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 배웠던 수요곡선, 공급곡선, 평행 상태 등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적이 없는가? 왜 그 잘났다는 경제학자들은 길지도 않은 1년 앞도 내다보지 못할까? 그 휘황찬란한 수식과 멋진 이론들로는 현실에서 유용하지 않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이 책은 기존 주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들이 기실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법칙' 이 아니라 하나의 '우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이것은 '폴 크루그만' 과 같은 주류경제학자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즉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만일 경제학이 과학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예술? 철학? 과학도 아닌 학문을 전공한 자들이 사회현안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손' 운운하며 '경쟁'과 '효율'을 이야기하며 많은 사람들은 실업의 고통으로 내몰고 이를 감내해야 한다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참아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건가? 도대체 뭘 근거로? 만일 경제학의 바탕이 실험에 의해(혹은 축적된 데이타에 의해) 뒷받침된 이론이 아니라면 뭔가 출발에서 문제가 있는것 아닐까? 이 책은 미국의 신고전학파와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자본(capital)의 정의와 생산함수(product function)에 관련된 논쟁을 소개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자본이라는 개념 부터가 잘못됐다는 주장을 책머리에 두고 있는 것이다. 생산 함수란.. 주류 경제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본적인 이론이다. 즉, 일정량의 생산은 생산을 위해 투입된 요소들을 입력으로 받는 함수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전문가도 아니고 기억에 의지해서 작성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할 것이다). G = f(L, K) : G는 생산물, L은 노동, K는 자본 때문에 똑같은 물건을 생산하더라도 어떤 f 즉 생산방법(혹은 생산기술)은 자본집약적이고, 어떤 f는 노동집약적이다. 최종 생산물에서 얻어지는 이윤은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비율에 따라서 나누어진다라는 이론이다. 이때 현실적으로 중요한것은 바로 자본의 생산성 때문에 자본이 최종 생산물에서 발생한 이윤의 일정부분을 (정당하게) 가져간다는 부분이다. 바로 사장님들이 돈을 버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되겠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 하다. 생산하려면 노동자가 있어야 하지만, 분명 자본재(혹은 자본재를 구입할 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본재를 제공한 자본가들은 그에 해당하는 이윤을 얻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따져보자, 그와 같은 자본가들은 얼마만큼의 이익을 가져가야 할까? 100억원을 투자해서 1000명이 일하는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는 과연 얼마만큼의 이윤을 가져가야 최종생산물에서 자본이 기여한 바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일까? 답은 모른다이다. 생산에 관련된 변수들은 너무나 많고 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특정시점에서 특정요소가 최종생산에 기여한 바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실제로 어떤 경제학자도 그게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성전자의 사주인 이건희가 얼마를 가져가야하는지는 어떻게 결정되나? 결국 생산함수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산함수는 논리로는 그럴듯 하지만, 경험적인 데이터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주류 경제학의 대부분의 함수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급곡선 수요곡선 모두 그럴듯 하지만, 경험적인 데이터로는 검증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것 아닌가? 최소한 우리가 그와 같은 이론을 마치 현실세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듯이 대우하는것은 좀 지나친것 아닐까? 그냥 말그대로 이론 중에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달이 거대한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전문 천문학자들은 어떤 증거를 가지고 이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이론은(내가 가진 천문학에 관한 지식안에서) 반박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전문 천문학자들이 내가 이해가능한 반박을 해주기 전까지는 계속 그러할 것이다. 생산함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저자들은 위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자본에 대해서 상당히 새로운 시각을 전개하고 이를 현실 데이터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산업활동과 이윤추구 행위는 별개이며 이윤의 분배는 산업활동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 나타나는 사회적인 권력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이후로도 매력적인(지적으로 재미난) 주장이 가득한 책이므로 경제학에 대해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고 해답을 찾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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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자원으로 본다면 자본의 축적은 화폐를 단위로 하여 도구화 하는 자원의 축적(즉, 화폐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규모로 조직적 차원의 축적을 하는 존재는 인간동물이 유일 한 것 같다. 