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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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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가볍고, 싸고, 뻔한 내용의 책이다. 아니, 저자가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고 프랑스 문단의 주류라면 획기적인 내용이랄 수도 있겠다. 결국 이 책의 내용이란 게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뻔한 내용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다시 말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책을 읽는 자세 혹은 옳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역시 내가 적어 내려가게 될 나의
"독서의 의미" 내용보기

      얇고, 가볍고, 싸고, 뻔한 내용의 책이다. 아니, 저자가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고 프랑스 문단의 주류라면 획기적인 내용이랄 수도 있겠다. 결국 이 책의 내용이란 게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뻔한 내용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다시 말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책을 읽는 자세 혹은 옳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역시 내가 적어 내려가게 될 나의 생각도 논란의 소지가 많을 것이다.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책이다. 사실 이런 내용이 읽어볼 만한 가치로써 충분하면 안되는 건데 말이지. 그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의 내용들이다. 

      내 입장에서는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정의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뻔한 얘기였고 탁상 공론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내가 말하는 방식도 포함하여) 탁상공론이다. 즉, 의도는 좋되 조직 시스템하에서는 이룰수 없는 듣기 좋은 뻐꾸기나 다름 없다는 얘기이다. 물론 독서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개인적으로 지인에게 말해줄 때는 나도 저자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내가 얘기하는 것처럼 독서를 한다. 어떤 면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은 내가 저자보다 훨씬 더 열려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 얘기를 바꿔 말하면 독서를 무슨 만병지식통치약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보기에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점의 시작이 다르다. 일단 나는 책이 음악이나 영화나 기타 다른 문화적인 요소의 창작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에 대해 그다지 동조하지 않는다. 혹자는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수도 있다고 한다. 잘못된 얘기이고 단편적인 얘기이다.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꾼 게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내재돼있는 어떤 변화의 요소가 책을 계기로 해서 바뀌었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그게 그 얘기 아니냐고? 천만에. 세상에는 뭉뚱그려서 판단하면 좋을 일이 있고 그 반대의 일도 있다. 앞선 얘기의 경우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얘기가 전해지고 그런 경로를 통해 책이 본래의 가치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린, 마치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지식인이고 안 읽으면 그렇지 않은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자.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게 책만 있는게 아니다. 음악 하나로도 바뀔수 있고 영화 한 편으로도 바뀔수 있다. 유독 책만 그런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책은 필요이상 과대 평가를 받고 있고 그 때문에 음악이나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는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만큼의 인기를 못누리고 있다. 정화수를 떠놓고 정중한 자세로 기도를 해야한다면 결국 기도하는 회수가 줄고 말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리뷰를 쓰다보면 웃기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떤 책에 대해 혹평을 썼을 경우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역자나 저자가 직업에 대한 특권 의식을 지닌 듯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 웃긴다.

      우리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을 때 좋고 나쁨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를 한다. 그 작품들에 대한 평을 리뷰로 혹평을 했다손 치더라도 영화 감독에게 이메일이 오거나 작곡가에게 이메일이 와서 왜 그렇게 혹평을 썼냐고 따지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독 책만 보면 그런 인간들이 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점을 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관련자가 영화 혹은 음악계의 창작자보다 우월하고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어이없다.

      한 번은 그런 이메일을 받아서 내가 답장하기를, 내가 신발을 사서 디자인의 나쁜 점에 대해 상품평을 올렸다고 해서 그 디자이너가 이렇게 항의하는 경우를 처음 당한다고 말했다. 그게 자신의 경우와 같냐고 그가 내게 되물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신발 디자이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내게 설명해보라고. 그랬더니 온갖 잡소리를 늘어놨다. 요점은 자신이 더 어려운 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업 디자이너의 창작보다 자신의 창작이 더 가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가들이 그렇게 이상한 우월의식을 가진 것은 아마도 앞서 말한 책에 대한 대중 인식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작품의 작가는 그 작품이 신발 디자인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다 똑같은 창작자이고 그중에서도 뭔가 대단한 게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칭송을 받는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뭐가 됐든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단지 위대하게 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닐텐데 그런 착각을 하는 인간들이 이 문학계에는 유독많다. 대상이 책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책이 지식이라는 편견과 언론이 말하는 지식인이 마치 리더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세상에 더 필요한 건 지식보다 지혜이다. 그런데 소위 지식인라는 자들이 지혜로움에 배반적인 행동을 많이들 하고 앉으셨더라.  

 

      나는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고 16년간 사업을 했으며 1년 평균 250권정도의 책을 보고 40여개에 가까운 나라를 여행했다. 지금 나열한 이런 나의 인생 중에 내가 습득한 지혜의 대부분을 책이 주었는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책이 준 부분도 있다가 정답이다. 다시 말해 책만으로는 절대 우리가 지향하는 현명한 삶의 완전함을 구현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멋진 요리처럼 각각의 요소, 경험, 사람, 책, 여행, 음악, 미술, 영화, 철학 이 모든 것들이 적절한 비율로 잘 배합됐을 때 최고의 맛을 내는 경우와 비슷하다. 다시 말해, 너무 책을 안 읽어도 좋을 게 없고 너무 책만 읽어도 좋을 게 없다는 얘기이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은 정말 많다. 이 모든 것이 알맞게 잘 조합돼야 그 각각의 요소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다른 요소는 차지하고 경험과 책의 조합만 보더라도 그렇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얻는 무엇인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흡수하기 위해 해야 할 것으로 정독을 꼽는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백 날 정독해도 모르는 걸 눈알이 빠지게 본다고 해서 이해가 될 것 같은가? 천만에 말씀이다. 어떤 책들은 반드시 그만큼의 삶의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이해 혹, 공감할 수 책들도 있다. 결국 그것은 정독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행간을 한 방에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경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이다. 지독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지독한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에 깊게 몰입하기 힘들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글자로 표현된 것 이면의 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단편 소설에 대해 감동하지 못한 이유를 수업시간의 분석적인 감상법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경험이다. 어느 소설에서 말한 행간의 슬픔 혹은 고뇌가 그땐 몰랐는데 살아보니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후에 그 소설을 다시 접하게 되어 느끼는 가슴깊은 공감이 정독을 하지 않았거나 분석적이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 말한다. 더 많은 책을 통해 더 많은 감성과 더 많은 이해와 더 많은 지혜를 얻고 싶다면 더 많은 경험을 하라고. 경험과 책이 조합되지 않으면, 책만으로 얻을 수 있는 이해는 한계가 있다. 책만 읽으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굉장한 편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삶을 걸어온 학자 중에서 그렇게 앞 뒤가 꽉 막힌 교수 양반들이 내 주변에도 널렸다.(더 웃긴 건, 학자가 아님에도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도 많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침튀겨가며 학생들에게 설파하다가 그보다 더한 고수, 교수가 가르치는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파병의 경험으로 인간의 잔혹한 삶을 겪고 돌아온 사람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나 다름 없는 경우를 수없이 봤다. 유명한 MBA 경제학자 교수중에서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려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제로였다. 그들은 강 건너에서 불 끄는 법에 대해서만 연구했기 때문에 눈앞에서 화염이 울렁거리면 앉아서 토하기 일쑤였다. 물론 전부 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도 있겠지. 그러므로 학문보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절한 배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봤으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이 없더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물론 유명한 사람이다. 어떤 이들은 저 문구를 책이 최고다라는 말을 알리기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경험은 미숙하고 얄팍한 지식으로 삶을 이해하는 이들이 자주 저지르는 오류도 바로 저런 식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합리화의 도구 이상은 아닌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저 말을 남긴 사람은 노령의 학자이다. 얘기의 포인트는 "도처의 쉴 곳을 찾아 봤다"는 데 있다. 그랬더니 책이 있는 구석방이 최고더라라는 얘기이다. 책이 있는 구석방이 최고인 것을 알게 된 이유가 바로 경험이라는 얘기이다. 즉, 결국 책이 최고니 그 전에 것은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미성숙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오독이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게 만드는 함정이며 자기 합리화의 첩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책이 지식은 줄지언정 지혜를 주지는 못한다. 삶에 필요한 것은 지식 우선에 지혜다.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혜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그 경험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써의 책이 뒷받침될 때 더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여전히,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절름발이가 절름발이인 것을 알 때는 벌어지지 않는다. 절름발이가 자신이 그렇다는 걸 모를 때 벌어진다. 그것이 전부인 진리라고 생각할 때 말이다.

