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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천주교인 정약종과 국가보안법의 희생자 이철우의원
"천주교인 정약종과 국가보안법의 희생자 이철우의원" 내용보기
이덕일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그 형제들을 엑스트라로 참 멋진 드라마작품을 썼다. 이덕일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이 작가가 역사학자인지 소설가인지 헷갈릴 정도로 나를 매료시킨다. 요즘 한창 정치권의 논란이 되고 있는 이철우 사건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200년전의 그 모습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느끼며 답답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아
"천주교인 정약종과 국가보안법의 희생자 이철우의원" 내용보기
이덕일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그 형제들을 엑스트라로 참 멋진 드라마작품을 썼다. 이덕일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이 작가가 역사학자인지 소설가인지 헷갈릴 정도로 나를 매료시킨다. 요즘 한창 정치권의 논란이 되고 있는 이철우 사건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200년전의 그 모습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느끼며 답답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아직도 답보상태에 있다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 너무나 갑갑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백명의 천주교신자를 지금의 서소문공원을 비롯한 전국의 형장에서 극악무도하게 처형한 그 벽파들이 지금도 한나라당에 살아있음을 보며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 왜 그들은 이리도 어리석은 걸까.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죄가 되었던 그들이 지금은 간첩 혹은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어지며 능지처참이 잔인한 안기부고문으로(정형근 등에 의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음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광란의 저주를 자행하는 한나라당의원들은 제발 정신차리라. 지금은 2005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데 아직도 1801년의 그 어두운 살인의 추억에 매몰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 역사의 심판을 받을 자들아. 이 책을 최소한 한나라당의원들에게 선물하여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싶다.
b****l 2004.12.15. 신고 공감 7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시대를 고뇌하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그들의 좌절-정약전, 정약용
"시대를 고뇌하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그들의 좌절-정약전, 정약용" 내용보기
정조가 갑자기 붕어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순간, 조선사회에 반동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암흑의 시대일수록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는 선지자의 존재감은 더욱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반동의 시대에  정약전, 약용 형제 또한 허송세월 하지 않았다. 그들은 흑산도와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면서 백성들이 겪는 삶과 현실과 직접 눈
"시대를 고뇌하고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그들의 좌절-정약전, 정약용" 내용보기

정조가 갑자기 붕어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순간, 조선사회에 반동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암흑의 시대일수록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는 선지자의 존재감은 더욱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반동의 시대에  정약전, 약용 형제 또한 허송세월 하지 않았다. 그들은 흑산도와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면서 백성들이 겪는 삶과 현실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어둠의 시대 편에서는 정약전과 약용 형제의 유배지 생활을 중심으로 저술하고 있다. 정약전은 소탈한 인물이었다. 양반이라는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어부나 천민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술을 마셨다. 그가 ‘자산어보’를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흑산도 어류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한 것은 그가 얼마나 실용적인 정신의 소유자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정약용은 더더욱 학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일찍이 조선에서 이렇게 팔방미인적 지식인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며, 다방면의 전문가가 됐다. 여유당전서는 시, 의학, 예절, 음악, 역학, 지리, 경제, 법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학문적 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대한 저서를 남길 만큼 그는 결코 멈추지 않고 학문에 매진했다.