부분적으로 그 동력은 아마도 욕망일테고 그 욕망은 나르시시즘적 불안(대체로 미래에 대한)에 기인하는 듯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르크스도 개탄했다던 인간의 노동의 목적이 돈을 버는 것이 되고 또 돈을 버는 목적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되는 사태(‘돈의 본성, 2004, 재프리 잉햄), 저자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해로 지적한 바와 같이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는 순환론적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즉, 자본가들뿐만이 아닌 아마도 자본주의체제의 모든 인간동물들 거의가 즉, 권력이 함축). 일반 동물들에겐 볼 수 없는 행동양식 아닌가? 그들에겐 소유현상 자체가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 갤브레이스의 지적을 일반화시켜 보면, 자원(재산, 토지, 화폐)을 소유하다보면 인간동물은 이른바 보수화된다는(’불확실성의 시대‘, 1976) 그리고 이 보수화는 방어기제(소유권, 탈세와 탈규제 등)가 덧붙여진 한층 격화된 차원의 욕망을 통해 축적의 동력으로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1904, 1908, 소스타인 베블런 ; ’가차없는 자본주의‘ 2010, 조이스 애플비). 축적이 확대되면 지배와 권력욕망이 견고해지는 바(축적 자체가 권력이 되는 바), 보통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계부터가 권력작용으로 변할 소지가 다분한(원래 본성상 그렇지만은) .... 어쩌면 인간동물은 뇌라는 독립체(?)에 종속(보상과 처벌 그리고 대립절차 시스템 - ’인간 속에 악마‘, 1996, 장-띠에 뱅상)된 불쌍한 존재(즉, 노예, 결국은 돈의 노예, 욕망의 노예)라고도 볼 수 있다. 계속 심화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중독자라는 이야기다(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고도의 중독사회 아닌가). 욕구(생존에 필요한)는 한계선이 존재하지만 체제 속에 깊이 중독된 욕망(요즘 말로 탐욕)은 무한계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인간동물 집단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그것도 부정적으로)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일반인적 시각에서 이 책의 또 다른 결론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역사 속에서 그랬었겠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체제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예외없이 돈을 보면 아예 미쳐버리는 것 같아... 무수히 경험하는 바, 정신을 잃는 것(마비)이 보여 ... 마치 날강도 귀족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하려는 듯하게 ... 워낙 ‘옮긴이의 말’에 간추린 내용만을 보더라도 핵심(진실)과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정도로 탄탄해서 별도로 서평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불필요하다. 저자와 옮긴이가 역사성과 함께 엄밀한 논리와 진실(현실)의 적합성을 면밀하게 추적해 주면서 논하듯, 주류니 정통(이른바 강단 및 총체적 경제학의 흐름)이니 하는 류의 상품, 화폐, 자본론(즉, 경제론)은 소견으로도 지배(권력, 예속)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실에서 절실하게 느끼는지라 옮긴이가 대안적 이해방식으로서 옮긴 가장 중요하다는 책들 세 권 중 ’자본‘에 해당하는 것이 이 책이다. ’화폐‘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돈의 본성(재프리 잉햄, 2004)‘ 그리고 ’상품‘에 해당하는 것이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1944)‘이다. 이 외에도 옮긴이가 해제를 쓴 저작들, 일례로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장 지글러, 1990)‘,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필립 바구스 외, 2014)‘ 등의 해제 내용 그 자체는 - 보통 해제라고 해서 쓰여진 많은 그것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정도로 - 매우 탄탄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일단 권력(지배)으로서의 국가(제도)와 공동체로서의 사회(실체)라는 개념이 개인과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어와 함께 - 언제나 그랬지만 - 머리 속에서 뱅뱅 맴돌면서 떠나질 않는다. ‘국가라고 불리우며 지칭하는 것의 실체가 마치 사람과 같이 의인화되어 있다’(‘역사가 사라져 갈 때’, 1994, 조이스 애플비). ‘국가의 실체적 관념은 다분히 허구적인 것으로 - 국가명칭이란 지배행위들의 이데올로기적 실체행위에 불과한 것 - 지배행위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지배와 그 양식들’ 2011, 이종영).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국가제도에서) 국민이 통치하는 곳은 없다.... 책임을 회피하는 관료와 공무원들이 통치할 뿐(’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1994, 칼 포퍼). ’사회학적으로 볼 때 국가는 공장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업이다‘(’행정의 공개성과 정치지도자 선출 외‘, 1921, 막스 베버). ’법인이라는 법적권리와 유한책임이라는 권한을 부여한 국가는 기업에 생명을 불어넣는 유일한 주체다.... 