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덟장의 CD. 꽤나 둔중한 편인 이 박스셋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딱 하나다. 라디오에서 단 한번 듣고 반해버린 보로딘 쿼텟과 리히테르의 드보르작 피아노 오중주 때문이다. 필립스나 예당에서 나온 한장짜리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진 이상 이제 브릴리언트의 이 박스셋이 이 음원에 대한 대안이 되어버린 듯 하다. 염가 음반사의 박스셋이니만큼 음반 표지나 내지 디자인은 그닥 볼 것이 없다. 그런 걸 애초에 기대한 것도 아니니 별 미련은 없다. 가장 먼저 드보르작의 피아노 오중주를 담은 네번째 CD를 건다. 처음 발걸음을 떼는 리히테르의 피아노는 나긋나긋하다. 하지만 바로 뒤따르는 첼로의 소리는 두텁고 울림이 큰 편이다. 이 연주가 녹록치 않다는 걸 예감케 한다. 곧바로 터져나오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소리 역시 세련됨 보다는 텁텁함에 가깝다. 그걸 리히테르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서일까. 리히테르만의 묵직한 발자욱 소리를 내며 저 텁텁한 소리를 받친다. 아니, 이 말은 정확치 않다. 토속적인 멜로디를 작곡에 많이 사용한 드보르작의 성향에 걸맞게 선 굵은 소리를 내는 보로딘 쿼텟을 리히테르의 피아노가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1악장에서 리히테르가 평균율에서 보여준 나긋나긋함을 비칠 때는 도입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게다. 그의 묵직한 소리는 네 악기의 만만찮은 음을 헤집고 나와 듣는 이의 가슴을 격렬하게, 사정없이 두들겨댄다. 원래 피아노 오중주라는 형식이 피아노의 비중이 크긴 하다지만 이 연주만큼 현악기 넷에 피아노 한 대 모아놓은게 '현악 5중주'가 아닌 '피아노 5중주'인가를 웅변하는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보로딘 쿼텟의 선 굵은 소리 정도 되니 리히테르의 압도적인 발걸음 사이로 음이 비치기나 한다는 생각은 너무 억지스러운건가? 1악장의 피날레가 극적으로 닫힌 다음 극단적인 대비가 이루어진다. 리히테르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에서 자주 접하는 극단적으로 느린 발걸음이다. 보통의 연주보다 4-5분이나 느린 거니 말이다. 조금이나마 힘을 빼고 한 발자욱 물러서긴 하지만 여전히 곡의 중심은 극단적으로 피아노에 쏠려 있다. 피아노의 발걸음에 맞춰 간간히 반주가 들린다고 할 만큼 현악 4중주가 뒤로 물려나있는게 불만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이 곡 2악장의 피아노 파트 비중으로 볼 때 리히테르처럼 한 발자욱 앞으로 나와 이끌어 가는 게 정답 같다. 리히테르의 극단적인 느린 템포는 더더욱 곡의 중심을 피아노로 몰아 온다. 피아노 파트에 악센트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말이다. 3, 4악장의 경쾌함을 풀어가는 중심 역시 피아노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 안간힘을 다해 이 간극을 메우는 보로딘 쿼텟의 발걸음이 더없이 즐거운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이 연주 하나만으로도 이 염가 박스셋의 가치는 충분하다. 나머지 실내악 연주를 둘러본다. 특이하게도 가장 유명한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 '아메리카'가 빠져 있다. 뭐 어떤가. 명연주 명음반이 차고 넘치는 곡인데. 이런 박스셋의 매력은 유명 작곡가의 숨어있는 보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나. 가장 먼저 귀에 걸리는 숨은 진주는 일곱번째 장을 여는 첫 곡, 드보르작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이다. 쾌활하고 호소력 강한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이거 두 장만 TOP price를 주고 사도 전혀 아깝지 않을게다. 그거 말고도 야금야금 들을 수 있는 CD가 여섯장이나 더 있다는 건 즐겁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주 수입되는 음반은 아니겠지만, 그리 수요가 많을 것 같진 않지만 음반사 이름처럼 빛나는 브릴리언트의 박스셋 중 하나일게다. 비단 리히테르의 드보르작 오중주를 재껴두더라도 말이다. 내지가 충실했다면, 디자인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불만을 품어보지만 뭐. 이 가격에 이런 연주들을 건지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용서할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