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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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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닮은 에이리언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에이리언이 있다. 지구 밖 우주에서 살고 있는 괴물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숙주로 자기 생명을 퍼뜨린다. <에이리언>이란 영화에서 에이리언은 사람의 배를 뚫고 나온다. 당연히 숙주=사람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버린다. 에이리언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숙주인 인간은 저항 한 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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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닮은 에이리언

- 리처드 커니, 『이방인, , 괴물』

 

 

 

에이리언이 있다. 지구 밖 우주에서 살고 있는 괴물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숙주로 자기 생명을 퍼뜨린다. <에이리언이란 영화에서 에이리언은 사람의 배를 뚫고 나온다. 당연히 숙주=사람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버린다. 에이리언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숙주인 인간은 저항 한 번 못하고 죽는다. 얼마나 무서운가? 내가 에이리언의 숙주가 되어야 하다니! 어떻게든 에이리언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내 목숨만큼 소중한 게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에이리언은 이렇게 절대 악이 된다. 절대 악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 혹은 희생양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겠다. 주목할 점은 에이리언과 같은 괴물만 절대 악이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의 사랑을 외친 예수도 희생양이 되지 않았는가? 절대 악은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를 권력이라는 말로 바꿔도 상관없다. 힘이 있는 자들이 절대 악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거기에 이 세상 모든 저주를 퍼붓는다. 하나가 죽으면 모든 사람이 산다는 논리! 무엇이 생각나는가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 , 괴물』(이지영 옮김, 개마고원, 2004)에서 이방인··괴물은 우리를 변경으로 이끄는 극한의 경험을 재현한다.”(12)고 이야기한다. 극한의 경험은 이미 확립된 범주들을 뒤엎는 경계에서 일어난다. 이방인, , 괴물은 경계의 저쪽에 있고 우리는 경계의 이쪽에 있다. 우리가 겪는 극한 경험은 우리가 저쪽으로 가거나, 이방인 들이 이쪽에 출현할 때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이방인··괴물(다양한 유령과 도깨비, 분신들을 포함하는)은 인간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들이다.”(15) 요컨대 에이리언은 내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존재이다.

 

에이리언은 곧 나다. 그럼 내가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이성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 세계로 에이리언을 말해도 된다. 에이리언은 무의식 세계에 갇혀 있다가 조건이 되면 언제나 의식 세계로 떠오른다. 현실을 뒤흔드는 실재가 바로 에이리언이다. 한국사회의 극우 보수 세력이라면 빨갱이가 곧 실재이고 에이리언이다. 더불어 살 수 없는 극한 존재로서 빨갱이.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끔찍한 대상.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이념 논쟁은 무엇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공포와 무관할 수 없다고 하겠다.

 

모든 자아가 악하지 않으며 타자도 전부 천사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비평을 그와 마찬가지로 필수불가결한 타자에 대한 비평으로 보강하는 것이 왜 현명한가에 대한 이유다. 에고 그리고 에이리언의 혼돈스런 범주들을 폭로하는 그러한 이중의 비평 없이,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 사이의, 혹은 사실상 인간과 비-인간(동물이나 신격) 사이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한 이중적인 운동을 통해서만 지금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소비중심 문화에 팽배한 힘의 탈-소외화를 희망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27)

 

지은이는 자아에 대한 비평을 타자에 대한 비평으로 보강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한다. 에고 입장에서 타자를 비평하는 게 옳지 않은 것처럼, 타자를 초월적인 세계로 내모는 일 또한 옳지 않다. 그는 무조건적 환대를 주장한 데리다를 비판하며 타자들이 내보이는 혼돈스런 범주들을 폭로하는 이중의 비평을 제안한다. ‘판별의 해석학(diacritical hermeneutic)’으로 전개되는 이 방법으로 지은이는 광기나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이방인과 신, 그리고 괴물에 대해 보다 개방적인 태도(42)를 견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만 믿는다. 믿는 것만 믿는 거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낯선 것을 어둠 속으로 내몰고 우리는 항상 빛이 있는 세계에 있으려고 한다. 어둠 속에 있어야 할 에이리언들이 바깥으로 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내밀면 우리는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거기에 저항한다. 타자는 어둠 속에 있어야 하고, 우리는 밝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는 이분법이 도리어 괴물을 낳는 상황이 되어 우리를 두려움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영화 에이리언시리즈나 지옥의 묵시록을 분석하며 지은이는 우리 안에 있는 에이리언을 다시금 강조한다. 에이리언은 우주에서도 이익을 탐하는 자본가들의 탐욕이 빚은 괴물이다. 베트남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몸으로 재현한 커츠 대령 또한 전쟁이라는 비인간적 상황이 만든 괴물이다. 우리는 에이리언이나 커츠 대령을 희생양으로 삼아 우리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지만, 그것은 이내 타자가 내보이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거짓으로 판명된다. 묘한 건 우리가 곧 타자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타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타자를 받아들이면 이성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파괴된다. <에이리언> 3편에서 주인공 리플리는 뱃속에 괴물을 품은 채 용광로로 뛰어들고,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커츠 대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내몬다.