 

      삶을 사는 과정 중에는 어느 하나만 해도 충분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배움보다는 그 배움을 통해서 남은 삶은 더 가치 있게 만들고 후세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쳐야 할 인생의 터닝포인트 말이다. 그런데 20대가 60대같은 삶을 살고 그런 사고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중간의 40년의 인생을 모든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지나고 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일이다.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먼저하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뭐든 가장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친구와 어울릴 나이, 여행을 할 나이, 조직생활에 몸담고 사회의 음양을 지켜볼 나이, 그 모든 것이 때가 있다. 그럴 나이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책만 파는 것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어느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몸 하나를 건사하는 것으로도 버거운 존재가 된다면 훗날 가정이 생겼을 때 혹은, 후배들에게 전해줄 지식이란 편견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책이 되려고 하는 책은 현명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활자로 기록해 놓으려는 산물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현명한 삶의 이야기가 19세와 21세기가 항상 같은 환경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기록된 현명한 삶의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삶의 참고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을 뒤로 하고 현명한 삶의 지식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보다 멍청한 행위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찌 현실도피적인 행위가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책은 놀이의 방편 그 이상은 아니다. 평생 책만 본 사람들은 나의 이런 얘기에 거품을 물수도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책 말고도 인간을 발전시킬 수있는 더한 삶의 지혜를 알게 해주는 방법들을 훨씬 많이 안다. 다시 말해 책만이 한 사람의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다. 즉, 놀이치고는 좋은 놀이에 속하므로 하면 좋은 거고 안해도 뒤처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명해지고 지혜로워기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 중에 하나로 책이 있는 거지, 책을 읽어야만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은 주와 부를 혼동한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죄다 옳은 얘기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왜 그 좋은 얘기를 우리가 알아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한 개인의 삶을 더 현명하고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귀결돼 있다. 그게 행복이든, 성취이든 말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써 책도 존재하고 문화도 존재하는 것이지 그 기본을 넘어서까지, 그러니까 스트레스와 중압감으로 작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그것이 주와 부가 바뀌어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었을 때 행복해야 한다. 슬픔을 느끼든 기쁨을 느끼든 그 모든 것이 어떤 나의 행복에 작용하기 위한 도구로써 쓰일 때 가치가 있다. 그런데 혹자들은 책을 읽어야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처럼 바꾸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인문철학서만이 귀중하다고 여기는 자세가 그러한 태도 중에 하나이다. 너무 하나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전체적인 줄기를 놓치고 만 꼴이다.

 

      한국인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접촉이 있었던 외국인을 만나보면 그들이 꼽는 첫 번째 한국인의 문제를 심각성으로 꼽는다. 너무 진지하다는 얘기이다. 너무 아유 레디 자세를 취한 사람이 많아서 때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런 자세가 물론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떤 하나의 사실을 웃었을 때, 자신이 웃게 된 그 원인에 대해서 너무 소홀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껏 엔돌핀을 생성시켜놓고 "그냥 킬링 타임용이야, 볼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든가 하는 행위이다. 솔직히 나는 이해도 못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서를 보는 것보다, 한동안 편하게 웃거나 몰입된 재미를 느낄수 있는 소설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 머리로 새겨지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게 없겠는가. 삶에 있어서 무게 있는 고뇌는 중요하고 재미있는 유머는 중요하지 않은가? 책을 통해서 한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이 왜 낭비인가? 그 낭비된 시간에 얼마나 더 건설적인 개달음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편견이다. 자신을 웃게 만드는, 혹은 즐겁게 만드는 도구들을 폄하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할 뿐더러 바람직하지 못하다. 

 

      책을 읽는데 어떤 방법을 논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드시 취해야 할 방법에 대해 책만큼 심각하게 논의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기껏해야 그 작품을 더 잘 즐기기 위한 요령으로써의 얘기들 이상은 없다. 그러나 책만 유독 이렇게 해야만 한다, 라는 일종에 마치 그게 법칙이라도 되는 양 정해진 룰이 많다. 불필요한 울타리이다. 리뷰도 마찬가지다. 좋은 리뷰? 물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써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쓰는 이가 프로가 아닌 다음에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본인이 행복하기 위해서, 혹은 줄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즉,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본인이 찾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남들이 짜 놓은 틀에 들어가기를 원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틀에 맞추어야 그게 바로 좋은 상품인 것마냥 얘기한다. 자유로울수 있는 권리를 줘도 울타리로 들어가려고 하고, 울타리를 짜 놓으면 또 그게 문제라고 말한다. 그들은 평생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준이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 방황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철학, 미술, 음악, 영화, 문학, 과학, 기타 모든 요소에 우선 하는게 무엇인가. 바로 보다 나은 삶이다. 그 하나를 위해 앞서 나열한 분야들이 발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의 순서가 뒤바뀌는 순간, 끌려가게 될 것이다. 현명해지려고 멍청한 삶을 사는 어이없는 경우가 되겠다. 오늘 멍청한 삶에 투자하면서 내일 현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책은 그저, 책일 뿐이다. 나가서 친구들과 놀 시기에 책만 보는 것은 앉아서 게임만 하는 경우와 별다를 거 없다. 오히려 게임만 하는 아이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착각은 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활자가 지능에 미치는 효과라든가 하는 미세한 부분은 말하지 않겠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굉장히 여러가지이고 그중 책이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지식이 곧바로 지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삶을 진지하게 상대하는 용기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하나의 좋은 표본이 될 것이다.     

