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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내용보기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간 때는 6년전 일이다.지척에 두고도 마음만 있었지 실천하기는 참말 어려운 일이 바로 메어있는 삶을 두고 마음먹은 곳에 직접 간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가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그곳은 울퉁불퉁 바위가 불거져 나온 산자락 어딘가였는데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내용보기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간 때는 6년전 일이다.지척에 두고도 마음만 있었지 실천하기는 참말 어려운 일이 바로 메어있는 삶을 두고 마음먹은 곳에 직접 간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가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그곳은 울퉁불퉁 바위가 불거져 나온 산자락 어딘가였는데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르락내리락하기 참 힘든 지경이었다. 걸어 올라가며 나누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새 시대를 구상하던 한 인간을 어차피 죽이지 못하고 죽음이상으로 뭉갤려면 좀 더 험악하고 그 방법이 졸렬황당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역사서라 많은 서평들을 접하면서 꼭 한번 읽고 싶었고 이제 읽었으며 그 여운이 꽤 오래간다. 역사서이지만 심장이 쿵쾅대는  한 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깊은 한 인간의 얘기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실천 철학을 주장하며 세상과의 무한한 교류를 꿈꾸던 다산이 접했던 현실은 당쟁의 휘몰이속에서도 꿋꿋했으며 그의 곁엔 언제나 주군 정조가 함께 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정조임금의 정치적 개혁의 동반자로, 의혹에 쌓인 채 급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 정조임금 사후 개혁의 조선이 아닌 암흑과 어둠의 시대로 역행하는 시절에 처참하게 가문의 몰살을 겪어야했고 형제를 잃었으며 세상을 버리고 은둔해야만 했던 지독히도 외롭고 처절한 인간이었다. 선교지원을 통해서가 아닌 독자적인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조선만의 삶이 아닌 조선밖의 이치를 받아들이려는 사고의 전환이 좁은 세상속에서 이루어지려하지만 뿌리 깊이 굳어진 거대 노론벽파의 지키고자 하는 삶의 방식과 독단은 끈질긴 피의 정쟁으로 치닫는다.

조선후기 어둠의 시대에 안타깝게 희생되었던 인물중에 다산의 막내형인 정약종은 하늘에 속한 자로 죽는 순간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약용과 약전을 살리고 결국 순교하였다. 그의 신앙고백은 물론 삼위일체론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글들은 그 시대에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학을 숭상하며 제사의 형식과 신주를 해하는 일에 갈등을 겪은 다산은 끝내 신앙을 버리지만 하늘에 오른 약종못지않게 땅에 남아 은둔하면서도 후학을 위한 학문예찬과 다독의 열정을 불태우며 200서가 넘는 수많은 책들을 쓰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18년이란 세월을 숨죽이며 언젠가 이루어질  세상과의 또 다른 교류를 위해 행한 학문에의 열정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긍정적 에너지의 발산이라고 본다. 생각해보면 피비린내나는 암흑의 조선후기를 이겨낼 방도는 달리 없었을 것 같다. 빈곤한 시절이었지만 다산초당에서 펼친 후학양성과 글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치있는 삶의 자세도 배우게 한다.

시대가 이렇듯 혼란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는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다산이 학문과 씨름을 했다면 같은 시기 흑산도로 유배를 간 약전의 삶은 어부의 삶이었다. 다산 못지 않게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그런 삶보다는 어촌에서의 삶과 어부들과 일과를 함께 하며 최초의 해양생태보고서인 자선어보를 집필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인물들이 있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인물이 죽고 철학이 죽고 사고가 죽어버린 조선후기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면 참 우습지만 정조임금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안동 김씨세력들은 어찌 되었을까?

왕의 후사를 몰살하지 않았다면....망국의 깊은 한을 겪게 되었을까?