 

지은이는 괴물을 생산하는 것은 오히려 특정한 희생적 분위기 안에서 남용되는 이성(112)이라고 말한다. 이성 특유의 이분법이 남아 있는 한 희생양을 요구하는 제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괴물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문학작품이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괴물들과 만났고 가차 없이 그들을 죽였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괴물이 넘쳐난다. 괴물은 이성의 밖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이 끊임없이 괴물을 생산한다. 이를테면 우리 국가는 그들 이방인에 끊임없이 맞서고 대항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한다.”(117) ‘정체성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정체성에 새겨진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지닌 정체성은 이방인을 상정함으로써 공고해진다. 이방인과의 거리가 우리를 통합적 정체성으로 모이게 한다. 이방인이 없는 순수한 정체성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개인이나 국가가 자행하는 이방인의 악마화는 과거에 억압되어진 것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강박적인 충동으로, 때로는 우리를 무섭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의 모습으로 현재에 되살아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악마화 된 타자의 모습에서 우리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거울 이미지이다. 타자화 된 우리의 모습. “실제로, 기묘한 낯설음 안에는 새로울 것도 에이리언 같은 것도 없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마음 안에 자리 잡은 것이며 우리에게 그만큼 친숙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억압의 과정을 통해서 소외되어버린 것이다라고 프로이트는 결론을 내린다.

기묘한 낯설음(unheimlich)의 접두사 ‘un’은 논리적으로 반대됨의 의미를 갖는다기보다 변증법적 역전의 의미로 이해된다. 내가 기꺼이 미워하는 적은 종종 가면을 슨 내 자신인 것이다. 프로이트로부터 단서를 얻으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에이리언들이 너무나도 두렵다면, 그 까닭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 자신보다 더 우리와 닮았기 때문이다. (135)

 

우리 안에 기묘하게 낯선 존재가 있다. 이성으로 쉽게 다스릴 수 없는 존재이다. 지은이를 따르면, 우리는 이 낯선 존재를 타자에게 투사하여 내적 분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 지은이는 자아의 탈중심화를 주장하고 있는바. 이 개념은 자아는 예기치 않은 것, 부조리한 것, 새로운 것에 그 자신을 개방한다.”(139)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무의식의 의식위에 기반하는 세계 민주주의 연대는 바로 탈중심화된 자아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곳에는 이방인이 없다. 오직 우리와 비슷한 타자들이 있을 뿐이다. 기묘한 낯설음을 내 안의 타자로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 연대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판별의 해석학은 이렇게 “(1) 또 다른 것으로서의 자신과, (2) 다른 자아로서의 타자를 인정하는 것(144)으로 이어진다. 타자를 인정하는 일은 타자를 절대적 존재로 바라보는 입장과는 다르다. 타자의 윤리학은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회색의 문제이다.”(148)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이분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아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 또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은이는 이방인--괴물을 기괴한 숭고의 대상으로 만드는 포스트모던 이론과는 거리를 둔다. 리오타르, 크리스테바, 지젝을 거론하며 지은이는 이런 설명에 따르면 공포는 신(God)의 수직적 초월성(레비나스와 부정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처럼 단지 언표할 수 없는것이 된다. 간단히 말해 기괴한 것들의 부정(apophasis)과 신성한 것의 부정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159~160)라고 정리한다. 이리 보면 유대인을 말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과 만인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숭고라는 맥락에서 하나로 묶인다. 그래서일까, 지은이는 지젝·크리스테바·리오타르와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 역시 정치적으로는 국가사회주의로부터 그렇게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나의 요점은 국가사회주의처럼, 그들의 숭고 버전이 때로 악의 공포 앞에서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162)라고 비판한다.

