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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년전쯤, 모소설가가 소세키의 <문>을 읽은 후 전율을 느낄만큼 감동받았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때부터 이 책을 찾아 헤매었지만 국내에선 아직 미번역상태라 일본어를 모르는 나로써는 좌절아닌 좌절을 맞보았었다. 항상 소세키 책에 대한 신보가 나오지나 않을까 하며 두리번 거리던 나에게 하늘의 뜻이었던지 아나면 나같은 사람이 많은 탓이었던지 드디어 근래 소세키의 책들이 속속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아껴가며 정독하였다. 역시나 소세키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소설이었다. 특히 이제껏 그가 쓴 소설보다는 극적인 연출이나 모호한 엔딩이 새롭고도 놀라웠다. 도쿄라는 곳에 사는 현대인이면서도 절벽 아래에 위치한 전세집에 사는 두 주인공 소스케와 오요네의 모습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소세키의 소설을 지루하게 느꼈던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문>에서 만큼은 그러한 기분을 다소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소개말에 포함된 소스케의 집 구조도는 책을 읽는 내내 친절한 표지판 노릇을 해주었다. 일본가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 대한 역자의 세심한 배려란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좋은 작가와 좋은 역자가 만나 좋은 책이 출간된 것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오래도록 문밖에서 서성이는 우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할 수 없는 문이었다면,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가는 건 모순이었다. 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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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국민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인간의 내면적 우울과 불안을 밀도 있게 그려낸 그는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화 물결 속에 나름의 근대적 인간상과 삶의 모습을 모색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1000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만큼 일본 국민들에게 추앙을 받는 작가다. 국내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는 이런 일련의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그의 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세키는 이것을 감히 옳다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런 방향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했다. “도덕에 가세하는 자는 일시적인 승리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다. 자연에 따르는 자는 일시적인 패배자지만 영원한 승리자다”라고. 또 “인간이 만든 부부라는 관계보다도 자연이 우러나게 한 연애 쪽이 실제로 신성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전기 3부작이라고 하면 『산시로』, 『그 후』, 그리고 이 작품 『문』이다. 『산시로』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떠나 보낸 남자 산시로는 『그 후』에서 책을 읽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데 소일하는 고등유민 다이스케가 되어 친구의 아내를 뺏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로부터 매장당한다. 그 다이스케가 『문』에서의 소스케로 등장하여 아내와 함께 해 앞에서 웃고, 달 앞에서 생각하며, 조용히 그리고 쓸쓸히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힘겹게 살아가게 된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소스케와, 애인을 버린 오요네는 사랑은 얻었으나 세상 밖으로 내쫓기게 된다.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소스케에게서 친구는 떠나고, 가족과 친척의 외면 속에서 학교와 사회로부터도 고립된다. 오요네는 세 번에 걸친 임신이 실패로 돌아가자 심한 정신적 가책까지 느끼게 된다. 평생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자의식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 부부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결국 도피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스케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도 않은 채 사회와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한다. 아버지의 유산 처리나 동생의 진학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만 대처한다. 이들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금실 좋게 살아가지만, “어느 틈엔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과거라고 하는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46쪽)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작은 셋집은 그들의 위태롭고 불안한 심정을 암시한다.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어있는 복선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읽어내는 것이 그의 소설의 감칠맛이다. “이 비극이 언제 어떤 형태로 다시 자기 가족을 엄습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따금 그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드리웠다. …간신히 자기 차례가 되어 차가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문득 이 모습은 원래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144쪽) 자기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불시로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과거의 죄의식은 이들 부부의 가슴을 억누르곤 한다. 소스케가 대학시절 애인을 빼앗은 옛 친구 야스이의 소식을 듣고 곧 그와 대면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극도의 내적 갈등을 겪는 소스케는 산사로 찾아들어가 참선을 시도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소스케로 인해 만주나 몽골로 떠돌며 살게 된 친구 야스이는 소스케 앞을 가로막고 선 ‘문’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눈 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5쪽)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친구의 존재감에 늘 불안해했던 소스케는 친구 야스이의 굴레를 활짝 벗어젖히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초조해한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작품의 결말에 오요네는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새봄이 왔다고 좋아하지만, 소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256쪽)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사랑과 불륜, 죄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천착하는 소세키 특유의 내면적 문장이 독자를 반성적 성찰로 이끄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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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의 일정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활동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의 초기작품인 <산시로>를 읽고서 산시로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에서 <그 후>와 <문>이 <산시로>의 후속작이라 해서 읽기로 하였는데 <그 후>와 <문>을 순서가 바뀌어 읽게 되었습니다. 