국가가 없으면 기업도 없다.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기업의 경제학’, 2004, 조엘 바칸). ‘시장은 사회나 국가없이 작동하지 않는다(못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지배를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 2016, 김동춘 외). ’법인기업은 그것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공적기관인 국가 안에서 강력한 것이다.... 법인기업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이며 우리를 통치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 법인기업이 현대국가의 연장이 아닌지, 즉, 우리들이 지배되고 있는 더욱 큰 조직의 불가분의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는지 아닌지를 물어야 한다‘(’불확실성의 시대‘, 1976, J.K. 갤브레이스). ’자유방임은 국가에 의한 계획된 산물이다. 시장논리와 그에 따르는 온갖 위험을 서민들에게 강제하려면 국가통치의 기술과 억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도 시장도 이 사회라는 실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 사회를 시장에 묻어 버리거나 국가에 묻어버리는 행위는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다’(’거대한 전환‘, 1944, 칼 폴라니). ’자본과 국가의 유대(유착?)관계를 지나 공생관계의 견고화를 통해 모든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은 국가권력(국가제도들)을 자본화함으로서 자본 자체가 국가의 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권력자본론’, 2004, 심숀 버클리, 조나단 닛잔). 신고전파의 자본론 우화(이데올로기 : 지금도 열심히 공부들 하고 있는 한계생산성이론, 생산성분배이론)가 만들어진 계기는 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클라크가 교수직을 맡고있던 시카고대학에 대한 록펠러의 4,500만 달러의 기부금으로 당시의 교육계와 학계는 석유와 라드산업의 거물들이 거느리는 충성된 종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신들의 후원자와 동일계급으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 것을 염려해 기존 사회제도의 개혁에 저항하는 온갖 형태의 파업에 몸바쳐 왔다고 한다. 한편, 그 와중에서도 철도산업 행태를 비판하거나 노동운동에 관심을 보인 비미스와 커먼스 등의 교수는 해고시켜 버리는 일도 있었고(애초에 배제, 이후엔 왕따 아니면 해고,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이런 일은 언제나 수시로 일어나는 일인 듯 -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스콧 니어링, 윌리엄 윌리엄스 등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2004, 김동춘). 록펠러 외 석유와 라드산업의 거물들이 당시의 교육계와 학계를 돈으로 지배하려는 했던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에 관련하여 ‘날강도 귀족’(온갖 조작, 사기, 강탈, 폭력을 통한 자본의 축적)이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해 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했겠는가라는 요지다. 현재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리고 사고하는 상품(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 생산된 것), 화폐(교환을 매개해 주는 상품으로서의 상품화폐론), 자본(잉여를 낳도록 생산에 투입되는 자본재 즉, 투자된 돈이라는 개념)이라는 관념으로는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동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를 이어가며 포획된 것 조차 깨닫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 클라크의 생산성분배이론은 나온지 거의 반세기 동안 완전무결한 이론으로 군림하였으나 이론이 기반하고 있는 자본의 개념(자본의 수량 개념 - 자본을 수량화 즉, 측정할 수 없음에도)이 순환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 더욱 결정적인 것은 스라파의 99쪽 짜리 저작으로 ‘자본의 수량(자본이 생산성에 기여한 몫) 혹은 측정’이 존재(측정가능)한다는 가정으로 출발하여 그 가정이 모순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자본의 수량이란 허구’라는 것이 밝혀진 후로 그 유명한 캠브릿지 논쟁(영국측과 미국측)이 수십년간 지속되나, 인정하면서도 우회적 회피, 얼버무림, 무시 등의 수법(미국측)으로 오늘날까지도 짜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교수, 전문가, 정책관료 행세들을 하며) 아주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그 전에 이미 베블렌에 의해 자본을 물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관념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상품가치나 자본축적이 생산(과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주장을 기반으로 자본을 불변자본(투여된 자본재)과 가변자본(노동력가격+잉여가치)으로 분류하여 투여된 자본을 회수하고 창출되는 잉여가치(노동시간으로 측정한 노동력 가격은 실제 노동시간 보다 반드시 적게끔 되어 있어 그 차이만큼 해당되는 노동가치를 말함.)를 사적소유제도에 힘입어 전유해 가는 것이 자본축적의 본질 즉, 착취라는 것. 