 

2001년 일어난 9·11 테러를 지은이는 이러한 숭고미학으로 분석한다. TV로 테러 장면을 본 사람들은 “(1) 그들이 테러 현장에 있는 듯한고통(이방인에 의해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최초의 테러로, 트라우마적인 경험), (2) 테러 현장에 현실적으로 없는 덕에 가능한 초연함(부시가 의회에서 우리는 위험에 노출된 국가다라고 말했을 때처럼).”(240)이라는 이중의 경험을 한다. 미디어는 다만 사건을 중개할 뿐이다. 이것은 미디어의 시선이 순진무구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디어에 나타난 테러 현장을 반복적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미디어를 상상하게 된다. 테러의 공포는 우리(이성)가 어찌할 수 없는 감각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테러리스트나, 테러를 강조하는 권력자들이나 이러한 공포로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한다.

 

지은이는 테러에 목숨을 내맡겨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직면한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던 그 사람들은 우리이면서 동시에 타자였다. 우리가 타자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희생자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이런 테러를 벌일 수 있겠는가? 지은이가 사랑을 얘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타자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테러는 일어날 수 없다. 수많은 생명을 앗으면서까지 지켜야 될 이데올로기란 과연 무엇일까? 희생자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 테러리스트의 마음은 그대로 세계를 우리 편과 악의 축으로 나눈 미 행정부 관리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우리는 선이 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가 선과 악을 구분하고 우리에게 선을 부여했는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지젝이 사용한 개념이다)에 들뜬 사람들이 벌인 추악한 이상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을 우리는 9·11 테러에서 똑똑히 볼 수 있는 셈이다. (다음 글로 계속)

 

 

o*****s 2018.03.2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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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신, 괴물 -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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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시간 끝에 간신히 읽어내기는 했지만솔직히 말해서 읽었기 보다는 그냥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방인, 신, 괴물’은 처음부터 읽기가 버거울 것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도전한 것 같고 아무래도 언제까지나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읽기 능력의 부족함을 잘 깨닫게 되는 책이었던 것 같다.   대충은 무슨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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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시간 끝에 간신히 읽어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읽었기 보다는 그냥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고 말하게 되는 이방인, , 괴물은 처음부터 읽기가 버거울 것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도전한 것 같고 아무래도 언제까지나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읽기 능력의 부족함을 잘 깨닫게 되는 책이었던 것 같다.

 

대충은 무슨 의미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알 것 같으면서도 논의의 진행이 그저 난해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서 뭔가 말을 꺼내기가 쉽진 않은 것 같다.

 

그저 어렵게 읽었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책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입장 속에서 어떤 논의들을 진행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들어가는 글을 읽었다면 그 다음의 논의들 대부분이 그걸 어떤 식으로 좀 더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타자라고 생각하는 것들

 

낯설게 느껴지고 나-우리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는지를 이방인, , 괴물이라는 존재()로 간추려서 설명해주려고 하고 있고, 다양한 학자들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그런 모색들의 중요성과 함께 그 한계를 그리고 새로운 모색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역사

신화

신학

그리고 지금 현재의 불신으로 가득한 시선까지

 

어떤 식으로 타자라는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화시키고 있는지를,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고, 괴물을 두려워하면서 결국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우리 또한 괴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어떤 식으로 타자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 타자를 반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다양한 학자들의 분석과 통찰들을 설명해주면서 그 논의-통찰의 부족함을 알려주고 있으며 어떻게 그 부족함을 채우려하고 있는지를, 그걸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었네라는 감탄을 하게 되는 깊이 있는 해석들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도 때로는 해석의 상세함-난해함에 어리둥절하게 되기도 했다.

 

아는 것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지만 때대로 책에 담겨진 통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지게 느끼기도 한다.

