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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한 이중적인 감정을 계속해서 느꼈다. 하나는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퇴락의 기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퇴락 속에서도 여전히 품격과 고귀함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 살리나 공작의 태도였다. 흔히 이 작품을 "몰락하는 귀족 사회의 초상"이라고 단정하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사회 계급의 쇠퇴를 기록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시대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를 보여주는 비극적이면서도 고요한 철학적 사색이라고 느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살리나 공작의 인물상이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려 안간힘 쓰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역사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주세페 가리발디와 통일 운동이 일으킨 파도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는 허망하게 무너지거나, 반대로 적극적으로 새 시대에 가담하지도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묘한 존경심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다. 마치 그는 역사의 거대한 무대에서 한 발 물러난 채, 단순히 증인이 되기를 자처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태도가 소설의 핵심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시대 변화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결국 인간은 그것을 지켜보면서 자기 나름의 품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의 조카 탄크레디가 보여주는 기민한 태도 역시 흥미로웠다. 그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귀족 계급의 몰락 속에서 재빨리 신흥 부르주아 세력과 손을 잡는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라고 생각했다. 변화가 필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변화의 수혜자가 결국 기존 권력을 갖고 있던 자들이라는 역설. 나는 이 장면에서 역사라는 것이 언제나 급격히 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기득권이 형태만 바꿔가며 살아남는 과정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진실을 떠올렸다. 이 점에서 『표범』은 단순히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기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와도 깊게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작품 속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공작의 내면 독백 장면들이었다. 그는 신앙심 깊은 가톨릭 귀족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육체적 본능과 죽음에 대한 집착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면서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신앙적 행위와 실제 내면에 차오르는 의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또한 젊은 여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육체적 욕망, 그러나 그것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아는 허무함. 이런 복잡한 심리 묘사가 나에겐 굉장히 진솔하게 다가왔다. 그는 단순히 “몰락하는 귀족”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보통의 인간이자, 자기 삶의 마지막을 인식하면서 고통스럽게 체념하는 한 노인으로 다가왔다. 나는 『표범』을 읽으며 유독 “죽음의 그림자”가 모든 장면에 깔려 있다고 느꼈다. 화려한 연회 장면도, 신분적 계산으로 가득한 결혼 장면도, 심지어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풍광마저도, 모두 쇠락과 끝남을 예고하는 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었다. 특히 후반부에서 공작이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은유였다. 한 사람의 육신이 사라지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귀족 사회라는 시대가 막을 내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꼭 공작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의 죽음 속에서 "나도 언젠가는 내 시대를 다 살고 사라지겠구나"라는 섬뜩한 자각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소설 전반이 굉장히 느린 호흡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거대한 전투 장면이나 정치적 격동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화와 내면 묘사, 사소한 사회적 의례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 느림은 처음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읽다 보면 그 느림 자체가 작품의 주제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변화가 아무리 급격해 보여도, 실제 인간의 삶은 여전히 식사, 산책, 사교, 연회 같은 일상적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의 거대한 물결도 결국 이런 사소한 삶의 결을 뚫고 들어와야만 현실이 된다. 나는 이 점에서 『표범』이 단순히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변화와 일상의 교차를 포착한 인간학적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시칠리아라는 공간의 묘사가 주는 무게감도 빼놓을 수 없다. 뜨거운 햇살, 사막 같은 건조함, 황량하면서도 장엄한 풍경. 그것은 곧 귀족 사회의 쇠락과 닮아 있었고, 동시에 인간 존재 자체의 덧없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시칠리아는 언제나 제국의 변방이었고, 권력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채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땅이었다. 이 공간적 특성이 공작의 존재와 겹치며, 한 개인과 한 지역이 공유하는 운명적 퇴락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공간 자체가 하나의 인물"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표범』이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단순히 귀족 사회의 몰락을 기록했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라는 이름의 필연과 그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다양한 태도를 섬세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탄크레디처럼 변화에 편승하여 살아남고, 어떤 이는 공작처럼 품위를 지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이는 신흥 세력처럼 탐욕스럽게 부상한다. 이 모든 모습이 결국 인간 사회의 반복되는 풍경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 나는 공작처럼 쇠락을 자각하면서도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혹은 탄크레디처럼 변화의 물결에 냉정하게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었다. 결국 『표범』은 나에게 “삶이란 결국 죽음을 향한 긴 준비이자,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무겁지만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모든 것이 변해도, 인간은 여전히 사랑하고, 욕망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사실을 되새기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시대를 넘어선다. 단순히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격변을 그린 소설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읽히며 사람들을 사색하게 만드는 보편적 고전이다. 나는 이 작품을 덮으며, 묘한 씁쓸함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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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으면 책임지쇼.. 고전에다 번역서라서 읽기 힘들지만 하루에 몇 장이라도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아요 역사적인 부분에서요.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 완독 할 거 같아서 천천히 읽고 있는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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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파드. 정말 전설같은 영화죠. 루키노 비스콘티의 천재성과 집요한 미적 추구가 거의 폭발적일 정도로 환상적인 작품. 학부 시절 영화를 봤는데 정말 화면 안으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어떤 황홀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나왔는데 어떻게 안 살 수 있겠어요... 사실 영화가 워낙 괴물같은 명작이고 개인적으론 영화를 먼저 접했기에 괜히 소설 원작을 보고 약간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네요. 원작 소설은 이것대로 참 대단한 작품이네요. 추가하자면 민음사 고유의 고전적 문체랄까? 번역투도 이 소설 분위기와 꽤 잘 어울립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되길 잘한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