그렇다고 정약용이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나 백성들의 삶에 밀착됐으면서도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식견을 쌓아간 것은 분명했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잊지 않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경지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전은 요즘으로 치면 생태학자나 다름 없었다. 그는 조정의 소나무 정책에 대해 따끔하게 비판하면서, 소나무 벌채를 금지할 것이 아니라 식목을 장려하자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굶주리는 백성의 아픔을 노래한 ‘기민시(飢民詩)’, 군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담은 시 ‘애절양(哀絶陽)’을 남김으로써 그의 시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다분히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렇게 두 형제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 통감했고, 백성들을 대변하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천연두로 자식을 잃은 아픔을 겪고는 종두법을 소개하며 의학을 연구하며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나, 흠흠신서에서 엄정한 법집행이나 절차를 강조하는 정약용의 모습은 합리적이었고 법치주의에 한걸음 더 다가가 있었다.  전론(田論)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정약용의 입장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농업이 중심이었던 조선사회에서 토지 문제는 그야말로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중 핵심 문제였는데, 그는 토지가 소수의 양반 지주들 것이 아니라 하늘이 모든 백성에게 내려준 공물(公物)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야말로 양반 위주인 조선의 물적 토대를 뿌리 째 흔드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시대와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에 정약용이 제시한 해결책은 양반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신분사회를 넘어서는 지역공동체를 구상하고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약전과 정약용 유배지에서도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했던 두 형제, 정약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유배된 지 16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됐지만  정약용은 18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돌아가야 할 현실은  반동의 세상이었다. 순조 이후 왕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돼 갔고, 몇몇 세도가가 권력을 장악한 정치 상황에서 정약용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정조 대에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봉건성을 탈피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토대를 다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면서,이후 조선사회의 봉건성은 오히려 더 강화됐고, 왕권과 당색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유력한 세도가 중심으로 정치판도가 재편됐다. 그렇게 소수 양반 가문들이 기득권을 점유하게 되면서 조선은 자주적 근대화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율곡, 유성룡, 이항복등 그야말로 빼어난 인물들이 많았던 선조대 못지않게 정조대 역시나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던 시대였다. 정약용, 정약전을 비롯한 정조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시대에 대한 고뇌를 잊지 않았다.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려 했던 정약용과 정약전의 고민은 근대성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좌절됐고, 신분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은 미완으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곧 조선의 조금씩 조성돼 가려던 자주적 근대화의 기반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다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싹이 이미 움트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사회든 그 사회의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힘 , 그것이 바로 그 사회의 자생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선각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당대의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그 사회가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해도, 당대에는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모순이 누적되다보면, 그 사회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역사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e****0 2011.05.31. 신고 공감 5 댓글 7
리뷰 총점 종이책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내용보기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간 때는 6년전 일이다.지척에 두고도 마음만 있었지 실천하기는 참말 어려운 일이 바로 메어있는 삶을 두고 마음먹은 곳에 직접 간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가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그곳은 울퉁불퉁 바위가 불거져 나온 산자락 어딘가였는데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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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을 찾아간 때는 6년전 일이다.지척에 두고도 마음만 있었지 실천하기는 참말 어려운 일이 바로 메어있는 삶을 두고 마음먹은 곳에 직접 간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가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그곳은 울퉁불퉁 바위가 불거져 나온 산자락 어딘가였는데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르락내리락하기 참 힘든 지경이었다. 걸어 올라가며 나누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새 시대를 구상하던 한 인간을 어차피 죽이지 못하고 죽음이상으로 뭉갤려면 좀 더 험악하고 그 방법이 졸렬황당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역사서라 많은 서평들을 접하면서 꼭 한번 읽고 싶었고 이제 읽었으며 그 여운이 꽤 오래간다. 역사서이지만 심장이 쿵쾅대는  한 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깊은 한 인간의 얘기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실천 철학을 주장하며 세상과의 무한한 교류를 꿈꾸던 다산이 접했던 현실은 당쟁의 휘몰이속에서도 꿋꿋했으며 그의 곁엔 언제나 주군 정조가 함께 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정조임금의 정치적 개혁의 동반자로, 의혹에 쌓인 채 급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 정조임금 사후 개혁의 조선이 아닌 암흑과 어둠의 시대로 역행하는 시절에 처참하게 가문의 몰살을 겪어야했고 형제를 잃었으며 세상을 버리고 은둔해야만 했던 지독히도 외롭고 처절한 인간이었다. 선교지원을 통해서가 아닌 독자적인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조선만의 삶이 아닌 조선밖의 이치를 받아들이려는 사고의 전환이 좁은 세상속에서 이루어지려하지만 뿌리 깊이 굳어진 거대 노론벽파의 지키고자 하는 삶의 방식과 독단은 끈질긴 피의 정쟁으로 치닫는다.

조선후기 어둠의 시대에 안타깝게 희생되었던 인물중에 다산의 막내형인 정약종은 하늘에 속한 자로 죽는 순간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약용과 약전을 살리고 결국 순교하였다. 그의 신앙고백은 물론 삼위일체론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글들은 그 시대에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학을 숭상하며 제사의 형식과 신주를 해하는 일에 갈등을 겪은 다산은 끝내 신앙을 버리지만 하늘에 오른 약종못지않게 땅에 남아 은둔하면서도 후학을 위한 학문예찬과 다독의 열정을 불태우며 200서가 넘는 수많은 책들을 쓰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18년이란 세월을 숨죽이며 언젠가 이루어질  세상과의 또 다른 교류를 위해 행한 학문에의 열정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긍정적 에너지의 발산이라고 본다. 생각해보면 피비린내나는 암흑의 조선후기를 이겨낼 방도는 달리 없었을 것 같다. 빈곤한 시절이었지만 다산초당에서 펼친 후학양성과 글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치있는 삶의 자세도 배우게 한다.

