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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러브>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그리고 <소피의 선택>의 공통점은 메릴 스트립이 여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 멜로라는 걸 꼽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소피의 선택>은 좀 더 다른 범주에 넣어야 하므로 일반적 멜로로 규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교롭게도 연달아 세 작품을 보면서 메릴 스트립의 순수하고 깨끗한 매력을 많이 보았다. 빼어나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장르를 본인 스타일로 소화해내는 걸 보면 젊을 때야 당연히 그랬겠지만 나이든 여배우인 지금도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다. 올초,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대처의 굴곡진 삶을 담기에 영화라는 장르가 녹록치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녀의 영화를 연대기순으로 관심 두지도 않았고 보지도 않아서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과 비교해도 내 안에 메릴 스트립이란 배우의 위치는 의외로 낮았다. <소피의 선택>을 보면서도 간절하게는 다가오지 않던 그녀의 순진무구한 매력이 이 영화를 보면서는 확연하게 느껴졌다. 보면 볼 수록 매력적인 사람을 '볼매'라고 한다면 그 줄임말을 써먹고 싶을 정도다. 실제로 작품성 인정 받은 좋은 필모그래피를 유지하고 있는 배우라서 꼭 그녀가 아니라도 작품들이 좋을 거란 확신도 있다. 좀 더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타자는 물론 올해 책으로 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와 몰리(메릴 스트립)는 크리스마스에 붐비던 어느 서점에서 처음으로 부딪친다. 이전에는 기차역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마주보고 각자 통화를 했었다. 짧은 해프닝에 서로의 연인에게 주려했던 책이 뒤바뀐다. 3개월 후, 우연히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고나서야 서로는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각자 무료한 가정생활, 의무뿐인 지위에 조금은 지쳐있을 때, 매일 출근길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는 단순한 토크가 아니라 활력이다. 현재 꾸린 가정에 불만이 쌓일 수록 기차 출근길을 점점 기다리게 되고 서로의 결혼생활, 아이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겉으로는 크게 이상이 없어보이는 두 사람의 가정생활이 어떻든, 일탈을 꿈꿨든 아니든간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점점 더 서로에게 빠지는 두 사람의 감정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서로 정신없이 빠져드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끈을 반드시 사랑의 씨앗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나가는 한 순간의 한눈팔기로 치부할 수도 없다. <폴링 인 러브>는 두 사람의 다정한 성격과 맞물려 가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빠져든 이들을 이해하게 만든다. 저 사람들 나빠,가 아니라 저 사람들 이해된다,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장점이다.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진지함이 애틋함을 만들어준다. 보다 적극적인 프랭크와 달리 함께 한 첫 번째 순간에 비로소 그를 밀어내는 몰리의 마지막 양심도 가슴 깊이 이해된다. 이들에게 찾아온 감정은 단지 사랑이 아니라 지친 일상을 탈피하고 새로운 활력을 얻어 다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한 셈이다. 내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레고 좋아서 시작된 만남이 내일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만나는 게 어떤 의미냐,고 묻는 몰리의 말에 그들이 처한 상황과 딜레마가 고스란히 들었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연애, 연애가 욕심내는 서로의 시간, 사랑이 원하는 서로의 몸과 마음들. 결국 몸과 마음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그러지 못한다면 헤어져야 하는 게 이 세상 사랑의 룰이다. 중간이란 건 영원히 계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랭크과 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놓치지 않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기차안에서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향해 웃어도 내릴 때가 되면 내려야 하는 것이 이들 앞에 닥친 운명이다.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아빠를 부르는 두 꼬마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뛰어오는 상황을 보이는 것, 아버지의 건강악화를 의사인 남편 대신 프랭크에게 토로하는 것 등이 상황을 뒷받침한다. 오늘날이라면, 바람과 외도가 난무하는 오늘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대신 서로를 잃지 않는 길을 택할 지도 모르는 이 커플이 지루하고 진지하고 재미없는 커플이라며 흥미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도 앞에 고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촌스러운 게 아니라 잊고 있던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남자가 가족 틈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반만 진실이라도 그 모습을 본 여자는 결코 그를 온전히 욕심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그런 여자이기 때문이다. 큰 허무와 상실을 스스로 달래는 그런 여자이기 때문이다. 누구와 살아도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기혼남녀에게 자주 듣는다. 불륜과 외도에 자신을 내던질 용기도 없는 사람들은 찾아오는 감정 뿐 아니라 아직 찾아오지 않은 감정마저도 불륜으로 포개어 접어버린다. 도덕적으로는 옳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 감정을 제대로 들여보지 못하는 무감증일 수 있다. 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 프랭크도 버린다. 정확히는 털어낸다. 그리고 "이런 멋진 날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매달려왔던 아버지와 프랭크를 잃으면 모든 걸 한꺼번에 잃는 것과 같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자신이 돌봐야 할 멀쩡한 자식도 없다. 시간은 외로움 속에 그저 흘러간다. 배우자를 잃을 것인가, 다시 찾아온 가슴 뛰는 설렘을 잃을 것인가. 선택은 자윤데, 크리스마스에는 다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깜짝놀랄 만한, 누구에게 욕을 들어도 괜찮을 만한, 감당하지 못해서 더 행복한 그런 일. 그들에게는 일어났다. 원래 진짜 갖고 싶은 것은 버리려고 마음 먹고 내려놓은 순간에 선물처럼 찾아온다. 이 영화도 그렇다. 1년의 절반이 지나버린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도 가슴 뛰는 좋은 일이 생기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