그렇게 안되었더라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b*******e 2011.01.20. 신고 공감 19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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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역사 시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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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최고의 개혁군주였던 정조치세와 그 사후, 개혁과 이성을 꿈꾸던 정약용 형제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역사에 적힌 몇 줄의 글귀가 아니라 펄펄 살아 숨쉬는 현실로 그려져 있다. 지배권력의 공격 속에 좌초된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정약용. 시대의 절망을 딛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 정약전. 고문 끝에 목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지켜낸 정약종. 그들의 미완의 꿈,
"형제의 역사 시대의 역사" 내용보기
조선조 최고의 개혁군주였던 정조치세와 그 사후, 개혁과 이성을 꿈꾸던 정약용 형제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역사에 적힌 몇 줄의 글귀가 아니라 펄펄 살아 숨쉬는 현실로 그려져 있다. 지배권력의 공격 속에 좌초된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정약용. 시대의 절망을 딛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 정약전. 고문 끝에 목이 잘리면서도 신앙을 지켜낸 정약종. 그들의 미완의 꿈, 배반당한 이상, 그럼에도 끝내 놓아버리지 못한 희망의 대서사시 (표지에서) 세자까지 뒤주에 가둬 죽게할 만큼 막강한 권력집단 노론벽파의 세상에서, 개혁의 열망으로 가득하나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 20년 넘게 정치를 해야했던 비운의 군주 정조와 그와 유일하게 소통한 정약용. 이상적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정조와 손잡은 남인들의 고난과 희망이 '1권 새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에서 펼쳐진다. 세계 최초로 자청하여 세례를 받고, 자생적 조직을 구축하고 순교까지 마다않는 조선의 천주교 역사의 시작과 함께 실학과 더불어 신문물로 받아들여, 교조가 되어버린 주자의 유학이 아닌 공맹의 유학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정약용과 정조의 눈물겨운 몸부림에 1권을 훌쩍 독파해버리고... 한국사 최대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시대의 비망록! 당대 현실에서 우러나온 실학과 선진 과학문물,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으로 침몰해가는 조선사회를 구명하려 했던 정약용 형제들의 역사와 지성의 파노라마! (표지에서) '2권 어둠의 시대'에서는 집권 20년이 지나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단죄하지 못하고 바랬던 개혁정치에 매진하지 못한채 울화로 고생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정조의 죽음에서부터, 가까스로 정계에 진출하여 그 이상을 펼쳐보이려 했던 남인들의 몰락과 죽음이 잔뜩 그려진다. 아아.... 이렇게 처절하고 눈물나는 역사서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역사서이면서 소설처럼 생생하게 그 당시의 정조와 정약용의 고민과 통분을 공감하고, 실록과 사극에서 감춰졌던 그들의 고난이 숨을 쉬며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역사는 살아가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이며, 몇 줄의 글과 기록이 아닌 그들의 꿈과 고민, 역경과 좌절을 호흡으로 읽어낼 때 비로소 감동으로 안타까움으로 교훈으로 분노로 되살아나는 법임을 이 책을 읽으며 실감한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중의 하나인 역사 이야기를 이리도 생생하게 되살려낸 저자는 그러고보니 내 책장에 진작부터 꽂혀있는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2]와 [오국사기1,2,3]을 지은 동일인이었다. 그 책들 모두 재미있게, 그리고 관심있게 읽긴 했지만 감동으로 다가온 건 이 책만 할까. 아마도, 개혁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온몸으로 역사의 풍랑을 헤쳐가다 좌초한 그들의 이야기가 해방후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개혁'이란 화두에 정치생명을 걸어야 하는 오늘의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공감하고 감동적인지도 모르겠다.
m*****i 2004.06.30. 신고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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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 같은 삶을 산 형제들..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 같은 삶을 산 형제들.." 내용보기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당쟁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왕권에 비해 강했던 신권은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도 당파적 결속과 이익에 더 적극적이었다. 송시열을 태반으로 하는 노론은 주자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절대적 진리로 내세워 노론벽파 만의 권력을 구축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특권을 강화시키며 결국은 사도세자마저 죽음으로 내몬다. 영조 사후 어렵게 등극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 같은 삶을 산 형제들.." 내용보기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당쟁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왕권에 비해 강했던 신권은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도 당파적 결속과 이익에 더 적극적이었다. 송시열을 태반으로 하는 노론은 주자학을 조선의 유일사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절대적 진리로 내세워 노론벽파 만의 권력을 구축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특권을 강화시키며 결국은 사도세자마저 죽음으로 내몬다. 영조 사후 어렵게 등극한 정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조석으로 얼굴을 맞대며, 가슴속에 품은 한을 혼자서 삭이며, 그러나 열린 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지향한다. 숱한 암살과 반란의 위협 속에서 남인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을 양성하며, 정치, 경제개혁을 꿈꾸며 하나하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노론벽파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그들은 정조와 신진세력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 억압 당하고, 종내는 죽음에 이르는 그 시대의 모습이 우리 현대사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그러기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지를 묻는 물음에 지금의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저자는 말한다. 그 시대의 선각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고..