시대가 이렇듯 혼란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는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다산이 학문과 씨름을 했다면 같은 시기 흑산도로 유배를 간 약전의 삶은 어부의 삶이었다. 다산 못지 않게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그런 삶보다는 어촌에서의 삶과 어부들과 일과를 함께 하며 최초의 해양생태보고서인 자선어보를 집필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인물들이 있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인물이 죽고 철학이 죽고 사고가 죽어버린 조선후기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면 참 우습지만 정조임금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안동 김씨세력들은 어찌 되었을까? 

왕의 후사를 몰살하지 않았다면....망국의 깊은 한을 겪게 되었을까?

그렇게 안되었더라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b*******e 2011.01.20.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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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형제들과 유배지에서의 삶
"정약용 형제들과 유배지에서의 삶" 내용보기
1권에서는 정약용이 개혁군주 정조의 사랑을 받으며 벼슬하는 동안 새시대를 지향하년서 경험하고 추진한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반면 2권에서는 정조 사후 실권을 장악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로 인해 압박받고 귀양생활하는 정약용과 남인들의 어두운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서기 1800년(순조 원년)을 기준으로 달라진 사회상과 함께 정약용의 인생 굴곡을 대비해 볼 수 있게 정리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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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정약용이 개혁군주 정조의 사랑을 받으며 벼슬하는 동안 새시대를 지향하년서 경험하고 추진한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반면 2권에서는 정조 사후 실권을 장악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로 인해 압박받고 귀양생활하는 정약용과 남인들의 어두운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서기 1800년(순조 원년)을 기준으로 달라진 사회상과 함께 정약용의 인생 굴곡을 대비해 볼 수 있게 정리된 것 같다.

 

정약용 삼형제가 가는 길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정약용은 정조 치하에서 수많은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지만 정조 사후 지배계급의 공격 속에 좌초된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킨다. 그의 귀양생활 18년은 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불행의 시기였지만 역사적으론 실학을 집대성하는 소중한 기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사에 교리 연구가이자 신념의 순교자로 기억된다. 반면 작은형 정약전은 시대의 절망을 딛고 민중과 호흡하면서 『자산어보』를 남겼다. 조선후기의 생태학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지배세력의 주자학적 가치관과 신분제도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 왕정과 신분제도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천주교의 정약종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준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전도 불의한 세상에 대한 항거의 발걸음을 내딛였다. 실학의 완성자 정약용은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문학·역사·철학·과학기술 등 학문에서의 업적과 함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최일선에서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러한 정약용 형제의 역사적 평가와 함께 한 가족으로서의 정약용 형제의 사랑과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같은 개인적 측면에서의 만호은 자료들도 제공하고 있다. 유배지에서도 자식교육을 위해 끊임없이 편지를 통해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는 아버지의 사랑, 흑산도 유배된 형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개고기로 보신하는 법을 소상히 알려주는 자상한 동생의 모습도 함께 볼 구 있는 책이다. 다산 정약용에 대한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권하고 싶다.