     그 많은 방법중에 유난히 책만 더 높은 가치를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영화를 보듯, 음악을 듣듯, 여행을 하듯, 책도 그렇게 대하면 그만이다. 그게 시작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가깝게 책을 느낄 때 책도 책으로써의 부담감을 덜 수 있고 적당한 평가를 받으며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것이라고 의무감을 갖는다고 해서 더 많은 책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뭐든지 자발적인 인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상 강력한 힘이 있겠는가. 책을 책 이상 무슨 올바른 의미를 따지고 드는 자체가 불필요한 과정이고 그것은 오로지 책 말고는 아는 바가 없는, 그래서 마치 인생의 유일한 솔루션이 책밖에 없다고 여기는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인물들이나 그러는 행동이다.

      인문 철학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고, 추리 판타지 소설은 소품이고, 고전을 읽어야 지혜가 생기고, 역사를 알아야 하고, 느리게 읽어야 하고, 정독을 해야 하고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아직 인생의 단면밖에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다양한 경험이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 할 수 있으면 다 하는게 좋고, 다 할 수 없으면 본인이 하고 싶은 걸하면 된다. 그래야 나중에 시간낭비했다는 생각이라도 안 하지. 인간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때가 되면 본인이 알아서 필요한 걸 섭취하게 된다.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를 느낄 때가 온다는 얘기이다.

      느리게 읽어야 할 책이 있고, 빠르게 읽어야 할 책이 있고 정독해야 할 게 있고 반대인 게 있고 당연히 그런 것이다. 거기서 뭐 하나의 정답적인 방법을 찾는다는 자체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 얘기이겠는가. 내가 아는 절륜한 내공을 지닌 어르신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단편적인 정답을 내려 말하는 양반들이 없다. 항상 먼저 전제 조건을 확인하는 것이다. 환경 말이다. 그 중요한 조건을 무시한 채 뭐는 이렇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당연히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조합을 중요시 한다. 반대로 앞서 말한 책에 편견을 마치 신앙처럼 설파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경험이 미숙한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더 단편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많이 보았다. 점점 더 우물안에 개구리가 된다고나 할까? 삶의 다양한 요소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로지 책만으로 인생을 깨우친 사람들이 항상 책의 대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많은 선구자들이 그들과 같이 책을 권하지만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주,부의 구별이다.

 

      나는 책에서 어떤 특별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 자세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편한 마음으로 즐기자고 봐도 느낄 건 다 느끼고 받아들일 건 다 받아들인다. 마치 무슨 시험 준비하듯 읽는다고 해서 더 많은 걸 깨닫지는 않을 거란 얘기이다. 얻게 될 것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된다. 판타지를 보다가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여행을 하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읽어야 한다니까, 오로지 그렇다니까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1년내내 들고 있고 그러면서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시간 낭비를 할 이유가 없다. 반면 이해하고 그게 정말 재미있으면 그걸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어려웠던 철학서들이 삶에 다양한 경험의 토대없이 100% 이해하기란 게 불가능할 거로 여겨진다. 경험을 하고 다시 읽었을 때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이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차피 시간이 지니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때가 되어 십분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부터 100일씩 고민할 이유가 없다. 100일을 고민하느라 놓친 일 중에는 세월이 흐르면 하지 못하게 될 일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땐 그게 더 중요하다. 그 경험이 결국 훗날 더 좋은 책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즐거운 놀이 도구의 한 방편 이상은 아니니, 거기에 이상한 의미를 추가로 달아 자신의 지식을 합리화할 필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년 250권을 읽는 것이 내세울 일도,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그 이하 혹은 이 이상도 마찬가지고 또 그런 이를 보면서, 우와 라고 감탄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나는 단지 지금의 나에 삶에 있어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독서인 것이고 그 이전에 그보다 재미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놀이도 해보았고 새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할 나이가 되었고 안정된 생활에서 가장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게 독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3살 어린아이도 그 아이가 좋아하는 건 1년 내내 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게 대단하다는 것 자체가 편견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굳이 좋은 평가를 하자면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그렇게 꾸준히 한다는 성실성에 대한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좀 오버라는 게 내 생각이다. 

      책은 읽고 싶으면 읽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책보다 더 좋은 게 많고 그걸 찾았다면 그걸 하면 된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딱히 그런 게 없다면 읽어서도 나쁠 게 없는 것이니 읽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마는 정도다. 책이 어떤 대단한 인생의 깨우침을 줄거라는 편견부터 버리자. 본인이 어떤 일에 무슨 깨달음을 얻는다면 본인 내면의 자아가 그런 변화를 깨달을 준비가 됐기 때문인 것이다. 그 매개가 무엇이 됐든 말이다. 준비도 안된 자아에게 책이 난데없이 엄청난 지혜를 주는 일이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없다. 

      예전 개그 프로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필이 충만할 때, 그때 하란 말이야."  

  

b******k 2009.02.06.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책속의 책, 을 찾아 읽다(8.15~8.22)
"책속의 책, 을 찾아 읽다(8.15~8.22)" 내용보기
책을 읽다보면,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마치 전작주의자처럼 한 작가의 책을 모조리 섭렵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작가가 언급한 작가들의 책을 거슬러 올라 읽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인물에 대해 읽다가 그 인물이 좋아하는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책들을 찾아읽기도 한다. 책을 선택하게 되는 길은 이처럼 한 길로 쭉 따라가며 길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책속의 책, 을 찾아 읽다(8.15~8.22)" 내용보기

책을 읽다보면,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마치 전작주의자처럼 한 작가의 책을 모조리 섭렵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작가가 언급한 작가들의 책을 거슬러 올라 읽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인물에 대해 읽다가 그 인물이 좋아하는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책들을 찾아읽기도 한다.

책을 선택하게 되는 길은 이처럼 한 길로 쭉 따라가며 길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책속의 책을 탐색하면서 옆길로 방대해지기도 한다.

그런 나의 책읽기 성향중 이 책은 책속의 책,읽기에 속한 책이다. 

이 책은 김무곤의 <종이책 읽기를 권함>을 읽으며 메모해 둔 책목록에 있던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어떤 책을 읽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좀 시시한 책일 수도 있다. 

세상의 많은 흥미거리들로 인해 한참 뒤로 밀려나 있는 '책',  

책읽기를 즐기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하면 흥미진진한 '책'속의 세상으로 인도(!)하여 책읽기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해 쓴 내용이 중점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는,

아이들이 책읽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멀리 하는 세태를 이야기하면서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책을 읽는 모습을 "낱말들이 안락사를 당하는 말처럼 차례로 쓰러져간다"고 묘사한다.