이가환은

너희들의 시대는 단지 반대파당에 속한다는 이유로 천재를 죽이지 않는가?”하고 묻고,

이승훈은

너희들의 시대는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지는 않는가?”하고 묻는다.

정약전은

너희들의 시대에도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는가?”하고 묻고,

정약용은

너희들의 시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않는가?”하고 반문하며,

정조는

너희들의 시대에도 나처럼 부친을 죽인 적당들과 타협하며, 미래를 지향했던 정치가가 있는가?”하고 묻는 것 같다고 한다.

 

책은 제목에서 말해주는것과 같이 약전,약종,약용의 3형제에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살았던 동토의시대, 열린사회를 꿈꾸면서 온몸으로 구시대의 잔재들과 부대끼며, 그리고 개혁하려는 의지로 고통의삶을 살아온 그들 삼형제의 고난에찬 가족사이자, 조선후기 미완에 그친 개혁사이고 혁명사이기도 하다.

 

정약전은 아우 정양용처럼 정치가는 아니었다. 노론벽파가 남인을 완전히 정치에서 쫓아내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때 흑산도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는다. 그는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그곳의 어부들의 삶에 동화되어 생활한다. 그의 저서 [송정사의] [자산어보]에서 알수 있듯이 그의 삶은 민중과 함께한 삶이었고, 저서 또한 철저히 그들을 위해 쓰여졌다. 아우 정약용이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라도 먼저 아우를 보기 위해 인근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려 할 때 흑산도 주민들의 만류로 1년 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던 것만 보아도, 흑산도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자로 꼽히는 이벽은 정양용의 이복 큰형 약현의 처남 이었다. 이렇게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고, 이것은 결국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빌미가 되고, 정약용이 정조사후에 까지 공격받고 유배지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하다. 약전과 약용이 한때 천주교에 입문하였다가, 조상에 대한 제사등이 성리학과 배치되는 문제로 배교하였지만, 가장 뒤늦게 찬주교에 뛰어든 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지은 [주교요지]는 조선사람의 눈으로 본 성경에 대한 교리해설서 이다. 당시의 사람들이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들의 인식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정조시대와 그의 사후,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보면서, 비록 그것이 노론 벽파의 집권연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현재에는 어떤지를 비교해보면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고 있다.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정쟁에 이용되는 민감한 사안으로 비화한 원인에는 조선 성리학의 교조화, 천주교인 대부분이 남인이었다는 점등 여러 가지를 들수가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교황청의 경직된 교리해석과 기계적인 강요라고 보고 있다. 예수회의 경우 천주교와 동양사상의 융합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타 교파는 그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상에 대한 제사문제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를 풀어내지 못하고, 우상숭배라는 일방적인 잣대로 재단한 것이 결국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에 유례가 없이 호전적이고 광폭한 종교가 되는 사단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들은 자연히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중심의 양반일수 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단순히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차츰 신앙으로써, 종교로써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주위사람들에게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조사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자, 당시 양반들은 거의 대부분 배교하였지만, 중인들과 여인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하게 된다. 이 또한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개혁이네, 투쟁이네 할 때 가장먼저 달려드는 것도 소위 먹물들이고, 거기서 먹을 것이 없음이 들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장 먼저 빠지는 모습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보아왔다는 생각이다.

 

형제들과 달리 정약용은 철저하게 정치가였다. 조선시대 제일의 개혁군주라 칭하는 정조를 도와 개혁의 중심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에 둘러싸인 정조는 정약용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정약용이 부친을 잃고 여막살이를 할 때에는 화성 축성의 기본설계를 하게하고, 또한 암행어사로 민생을 살펴보게 하고 중앙관직과 지방관을 두루 거치게 한다. 정약용이 곡산에서 부사로 재직할 때 펼친 선정은 정조사후 그가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국문을 당할 때, 노론벽파가 민심이 두려워 정약용을 사형시키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도 한다.

