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소망을 품게 되고, 소망대로 되었을 때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라 다른 꿈을 꾸게 해 준다는 것. 언제나 만족은 없으며, 소망과 욕망의 되풀이만 있다는 다소 철학적인 동화책이다. 내가 어떤 욕망을 품어 욕망대로 되었다고 치자. 행복은 찰나이다. 행복은 늘 곁에 두고 만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걸 애써 아이들에게 숨기고 호도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되고 싶은 게 됐는데 왜 행복한 모습이 아니냐? '어떤 모습으라도 좋다.' 에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변화한 새의 모습은 어떨까? 새의 모습 한번 유심히 들여다 보자. 사람새다. 손, 발, 인간적인 표정이 살아 있고, 신발이 신겨진. '새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 는 문장에선 인간의 욕망, 참 못말려 하고 피식 웃게 된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을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어떤 모습으로라도 좋을까? 과연. 현대인의 도시적 삶에서 자기의 개인성을 상실한, 근대적 도시인들의 초상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맨 뒷장 그림을 보자. 커다란 빌딩을 배경으로 축 늘어져 걷고 있는 사람들... 어른의 입장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하니 참 우울하다. 아이도 똑같이 우울할꺼라고? 그럼 그 아인 어른이게? 내 아이에게 한번 물어보자. "어느날 일어나보니까, 새가 되었어. 어떨까?" 새가 되면 아이는 여행이 하고 싶다고 말한다. "훨훨 날아서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갈꺼야." "그리고 지쳐 잠들고 일어나면 또 새가 되고 싶니?"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간질러주고 자극을 줘서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면 된다. 책 표지에 두른 띠에는 소설가 함정임의 적절한 코치도 있다. -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아이는 세상을 보다 넓게, 삶을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숨 죽이고 한 장 한 장 책을 열어본 아이는 이전의 내 아이가 아니다. 내일은 무엇이 되어볼까, 그리하여 나는 어떤 인간이 될까, 꿈꾸느라 바쁘다. -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야기를 즐기고 순수하게 읽고 끝내려는 그림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즐거운 그림책'에 주안점을 두고 보자면, 책 내용을 따지고 분석해 들어가 보면,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조야한 책에 비해 강렬하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변신 변용에 관한 이야기가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어떤 식으로 문학사와 철학사에 운용 되었는가 관심을 가져보자. 도대체가 무조건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어려운 것은 딱 질색이라는 어른들이여. 그림책도 철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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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되고="" 싶어="">는 작품의 제목처럼 새가 되고 싶어 하는 한 사람의 꿈과 상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긴 줄에 매달려서 높은 빌딩에 페인트를 칠하는 주인공은 그 힘겨움과 불편함으로 새가 되기를 꿈꾼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가 되어 있으면 좋겠어"라는 주인공의 바람대로 그는 정말 새가 된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동물이고 상상력은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므로 황당할 것 같은 이러한 상상이 힘을 가지기도 한다. 새가 된 주인공은 높은 곳도 올라가 보고 바다 위를 날아 보기도 하고 멀리까지 여행을 떠나 보기도 한다.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끝 간데 없이 펼쳐질 듯 보인다. 그러다가 이내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데, 그 현실의 냉엄한 세계는 '날아다니는 새'의 세계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것은 바로 나보다 강한 자로부터의 공격이다.'비'와 '눈'보다 무서운 '고양이'앞에서 새는 무기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고양이를 꿈 꾸어 본다. 그러나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가 아니다. 머리와 다리, 유난히 길어 보이는 꼬리는 고양이의 모습이나 입은 새의 뾰족한 부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정체성의 혼란이다.
<새가 되고="" 싶어="">에서는 새가 되어 고양이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다시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고양이가 된 새는, 아니 고양이가 된 사람은, 정말 고양이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새가 되었어도 완벽한 새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고양이가 되었을 때 역시 고양이 머리와 꼬리에 새의 부리, 인간의 두 다리를 가진 기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또한 생쥐를 쫓아 가는 고양이의 그림이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임이 이를 보여준다.
에릴 칼의 작품 <샘 많은="" 카멜레온="">은 <새가 되고="" 싶어="">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원래 카멜레온은 변신의 귀재다. 초록색 이파리 위에 앉으면 초록색이 되고 갈색 나무 위에 있을 때나, 빨간 꽃잎을 지날 때, 그 바탕색에 맞추어 제 몸의 색깔을 바꿀 줄 아는 훌륭한 마술사이다. 그런데 그 마술사는 그 정도에 만족할 줄 몰랐나 보다. 동물원에 가서 큰 동물들을 처음 본 카멜레온은 처음엔 큰 곰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홍학, 여우, 물고기, 사슴,기린, 거북이,코끼리,물개, 사람까지 되어 본다. 헤아리기도 어렵게 그토록 많은 '나아닌 나'를 꿈 꾸어 본 이후에야 카멜레온은 원래의 내 모습이 가장 소중한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내가 나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위기의 상황에서이다.카멜레온은 자기 주위를 맴도는 파리 한 마리가 간절히 먹고 싶었으나 온 몸이 여러 동물로 뒤죽박죽 섞여 있어 파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카멜레온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샘 많은="" 카멜레온="">의 카멜레온은 나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무절제한 욕망의 정점에 다다랐다가 그 한계를 자각하고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온다. 인간과 새와 고양이의 복합체인 인간의 모습과 여러 동물과 인간이 한데 뒤엉킨 카멜레온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위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과 카멜레온의 모습을 동일한 모습으로 인정해야 하는부분은 서글프다.