잉여가 존재한다는 것은 계급사회라는 것이고, 계급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잉여가 어떻게 창출되고 누가 가져가는 가를 놓고 싸움(투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특정 생산양식에 따른 특정 사회적 관계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당시만 하더라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 통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정)에 초점을 둠으로서 생산에는 생산적 및 비생산적 노동이 포함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다른 사회적 생산을 분리해 낼 방법이 없고, 생산에서 가격(노동가치를 생산가격으로, 생산가격을 시장가격으로)으로의 전형문제라는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 요지다. 신고전파와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모두 생산에 기반을 둔 축적이 화폐로 표현된 형태(물질적 척도)로서 측량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질적으로 다양하며 주관적인 성격을 포괄하고 있는 생산이라는 실체를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화폐라는 수량(물질적 개념)으로 전환할 수 없고 이는 축적되고 있는 것의 정체(질적인 측면)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밝혀내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에 얽혀들고 마는 것이라는 요지다. 생산과정에서 자본측량의 단위(자본축적의 실체)를 신고전파에서는 효용(물질적 유용성 즉, 쾌락)을, 마르크스는 노동을 단위로 하는 측량문제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적 요소(물질주의적 관점)만을 고집하여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면 근본적인 실체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여기서 저자들은 토스타인 베블렌의 권력자본론과 루이스 멈포드의 권력문명론의 제도주의 이론 틀의 힘을 빌어 자본의 정의를 권력 개념과 통합시키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두 이론은 모두 생산성(창조성)과 권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출발하는데, 베블렌은 이 상호작용을 산업(생산, 사회적 유산으로의 지식에 기반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공동체의 총체적 과정의 개념)과 영리활동(이윤추구만을 위한 투자와 청구권, 상품, 가격, 화폐 등이 본질적 존재요소, 화폐적 부의 축적은 소유권법적권력에 기반한 생산에 대한 깽판놓기로 뜯어가는 몸값개념 즉, 비생산적인 과정)으로 구별해서 연관지었고, 멈포스는 이를 민주적 기술(신석기 시대의 민주적 세계관)과 전체주의적 기술(문명화된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권력지향적 권력문명으로, 거대기계에 의한 사회의 기계부품화, 권력집중, 계급사회. 근대에 이르러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재출현 즉, 기계적 세계관/기계적 합리주의) 간의 갈등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 베블렌의 개념으로부터 깽판놓기(사보타주, 생산에 대한 그 효율성의 의식적 철회, 영리활동의 산업 즉, 생산에 대한 제한)라는 법적권리로부터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유지하고 정상적인 수익률(몸값)을 확보한다는 것. 산업(생산)에 대한 영리활동의 제한으로서 자본이 출현한 것과 관련하여 현대주식회사의 발생(통념과는 달리 대량생산을 위한 것이 아닌 과도한 생산을 제한하기 위한 규모의 크기에서 출현한 것)과 신용이 소유권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것(주식과 채권의 구별, 자기자본과 부채란 산업을 제한 할 차등적 및 평균적 능력을 자본화한 것) 등이 있으며 관련한 흥미진진한 설명이 역사적 연관성과 함께 전개된다. 영리활동과 관련한 모든 활동의 목적은 오직 자기 이윤(절대적 이윤이 아닌 차등적 이윤 즉, 차등적 축적) 추구를 위해 소유권이라는 법적권력을 무기로 산업(생산 - 개별적 및 전체적 차원 모두)의 의식적 통제(제한, 깽판놓기)가 기초하고 있다는 점. 멈포스의 민주적 세계관을 지닌 신석기문화에서 권력문명이 나타난 이유는 물질적 환경(경제적 잉여가 사회적규모로 집합형태를 띄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재해와 재난의 발생은 권력자의 권력에 대한 위협과 공포으로 작용) 때문. 인간으로 이루어진 거대기계(권력이 만든 기술, 그 기술이 낳은 최초의 기계로서의 사회조직 - 노동기계, 군사적 기계, 관료기계)가 최초로 적용된 대상은 사회 자체(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융합)로 권력으로 집중된 사회가 형성되고 계급적 사회구조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 16세기가 되면 다시 중앙집중화된 권력이 출현하여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 즉, 갈리레오로부터 뉴턴에 이르러 인간만사 전 사회분야로 기계적 세계상과 기계적 합리주의가 확산되며 몇세기도 안되어 기계적 원리가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는 것으로, 저자들은 이를 거대기계의 권력구조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자본에 적용(정상수익률을 기반으로하여 소수의 부재소유자들이 사회전체의 인간조직에 행사하는 권력을 상징)하고, 국가와 자본의 모순된 의존관계를 마르크스의 본원적 축적과 조세체계와 공공부채의 관계를 통해 국가는 최초부터 축적과정의 본질적 측면의 하나였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정치제도들이 자산가격으로 자본화되어 자본 자체가 점차 국가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금까지는 기존의 자본론과 그 한계점 그리고 저자들이 기반으로 두고 있는 배경이론들에 대한 요약적 설명이고, 이후로는 자본의 규모가 변화되어 온 역사적 형태 및 관련한 내용으로 이들이 추구하는 축적은 정상/평균 수익률을 넘는 차등적 축적이고, 이는 자본의 차등적 권력을 좇는 투쟁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변동의 과정을 통제할 권력을 더 많이 얻기 위한, 반대를 짓밟으면서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자본가들 내부의 투쟁이란 점. 