 

정조사후 멸문지화에 가까울 정도로 가문의 몰락을 당하고, 기약 없는 유배형 속에서 그는 이를 학문에 정진하는 기회로 삼는다. 노론세력에 의해 당쟁의 도구로 변질된 성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세, 형법, 군사등 국가를 경영하는 제도들을 혁신할 방안들을 모색하여 저서로 남긴다. 또한 유배지에서 몰락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아들들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하고, 잔소리하고, 염려하는 모습이나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당부하는 데서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비록 정조의 죽음과 함께 열린 사회,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던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시대는 다시 암흑의 시대로 돌아가지만, 우리에게 그런 선각자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이 책은 저자 이덕일의 조선후기 인물사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한다. 1부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그리고 2부가 [사도세자의 고백]이라고 한다. 가까운 시기에 읽어야 할 책이 또 생겼다.



k*****1 2011.01.13. 신고 공감 12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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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대와 오늘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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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조 대왕이 그렇게 갑작스레 승하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더라면, 그래서 다산의 1표2서에서의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가 경영의 체계를 단지 이념으로서만 끝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부질없는 가정이 책을 읽는 내내 덧없는 꿈처럼 머릿속을 떠나지않는다. 지금 내가 사는 현재는 200여년전 그들의 암울했던 시대에 비할 바 없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열린 사회,
"그의 시대와 오늘의 우리" 내용보기
만약 정조 대왕이 그렇게 갑작스레 승하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더라면, 그래서 다산의 1표2서에서의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가 경영의 체계를 단지 이념으로서만 끝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부질없는 가정이 책을 읽는 내내 덧없는 꿈처럼 머릿속을 떠나지않는다. 지금 내가 사는 현재는 200여년전 그들의 암울했던 시대에 비할 바 없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열린 사회, 유연한 시대인가.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그가 남긴 어이 없을만큼 방대한 저작들은 감탄에 앞서 턱없는 측은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철저한 파멸만을 바라는 악의로 뭉친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방 천지의 적들을 마음에서 애써 물리친 채 홀로 긴긴 밤 낮을 이상적 사회 건설을 향해 치열히 천착해 간 그의 시간들..... 콘텐츠 부재의 정치인 홍수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200여년전 외딴 남녁땅 유배지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조선의 개혁을 평생의 화두로 껴안은 그의 일생이 준엄한 일갈이 되어 울린다.
l*****1 2004.06.08.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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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고민과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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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서소문 쪽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자그마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벛꽃도 감상할 겸, 잠시 쉴 겸해서 그 공원에 들어갔더니, 알고 보니 한국 천주교인의 비극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유박해 때, 정약종을 비롯한 천주교인 삼백여명이 처형당한 서소문 형장터 였던 것이다. 멋 모르고 갔다가 그곳 순교 기념비에 새겨진 희생된 천주교인들의 이름 앞에서 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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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서소문 쪽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자그마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벛꽃도 감상할 겸, 잠시 쉴 겸해서 그 공원에 들어갔더니, 알고 보니 한국 천주교인의 비극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유박해 때, 정약종을 비롯한 천주교인 삼백여명이 처형당한 서소문 형장터 였던 것이다.

멋 모르고 갔다가 그곳 순교 기념비에 새겨진 희생된 천주교인들의 이름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그때 처형당했던 순교자의 넋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분홍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던 정경은 아직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는 정조가 붕어하면서 이미 예견된 비극일 수 밖에 없었고,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형 약종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약용은 사형은 면하고, 형 약전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게 됐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던 형 약종의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약용은 피를 토하는 슬픔, 그리고 비루하게 살아 남았다는 자책감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 일가는 한국 초기 천주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베이징에 백서를 보내려다 체포돼 능지처참을 당한 황서영은 이복형 약현의 사위였다. 그러니 정약용에게는 조카 사위이고, 자청해서 중국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그의 누이의 남편, 즉 매부였다. 부모의 신위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해서 물의를 빚은 윤지충 역시나 외육촌이라고 하니,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정조 시기의 유럽은 구제도가 몰락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혁명의 시기였다. 그렇기에 정조 시대에는 무엇보다 봉건성을 탈피하는 시대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 때는  조선의 그 어느 시대 보다 개혁과 변혁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가 다져졌던 시기였다. 생산력이 발전했고, 그에 따라 상업이 융성했고, 서민 문화가 발달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개혁의 걸림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성리학이  더더욱 교조화되면서 여전히 조선의 봉건성은 강화됐고,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노론은 완고하게 변화의 흐름을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정약용은 천주교를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양과학기술의 일종으로 유학의 한 별파로 받아들였다고 훗날 밝혔는데, 그렇게 본다면 그가 천주학에 관심을 가진 것 역시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복합된 결과였던 것이다.