책읽기보다는 텔레비젼 보기를 훨씬 좋아하는 아이들은 십년 전의 프랑스에도 여전히 많았고

그 아이들을 어떻게 책읽기에 끌어들이고

급기야 어떻게 스스로 책속에 빠져들게 할 수 있는가를 '소설처럼' 쓰고 있다.

 

다니엘 페나크가,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꼽는 것은 

책을 읽어주는 행위이다.

심지어 대학 강의실에서도 교수가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대목이 있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단,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부모의 금기사항이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해 묻지 않기다, 특히  분석하며 들이대지 않기다. 

책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장 속에서 펼쳐지는 그 소리없는 찬란함에 빠져들 수" 있도록 그대로 두다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책 속의 길을 찾아나설 것이라고 다니엘 페나크는 장담한다.

 

주로 아이들(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책과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을 책의 세상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에 대한 내용들은 그럭저럭 읽었는데.

다니엘 페나크가,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라 하여

책을 읽는 모든 이들-그리고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있으니 책을 읽지 않는 이들도 모조리 포함하여

허용하는 열가지 권리는 의미있게 읽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그렇게 되어지던 행위들을

다니엘 페나크가 '권리'로 까지 격상시켜 언급해주니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시원한 기분이었다.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나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과정을 '소설처럼' 쓴 책이고, 나도 그냥 '소설처럼' 읽었다.

 

***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를 옮겨본다.

다니엘 페나크는 강조한다.

"만일 우리의 아들딸이, 청소년들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그들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해주어야 한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우선 명기할 점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매일같이 일상속에서 책을 읽지 않을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볼 일이 많아서일게다.

책으로부터 소외 된다는 것은-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을 책일지라도- 그보다 더한 고독은 없을 만큼 절대적인 고독이자 크나큰 슬픔이다.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나는 오로지 나타샤의 전심이 너무도 궁금하여 책의 사분의 삼을 그냥 건너뛰었다.

만약에 아이들이 <모비딕>을 읽고 싶은데 벨빌이 고래 사냥의 장비며 기술을 한도 끝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번번이 도중하차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읽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 대목을 건너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자청한 이런 식의 고집스런 권태는 결코 의무의 차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자가 누리는 즐거움의 일환인 것이다.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책장 한구석에 밀쳐두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는가. '성숙'이란 개념은 독서에 관한 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작품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는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우리는 그저 반복하여 읽는 즐거움,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친밀감을 새삼 확인하려고 다시 읽는다.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분명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소설들은 대개 후자일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의 시기까지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가리지 않고 마구 뒤섞어 읽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파스테르나크가 더 좋아지기 시작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욕구가 '좋은'책을 더 자주 찾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우리는 차츰 작가들을, 글을 찾아 나서게 된다.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보바리즘'이란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앞서 말한 바로 그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예전에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들에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것에 감동할 수 있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에 더없는 감동을 받는다.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난 척하던 선생이여, 자리에 앉으라, 나는 당당히 말하노라.

변기통에 쭈그리고 앉아 고골리를 다 읽었노라고.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나는 중간중간 골라 읽기를 밥 먹듯 한다.

우리는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들고 아무 데나 펼쳐서 우리에세 허용된 잠시 동안이나마 책에 빠져들 자유가 있다.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리내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큰 소리로 글을 불러주며 책을 썼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란 무엇보다도 말이 빚어내는 소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나에게 읽을거리를 건네주곤 하던 어른들은 늘 자신의 권위보다는 책을 앞세웠으며, 내가 이해한 것을 굳이 시시콜콜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c*******7 2013.08.24.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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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라. 원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즐겁게.
"읽어라. 원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즐겁게." 내용보기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 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따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
"읽어라. 원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즐겁게." 내용보기

인간은 살아 있기 때문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있기에 글을 쓴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기에 모여서 산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에게 동반자가 되어 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따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자리도,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옭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들은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 다니엘 페나크

 

*

책 읽는 인간. 그건 지금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나를 우리를 명명하는 또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이유로 책을 들고 있다.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들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시간을 죽여보려고?

시간을 알뜰히 써보기 위해서? 무식을 감추기 위해? 아니라면 유식을 티내기 위해?

 

가끔은 지겹도록 말안든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기 위해 책을 집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외로움을 외롭지 않은 척 가장하기 위해 책을 집어 들기도 하고,

종종 나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인간을 만나기 위해 책을 펼쳐들며,

어쩌다가 한번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른이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책을 집어드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책이 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책은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책이 우리에게 무엇이기 때문인가?

동화도 소설도 모두 유명한 다니엘 페낙의 이 책은 책읽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리하게 해준다.

그것도 즐겁게 신나게 읽었던 책읽기에 대해서. 특히 재미있었던 건 소리내어 책읽기. 초등학교 이후 우리는 언제 소리내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던가. ㅎㅎ

쫓기듯이 책을 읽지 말고, 공부나 강요때문에 읽지 말고, 스스로 즐겁게 읽으라고 말한다. 만화가들은 만화에 관해 그리고, 영화인들은 영화에 대해 찍고, 시인은 시에 대해 노래하고 음악가는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설가는 소설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 왜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게 되면 자신이 보인다. 이 책은 나에게 책읽는 나를 생각하게 한다. 

책 읽는 나는 나를 슬프게 하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하고, 괴롭게 하기도 하며,

짜증나게 하기도 하고, 행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 읽는 인간과 책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

책 읽는 인간. 그건 나를 명명하는 또다른 이름이다.

여기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 다락방서 책 읽는 허뭄   

 

 

g*****6 2008.04.2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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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교육에 관한 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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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법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 읽으며 깜짝 놀랐다. 독서교육에 관한 책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나와서. 수필이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읽다보니 혹시 이거 소설인가 또 한번 놀랐다. 소설같은 수필. 아이들의 독서 교육에 관해 얼마나 고민하였으면 이런 멋진 책을 만들어 냈을까.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인문독서를 많이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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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법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 읽으며 깜짝 놀랐다. 독서교육에 관한 책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나와서. 수필이라 생각하며 읽었는데 읽다보니 혹시 이거 소설인가 또 한번 놀랐다. 소설같은 수필. 아이들의 독서 교육에 관해 얼마나 고민하였으면 이런 멋진 책을 만들어 냈을까.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인문독서를 많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럽다 생각했다. 얼마나 환상적인 교실 모습일까. 수업 내용은 어떨까 하며 국영수에 푹 빠져 그저 성적 챙기고 대학가기에나 급급한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 보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커리큘럼과 실제 학생들은 다르구나를 새삼 느꼈다. 완벽한 커리큘럼이 있어도 그걸 수행해내는 학생이나 교사는 어느나라 사람이건 비슷하다는 걸. 책 속 프랑스에서도 학생들은 두꺼운 책을 보며 위압감을 느끼고 지겨운 내용에 질려하고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며 한탄하고ㅋㅋ 

 

 어린 시절 유치하고 시류에 편승한 책을 읽기만 하더라도 걱정할 건 없다. 어른들이 보기엔 걱정스러운 책만 읽는다해도 그 책들이 언젠가 더 좋은 책, 진실로 좋은 책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어 준다. 우물을 처음 파기 시작할 때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다. 이 곳 저 곳 파다보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이 책과 저 책 사이를 넘나 들다 보면 맥을 찾아 내고 어떤 책의 길로 즐기며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세상 모든 어른들의 공통 걱정거리 중 하나가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걸 보며 왠지 안도하며 웃음이 나왔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냥 이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것, 그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안다면 그녀가 사랑받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외모만큼이나 책으로 속을 꽉 채워 볼 일이다.