자본축적과정의 중심에 있는 가장 크고 가장 큰 이윤을 올리는 기업연합체인 지배적 자본이 차등화 축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신규설비투자(외부적 넓이지향), 인수합병(내부적 넓이지향) 비용삭감(내부적 깊이지향), 스태그플레이션(외부적 깊이지향)을 제시하고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8종류의 명제가 주어진다. 8가지 명제에 대한 역사적 변화(축적의 위기나 환경변화 등)와 그에 따른 차등화 축적 전략적 대응 및 결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가장 타당한 지표와 통계적 자료들을 통한 추세와 경향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통념을 모조리 깨뜨리는 평가를 하고 있다. 마지막 시기만을 요약해 본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차등화 축적을 이끌었던 기업연합은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으로 중동에의 무기공급 및 석유가격을 부추켰던 미국과 유럽정부를 뒷배경으로 하고 축적메커니즘은 에너지 갈등과 석유위기의 순환이었다. 석유가격이 오르면서 전세계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고 도처에서 분쟁과 갈등이 들끓었지만 이 연합은 번창하였고 스태그플레이션의 결과로 나타나는 인플레이션의 큰 혜택을 입어 세계최고이윤을 올리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것(주안점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재분배적 현상이고, 그것 때문에 나타나는 것. 차등화 축적이 깊이지향 양식으로 바뀌고 거시경제상황이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변해 갈 때 인플레이션이 나타나는데 이때 보통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명분하에 긴축기조로 가게 되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경제침체가 벌어지게 된다. 즉, 지배자본이 인플레이션을 지속시키기 위해 경제성장을 희생시키는, 정책입안자들에게 유행했던 이중인격적 행태를 설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설명)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상황변화(개도국의 투자유치 적극, 하이테크산업 등장으로 투자낙관, 주가급등 및 신자유주의로 사유화와 자본탈규제)와 1990년대 냉전종식으로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은 해체되기에 이르고, 민간하이테크와 기업인수합병(새로운 넓이 지향 축적양식)을 기반으로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정부를 배경으로 삼는 기술달러-합병달러 동맹의 도전을 받게 된다는 것. 탈규제, 사유화(민영화), 평화협상 등으로 기술달러-합병달러 동맹의 기업이윤이 치솟고 반면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주저 앉는다. 그러나 넓이 지향 축적 양식의 팽창은 아시아 신흥시장에서의 엄청난 과잉설비의 누적을 낳았고, 이윤마진에 부정적 결과를 예측한 부재소유자들이 (수익종가가 평균 이하인 나라의) 자산들을 청산하기 시작하면서 멕시코를 이어 태국을 거쳐 거의 개도국 전반에 걸친 외환위기가 확산되어, 2000년이 되자 중심부국가까지 엄습해 미국을 필두로 대폭락이 시작되면서 이전 20년간 기업합병의 물결을 지속시켜 준 기반까지 붕괴지경에 이르고, 게다가 9.11사태와 아프카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 다시 격화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폭력과 전쟁 이윤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2000년 초 시점에서는 지배적 자본은 다시 갈림길에 놓여있다는 것. 넓이 지향 축적을 계속 밀고 나갈건지 깊이 지향 축적으로 전환할건지 지배적 자본 자체의 내부 투쟁에 달려있지만 당시까지는 깊이 지향 축적으로의 전환이 승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 양식의 명확한 징후는 스태그플레이션과 갈등(예로 전쟁)의 고조다. 2000년 추세를 보면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의 몫이 치솟고 있는 반면 기술달러-합병달러 동맹의 몫은 급전직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달러-합병달러 동맹의 경우 지난 한세대 동안 정치적 영향력을 엄청나게 공고히 해 놓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분석이 나온 후 거의 15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일까? 장기침체 상황으로 보아 스태그플레이션의 지속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2000년 이후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과 기술달러-합병달러 동맹의 축적이윤의 몫은 어떤 변화(추세)가 있을까? 저자들의 진단으로는 당시 기준으로 자본축적의 전지구적 통합은 요원한 일이고 대신 인수합병 대상기업은 얼마든지 남아있으나 거의 20년간 진행된 인수합병으로 국내외적으로 기업집중화에 대한 각종 장애물 탓에 넓이 지향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아무튼 차등화 축적이 계속된다는 법칙 또한 결코 없다고 하니 이 상태가 그냥 지속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트럼프의 당선과 병행, 최근에 와서 한반도 긴장의 심화화와 이란과의 전쟁가능성(포함 6개의 지정학적 분쟁가능 지역)이란 변수는 무기달러-석유달러 연합의 깊이지향 축적양식과의 연결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바 2000년 당시 관점에서 지배적 자본 자체가 원하는 바인 듯 보인다. 선진국의 인플레이션과 무기수출은 양의 장기적인 상관관계가 있음이 밝혀진 바, 전쟁은 아주 매력적인 지배자본의 차등적 축적양식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패권유지라는 모호한 정의 보다는, 부분적으로 그런 연유로 냉전이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미국시민들의 세금(2012년 7,000+α2