그렇게 다져진 정약용의 학문과 기술은 탁상공론에서 머물지 않고, 화성 건설 등 정조치하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새시대를 열어간 사람들에서는 정약용 형제의 삶, 그리고 정약용과 정조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약종처럼 목숨을 걸고 끝까지 천주교를 지켰던 한국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심은  눈물겹도록 진지하게 다가왔다. 그들의 놀라운 조직력이나 자기 희생 정신을 보면서, 영세를 받았지만 지금 성당에 나가지 않고 있는 나로서는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천주교 신자들 체포령이 떨어지자, 양반들은 대부분 배교했지만 끝끝내 신앙을 지켰던 것은 중인과 서민이었다는 점에서도 천주교를 통해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기층민들의 갈망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봉건성을 타파하고 근대성을 확보해야 하는 조선 사회의 당면 과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정조 사후에도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를 잊지않고 충실하게 지켜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0 2011.05.30. 신고 공감 5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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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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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1,2권 - 1권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2권 "어둠의 시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숙종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굳히기의 형태로 영조로 하여금 자식을 죽이게 하고 세손을 폐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마침내 정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해에 태어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와 정약용을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왕위에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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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책은 1,2권 - 1권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2권 "어둠의 시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숙종이후 정권을 잡은 노론은 굳히기의 형태로 영조로 하여금 자식을 죽이게 하고 세손을 폐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마침내 정조가 왕위에 오릅니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해에 태어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와 정약용을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영조의 '사도세자의 복수 금지' 라는 유언으로 노론대신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합니다. 정조 자신도 자신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하면 커다란 사단으로 이어질까 두려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다른 죄목으로 치죄하는 한편 조정내 남인들의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정조13년에 첫벼슬을 시작하던 정약용은 정조가 기대한만큼 학문의 수준이 높고, 현명한 판단으로 시비를 가려 정조는 그에게 큰벼슬을 주어 국정을 논하고 싶었으나 주변 노론세력들의 견제로 쉽게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정조21년 동부승지로 임명한다고 했으나 정약용 스스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사직상소를 써서 곡산부사로 부임하면서 목민관으로 행정일을 몇가지 주요사안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것으로 1권은 끝이 납니다. 

 정조가 아직 살아있기에 정약용과 그의 주변사람들은 노론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큰 탄압없이 지내고 있어 보는 저로서는 안도(?)의 마음으로 1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권은  의문속에 죽은 정조부터 시작하여 그는 순탄하지 아니 바람앞의 등불의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며 노론의 끊임없는 공격은 아무리 서학을 서교로 믿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행동해도, 반대파란 이유로 공격받게 됩니다.

 정조 이전에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조선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천문학,수학,기하학 등 당시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많이 이 책들을 접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도 유학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남인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성리학만으로 나라의 앞날에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집권세력 노론등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조선의 앞날은 추락하여 100년뒤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국치를 맞게 됩니다.  1권은 봤지만 2권은 보다가 정말 화가 많이 날 것 같아 보기가 무섭습니다.