c******4 2010.06.05. 신고 공감 4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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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시대를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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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변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지루한 당쟁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18세기의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은 대동소이한듯 보여진다. 다만 정약용이 살던 조선시대는 왕에 의해서 할수있고 제한되는 것이 많은시대였던 왕정이기에 답답한 현실을 바라보는 정도가 현재 우리가 체감하는 정도보다 무력감및 좌절감은 더욱더 컸을것이다. 지금은 선거를 통한 심판및 시민단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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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변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는 지루한 당쟁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18세기의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은 대동소이한듯 보여진다. 다만 정약용이 살던 조선시대는 왕에 의해서 할수있고 제한되는 것이 많은시대였던 왕정이기에 답답한 현실을 바라보는 정도가 현재 우리가 체감하는 정도보다 무력감및 좌절감은 더욱더 컸을것이다. 지금은 선거를 통한 심판및 시민단체의 비판이 있기에 완전할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 견제하고 방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정조의 죽음 우리역사를 통틀어 아쉬운 장면중 하나이다. 역사의 인물을 볼때 정조,정약용만큼 무비판적으로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은 적지않다고 본다. 그만큼 그들의 활약상및 나라를 이끄는 방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가능한 사랑일것이다. 18세기 조선의 미래는 밝지않았다. 어린 순조의 모습 그리고 섭정할려는 무리들, 다시 고개를 드는 노론세력까지 어느하나 조선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아마도 정약용과 그의 친구들은 정조죽음이후 총명한 리더의 부재로 인한 답답함과 목숨까지도 빼앗을 반대세력의 날이 선 칼날 앞에 개혁이건 뭐건 살아남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권을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둠의 시대를 사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음을 볼수있다. 정약종같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의 모습에 순교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국가핵심에서 일은 못하지만 목숨을 잘 유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많은 책(=500여권정도)을 작성해 살아가는 유형도 나온다. 정약용의 모습은 어둠의 시대를 사는 하나의 role model이다. 어둠중에서도 어둠의 시작은 어둠의 끝보다 괴롭다. 언제까지일지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전혀 알수도 없을 뿐더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눌림은 왠만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것이다. 정약용형제들이 느꼈던 어둠과 현재 우리가 느끼는 어둠(실업,경제불황)은 강도 혹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정약용이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방법이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힘과 꿈을 줄수 있다고 본다. 인생을 사는데 밝고 좋게 살아가고자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어둠의 시대를 거부하고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한 인간으로써 인생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어둠보다는 빛을 찾아 그리고 억압되고 부자연스러운 사회보다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간구하고 찾아가는 것은 보편적인 사람의 정서이다. 하지만 뜻대로 그리고 원하는대로만 되지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산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이런점에서 제한적이고 답답한 현실로 대변되는 어둠의 시대를 산 정약용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절망도 하고 낙담도 했겠지만 자신의 현실을 잘 인식해서 당대 역사의 물줄기는 바꾸지 못하더라도 역사의 심판과 평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꽤 뚫고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에 정약용관련 미공개유물이 공개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역사의 다른인물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아마도 정약용이란 인물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역사의 거인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란 생각을 가져본다.
m*****e 2005.07.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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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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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이 정약용이 정조와 인연을 맺으면서 관료로서 신하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던 시대를 그린 글이지만,2권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한 천주교인들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정약용 일가는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정약용은 비의 숙청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가시밭길과 같은 유배의 형극을 맞게 되고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경세치용과 백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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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이 정약용이 정조와 인연을 맺으면서 관료로서 신하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던 시대를 그린 글이지만,2권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한 천주교인들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정약용 일가는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정약용은 비의 숙청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가시밭길과 같은 유배의 형극을 맞게 되고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경세치용과 백성들을 위한 저작물들을 남겨 후대에 높은 명성을 떨치게 된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정약용은 순망치한의 시대를 겪게 되는데,정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내걸게 된다.그 의미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당시 정순왕후에 의한 순조의 수렴청정과 가혹한 천주인 탄압,세도정치의 회오리 바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몸을 낮췄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론 벽파에 의한 천주교 탄압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과 그의 매형 이승훈,소론의 좌장격인 이가환 등의 엄중한 추국과 숙청을 당했던 것이다.천주교 탄압은 당시 국체인 유교를 배반하고 조상을 섬기지 않은 대역죄로 몰렸던 것으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을 비롯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천주 여성인 강완숙씨 등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장기에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는 바로 위 형인 정약전과 강진에서 헤어지면서 언제 풀릴 지 모르는 유배의 형극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저서를 남기게 되고,정약전은 흑산에서 어부들과 어울리면서 민중들의 삶을 깊이 체험하면서 자산어보를 남기게 되며,정약용은 유배의 몸이지만 자식에 대한 바른 교육법을 편지로 또는 구두로 자상하게 알리기도 한다.특히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저서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저작물이고 현실 정치,경제,의학,주역 등의 다방면에서 유익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을 오갈 수는 없어도 편지를 통해 그 마음을 전하기도 하는 등 돈독한 우의를 다지기도 한다.형이 동생에게 보내고,동생이 형에게 보내는 서찰들은 사랑과 슬픔을 상징하며 결국 형인 정약전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정약용은 형이 있는 흑산을 향해 그 그리움과 슬픔의 한을 달래기도 하는데 우이(牛耳)라는 형제봉을 지었다고도 한다.애틋함이 쏴하게 밀려온다.