 이렇게라도 저렇게라도 아무렇게라도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다니엘 페나크님의 말이 귓전에 울린다. 건너뛰며 읽어도 되고 중간에 아무데나 펼치고 읽어도 되고 이 책 저 책 수준 신경쓰지말고 그냥 읽다 보면 도약하니 그냥 읽기나 하라는. 

 

n*****8 2019.03.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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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용기를 가져 볼께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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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표현된 지혜로움에 감탄하기 보다는 그 지혜가 자신의 것인 양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책의 비밀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 속에 들어있는 경이로움을 찬양하기로 맹세하고 사원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p.124)   독서를 하면서 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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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표현된 지혜로움에 감탄하기 보다는 그 지혜가 자신의 것인 양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책의 비밀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책 속에 들어있는 경이로움을 찬양하기로 맹세하고 사원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p.124)

 

독서를 하면서 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이다.  (p.184)

 

인간은 살아있기 때문에 살 집을 짓는다. 하지만 인간이 글을 쓰는 것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리지어 다니는 본능이 있어서 모여 살지만 결국 혼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p.236) 

 

나는 지적 허영심에 책을 읽는다. 아는 체하기 위해서,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많이 알고 싶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책을 읽는다. 자아를 알기 위해 혹는 내면과 삶을 보다 긴밀하게 하기 위해서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책이 좋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책을 좋아하세요?' 혹 '책을 많이 읽으세요?' 라고 물으면 선뜻 '네'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그건 아마도 '고상하고 지적인 사람'의 역할을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대답을 매끄럽게 하지 못하거나 거리가 먼 대답을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나는 어색하게 '조금요.'라고 대답해버린다. 목적이 불순해서인가 자신있게 좋아한다 말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책 속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기 보다 그 지혜가 내 것인양 떠들고 다니고 싶었고, 책 속에 있는 경이로움을 찬양하기로 맹세하고 사원을 굳게 지키려는 사람에게 보이는 경직이 나에게도 보였다.

 

어릴 때 책을 좋아했다. 자기전에 늘 머리맡에 두고 잠이 안올 때마다 그것들을 읽었다. 그땐 정말 책을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 같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냥 재밌으니깐, 즐거우니깐, 잠이 잘 오니깐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책에 대해 이야기해 봐바.'라는 말들이 부담스러웠던 거다.

 

여기선 말한다.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책을 읽고 나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이 책을 읽고 조금 용기가 생겼다. 전에 보다는 자신있게 '책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c********3 2013.02.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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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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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 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어디선가 들어 본 내용이 아닐는지.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트의 <소설처럼>은 소설에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내용보기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 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어디선가 들어 본 내용이 아닐는지.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트의 <소설처럼>은 소설에 관한 책이 아니다.

작가는 책읽기, 혹은 책을 읽어주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책과 책읽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은 정확하게 5년 전 이맘때 처음 읽었다.

동화읽는 어른 모임에서 누군가 이 책을 권했고 "의무적으로"읽었다.

(이 책에서 수도없이 역설하는 것처럼) 강요된 책읽기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대신 위에 써 놓은 10가지 독자의 권리는 메모를 해 두었다.

아이들의 자발적 책읽기를 바라는 모임의 취지와 딱 들어맞는 내용이 아닌가

그 후로  10가지 독자의 권리를 인용한 글을 종종 보았다.

<소설처럼>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는 오로지 이 부분만,

지금 생각해 보니 8번에 해당하는 권리일 수도 있겠다. 필요한 부분만 군데군데 읽을 권리말이다.

 

시간이 흐른 뒤 나의 노예가 된(p.183을 읽어보라. 책은 일단 나의 소유가 되면 온갖 수난을 겪게된다.몇 년 동안 어두운 책장 구석에 감금당하는 고통을 감수하는 노예와 다를바가 없다.) 이 책을 풀어 주었다.

5년이라는 시간은 독자로서의 나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스스로 선택한 책읽기는 정말 좋았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그 참맛을 느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나는 줄을 그어가며 중요한 대목이 있는 페이지는 접는 고문행위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읽어 내려갔다.

혼자 읽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5년 전 나에게 이 책을 권한 사람이 저질렀던 잘못을 똑같이 하고 말았다. 모임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심지어 토론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권리를 침해한 꼴이다.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책 읽은 후 가장 하기 싫어하는 10번째 권리, 책을 읽은 후 아무 말 하지 않을 권리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자녀들의 책읽기에 고민하는 부모들,

그보다는 자신의 책읽기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고 싶은 사람들,

무엇보다도 어렸들 적 학교에서 강요하는 책읽기로 인해 독서의 즐거움을 뺴앗긴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책의 앞부분이 도데체 무슨 이야기인지 작가는 왜 이렇게 횡설수설하는지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면 건너 뛰면서 읽어도 된다.

<전쟁과 평화>를 읽듯이 말이다.(p.198  수십장 씩 이어지는 전투장면은 가차없이 건너뛰면서 나타샤가 나오는 부분만 골라 읽는 것처럼, 나는 정말 이렇게 읽었다!!)

 

첵은 아주 작다.

어디나 데리고 다니면서 틈틈히 읽기에 딱 알맞는 크기이다.

책은 아주 가볍다.

읽고 난 후의 내 마음도 가벼웠다.