<새가 되고="" 싶어="">의 작가 한병호는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답게 책의 그림을 수묵담채화로 표현하였다. 수묵화의 특성대로 책은 여백의 미가 있고 간결하고 담백하다. 책의 표지를 보면 새가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본문의 "정말 새가 되었네"의 전 페이지 그림과 방향만 바뀌었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책 표지의 사람은 얼굴이 없다. 사람의 얼굴 대신 새가 되고 싶어하는 강렬한 꿈과 욕망의 외침인 듯 '새가 되고 싶어'라는 글이 마치 생각 주머니처럼 달려 있다. 그림의 의미는 새가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동시에 어쩌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음을 나타내는 듯도 하다. 인간이 새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새가 되고="" 싶어="">의 간결한 이야기 구조는 그 문장의 배치에서도 돋보인다. 새가 되기를 꿈꾸는 주인공의 상상 부분은 시종일관 책의 페이지 오른쪽에 글자가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꿈을 꾸는 부분 "고양이가 되면 어떨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만 활자가 왼쪽에 인쇄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로 인해 이야기의 내용이나 진행이 바뀌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그림은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우울한 모습들이다. 주인공이 새가 되어 높은 건물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장면, 그리고 수 많은 자동차에 몸을 싣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어둡다. 마치 무언가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의 표정이거나 불만이 가득 찬 듯한 모습들이다. 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꿈을 꾸지 않거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대비되는 표현이라면 적어도 새가 된 주인공의 표정만큼은 밝거나 유쾌해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꿈과 희망을 이루었는데도 즐겁거나 기쁘지 않다면 인간은 꿈을 꿀 필요가 없지 않을까. 간결한 이야기와 담백한 그림의 <새가 되고="" 싶어="">가 그다지 정겨운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가 되고="" 싶어="">의 새를 꿈꾸는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꿈을 꾸는 모든 사람은 아름다우니까. 그런데 그 꿈이 <샘 많은="" 카멜레온="">의 경우처럼 지나치게 되면 추한 욕망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꿈과 욕망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내가 살아 가고 있는 이 세상, 이 세계의 주변 상황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아름다운 꿈과, 주변 세계와 상관 없이 나를 채우려고만 하는 욕망은 그 출발이 분명히 다른 것일 테니까.
[인상깊은구절] 새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가 되어 있으면 좋겠어. 샘>새가>새가>새가>새가>샘>새가>샘>새가>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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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고 싶어...라는건 참 매력적인 말이다.
죽을때까지 욕망과 소망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변신의 대상은 무궁 무진하고, 변신의 과정을 흥미 진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나이가 들어갈 수록 변신에의 욕망은 줄어들고, 대상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설혹 되고 싶어 되어보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이 최고야~라던가,변신이란건 한여름밤의 꿈에 불과하다는걸 알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중년 남자라는 점은 정말 의미 심장한것 같다.
아마, 팬시한 캐릭터나, 어린이 캐릭터가 아니라서 독자층인 유아들이 동일시 하거나,
감정 이입을 쉽게 할수 없었을 것 같다.
대신, 문장 몇 개와 그림 몇 장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철학을 할 수도 있음을.....
쉽게 잊혀지지 않는 질문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닦는 일에 지친 남자가 변신의 꿈을 꾼다.
높은 곳에서 아슬 아슬하게 일하기에 하늘에서의 자유를 꿈꾼다.
꿈만 꾸는 게 아니라 새 그림도 그리고, 새 조각도 만들어본다. 그 장면은 이 유리창 닦이가 현실의 고단함에 파묻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소중하게 간직해온 꿈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꿈이 있는 사람이 변신에의 꿈을 한번 더 꾸어본다.
그리고 변신에 성공한다. 하지만.... 새로 변해도 외롭거나 힘든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역시 사람이 최고야...하고 안분자족을 해야 할까?
아니다. 가슴에 꿈을 간직한 사람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 호기심이 새를 쫒는 고양이에게 가닿았다는것이 흐뭇하다.
아이가 주인공이 아닌 이 그림책이 동심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변신에의 욕망을 끝이 없다.
그 호기심은 고양이에서, 마지막 장의 고양이가 쫒는 쥐로도 이어질 것이며,
그 쥐는 어느 다락방에서 쥐와 동고 동락하는 가난한 소녀로도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열려있는 호기심과 지치지 않는 변신에의 욕망이
동심 그대로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 남자는 그런 동심을 간직한 작가인듯도 하다. [인상깊은구절] 그럼,이번엔 고양이가 되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