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는 정전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의 원제는 도신(賭神)입니다. 도신, 곧 '도박의 신'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도박을 잘한다는 얘기입니다. 영화 도신(정전자) 속 주윤발의 슬로우 워킹은 주성치 주연의 도성(賭聖)에서 패러디 되기도 했지요. 도신, 도협, 도성 이런 식으로 '賭 O' 시리즈가 있고 도성에서 주인공 주성치가 도신의 도박 장면을 보며 도신 주윤발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듯 연결고리가 있기도 합니다.
홍콩 카지노 무비라고 하면 알란탐, 유덕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지존무상'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지존무상이 비장함과 의리로 가득찬 영화라면 도신(정전자)의 경우는 도신(賭神)의 기억상실과 복수라는 큰 이야기틀 속에 코믹함을 곳곳에 새겨 놓았습니다. 그 시절 주윤발이라는 배우 자체가 홍콩 느와르와 코미디 두가지 장르 모두에 능통한 인물이라서 기억을 잃고 바보가 되어 웃음을 주다가 기억을 찾고 도박판에서 복수를 하는 영화 속 도신, 고준 캐릭터에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지존무상의 유덕화와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조연으로 나오는 것도 그 시절 홍콩 영화팬이라면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도박판을 휩쓸던 도신 주윤발이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고 동네 건달 유덕화와 그의 여자친구 장만옥을 만나게 되죠. 머리를 다쳐 바보 같기도 하고 어린애 같기도 한 모습이지만 도박 실력은 그대로라서 유덕화의 도박빚 청산에 도움을 주다가 도신의 행방을 찾던 경호원과 연락이 닿게 됩니다. 도신은, 도박판의 복수를 의뢰받은 상태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인데 도신의 비서가 끔찍한 배신을 했기에 그 복수까지 해야되는 상황이죠. 비서는 악당과 손을 잡고 그 악당은 도박판에서 꼼수를 부리며 도신을 상대합니다. 올백 머리에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도박장으로 걸어들어온 도신은 운명이 걸린 도박판을 멋지게 승리로 이끌어냅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비둘기와 쌍권총, 바바리 코트와 입에 물고 있는 성냥개비로 상징되는 주윤발의 느와르적인 매력과 대장부 일기 등에서 보여준 코믹한 이미지, 전성기 시절 홍콩 카지노 무비의 활극적인 요소까지 더해 영화 자체는 상당한 활기를 보여줍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웃기지도 않은, 오버된 장면들, 잔인한 장면들, 비논리적인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단한 인기를 끌기에 틀림이 없는,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였습니다. 문제는 당시 홍콩 영화가 그렇듯 조악한 속편들이 줄지어 나오면서 그 인기를 끌고 가지 못했다는 것이죠. 주윤발의 도신, 유덕화의 도협, 주성치의 도성, 지존무상, 지존계상 등등으로 속편에 속편이 이어졌던 홍콩 카지노 무비는 결국 관객의 외면을 받고 말았지요.
주인공 도신 고준 역을 맡은 주윤발의 매력은 철철 넘칩니다만 DVD 자체의 품질은 조악합니다. 화질은 8,90년대 비디오테이프를 보는듯 하고 자막도 엉성합니다. 영화 초반부 라스베가스 도박 장면에서 도신을 '도박귀신'이라고 번역해놓은 부분에선 실소를 참을 수 없습니다. 말그대로 갓 오브 갬블러, 賭神인데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이 대충 번역해놓은 '도박귀신'이라는 단어는, 신적인 위엄보다는 잡귀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영어 자막, 중국어 자막이 함께 화면에 붙어 나오는데 이런 영상을 정확하게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법적으로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닌 것이라는 말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글 자막을 보면서 영어 자막과 중국어 자막을 동시에 보게 되니 영어 공부도 되고 중국어 공부도 되고 엉성한 한글 자막이 표현하지 못하는 미세한 뉘앙스를 영어 자막과 중국어 자막을 통해 곰씹어 볼 수 있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있긴 하지만 씁쓸한 기분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글래디에이터, 패닉 룸 등등 제가 본 DVD들은 자막을 고를 수도 있고 영상만 볼 수도 있었고 화질도 또렸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DVD 제작 상태가 이토록 조악하다면 홍콩 영화 시장이 망하듯 국내 DVD 시장이 망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 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주윤발과 홍콩 영화에 대한 추억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서 DVD를 구입하긴 했지만 영화를 재밌게 보면서도 한 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제가 본 것은 분명 도신(賭神)인데 엉성한 자막과 뿌연 화질을 보고 있으면 조악한 스토리와 허술한 완성도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던 도신 2, 3나 도협 시리즈 속편 어딘가를 보고 있는듯한 기분 또한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