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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균관대 유학과,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북경대, 전북대, 성균관대, 경희대 등에서 연구와 출강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동양사상을 유가와 도가로 나누는데, 정확히 말하면 유가와 비유가로 구분합니다. 선불교 등 유가의 사고 틀을 따르지 않는 사상들을 도가의 이름을 빌려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때문에, 저자가 제시하는 동양사상은 크게 유가적 사고와 유가 이외의 사고 둘로 나뉘어집니다. 저자가 유가적 사유와 비유가적 사유를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하는 매체는 '예술'입니다.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만들고, 그것이 관객 혹은 독자에게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런 예술적 향유가 이루어지는 사고의 과정과 내용이 유가와 비유가에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철학이라기보다는 '미학'(美學)으로 분류되는 것이 맞을 법도 합니다. 그렇지만 미학과 철학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 것이 또 동양 사상의 특성이라면 특성이겠지요. 책의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바, '소나무'는 군자의 절개를 칭송하는 유가적 미학을 말하고 '나비'는 인연과 자아를 초월하는 도가적 미학을 뜻합니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 유가적 미학 - '영원에의 노스탤지어' 공자가 그의 네 제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슴 속에 품은 이상을 밝혀보라고 주문합니다. 한 명은 세상 다스리기, 다른 한명은 백성 보살피기, 세 번째는 문화사업(?)에 대한 포부를 내보입니다. 마지막 제자인 증점이 한 구석에서 조용히 비파만 타고 있을 뿐 아무말 않자, 공자는 그에게 묻습니다. "점아, 그러면 너는 어떠하냐?" "저는 세 사람과는 다릅니다." "괜찮다. 그저 다들 자기의 뜻을 말한 것이니라." "그저 늦은 봄에 얇은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강에서 물놀이도 하고 언덕에서 봄바람 쐬면서 그러곤 좋은 시구로 가락이나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여기서 공자는 감탄합니다. 바로 이것이다! 잘 알려진 바, 유가적 사상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와 '군사부일체'에 이르듯 예법을 지키고 학문에 증진하여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을 중시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공무원 또는 관료를 양성하고 사회의 질서와 법도를 지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해 왔습니다. 다른 한편, 사농공상을 나누고 남존여비, 기타 여러 수직적 잣대를 사람들 사이에 그어 인간의 상중하를 나누는 중세 계급구조의 이데올로기를 특유의 가족공동체 지향성으로 정당화하기도 하였지요.. 유가의 법도란 국가든 촌락이든 집안이든 한결같이 밝게 비추는 것으로 황제에서 머슴까지 모두가 따라야 했습니다. 그런 엄격한 유가의 세계에도 물놀이, 들놀이하며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높이 사는 이런 이야기는 한편 숨통이 트이는 미소를 머금게도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유희 이후에 '돌아오겠습니다'에 있습니다. 유가의 예술정신에도 초월이 있지만 그것은 삶의 자리로 '되돌아감'을 전제로 하는 초월이랍니다. 유가 사상에서 '바깥세계'란 없습니다. 다 하늘 아래 있지요. 道란 하늘의 밝은 뜻(天命)을 받아 예의와 법도를 만들고, 이를 교육으로 풀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고로, 자연물의 아름다움과 인간적 덕성은 다르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대나무는 선비의 절개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지며, 또한 감상하는 이는 대나무 그림 속에 깃든 올곧은 마음을 느끼고 탄복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단련하는 것. 매,란,국,죽과 같은 자연물은 군자의 품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아무리 정교하게 대상을 모사하였다 하더라도 그 안에 화가의 정신적 깊이가 들어있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가치 체험에 동참함으로써 유한한 자신의 틀을 깨고 하늘 아래 올곧게 바로 서고자 하는 선비정신, 이를 일컬어 '영원에의 노스탤지어'라 합니다. 그 몸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도 선비의 일심단편만은 가실줄이 없다는 것이지요. 2. 도가적 미학 - '낙원에의 노스탤지어' 장자가 산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았는데, 나무꾼이 옆에 있으면서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습니다. 쓸데가 없어서입니다. "아하, 이 나무는 재목이 못 되어서 오히려 타고난 제 수명을 다할 수 있도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친구가 장자를 위하여 오리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그때 친구는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았습니다.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산중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제 수명을 누렸는데, 저 오리는 재주가 없어서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어디에 처하시겠습니까?" 장자는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시하겠다. 그런데 중간의 경지란 옳은 듯 하면서도 그릇된 것이어서 재난을 면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자연의 도(道)와 덕(德)에 의거해 떠다니며 노닌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유가는 삼강오륜과 같은 보편적 윤리적 규정을 지키도록 함으로써 세상의 질서를 잡고 삶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반면 도가는 그러한 유가의 규정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게 하고 오히려 죄를 짓게 하며 삶을 그 본래 자리로부터 떨어져나오게 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밝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따르면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 성취하겠다고 하는 것 모두가 허망하고 덧없으니, 자연에 삶을 맡기고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아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요즘은 워낙 자수성가와 노력파를 칭송하는 세상이어서,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는 제 인생도 세상도 다 망가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가의 비판은 그렇다고 아득바득 열심히 산다고 한들, 이 세상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다는 딴지걸기입니다. 