 왜 집권세력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걸까요. 그동안 집권하기가 너무 어려워 보상심리가 작동하여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더 좋아서 일까요?  오늘날에 사는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항상 나를 돌아보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하는 경계심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d*****b 2011.04.03. 신고 공감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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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낳은 이상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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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화된 성리학은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은지 오래였다. 사변적인 논쟁만이 오고 가는 그 속에서 민생들의 생활고는 날로 거세어져 갔지만 제 이익만 챙기기 급급했던 탐관오리들이 들끓던 시대였다. 극심해진 당파싸움으로 인해 역사가 사도세자라는 비운의 인물을 낳던 그 해에 정약용은 태어났다. 실학 사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 정약용. 하지만 그의 삶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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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화된 성리학은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은지 오래였다. 사변적인 논쟁만이 오고 가는 그 속에서 민생들의 생활고는 날로 거세어져 갔지만 제 이익만 챙기기 급급했던 탐관오리들이 들끓던 시대였다. 극심해진 당파싸움으로 인해 역사가 사도세자라는 비운의 인물을 낳던 그 해에 정약용은 태어났다. 실학 사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 정약용.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대에 태어난 그였기에, 고달픈 삶은 어쩌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정약용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생원시에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과를 보지 않았다. 선비로서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영예롭지만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형들 역시도 불행한 운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몰락한 남인이었기에 뛰어난 학문적 조예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론에게 논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논란의 중심에는 천주교라는, 당시의 유교적 질서 하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교가 있었다. 성리학의 배타성은 극에 달했고, 당쟁의 과정 속에서 노론은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들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에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에 비해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남인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밖에 없었다. 노론 중심의 질서 체제에 대한 비판의 과정 속에서 천주교는 어쩌면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힘으로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서학을 받아들였고, 그들 중 일부는 신앙의 일환으로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정조에게 이들 남인은 집권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임금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에 둘러싸인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무조건적인 배척을 시도할 수 없었다.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왕들 중 하나였던 정조는 남인을 통해 노론을 견제하려 들었고, 신중을 꾀한 그의 정책 속에서 학문적 소양을 갖춘 남인들은 하나 둘씩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던 그 해 태어난 정약용, 그의 재능은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깨끗하면서도 곧은 심지는 지방관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것을 행하는 태도 속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수원성을 건축하는 과정 속에서도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부역이나 노역을 행하지 아니하고, 일하는 이에게 그 대가를 제공한 모습은 오늘날 국민을 위할 줄 모르는 공직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근대를 향해 나아가던 시대는 그에게 보다 넓은 학문적 견지를 허락하였을진 모르지만 권력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제사 문제를 놓고 벌어진 갈등으로 인하여 정약용은 사실상 천주교 신앙을 포기했지만, 노론 집권층은 이 문제를 물고 끊임없이 물어졌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정약용이 정말로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조의 사망은 그들에게 오랜 가뭄을 잠재우는 소나기와도 같지 않았을까. 본격적인 세도정치를 통하여 그들은 왕위에 군림했고, 결과적으로 조선 왕조를 멸망으로 몰아넣었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는 정약용 형제의 불운했던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을까 싶다. 천주교 신앙을 간직한 체 살아간 정약종이 순교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남겼다면, 정약전과 정약용은 수많은 저서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남겼다. 그들에겐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은 너무도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그들은 어쩌면 시대가 낳은 이상주의자여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한된 영역 안에서 자신들이 지닌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들이었기에, 오늘날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놓아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q*****2 2004.07.08.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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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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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국사 시간에 배운 것이라고는 '정약용 -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수원성을 거중기를 이용하여 건설하다. 그리고 실학을 집대성하다' 외에는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도대체 목민심서가 무엇이며 실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칠판 가득 선생님이 판서하신 것을 노트에 글자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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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선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국사 시간에 배운 것이라고는 '정약용 - 목민심서, 다산 정약용, 수원성을 거중기를 이용하여 건설하다. 그리고 실학을 집대성하다' 외에는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도대체 목민심서가 무엇이며 실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칠판 가득 선생님이 판서하신 것을 노트에 글자 한자 빼먹지 않고 받아 적어야 하니 설령 그런 것을 설명하였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을리 없다. 우리네 교과서의 잘못인지 교육 방식의 잘못인지 몰라도 아주 재미없게 배웠으니 왜 사학을 공부해야하는지 이유는 학교를 졸업하고 10여년이 지나서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고 나름 어느 정도 역사관을 가지면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왜 역사를 공부해야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혹은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우리나라가 OECE 국가중에서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고보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언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역사 소설도 아니니 또 뻔한 역사 이야기 늘어놓고 노론이니 소론이니 혹은 남인 북인하며 당파 싸움 및 OO사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조께서 선친인 사도세자를 위해 수원성을 건설하였고  매년 화성 행차관련한 지역 축제가 있다보니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심에 책을 집어 들었다. 게다가 얼마전 IT프로젝트 관련 세미나를 하는데 주제가 정약용 선생께서 건설한 수원화성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수백년전에 이미 수원 화성 설립 프로젝트를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엄청난 유산이다.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셰계 유산이 되었는데 화성의 기능이나 우수성도 대단하지만 엄청난 프로제트를 수행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이슈들과 리스크들을 정리하여 해결해 나갔던 배경과 인력동원과 납기 단축에 대해 지금도 '도대체 그 시대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라고 감탄을 하니 정조나 정약용 선생의 경우 서양의 르네상스를 이끈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필적할 만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당쟁이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 그리고 억압받는 농민들과 부패한 관료들 때문에 상당히 얼룩진 역사라고 생각한다. 선대의 왕들이 독살 혹은 의문사를 당하고 당쟁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때 임금의 자리에 올라 다수당의 횡포를 막고 소수당의 견제를 적절히 조절하고 훌륭한 인재를 강하게 키워 조선후기 다시 한번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정조의 놀라운 통치력.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정조와 같은 임금과 정약용 선생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더 많이 배출되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보다는 훨씬 덜 부패한 나라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거나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아쉬움들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역사 소설이 아니기에 흥미는 덜 할 수 있지만 조선왕조 실록에 바탕을 둔 역사서이기에 아주 객관적으로 씌여졌다. 물론 한자와 조선후기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나의 무지함이 빛을 발하여 앞 장으로 다시 넘어와서 읽기를 반복했지만 교과서나 역사 시간에 결코 배울 수 없었던 사실들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다. 시중에 수많은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을 다룬 역사서에는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내년(2012년)에 대선과 총선이 함께 치러지는데 왜 내가 선거를 해야하는지 그리고 유권자로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흥미롭거나 긴박감을 주는 것도 아닌데 2권이 기다려지는 이유도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때문이 아닐까 싶다.

