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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언어 가슴 아프게 읽었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부터 독자를 향해 거침없이 의식의 망치를 휘두른다. 자살이 불법이냐! 불법이 아닌데 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하는가! 하지만 그는 자살 찬성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의학과 의사로서 수많은 우울증 환자와 자살 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도대체 왜, 무엇이 사람들을 자살로 이끄는지, 그 막막한 질문과 사유를 통해 진실로 나아가고자 했을 뿐이다. 이 책에서 나는 자살이란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시도하며, 이를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과 슬픔이란 무엇인지 탐구한다. 자살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잘못일까? 자살에는 전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조력사에는 찬성할 수 있을까? (17) 나는 이 책이 한편으로는 반가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나는 자살관념을 가진 사람이었고, 실천자였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담과 가족치료를 공부하고 상담소를 운영한 반전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생명의 전화의 봉사자로 자살을 목전에 둔 사람의 전화를 받고 응대한 상담자였다. 그럼에도 이쪽과 저쪽에 서 있었던 그런 일들은 어느새 오래 전 일이 되어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독자로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이 책을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쉽지 않았다. 집 책상에 이 책이 제목을 하늘로 향한 채 꽤 오랜 기간 놓여 있었는데, 옆지기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는 감히 물어볼 수 없었고, 얘기를 꺼낼 수조차 없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누군가 자살로 행을 마감할 때면 으레 그렇듯, 리즈 고모의 죽음은 예상할 수 있었던 동시에 에 의외였다. 고모의 삶은 늘 힘겨웠다. 고모가 했던 일은 대부분 꼬여서 엉망이 됐다. 고모의 죽음이 의외였던 이유는 고모가 이전에는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얘기를 했던 적도, 해명을 남기지도 않았다. '왜'라는 의문은 유족에게 해결할 수 없는 상처가 된다. (19) 마침 얼마 전 남유하 작가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라는 책을 읽은 것은 매우 시의적절했고, 이 책의 내용 중 조력사에 대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안락사 기관 엑시트(EXIT)는 1982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회원 수는 15만5,000명에 달한다. 조력사 도입과 관련해 이 기관은 가장 성공한 곳 중 하나다. 기본적인 취지는 '하얀 가운의 신', 그러니까 의사들로부터 권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1985년 이래 EXIT는 조력 자살을 지원해 왔으며, 2022년에는 이 기관의 도움을 받아 1,125명이 죽음을 맞았다. 오늘날 스위스에서는 '이기적인 사유' 외 다른 사유가 있는 경우 개인이 죽도록 돕는 것이 허용되고 잇다. 이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도 마찬가지다.(30) 과연 얼마만한 질병의 고통을 참아야 우리는 잘 살아냈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래 전 '행복전도사'로 매스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삶의 의미를 부여했던 분이 암 투병의 힘듦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한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삶은 그것이 살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토대로 구축된다. 아니면 적어도 살아야 하는 것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모든 것에 의문이 제기되는 셈이다. (69) 삶에 대한 의미와 긍정성의 총량을 압도한 자살의 유혹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돌이킬 수 없다. 천국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현재의 고통 총량에 비견되지 않는다. 구약성경 <욥기>에 나오는 욥의 아내도 온갖 불행과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욥에게 당신의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우울증과 별개로 육체적인 고통은 삶의 연장을 못 견디게 한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고백이 결코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때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죽었다면 부모님은 자녀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살의 부국어는 침묵이다. 죽은 사람은 자신의 몸속에 자기의 동기를 숨긴 채 사라진다. 자살의 모(母)국어는 수치심이다. 만약 부(父)국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침묵일 것이다. 서로의 기억에 그렇게나 차이가 있는 것은 벌어진 일에 대해 그다지 얘기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책에서 저자는 '자살 관념'이라는 단어를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한다. 자살 관념이 있어야 자살에 대한 단계가 구체화된다. 그래서 저자는 많은 우울증 환자 등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자살 관념' 여부를 질문환다고 했다. 사람은 갑자기 뜬금없이 충동적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 관념을 가진 사람은 자살의 총량이 내부에 쌓일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린다. 총량이 넘쳐야 드디어 구체화에 대한 생각으로 들어간다.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자살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자살 관념과 함께 시작된다. ... 자살 관념이란 자살을 탈출구로 생각하는 것부터 직접 죽겠다는 더욱 강렬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자살 관념에 이어 자살 계획 수립이 이루어진다. 그런 다음 자살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죽음을 향해 논리적으로 한 발씩 다가가는 셈이다. (39) 자살은 무조건 막아야 하는가. 타인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기 때문에 자살은 잘못된 것인가. 아무도 여기에 정답을 제시할 순 없다. 저자의 말처럼 자살은 예견할 수 있으며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다. 