태극권만 하여도 억지로 힘을 주면 오히려 몸이 굳고 기운이 끊기며, 힘을 빼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반응을 좇을 때 비로소 몸이 살 길을 찾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태극권만 그러하겠습니까. 머리로 하는 공부도, 말로 하는 논쟁도, 세상 살이도, 정치도 다 제 고집을 꺾고 힘을 빼고 주변을 겸허히 살필 줄 모르면 결국 저도 남도 다 망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그저 남의 말, 행동만 좇으면 또 모두 헛것입니다. 태극권에서 내 몸을 여는 것은 결국에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겸허히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나보다 더 큰 나'로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고로, 도가적 공부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과 더 큰 뜻을 추구하는 것은 항상 모순되면서도 함께 움직이는 역동성을 가집니다. 양과 음은 모순이면서도 서로를 낳으며 서로를 멸하며 공존합니다.) 도가의 아름다움은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통과합니다. 덧없는 세속에 붙잡힌 인간의 고난을 문득 목도하고, 애통해 절망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대적 곤경이라는 점을 통절하게 인정한 다음, 그것에 대한 집착을 거둠으로써 '눈물의 카타르시스'는 완성된다고 합니다. 이 눈물을 통하여 곤경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갈망하지도 않는 무심(無心)한 자유의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이 때가 되면 작은 이슬에서도 미(美)와 도(道)를 발견하고, 찰나의 종소리에서 무한하고 영원함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초월은 시간을 들인 공부나 노력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닌 '즉자적'인 사고의 전환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이러한 경지를 도가는 원래 인간의 자리, 자연에 따르는 자리로 보고 그곳을 향수하기에 일컬어 '낙원에의 노스탤지어'라 합니다. 북극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붕(鵬)의 등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붕이 떨쳐 나라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갈 때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고서야 비로소 쉰다. 곤과 붕에 대한 위 문장은 일상적인 세상의 덧없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어머어마한 크기를 갖다대어 아예 질려버리게 합니다. 이 대미(大美)는 서양의 숭고미와 다른 것으로서, 거대한 신상의 숭고미가 거대한 대상 앞에서 두렵고 짓눌리는 위압감을 느끼는 데 기인하는 반면, 장자의 대미는 너무나 커서 차라리 자유롭게 탁 놓이는 느낌을 줍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이 자질구레한 일상이 결코 전부가 아니요, 그것은, 내 삶은, 아주 작고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주는 자유로움. 그런데 이 자유는 사실상 일정부분 포기와 체념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기와 체념 조차도 알지 못하는 자는 그 너머도 알 수 없겠지요. 다른 한 편, 제대로 삶의 고난을 겪어보지도 못한 자가 들은 풍월만 갖고 포기한 척, 체념한 척 하며 세상 너머를 논하는 것도 길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올습니다. 요컨대, 공자든 장자든 책만으로 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마음을 느껴야 될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맨날 치고 박고 싸우고 죽는 전국시대에 태어나, 하늘을 모시고 사람을 사랑하는 예의와 법도로서, 온 나라가 한 가족처럼 질서있고 평화롭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다른 사람은 삶과 죽음 만사가 고통일 때, 문득 생각을 돌이켜 그 모든 것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작은 인연에 불과함을 깨닫고 집착을 버림으로써 자연을 닮은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출발은 고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고로, 고통을 고통으로 깨닫는 것이야 말로 어디로 가든 제대로 된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제 몸의 근육이 마르고 굳어 뒤틀어져 있는데도 그게 아픈 건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거 아픈거야! 알아?'라고 일러줄 수 있는 것. 거기서 공부(功夫)는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몸의 공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 세상공부도 다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 것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요구하지 않고 그저 따스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 그것 할 줄 모르는 것도 마음이 병든 거지요. 세상 일 계절처럼 춥다 덥다 하는 것인데 맨날 햇살일 수는 없는 것. 그것 견딜 줄 모르는 것도 허약한 거겠지요. 제가 지금 병들고 약한 것은 죄가 아니니, 그런 나약함도 감사히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요. ※ 아울러, 저자는 장자의 초월이 '자아'는 해체하였지만 '생사관'을 넘지는 못하였다고도 합니다. 사람인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그 반대인지를 이야기할만큼 주관을 넘어서는 경지를 보였는데, 그의 주장이 후기에는 신선사상이나 여러 단법, 방중술, 도인술 등에 이르고 마는 것을 보면 살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선 것까지는 아니지 않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장자의 초월은 '끝'이 있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그 초월은 불충분하다..라고 합니다. 이 주제는 아마도 불교의 자리에까지 가야 이야기가 될 것 같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