다는 것’에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 헌데 그 슬픔은 잊혀진 그 사람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사람에겐 잊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그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죽은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혼자만의 기억’이라는 쓸쓸함으로 다가와 앞으로 맞게 될 부모의 죽음에 슬퍼할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이란 그 본인의 죽음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사람들이 겪어내는 죽음이다.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고 그 빈자리를 쓸어내리며 다시 무언가를 채워 넣거나 새로운 행동으로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시간이 빼곡히 적혀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닥쳐올 슬픔과 인생 최대의 고비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생각 외로 슬픔으로 가득 찬 무기력한 시간이 아닌, 끊임없이 발을 굴리고 손을 놀리며 이어지는 현실로 다가와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를 죽음을 생각하니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두려운 순간에 대해서 내가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그 사람과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게 어떤 식이든 인생에 가장 밀접한 죽음을 꺼내어 본인에게는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또 그것을 겪어내야 하는 나에게는 영원히 남아 있지 않을 기회의 시간들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 ‘아직’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작은 감사함마저 느낀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72쪽)
이 책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매우 성숙하게 다가간다. 누구에게나 반가운 주제가 아니지만 모른 척 고개 돌리고 살 수는 없다.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평소에 죽음이라는 주제를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얘기함으로써, 남겨질 사람들이 치러내야 할 나의 죽음에 대해서 본인의 의사와 생각을 밝혀두는 편이 훨씬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는 주인공이 불교 신자로 나와 유교 전통 장례 절차가 상세히 나오는데, 죽은 사람을 기리고 그를 애도하는 방법들이 지금의 간소화된 장례와 제사의 본 의미를 되짚어 보며 처음에 선조들이 행한 그 정성이 깃든 마음을 본 듯해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우리 중에 죽음과 관련 없는 사람은 없다. 내가 맞게 될 죽음뿐만 아니라 내 가족, 친구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이 겪어야 할 죽음까지 모든 주변인이 책 속에 등장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식의 입장으로, 미래의 부모의 입장으로, 다시 곁에 있는 친구의 입장으로..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주변 사람의 슬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를 각각의 인물이 되어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한 건 내가 경험한 만큼만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거다. 누군가의 슬픔에 빗대어 내가 가진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큼 위선적인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자연히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구라는 틀 안에 현실적으로 쓰인 엄마의 죽음 이후의 시간은 그런 점에서 죄책감 없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들이나 되돌아봐야 할 것들, 그리고 나아가 비슷한 아픔을 겪는 누군가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심정을 본 것 같아 무거우면서도 단단한 축을 잡은 것 같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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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쓰린 현실
누군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도한 최초의 기억은 나의 고모할아버지 였다. 내 아버지의 고모부, 내 왕고모부님이신데, 나는 그를 고모할아버지라고 칭했다. 오랜 투병을 하셨고 끝내는 돌아가셨던 그분은 명절이면 우리 친적들 모두를 웃게 만드시는 유쾌하신 분이었다. 아직도 그분의 새까만 머리와 팔뚝에 있었던 독수리 모양의 문신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병문안 갔을 때 왕고모부님은 조카 그러니까 나의 아빠도, 조카 며느리도 알아 보지 못하셨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고를 들었다.
생과 사의 간격이 얼마나 가까운지에 대해 느꼈던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 눈을 깜빡이셨던 것 같았는데, 이제 그 혼이 어디론가로 간다고 해야 하나, 사라진다고 해야하나... 사실 그 당시에만 해도 어렸던 내게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은 것이었다.
누군가 죽은 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슬퍼하고 그를 기려야 하는 걸까.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기만 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 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p.72)
죽음 후에 남겨지는 상념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은 엄마가 죽은 뒤, 49재 되는 날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엄마가 죽은 후 딸이 써내려 가는 이야기. 처음에는 그저 그런 상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 일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 죽음과 상실에 대한, 삶과 냉혹한 현실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문득 문득 마음을 저리게 한다. 아마도 나의 부모가 문득 세상을 떠난 다면 아마 나에게도 그런것들이 남겨 질 것이다. 남겨진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 부모를 잃었다는데에 대한 상실감. 애도와 추모에 이어 종교에 얽힌 사람의 내세에 대한 생각까지도 말이다.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추모하는 과정에서 <상실의 시간들>의 화자 석희는 누구보다도 엄마에 대한 큰 애정을 간직한채, 엄마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유독 고집스럽고 예민한 화자의 시선은 다른사람들의 애도의 모습도, 자신에 대한 연민도, 압축적으로 담아 낸다.
누군가를 잃고 슬퍼하고 삶이 고통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사랑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막아서도 안되는 거야" 나는 쉰살도 넘은 엄마가 열일곱 소녀 같다고 생각했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만사를 사랑의 관점에서만 생각했던 엄마. 어찌 생각하면 엄마의 죽음을 겪은 것은 우리 뿐이니, 엄마는 전혀 죽지 않은 듯도 하다. (p.211)
그들 각자의 죽음 엄마가 떠난 뒤 소희, 석희, 은희가 아버지가 교회 사람들이, 아버지의 형제들이, 형부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다 다르다.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나는 상실을 느끼거나, 세상 누구보다 의지했던 사람을 잃은 막막함,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이미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마도 구절구절 공감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개인의 삶에 아무런 대답도 없는 국가나, 어쩔 수 없이 남의 일로만 받아 들이는 주변인의 모습 같은 것.
책에 나오듯 우리의 죽음을 우리는 경험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는 동안에 우리는 죽은 경험이 없기에, 나는 <상실의 시간들>을 읽으면서 나의 죽음 이후의 주변을, 나의 누군가가 죽은 이후의 주변을 생각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