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고향에 머무시고 큰형 집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랑 같이 살게 되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버지의 살가운 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는 아버지와 종종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사회를 보는 눈이 달랐는데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마찰을 빚고 싶어도 빚을 수 없는 처지라 살아 계실 때 좀더 이해하려고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별이 된 오쟁이」의 중간이 아저씨는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을로 흘러든 중간이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름조차 왜 중간이인지 모른다는 아저씨는 농사일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농사일만큼은 남보다 곱절은 더해 금방 마을 일꾼이 됩니다. 그런데 아저씨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돕니다. 몹쓸 병에 걸린 아들이 산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중간이 아저씨가 몹쓸 병에 걸린 아들이 있는, 모자란 사람이라고 놀리지만 아저씨는 아들을 생각하며 벙긋벙긋 웃을 따름입니다. 「마부의 노래」에 나오는 마부로부터는 홀아비의 자식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부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어슴새벽부터 마차에 곡식을 싣기 시작합니다. 어젯밤 늦도록 찧었던 햇곡식을 배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아홉 살 아들은 혼자 종일 산 속을 돌아다니며 놀 것입니다. 「엄마 열목어」에서는 알을 낳는 엄마를 아빠 열목어가 어떻게 고향으로 인도하고 돕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엄마 열목어가 피투성이가 되어 알을 낳지만 아빠 열목어 역시 자식을 위해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그래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별이 된 오쟁이」,「마부의 노래」,「엄마 열목어」 모두 아버지의 관점에서 글이 쓰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강조할 뿐 그 사랑을 대하는 아이의 눈길을 엿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칫 위험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사랑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나라를 위해 고민 없이 목숨을 바치는 가족 삼 대의 이야기(「북 치는 소년」)나, 은행나무를 떠난 바람의 모험이 쓸모 없는 것(「천년바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