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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녹색개발'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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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들어와 산지 5년차인 나는 감히 ‘귀농인’이라 하지 못한다. 농사를 짓지도 않거니와 (기껏 도시농군들의 ‘세평농사’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농업에 나의 미래를 걸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자급자족’과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데 이것이야 말로 내가 시골사는 존재의 이유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분명히 농사를 짓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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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들어와 산지 5년차인 나는 감히 ‘귀농인’이라 하지 못한다. 농사를 짓지도 않거니와 (기껏 도시농군들의 ‘세평농사’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농업에 나의 미래를 걸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자급자족’과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데 이것이야 말로 내가 시골사는 존재의 이유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분명히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지속가능과 자급자족을 이야기하는 모순을 지적할수 있다. 맞다. 적어도 먹을 것은 스스로가 자급해서 먹을 수 있어야 기본이 되는 것이고 나머지 입고 자고 하는 것에 대한 자급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의미로 보면 아직 나는 얼치기다. 머리로만 차있고 실천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먹고, 자고, 입고 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오늘 내가 가진 ‘욕망’은 결국 ‘돈’이다. 아이들 교육문제와 간간히 즐기는 문화적인 활동과 시골 구석에서는 충족 못한 교류를 위한 에너지는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가끔 외식하고 몸아프면 병원가고 좋은 행사있으면 가서 구경하고 좋은 물건 있으면 가서 사고. 모두 다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위해 농사외에 건축일을 한다거나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사무보조를 하거나 작은 점포를 얻어서 장사를 한다거나 하는 일을 한다. 벌이로 본다면 차라리 소비가 활성화 되어 있는 도시의 벌이가 나을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산골에서도 ‘부업’을 버리지 못한다. 소비의 미덕을 조장하는 경제사회의 분위기 탓이다.


20년전만해도 보일러를 돌리는 집이 세가구였는데, 지금은 장작을 때는 집이 세집이다. 심야전기, 기름보일러는 ‘몸을 움직여서 얻는 연료’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야한다.


생태적 삶을 꿈꾸는 귀농·귀촌인들이 겪는 딜레마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맞추어진 입맛으로 소비행위가 매우 불편한 곳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이다. 결국 그때의 ‘생태’는 남들에게 보이기위한 겉멋에 불과하다. 농촌에서 성공을 꿈꾸며 파괴와 소비를 조장하는 사업에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늘어나는 도로로 산이 깍이고 하천에 보를 만들고 다리를 만들면서 죽어가는 물고기와 수생식물들, 지하수를 뽑아내는 공장 때문에 주변 수위가 줄어 생기는 기후변화, 상위포식자들을 사냥해서 번성하는 뱀, 다람쥐, 들쥐 등이 다가올 불길한 미래의 징후들이라 생각하는 것은 실없는 것일까.



잘 알다시피 경제를 뜻하는 영어의 'economy'와 생태를 뜻하는 'ecology'는 말뿌리가 'eco'로 같다. 이것은 본래 집을 뜻하는데, 경제인이 이윤원리를 중심으로 집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는 사람을 뜻한다면, 생태인은 집의 근원적 특성을 잘 이해해서 조심스럽게 이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집은 우리 각자의 집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지구를 뜻한다.


개발과 보존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의 어원이 같다는 것이 충격적이기까지하다. 내가 이해하는 개발은 중장비와 대형덤프, 철골과 레미콘이 들이붓는 콘크리트의 이미지다. 아무리 잘 이해하려 해도 그것은 환경에 ‘악’의 영향을 끼친다. 오랫동안 설계해서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어 실행해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버려지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천혜의 자연들은 모두 몸살을 앓고 있다. 십년도 더된 일이지만 강원도 처녀지, 동강이 기억난다. 오지로 소문나서 사람이 들고 나니 레포츠업체들의 경쟁에 위락의 장으로 전락했다.


상업주의자들은 환경에 관심이 없다. 이용할 수 있을때 이용하면 그만이다.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면서 ‘빌려 쓸’ 방법을 찾는 것이 생태주의라면 쓰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글로벌 대기업들이다. 그네들은 심지어 ‘환경’도 팔아먹는다.


이와 관련해서 요즘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파트 광고의 ‘자연 판촉’이다. 고급스런 외양의 고층 아파트 여러동이 우둑 솟아있는데, 그 아래에는 온통 짙푸른 나무 숲의 물결로 치장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광고는 곳곳에 솟아오른 아파트 숲 속에서 자연의 나무 숲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편승하는 것일 뿐이다.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냥 무시할뿐이다. 무시하지 않으면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것들을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석유를 소비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인것처럼.


제정신을 가진 누구나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위기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당연히 위기에 대한 대응책에서도 여러 이견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얕은 생태학’과 ‘깊은 생태학’의 구분은 이러한 이견들을 잘 보여준다. 전자가 문제의 성격을 부분적인 것으로 보고 보완적인 대응책을 제시한다면, 후자는 문제의 성격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발본적인 대응책을 요구한다.



현대의 환경문제는 단지 자연과학을 동원하여 그 발생기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170여개에 달하는 주권국가의 이해관계와 각국 내의 불평등문제를 고려해야만 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이다. 문제의 이같은 다차원성이야말로 생태위기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근원적인 요인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질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는 역설적 현상을 여기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역설적 현상이 아니라 ‘의 도하지 않은 결과’에 주의하지 않은 ‘오만한 문명’의 필연적 결과이다. 공업력이 갖고 있는 무서운 잠재력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오존층 파괴는 잘 보여주는 것이다.



YES마니아 : 골드 s******e 2010.07.0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