지금까지 독서를 하면서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졌고,

아이들의 책읽기에 관한 부모의 의무감도 한결 가벼워 졌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로얄 u******1 2010.07.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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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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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한 지인이 '완소' 책이라고 추천해서였다. 단지 '완소책'까지만 듣고 다른 정보는 별달리 찾아보지 않았기에 기억속에 희미하게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한 책카페의 독서토론 모임 도서로 지정되면서,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미 읽은 한국 소설 한 권과, 이 책이 2월달 토론 도서였기에, 일단 구입했다.(역시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내용보기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한 지인이 '완소' 책이라고 추천해서였다. 단지 '완소책'까지만 듣고 다른 정보는 별달리 찾아보지 않았기에 기억속에 희미하게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한 책카페의 독서토론 모임 도서로 지정되면서,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미 읽은 한국 소설 한 권과, 이 책이 2월달 토론 도서였기에, 일단 구입했다.(역시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책 뒷표지의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이 책이 나에게도 '완소×100'쯤 될 책이라는 예감이!(그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나는 소설을 그냥 소설로 보지 못한다. 이 책과 함께 2월 토론 도서로 지정된 <위험한 독서>에 나온 내용을 빌리자면 이렇다.

  '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중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의 폐해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지 책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경험인가, 저것은 작가의 상상인가.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을 읽어내지 못했다.'(김경욱, <위험한 독서> 22쪽)

  딱 내 얘기가 아닌가! 나는 이 글귀에 밑줄을 백 번이라도 긋고 싶을 만큼 깊이 동감했다.(결국은 아직 '초보적인 독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한편으론 씁쓸함도.)

  내 딱한 처지를 정확히 짚어주는 글을 하나 더.

  '즉 소설은 정보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지산 씨는 성암사니, 스님네들의 생활이니 하면서 제게 사실의 묘사인가라는 질문을 하시는데요, 소설은 소설의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고는 무관합니다. 이 문제는 작가의 성실성과도 상관이 없구요. ... 소설은 공유할 만한 정보도 아니며 뉴스도 아닙니다. 다만 현실을 작가를 통하여 반영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자꾸만 현실에 종속시키지 말란 말입니다.'(김연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346~347쪽)

  '초보적인 독자'인 나는 소설의 주인공에 작가를 오버랩 시키느라, 또는 소설 속의 내용이 사실인가, 작가가 충분한 조사 없이 '엉터리로' 쓴 것은 아닌가, 고민하느라 소설을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고 만다. (고백하건데, 몇 년 전에 한 역사 소설을 펴낸 작가가 그 주인공과 연관된 대단히 중요한 곳을 가보지도 않고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그 책 읽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 부끄럽다.)

 

  <소설처럼>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얘기가 너무 길었는데, 내가 어떤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을 뭐라고 분류하면 좋을지 도움을 받고자 '네이버책'에서 책 정보를 찾아보니, '책 홈 > 분야별 책찾기 > 언론/미디어/광고 > 문헌정보학 > 독서의 기술'에 있다.  ('독서의 기술'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분류명 그대로, 이 책은 '독서의 기술'을 일러주는 책이다. '기술'을 알려주는 책은 책인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소설인지, 산문인지 그런 형식을 빌려 줄줄줄 늘어놓는다. '책 읽기'에 관한 내용을.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법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하다'라든가 '꿈꾸다' 같은 동사들처럼, '읽다'는 명령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15쪽)

  "사랑해라!" "꿈을 가져라!"라고 명령할 수 없듯이, "책을 읽어라!"라는 명령문도 통하지 않는다. 거부 반응을 심하게 일으키니까. 책은 누군가 읽으라고 해서 억지로 읽히는 게 아니니까. 이 책이 '독서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이러저러 해라,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연금술사의 탄생'에서는 아이들이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쳐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고, 책을 좋아하게 되며, 다시 책을 싫어하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맛깔스런 입담으로 들려주고 있다.(어찌나 재미나게 들려주는지, 이 작가의 책을 꼭 더 읽어보리라 다짐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61~61쪽)

 

  다음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에서는 제목 그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지만, 역시 강압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떠어떠한 이유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공통된 생각은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한 책읽기를 할 것인지 등을, 들려준다.(편안하게 읽는 한 편의 수필 같다. 나는 이 책의 분류가 '에세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더러는 책은 전혀 읽지 않지만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부모들도 있다. 또 소설은 읽지 않되, 실용서나 수필집, 전문 서적, 전기며 역사책은 읽는다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눈을 번뜩여가며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책을 탐독하는 부모들도 있다. '세월의 검증보다 더 정확한 비평은 없다'라는 신조 아래 고전만을 섭렵한다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중년에 이르러 읽었던 책들을 다시금 펼쳐 읽는 부모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고자 주로 최신간을 읽는다는 부모들도 있다.

  어쨌든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모두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정말, 사람마다 책 읽는 이유도 다양하다!)

 

  그 다음엔, '읽을거리를 주어라'이다. 여기에는 책 읽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등장한다. "책 읽어줄 나이는 지났다"고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잠자코 들으라며 선생님이 읽어준 책은 <향수>이다. 여기까지면 된다. 아이들은 이미 소설의 다음 내용이나, 깜빡 조느라 못 들은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고, 안 읽고 못배길테니까. 이후에 아이들 입에서는 이런 책 제목들이 줄줄이 나온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백 년 동안의 고독> <자기 앞의 생> <반쪼가리의 자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가 한 일이라곤 거의 없다. ... 단지 아이들은 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어떻게 읽든......_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이다. '독자의 권리'라니, 그런 권리가 있는 줄 몰랐다. 여기에서 말하는 10가지 '독자의 권리'란 이렇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보기만 해도 정말 황홀한 '독자의 권리'가 아닌가! 이 책에서 가장 내 심장을 강하게 뛰게 한 부분이자, 모든 내용을 한 글자라도 놓칠 새라, 머리에 새겨 놓을 듯이 집중해서 읽기도 한 부분이다. 차마 어느 부분부분 떼어내 옮기기도 힘들다. (책 후반을 아주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을 지경이니까!)

 

  이 책을 덮을 때 즈음,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 넘쳐났다. 책에 대한 사랑,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한 사랑, 책을 읽어주는 행위에 대한 사랑,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훌륭한 책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 나와 책과의 사이를 한층 더 가깝게 해주는 너무나도 멋진 책이었다. 그런데 다소 엉뚱한 쪽으로 결론을 지으며 마무리해야겠다. 내내 유쾌하게 이 책을 읽다가 그만 눈물이 핑 돌아버린 한 구절이 있었다.

  '...책이란 더도 덜도 아닌 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닭만큼 덧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비되지 못한 닭이 반품되듯, '팔리지 않는' 책은 즉시 종이 재생 공장으로 보내져, 한번 읽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187쪽)

  세상에, 이런 비참하고 슬픈 죽음이라니! 이 세상에 '팔리지 못한 닭'처럼 종이 재생 공장으로 반품되는 책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책들은 소중하니까요." (물론, 닭들도 다 팔렸으면 좋겠다...)

j******o 2009.02.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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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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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조그맣고 무겁지도 않고 가격도 저렴하고. 내가 좋아하는 책의 외형적인 이상형이다. 그렇다면 내용은? 완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첫번째 읽었을 때는 리뷰를 남기지 않았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리뷰를 쓰지 않으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리뷰를 남기기로 한다.   제목이 <소설처럼>이라서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굳이 장르를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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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도 조그맣고 무겁지도 않고 가격도 저렴하고. 내가 좋아하는 책의 외형적인 이상형이다. 그렇다면 내용은? 완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첫번째 읽었을 때는 리뷰를 남기지 않았고 이번이 두번째인데 리뷰를 쓰지 않으면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리뷰를 남기기로 한다.

