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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는 흑인들의 속어와 비어를 수집하는 영문학 강사. 남성과의 (성적)관계에 장애가 있는 그녀는 이웃여자의 살인사건을 수사중인 형사 말로이와 성적 접촉을 하게 되면서 내면의 장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런데, 그가 옆집 여자를 죽인 연쇄살인범이라면? 공포와 성적 욕망, 혹은 로맨스에의 욕망 사이에서 주인공은 접합지점을 찾으려 서성거리지만, 말로이가 범인이라는 것은 점점 확실해진다.
<인더컷>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느끼는 공포를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바야흐로 남성이라면 누구라도 프리섹스를 쉽게 말하고 행동할 수 여건이 완비된 세상이지만, 여성에게는 허리띠 풀고 욕망을 충족하기에는 사방이 공포와 위협으로 주조된 세상이다. 어디, 섹스뿐이더냐? 남성중심으로 구성된 세상은 여성의 두 손과 두 발, 따뜻한 감수성과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까지 이용하고 착취한다.
아아 이렇게 여성들을 이용당하도록 사고를 마비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물건이든 사람이든 돈으로 사고 팔리는 거대한 빌딩숲 뒷골목에서 햇빛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그 여성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로맨스라는 달콤하고도 끊기 힘든 마약. 누군가 기대거나 나눌 존재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에게는 성욕만큼 강력한 로맨스에의 욕구가 있지 않았던가. 그건 막막한 현실에서 든든한 동앗줄을 발견한 것만큼 대단한 만족감에 빠지게 한다. 실제로, 유부남에게 버림받고도 사랑을 기다리는 동생의 연기는 흡사 마약중독자의 말투와 움직임을 닮아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콩깍지를 떼어내고 생각해보면, 여성에게 벅차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주는 대신, 여성의 뼈와 살과 피를 빨아먹는 치명적인 해충같은 것이 로맨스판타지이다. 프래니가 슬쩍 꺼낸 부모의 사랑이야기는 처음에는 달콤했다가 종국에는 피로 칠갑하는 치명적인 스릴러가 된다. 흑백필름 속에 담긴 그들의 고전적인 로맨스는 <인더컷> 속의 현실이 그대로 모방한다. 벚꽃의 흩날림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저 세상으로 추락하는 죽음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한다.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위태롭게 싸워나가는 주인공은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20대 중반에 접어든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이성애주의라는 각본은 여성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남편’이란 존재를 적극 권장한다. 그러나, 막상 선택한 남편과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는 여성을 보호하기보다는 본전 뽑을 때까지 쓴물 단물 다 빨아먹는 공간에 가깝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버림받은 다음에 그네들이 ‘더러운 놈들’임을 깨닫는다는 사실. <인터컷>은 이와 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들이미는 한편으로, 참혹하게 토막나버린 여성의 영혼에 송가를 부른다.
어쩌면, 이 여성연쇄살인사건의 죄 값은 한명의 괴물이 가진 게 아니라, 모든 남성들이 공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로이의 침묵과 팔에 새겨진 문신이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범인을 제 손으로 때려잡은 프래니가 집으로 돌아와 알리바이가 명백해진(?) 말로이의 품에 눕는 마지막 순간은 그래서 위태로운 여운을 남긴다.
“니가 내곁에 있는 한 난 널 떠나지 않아 목이 눌려오고 피부가 창백해지더라도 소리지르지마, 두려워마.” 달콤하고도 믿음직스런 목소리의 남성이 부르는 엽기적인 노래로 이 섬뜩한 영화는 막을 내리지만, 영화관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지금, <인더컷>의 스펙타클은 볼을 꼬집어 따가운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애인과 헤어진 충격으로 여성혐오증에 걸려, 길가는 주부를 흉기로 마구 찔러 중태에 빠뜨린 사람이 검거됐다나 어쨌다나. 아아 정녕, 전쟁을 닮은 마쵸이즘의 제의는 언제쯤 끝날 것인가? 여성이 모두 씨가 마르고 남성만이 살아남는 그 순간? 대단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순간부터 인간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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