 

 그는 18년 간의 유배생활에서 해배가 되면서 고향에 돌아와 <자찬묘지명>을 작성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경진년(1820년,59세) 봄에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과 청평산 등지를 유람했다.가을에는 다시 용문산에 가사 유람하는 등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

 

 현세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체념하면서 인생을 정리했다.태어난 1762년부터 1822년까지의 삶의 가정을 되돌아 보면서 정밀하게 수신을 실천하고 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해이기도 하며,정조로부터 엄혹한 관료훈련을 받으며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기도 했던 정약용은 천주교의 대대적인 탄압과 정순왕후의 세도정치에 휘몰려 두 차례에 걸친 유배의 몸이 되었지만,국체와 사회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낮추어 몸소 수신제가의 정신을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그는 관료,학자로서 '경세치용'의 정신을 백퍼센트 보여 주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j******6 2012.12.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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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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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사라지기 전에 정약용을 향한 살의의 기운이 가득해 진다. 본격적으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들의 남인 죽이기가 행해진다. 뜻을 이루기 위한 명목이 필요했는데, 그 희생양이 천주교가 된다. 사학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자신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 상대 당파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중의 핵심 인물이 정약용이기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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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사라지기 전에 정약용을 향한 살의의 기운이 가득해 진다. 본격적으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들의 남인 죽이기가 행해진다. 뜻을 이루기 위한 명목이 필요했는데, 그 희생양이 천주교가 된다. 사학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자신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인 상대 당파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중의 핵심 인물이 정약용이기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명분을 갖다 붙이려 하지만 결국 그런 명분을 찾아낼 수 없었다. 비록 그의 목숨은 제거할 수 없었지만 유배를 보내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 내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18년 동안의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10대에도 공부, 20대, 30대, 40대, ... 이제는 이런 평생 공부란 것이 흔한 말이 되어 버렸다. 그때 그때 자기 나이에 맞는 상황에 남들 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하는 그런 자격증이나 따고 점수나 높이기 위한 공부가 진정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의미있는 공부를 위해서는 어떤 학문에 대한 방법서 같은 것 보다는 이러한 정약용과 같은 인물의 역사서를 한 편 읽는 것이 더 큰 배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수원에 있는 화성, 그리고 가보고 싶은 곳이 늘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곳이 강진이라 한다(읽어 보진 않았지만). 과연 정약용을 알고 찾은 강진 답사기는 어떨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리고 한 날, 한 때 그의 형과 유배지로 가면서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향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뒤,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바다와 육지를 바라보며 형을 그리고 동생을 그리워 했던 곳들......

 

 내가 익히 들어 아는 [목민심서]는 정약용에 대한 아주 일부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에 부끄러워지는구나.



YES마니아 : 로얄 c********9 2012.02.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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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많은 것을 남긴 비운의 천재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많은 것을 남긴 비운의 천재들" 내용보기
국사시간에 수없이 외웠던 기억이 난다. 다산 정약용 -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가끔은 퀴즈 프로그램이나 도전 골든벨 문제의 정답으로 출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황이니 이이처럼 지폐를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다보니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정조가 통치하던 시절에 살았던 인물이고 1권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만드신분 그리고 실학자라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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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시간에 수없이 외웠던 기억이 난다. 다산 정약용 -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가끔은 퀴즈 프로그램이나 도전 골든벨 문제의 정답으로 출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황이니 이이처럼 지폐를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다보니 그 이상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정조가 통치하던 시절에 살았던 인물이고 1권에서 자세히 다루었듯이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만드신분 그리고 실학자라는 정도외에는 잘 모른다. 물론 실학이 무엇인지 조차도..

 

  1권을 다 읽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를 읽다보니 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어느정도는 알 것 같다. 반대파들에 의해 탄압을 받고 역사적인 기록들이 삭제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리학을 숭상한 것이 아니라 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을 집대성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도대체 성리학은 무엇이고 실학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는 못한다. 왜냐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니 어느 정도의 감은 잡히기는 한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는 양반사회이다 보니 물에 빠져도 개헤험은 치지 않고 바빠도 뛰지 않는 고상한 양반들이 지배층을 차지하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사실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인문학을 숭상하고 과학이나 공학은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으니 말이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이공계를 졸업하고 IT업종에 일하고 있지만 사실 제조IT에 일하는 사람이 홀대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소위 조선시대의 중인 계급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런 것을 정약용 선생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일까? 자식들보고도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로 진출하는 것보다 학문에 몰두하라고 편지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부모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선비로서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정약용 선생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이 인용되는 것을 봐서 소위말하는 뼈대있는 집안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보다. 특히 1권에서는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생태학자 정약전의 경우 지금처럼 잠수 기술이 발달하지도 않았는데 어류의 생태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한 것은 어쩌면 미스터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대를 잘 못 타고난 탓일까? 사대주의니 유교를 숭상하니 하면서 서양에서 건너온 천주교를 배척하고 박해를 하였기에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조 사망이후 귀양 생활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서학을 그토록 배척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 밥먹여 주지도 못하는 성리학은 접어두고 실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중용하였더라면 우리가 아는 조선의 역사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 정약용과 형제들이 귀양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 당시에는 수백년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였기에 당파정쟁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한두명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기에 그토록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께서 의문사(?)를 당한 뒤 힘든 시기를 견뎌야만 했다. 오늘날 맘 편하게 공부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우리들에게 지하에서 훈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실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그칠것이 아니라 이공계생들의 든든한 후원자라고 생각한다.

