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거장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맞서 싸우던 신자유주의라는 형체 없는 물결은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듯하다. 주객전도, 사람이 만든 자본에 의해 사람이 잠식당하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그 학문의 깊이 있는 성찰 못지않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이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출판되지 않았던 그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어찌 보면 잡동사니와도 같다.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 때문일까? 난해함으로 유명한 부르디외의 글이건만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들은 상대적으로 그 난해함이 덜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내용이 이론의 영역 아닌 실천의 영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20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쓰여진, 신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성장의 지속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경쟁력의 강화, 하지만 이를 다루는 기준은 결코 일반 민중 아닌 자본의 시각이었다. 개혁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구조조정은 많은 이들의 삶으로부터 직장을 앗아갔다. 그렇게 직장을 잃은 이들은 무능력한 이들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그 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나마 해고를 면한 이들의 삶 역시 피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함께 일하던 동료를 하루아침에 잃었다는 것은 그들 역시도 언젠가는 직장을 잃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정규직은 끊임없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남아도는 유휴노동력의 존재로 인하여 그들은 저임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존재하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자신들과 다른 피부색, 다른 생김새를 지닌 이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경쟁력을 상실한 인문, 사회과학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이들에 대한 기피현상이 가중되었으며, 인간은 차츰 자신들의 삶으로부터 (정신적) 풍요로움을 기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경쟁력의 강화, 이를 강조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경쟁력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경쟁력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언론을 앞세워 자신들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자본의 흐름 앞에서 우리는 실로 무능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외세에 의해 이식된 우리의 자본주의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 자체를 허용치 않았다. 노동자는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로,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존재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유럽사회를 단일화하는 흐름인 유럽 연합은 점차적으로 공고화되고 있으며, 어찌 보면 이는 미국 단독의 세계지배에 저항하는 기제로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 연합 내에서 자행되는 일들은 우리에게 핑크빛 희망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통합화는 상대적으로 부유치 못한 국가의 소외로 이어지며, 이는 유럽연합 내에도 적용되는 질서이니 말이다. 작게는 노동자,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결국 이 세계는 강한 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신자유주의는 지난 1920년대 세계를 강타했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던 사회진화론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좌파의 논리가 보수가 되어버린 유럽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보수를 넘어선 고전으로 볼 수 있을지도...)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흐름 내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소수의 풍요를 보장할진 모르겠지만 다수는 지금보다 더 아파야만 한다는 것, 신자유주의에 우리가 반대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