나는 실행하기 며칠 전, 나를 좋아한다던 여직원과 저녁식사 데이트를 마지막으로 했다. 늘 입는 후줄근한 근무복을 벗고 평소와 다르게 정장을 갖춰입고 나갔다. 그 친구는 잠시 의아해했지만 내가 이 시간이 소중해서 그랬다는 말을 듣고 그저 환하게 웃어주었다. 물론 나중에 직장 상사로부터 그 신호를 눈치 못 챘냐고 핀잔을 듣기는 했다. 그럼에도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질문은 슬며시 고개를 든다. 바로 이 의문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온 가족을 죄책감의 수렁으로 빠뜨린다. 동시에 이 질문은 자살을 예견할 수 있으며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53)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자살 예방 단체에서 근무하는 많은 사람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권장한다. 이는 자살이 선택이 아니며, 다른 길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행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54) 이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장을 깊이 숙고하고 이해해주길 소망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저자의 글처럼 자살한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과, 자살을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살한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해서 자살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살을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 사람의 관점을 통해 봄으로써 선택으로 존중하는 것은, 자살을 일종의 심리적인 요인에서 기인한 실수로 보는 것과 차이가 있다. (55) 전 세계에서 매년 80만 명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전쟁과 살인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많다. 자살하는 사람 세 명 중 두 명은 남성이며, 남성의 자살 시도는 대체로 죽음으로 끝난다. (61) 자살은 전 세계에서 금기시되어 왔음에도, 모든 현대적인 인류 문화권에서 관찰되고 있다. 어떤 자살은 용납될 수 있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63) 어린 시절 내 삶의 불행은 그저 불행함의 최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역시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때는 우울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뿐이다. 자살하고자 하는 욕구는 많은 경우 심각한 우울증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 확실한 사람이 개입이 필요한 수준의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지 않은 경우는 무척 드물다. (91) 저자의 자살에 대한 탐구와 사회학적 의미는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반드시 자살과 관련된 사람,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은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곧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살의 언어>를 연구하고 조사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삶의 편에 설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본 자살은 고독하고 충격적이며 엉망진창이었다. 죽음을 맞은 자녀의 부모, 의사와 가까운 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은밀히 죽음을 맞이한 사람, 조금만 달랐더라면 계속해 삶을 이어 나갔을 무계획적인 죽음, 죽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 죽고 싶지는 않으나 사는 것이 너무 힘든 사람들. 나는 이런 경험을 도려내고, 그 모든 세월을 뒤로한 채 다른 사람이 죽도록 하는 데 동참할 수 없다. 나는 내 길을 택해야 한다. 내 길은 사람들이 치명적인 약물을 발견하도록 돕는 게 아니다. 나는 삶의 편에 설 것이다. (149) 대학원에서 상담복지 공부를 하면서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 로고테라피> 수업을 한 학기 동안 했다. 나치수용소에서 12월25일에 석방될 거라며 기다리던 동료가 12월25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급격하게 건강이 쇠락해 죽음을 맞이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실존 체험기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다. 의미가 사라질 때 사람은 죽는다. 아아, 지금 독거노인으로 거동 불편하여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요양보호사만 기다리며 혼자 살아가는 어머니는 내게 늘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냐'라는 말을 하신다. 우리가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에는 이점이 있다. 유의미함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삶을 더 나은 방식으로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며,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적인 현상으로서 유의미함을 느낀다는 것은 동시에 그 반대되는 상황, 즉 의미를 상실했을 때 취약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15) 하지만 저자는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의미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우리의 행위일 뿐,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된다. (231) "자살은 맑은 하늘에 날벼락처럼 벌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구름 낀 하늘에 벼락이 치는 것과 비슷하죠." (루네손, 261) 이 책은 이 땅에 숨어 살아가는 수많은 자살관념자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긍정의 세상으로 나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자살의 긍정이 아닌, 세상을 향한 긍정. 한 인간에 대한 존엄과 이해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살을 하려는 사람 마음속에 이제 더 이상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 필요가 없고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삶과 죽음 나아가 자살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인류 공동체의 의미를 더욱 확장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좋은 책, 한 번은 더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