산시로의 작품소개를 보면, “나쓰메 소세키가 문학과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자 천착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는 곰곰이 생각해볼 인생의 화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소세키는 <그 후>가 산시로의 그 후의 모습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문>의 모두에 있는 역자의 글에서는 “<그 후>에서 도쿄대학을 졸업한 다이스케를 주인공으로 하여, 대학 시절 의협심 때문에 친구에게 양보했던 미치요라는 여성을 ‘천의’에 따라 되찾으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라고 하였으며, “<문>에서는 ‘천의에 맞지만 사람의 도리에는 어긋나는 사랑’을 하게 된 <그 후>의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바통을 이어받은 소스케와 오요네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셋집에서 쓸쓸하지만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5쪽)”라고 했습니다. <산시로>의 주인공이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여성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두 사람은 손도 잡지 않고 밤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그냥 헤어졌더라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터인데, 그녀가 산시로에게 건넨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라는 말을 곱씹어보게 합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산시로를 따라 여관에까지 쫓아온 그녀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런 그녀는 왜 적극적으로 산시로를 유혹하지 않았을까요? 산시로는 배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순수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순수하지 않았던 그녀야 말로 배짱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 3부작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만, 주인공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산시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명의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비교해본 작품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싶습니다. <문>은 1910년 3월부터 6월까지 도쿄 아사히신문과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소설입니다. 전작이 끝날 무렵 차기 작품을 예고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을 작가가 정하지 않고 문하생들이 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의뢰받은 문하생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춰보고 ‘문’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문’을 제목으로 해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니 작품의 얼개를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문’의 의미를 녹여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는 잇소암에 참선을 하러갔다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소스케의 독백에 제목인 ‘문’의 의미를 새겨 넣었습니다. “나는 나의 문을 얼려고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뒤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다. 네 힘으로 열고 들어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4-245쪽)” 문의 주인공 소스케는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일을 숙부에게 맡기고는 내버려 둔 탓에 동생의 학업조차 돌보아줄 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런 성격인 소스케가 친구 야스이와 함께 살던 오요네가 여동생이라는 말만 믿고는 결혼해서 살게 된다는 설정도 애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세키를 존경하는 분들은 그의 문체나 이야기의 구성이 빼어나다고 합니다만, 모호한 부분이 많고 마무리 역시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재소설의 경우 회차가 끝날 무렵에 갈등구조를 키워서 독자들이 다음 회차에 관심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전반적으로 이런 구조를 볼 수 없고, 비슷한 상황도 유야무야 정리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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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끓는 죽 먹는 것 같을 때면(황동규)" 나쯔메 소세끼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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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만약, 누군가 톨스토이며 도스프예스키, 세익스피어를 읽는다하면 제 정신은 아닐 것이다...? 고전은 더이상 읽히지도 읽지않는다. 그것은 고전의 죽음일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사람들은 신앙처럼 진화론을 믿는다. 어리석고 현명한 21세기의 교육 덕분이다. 일본 근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남모를 미소를 혼자 지을 때이다. 지금은 동양인의 껍데기를 쓴 서양인의 아류처럼 보이는 그들조차도, 그 때는 우리보다 더한 동양적 오류에 빠져있었다...라는 발견은 실로 재미있는 숨은그림찾기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럼, 그렇지이~ 너라고 별 수 있냐?"하는 식의 고소함...같은 본능적 속성일게다...^^* 기실, 그런 것은 다양한 문화 속이 하나일 뿐이고 흐르는 강물의 한 바가지정도의 역사일 뿐일텐데도... 소설 "문"에서 찾은 나쓰메 소세키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상실감을 풀어준다. "오랫동안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이라는 말에서 고뇌에 찬 인간 심리의 타협점을 찾은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