 

제목이 <소설처럼>이라서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에세이정도로 구분할 수 있지 싶다. 제목의 소설처럼의 의미는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는 의미이다. 즉 문학을 이리저리 자로 재고 다 읽기도 전에 한문장씩 난도질하지 말고 무릇 있는 그대로 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유아부터 청소년들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독서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해, 유머스럽고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설정으로 어른들의 책읽기에 대한 강요를 무색하게 만든다.

 

우선 저자는 우리가 책을 소리내어 읽어주곤 하던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도록 한다.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더 읽어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 예뻐서 읽어주고 또 읽어주던 시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느새 우리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귀찮아하게 되고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마자 아이 스스로 책을 읽을 것을 강요한다. 이런 상태로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고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하는 난감한 상황을 결국 다른 아이의 독후감을 베끼는 것으로 해결한다. 도대체 왜 그토록 재미있어하던 독서가 억지로 해야만 하는 고역으로 전략해버린 것인가? 그건 순전히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이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온전히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한줄 읽을 때마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텔레비젼을 보지 못하는 벌을 주기까지 한다. 그렇다. 텔레비젼이 보상이라는 지위로 격상됨에 따라 독서는 자연스레 억지로 해야만 하는 고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등교사이면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렇게 독서 기피증이 생긴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는지 자신의 책읽기 지도의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책 읽기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책 읽기의 즐거움을 교사는 학생들과 공유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아주 두껍게 보이는 책 한권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책의 두께에 질려 선생님의 의도를 의심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아이들이 책 읽기를 기피하는 것은 읽어도 모를까봐 지레 겁을 먹고 소설을 소설 그대로 읽지 않고 해부해야 할 대상으로만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원하는 갈구를 채워준다면 아이들 스스로 " 억수같이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잦아들게 만드는 책이라는 은신처, 귀를 때릴듯한 전철의 진동음마저 아득하게 만드는 책장 속에서 펼쳐지는 그 소리없는 찬란함 " (106p)의 세상인 독서삼매경에 빠져들게 된다고 자신한다.

 

마지막에 무엇을 어떻게 읽든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하이라이트이다. 무엇을 어떻게 읽든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건너뛰며 읽을 권리/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책을 다시 읽을 권리/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보바리즘을 누릴 권리/아무데서나 읽을 권리/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소리내서 읽을 권리/읽고나서 아무말도 하지 않을 권리

 

이 책을 읽고 나면 책 읽기가 어떤 목적이나 수단이 아닌 그저 무상의 행위이며 저자가 처음에 말했듯이 '읽다'라는 동사는 명령문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동사라는 이유가 저절로 이해되게 될 것이다. 별 10개쯤 주고 싶은 책!!!

YES마니아 : 로얄 l********d 2009.01.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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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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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교육자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을 그야말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했던 다양한 형태의 고민들이 증식되면서,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라는 책읽기의 근본적인 질문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책을 읽는데는 수많은 이유들이 읽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취미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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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의 교육자이자 작가인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을 그야말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했던 다양한 형태의 고민들이 증식되면서, 왜 우리는 책을 읽는가라는 책읽기의 근본적인 질문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가 책을 읽는데는 수많은 이유들이 읽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취미이기 때문에, 혹은 심심해서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부터 읽어서 내 것이 되기 전엔 한낱 종이뭉치일 수밖에 없는 책이, 책읽기의 과정이라는 지난한 의식을 통해 그 책을 쓴 작가와 개인적 친밀함이 더해지면서 교제와 소통을 이루어지고 간접지식을 쌓아 개인의 영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는 원대한 포부에 이르기까지 몇 만 가지 이유들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보태서,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허영과 과시욕의 발로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죽어라 읽는 사람이든 일 년에 책이라고는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동의하는 바가 있으니 그건 바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니엘 페나크는 ‘읽다’라는 동사만큼 전적인 자율성을 담보하고 있는 동사가 없다고 이 책을 통해 역설한다. 물론,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책을 ‘읽어라’라는 강압적 변형의 명령을 듣기도 하지만, 타의에 의한 책읽기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다. 가장 극단적인 폐해는 그로 인해, 책읽기에 신물을 내면서 책을 아주 안 읽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책읽기, 다시 말해서 독서가 교육의 한 방편이나 혹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처럼 입시의 한 과정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해 저자는 명백하게 경고장을 발부하고 있다. 오로지 책읽기는 책을 읽는다라는 자주적인 노력에 근거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성을 바탕으로 한 즐거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페나크는 책의 시작을 아직 글을 몰라 책을 읽을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책을 읽어 달라거나 혹은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모습으로, 책을 읽음으로써 발생하는 즐거움의 무상성에 대해 중요한 방점을 찍는다.

 

행복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아는 이라면 모름지기 그 즐거움을 혼자서 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인지상정이 아닌가.

 

간단하게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최근 나의 무지막지한 독서열에 신기해하시던 어머니가 책읽기의 즐거움에 동참하시기 시작하셨다. 대학시절 조교 형으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았던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를 근 10년 이상 걸려가며, 포기와 도전의 반복을 통해 결국 다 읽어낸 그 뿌듯했던 나의 자부심은 어머니 역시 고전하셨지만, 몇 달 만에 다 읽어내셨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고리끼의 <어머니>를 통해 자신감을 얻으신 어머니는 본격적인 책읽기의 즐거움에 오늘도 책을 읽고 계신다.

 

다니엘 페나크가 묘사한 대로, 과제로 책을 읽어야 하는 학생들이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의 페이지 수 전쟁을 벌이는 장면은 내가 책읽기를 하면서 느낀 것과 너무나 일치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지 않으면 다 읽은 책으로 간주하지 않는 개인적인 결벽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손에 잡은 책을 다 읽기 위해 끙끙대며 마치 생쌀을 씹어 가는 듯한 느낌으로 억지로 그렇게 책을 읽곤 하던 시간들이 페나크의 글들과 자연스럽게 공명하고 있었다.