 

중반부에서는 2000년 이후 우리들의 머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2001.09.11의 순간을 자세하게 다뤄내고 있으며, 철학적 허무주의와 패배감을 어떤 식으로 이겨내야만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내용에서는 알지 못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면서 무언가 동의를 하고 싶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햄릿에 대한 다양하고 상세한 해석들을 읽어내면서 과연 해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향할 수 있는 것인지 놀라게 되기도 하고 지나치게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면서도 하이데거의 논의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후반부의 내용들은 이해되는 논의는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극단적 선택에 대한 경계와 무언가 지금을 돌파해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인상적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이해한 것이

이해되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할 수 없고 어떤 말도 아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들을 꺼내게 된다.

그런 생각들이 부디 틀리진 않았기를 그리고 오해로 가득하진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꽤 오랜 시간동안 읽었음에도 별다르게 얻은 것이 없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y*******o 2015.1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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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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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직후 부시는 자국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지으며 전쟁을 정당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인류를 유혹하는 악마의 존재는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다분히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이다. 그 과학성, 정당성 여부는 입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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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직후 부시는 자국에 협력하지 않는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지으며 전쟁을 정당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인류를 유혹하는 악마의 존재는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기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다분히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이다. 그 과학성, 정당성 여부는 입증하기 힘든... 이 외에도 인류가 만든 구분 짓기의 모습도 존재한다. 푸코에 의하여 연구된 정신병리학이 그러하며, 지난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보여준 유대인 대학살이 그러하다. 존재하지 않는 우등과 열등의 구분, 이는 사람이 만들어낸 극히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다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권력에 의해 정당화되는 순간 이는 하나의 영역에 속한 이들과 다른 영역에 속한 이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정신질환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들을 비정상으로 정의하는 기제는 역사를 통해 발전해 왔으며, 지금은 DSM-IV 라는 과학적인 분류에 의하여 특정 증세를 가진 이는 특정 질환에 해당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선험적인 구분이라기 보다는 인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는 이들을 환자 아닌 범죄자로 구분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종교의 힘을 빌어 악마와 내통하는 자, 선을 해하는 자 등으로 구분하였다. 나치가 보여준 만행 역시 후천적인 구분 짓기의 양상을 띤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해보이기 위하여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유대인’이라는 희생양이었다. 일종의 선민의식 차원에서 이를 해석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는 성서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선민의식과 흡사하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서 조차도 나타난다. 정당하지 않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 희생양을 요구했던가? 국가의 안보를 저해하고 공산주의를 책략하려 든다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진보 세력들이 고초를 겪었으며 있지 않은 간첩단들이 얼마나 많이 창조되었는지를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 짓기의 영역은 결국 또 다른 구분 짓기를 낳을 뿐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살아남기 위한 전쟁과도 같다. 끊임없이 정결함을 부르짖고, 자신이 보다 신의 영역에 가까이 존재함을 구술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그렇게 타인을 배척한 이들 역시도 타인에 의해 배척당할 수 있음을, 그 위험성에 대해 우리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나날이 새로운 싸움을 갈망하는 듯한 오늘날의 세태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혹자에 의하여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라고도 이야기되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어떠한 종교도 존재치 않는다. 종교는 그저 그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 그들의 싸움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미움의 정서이다. 근본적으로는 비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정서에 근간하여 악의 세력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역시 상대에 의하여 ‘악’으로 정의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분쟁(?)의 종식을 위하여 하이데거가 부르짖었던 것은 다름 아닌 신이었다. 지구를 관통하고 있는 허무주의의 정신, 타인과의 분쟁을 정당화하는 수많은 기제들의 타파를 위한 보다 강렬한 신. 그는 이러한 신의 존재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 세계사를 주름잡을 사건들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를 부르짖은 그의 목소리는 결국 나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우등한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세계 평화, 열등한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쟁. 자신들을 구원자로 설정하고 희생양의 존재를 교묘히 변질시키는...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구분 짓기일 뿐이다. 프랑켄슈타인, 에어리언 등이 현실 아닌 영화에나 존재할 수 있음을(혹시 또 모른다. 먼 훗날 우주인이 지구를 정복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고, 우리와 다르다 규정짓는 이들은 결국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이방인, 괴물의 존재를 타파해 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q*****2 2005.05.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