s******5 2011.12.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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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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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정약용의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2권은 정약용 형제의 정치적 실권과 유배, 그리고 생존 투쟁의 이야기이다.30대 후반, 한창 일할 나이에 유배를 가서 18년간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남았다.그 좌절과 분노의 세월을 책을 쓰면서 살아남았다.이제는 20여 전에 읽어 내용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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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정약용의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2권은 정약용 형제의 정치적 실권과 유배, 그리고 생존 투쟁의 이야기이다.
30대 후반, 한창 일할 나이에 유배를 가서 18년간을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남았다.
그 좌절과 분노의 세월을 책을 쓰면서 살아남았다.
이제는 20여 전에 읽어 내용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떠 올렸다. 무엇이 그를 좌절 시키지 않고 살아남게하는 동력이 되었을까?
아마도 책을 쓰지 않았다면 그도 형 약전처럼 살아서 그 유배지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유배는 개인적으로는 악몽이었겠진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필수였던 것 같다.
정약용과 같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정승까지 지내면서 살아서는 영광을 누렸지만 역사적 위치에서 채제공은 많은 정승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살아 생전 정치에 너무 바빠 학문적인 성숙이나 책을 남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살아 생전의 위치를 알아보려면 그들이 남긴 초상화를 보면 참고가 된다. 선비들의 초상화란 생전의 권력의 발현이므로 당시의 권력자일수록 많은 초상화를 남기고 있다. 채제공은 책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여러 초상화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수준의 국사에서 채제공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다.

남자로서 한창 자신의 뜻을 펴서 일할 나이에 정약용은 강제로 책을 쓸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용하여 결국 역사적으로 정적들을 능가했다.
아마도 이것이 정약용이 후손들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일 것이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를 읽어보지 못했다. 읽어 본 것은 만화 '목민심서', 그러나 비록 만화지만 목민심서의 가치는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세계의 많은 천재들이 그랬듯이 생전에 자신의 유산이 역사적으로 남을 것을 알고 그것을 잘 지키려는 정약용의 노력이 엿보인다.
뛰어난 조상의 유산을 이어 받아 그것을 보존 발전 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후손들의 마음은 어떨까 궁금하다.

e******s 2011.08.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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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정양용의 집안이 베푼 은혜에 고마워하고 갚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양용의 집안이 베푼 은혜에 고마워하고 갚아야 한다!" 내용보기
나는 이 책의 1권을 읽었다. 그리고 목민심서와 아버지 다산 읽고 있다. 먼저 이 책을 저술한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오래전부터 다산을 존경해 왔고 그의 엄청난 저술에 놀랐다. 더우기 나는 백성과 함께 하고자한 정조를 좋아했는데 그와 정약용은 동시대를 살았고, 두사람의 특별한 생애를 알고 가슴이 뛰었다.   다산은 진정한 학자이고 민주주의자라고
"대한민국은 정양용의 집안이 베푼 은혜에 고마워하고 갚아야 한다!" 내용보기

나는 이 책의 1권을 읽었다.

그리고 목민심서와 아버지 다산 읽고 있다.

먼저 이 책을 저술한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는 오래전부터 다산을 존경해 왔고

그의 엄청난 저술에 놀랐다.

더우기 나는 백성과 함께 하고자한 정조를 좋아했는데

그와 정약용은 동시대를 살았고,

두사람의 특별한 생애를 알고 가슴이 뛰었다.

 

다산은 진정한 학자이고 민주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넘은 시대에

그는 이미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였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였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없고

목민심서를 읽지 않고 공직생활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정약용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학자와 정조에 대해서도... 

 

w*****a 2010.11.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