s******5 2011.12.0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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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정약용을 통해 오늘을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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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정약용을 통해 오늘을 깨닫다.   고등학교 국사까지 배운 한국 사람치고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드믈다. 그는 정말 중요한 실학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을 알지는 못한다. 교과서는 그를 단지 중요한 실학자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에도 나오는 그의 저서들이 집필된 곳이 왜 서울이 아니고 유배지 강진인지, 그가 왜 기나긴 시간동안 유배지에 갇혀있어야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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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정약용을 통해 오늘을 깨닫다.

 

고등학교 국사까지 배운 한국 사람치고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드믈다.

그는 정말 중요한 실학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을 알지는 못한다.

교과서는 그를 단지 중요한 실학자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에도 나오는 그의 저서들이 집필된 곳이 왜 서울이 아니고 유배지 강진인지,

그가 왜 기나긴 시간동안 유배지에 갇혀있어야 했는지, 그를 유배보낸 사람은

누구인지, 그 역사적 실체는 무엇인지 교과서는 우리에게 묻지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의 책과 사상은 개인적인 학문적 소양의 일부일 수도 있으나 그가 살아야 했고

극복해야 했던 시대의 소산물이다.

따라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이 펴쳐질 뻔 했던

정조 치하와 그의 날개가 꺾이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순조 치하의 역사,

나아가 노론과 남인의 대결의 장에서 펼쳐진 죽음의 굿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약용이 보이고, 당시에 빗대어 현재를 조명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일하고, 뛰어나다.

교과서의 역사와 실제의 역사가 얼마나 다른지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제목만 외우고 지나쳤던 그의 명저들의 중심 내용이나마 맛볼 수 있는 건 어쩌면

유일한 기회이다.

 

마지막으로...

항상 역사에서 정조를 읽는 건 참 곤욕이다.

개혁적인 군주, 그의 짧은 치세가 아쉽고 또 아쉽기 때문이다.

 

 

 

 

s***u 2010.03.01.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