 

역시 20년간 현장에서 교육자로 일한 베테랑 교사답게, 다니엘 페나크는 도무지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학생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하는 방법들을 실제 경험에 의거해서 그야말로 ‘소설처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소개된 그의 방법론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책읽기의 본질 다시 말해서 그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반드시 이 과정이 필요하다) 그 독자들을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현대 대량소비 사회에서 책만큼 소유한 사람이 절대권을 행사하는 물질도 없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책을 독서를 통해 독자와 소통을 하게 되면서 그 생명력을 얻게 되지만, 그 전에 종이뭉치였을 때는 정형화된 직각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라면 끓여 먹을 때 안성맞춤으로 펄펄 끓는 라면 냄비를 받치거나, 혹은 나른한 오후 수마(睡魔)의 강렬한 유혹에 시달릴 때 몇 권의 책을 집어다가 가차 없이 베개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종이뭉치 책을 읽어서 일단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형성된 끈끈한 유대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나만의 무형의 재산이 된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얻게 된, 그 무수한 상상과 감정들의 파노라마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나크는 책의 주인이자 소비자인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제 권리들에 대한 글로 <소설처럼>을 맺음한다. 모든 것에 대한 부인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출발한다고 했던가. 책을 읽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나의 개인적인 의사와는 반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권리 또 군데군데 골라 띄엄띄엄 읽을 권리 등이 차례로 소개가 된다. 그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권리 중의 하나는 바로 ‘책을 다시 읽을 권리’였다. 그것은 바로 페나크가 이 책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에 기초한 즐거움인 것이다.

 

책을 읽는데 있어서 시간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부족한 글을 맺고자 한다. 너무나 바쁜 우리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 너무나 인색하다. 그리고 책을 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대곤 한다. 사랑을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사랑을 하면 없는 시간도 나기 마련이다. 책을 사랑하면, 책 읽을 시간은 자연히 따라 오는 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항상 읽을 책을 손에 들고 다녀 보라.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고 펴보게 될 테니까.

h******1 2009.01.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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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즐거움에 빠져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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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어야 하나,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도대체 무엇을 읽어야 하나. 책을 읽어야 할, 읽고 있는,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책에 대해 하는 질문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정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 가령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등의 이유로 읽을 수 있다. 어떻게?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에 의하면 대세는 느리게 읽기다.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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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어야 하나,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도대체 무엇을 읽어야 하나. 책을 읽어야 할, 읽고 있는,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책에 대해 하는 질문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정답이 있을 수도 있겠다. 가령 책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등의 이유로 읽을 수 있다. 어떻게?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에 의하면 대세는 느리게 읽기다. 무엇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는 인문서를 읽어라, 고전을 읽어라 뭐 그런 말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이런 말들에 정말 동의하냐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건. 때로 위의 이유들이 맞아떨어질 때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책'이란 읽고 싶어 읽는 것이고, 이후의 목적이야 어찌됐건 그 바탕은 항상 '무상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요컨대 '책'에 있어 읽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면 그만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책에 있어 '무상성'만을 주장하는건 아니다. 단지 동물적 욕구가 없는 행동에 다른 이유를 붙인다한들 그 마음과 행동에 진정함이 깃들 수 있을까란 의문을 제기한 것 뿐이다. 왜 이렇게 재미없는 서두가 길어졌느냐 하면,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던 한 권의 작은 책 <소설처럼>(2004.문학과지성사)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근래 나오는 수많은 독서 관련 책들이 여러 방법론과 이유를 그럴싸하게 대고 있지만, 이 책은 근본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한다. 어린 시절 글자와 이야기에 빠졌던 즐거움으로. 즉 소설을 '소설처럼' 읽으라고 요구한다. 아니, 요구랄 것까지도 없다. 그저 툭툭 던져대는 이야기들만으로 저자는 우리를 과거로 던져놓는다. 단 한 순간이라도 '책' (혹은 활자)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경이로운 시간으로.

 

책은 4개의 목차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연금술사의 탄생' 에서는 아이가 이야기를 듣고, 글자를 깨우치고, 직접 책의 세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가 이야기의 세계에 입성하는 것을 연금술에 비유하다니, 로맨틱한 사람이다!). 책을 읽다 문득 생각에 빠진다. 지금은 당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나도 그 놀라운 시작의 시간이 있었을텐데! 마치 처음부터 잘 읽었다는 듯이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은 그 순간이 아쉬울뿐이다.

 

두번째 '책을 읽어야 한다' 에서는 시대(범람하는 영상 매체) 탓만을 하며 '책 만세!'만을 부르짖는 현실을 꼬집는다. 바로 여기서 오랜 시간 중등교사로 일하며 느껴온 그의 독서 교육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는데, 그 방법이란 '책 읽어주기'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책을 읽어준다고?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우리에게 있어 독서란 혼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동적인 행위로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책 읽어주기'란 '독서=어렵다'의 공식에서 벗어나 책과 화해하게 하는 가장 유용하고 색다른 방법이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세 번째 '읽을거리를 주어라' 에서는 읽어주기 방법을 통해 독서 세계에 입문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입시란 벽 앞에서 좌초된 아이들. 그러나 선생님이 읽어주는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향수'를 들으며 그들은 독서의 세계에 빠진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듣기'만 했을 뿐인데.

 

마지막, 드디어 ~읽을 권리, ~않을 권리, 즉 책에 대해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여러 권리가 나온 '무엇을 어떻게 읽든......' 이다. 10가지의 욕구가 나오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건너뛰며 읽을 권리' 와 '소리내서 읽을 권리'였다. 모르면, 다음이 궁금하면 건너 뛸 수도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인지 6학년때인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로서 쉽지 않은 3권짜리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나름 지루하고 어려웠던 '~백과사전' 부분은 죄다 빼놓고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부터 책에 대한 권리를 만끽하고 있던 셈이다.

 

'소리내서 읽을 권리' 또한 나를 중학교 시절 국어 시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국어 책 내용을 돌아가며 읽고, 틀리면 다음사람으로 넘어가는 규칙이었다. 조금이라도 많이 읽으려고 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내가 떠올라 웃고만다. 그깟 읽기에 집착하던 중학생의 모습이라니. 요즘도 가끔 소리내서 책을 읽는다. (여전히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건 속으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오자마자 나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존재가 되는 것 같았거든요." (220p) 활자 스스로 공간을 떠다니며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마지막 한 장. 잠시 멈춘다. 책을 마치는 아쉬움이 이렇게 몸서리치게 느껴진 적이 내 생애 몇 번이나 있었을까. 책에 글자 하나 안 적는 내가 "이 책이 나에게 오게된 건, 아, 운명이란 이럴 때 쓰는 단어일지도." 라는 같지도 않은 문장을 속표지에 적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권해준 이웃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 모두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나는 소설을 '소설처럼' 읽고 있는지. 책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일 수 있다. 그저 읽고 싶은 욕구에 몸을 맡기고 책에 대한 다양한 권리를 내세우며, 내 맘대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책에 푹 빠진 사람, 책과는 왠수진 사람, 책에 대해서 온갖 이유가 필요한 사람 모두 일독을 권한다.

 

 

 

 

 

 

YES마니아 : 골드 z*****x 2008.10.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