억 달러, ‘전쟁의 경제학’, 2012, 비제이 메타)을 쏟아 부으면서까지 세계군사기지의 고리화 네트워크와 군산복합체를 유지(오히려 국방예산규모로는 강화됨)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든다. 전쟁은 무기수출 보다도 더 매력적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군산복합체(그 가동률이 10% 밖에 안되는데도 수익률은 평균을 훨씬 넘는다는 점이 의미하는 바)는 물론 관련 지배자본동맹에도 함께 차등적 축적을 늘려 줄 수 있는 수단(역시 가동률 25%에도 불구하고)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지배자본의 지속적 축적은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는 일이므로 궁국적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리고 20세기 역사를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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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의 심장을 움켜쥐다.
순수한 의미의 경제학이란 현실에서 존재할까? 이론적인 학문으로서만 존재할까? 경제학은 정치적 권력에 영향을 주거나 받지는 않는걸까?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주를 이루는 현 시점에서 <권력자본론>은 상당히 파괴적인 주제로 부상될 수밖에 없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농간에 휘둘리는 경제학의 실체를 파헤친 책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기도 하다.
그간 경제학 서적들을 읽으면서 참 많은 답답함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한방에 해결해주는 책~!!
개인적으로 안으로 쌓이는 실망감과 답답함을 이 책의 저자는 질문으로 묻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가려움을 긁어주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경제학과 정치학을 분리시켜버린데는 정치적 목적이 작용했음과 이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를 듦과 얼마나 현실적으로 설득력없는 내용들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핵심내용을 이루고 있는지 드러낸다.
이 한 권의 책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주류경제학이라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허구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의 문제가 얼마나 많은 결과물들을 양상해내고 있고, 자본의 불균형을 초래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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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0. 15. 완독.
옮긴이께서 책이 어려운지라 친절하게 옮긴이(전문적인 논문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는 대중서적이 되기를 원하셨는데 )의 글을 통해 사전지식을 얻게 해 주었지만, 역시나 읽기가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음.^^
'자본주의', '자본'이 무엇인가 궁금해 읽기 시작하였다. 지은이들은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마르크스파 정치경제학에서의 '자본주의'와 '자본'의 개념이 잘못된 것임을 언급하고 자본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루어나간다.
자본주의라는 전체 사회 체제가 '경제'라는 핵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관념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게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란 총체로서 단일한 전체적 사회 질서로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잇다고 믿으며, 따라서 결국 그 주요 범주인 자본의 개념도 그렇게 포괄적 관점에서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104쪽)
글쓴이의 뜻에는 동감이 갔다.
또한,'경제학'과 '정치학'이 나뉘어서는 자본주의와 자본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밖에, 편협한 이해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데 동의한다.
'국가'라는 개념은 종종 사회 조직의 근간이 되는 중심적인 정치적 법적 제도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점차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적 제도들이 자산 가격의 모습으로 '자본화'되기에 이르면서, 자본 자체가 점차 국가의 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의 권력 제도들이 이렇게 '하나의 그물에 엮인' 사실을 충분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178쪽)
어려워 읽기가 힘들었으나 지은이들의 위 글들이 동감이 간 거면 그나마 그러적럭 잘 읽은 것으로 자위한다.
[인상깊은구절] '국가'라는 개념은 종종 사회 조직의 근간이 되는 중심적인 정치적 법적 제도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점차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적 제도들이 자산 가격의 모습으로 '자본화'되기에 이르면서, 자본 자체가 점차 국가의 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의 권력 제도들이 이렇게 '하나의 그물에 엮인' 사실을 충분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17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