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지성, 본능과 영혼 사이의 대조적 삶을 그린 성장 소설. 나르치스의 논리적 삶과 골드문트의 감성적 삶이 교차하며 인간 존재와 자기 발견을 깊이 탐구한다. 철학적 성찰과 문학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어 몰입감과 울림이 크다. 헤세는 믿고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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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젊은 생도로, 수도원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던 나르치스. 수도사의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믿고 지내오던 그의 앞에, 어느 날 골드문트라는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맡겨진’ 골드문트 역시 그곳에서 훌륭한 학생이 되고 이후 예비 수사로 경건하고 조용한 형제로 살아가길 바랐다. 자신과는 달리 밝고 빛나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점점 마음이 끌리고,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깊어져 간다. 둘 사이에서 상대방을 이끌어 주고 깨우쳐 주는 것은 항상 나르치스의 몫이었다. 그로 인해 나르치스는 오랜 세월 고독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친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골드문트야. 문제는, 네가 내게 너 자신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네가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기만 하면 나보다 훨씬 우월해질 거야.”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를 보게 해 주는 사람, 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나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그런 안내자가 되어 준다. 친구로서 오래 곁에 두고 싶었지만,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의 길을 열어준다. “나는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도록 도와준 일을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사람. 함석헌 시인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의 제목이 스쳐 간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 떠올려 본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 한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내주는 사람. 나를 위하는 사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수도원을 떠나 온 골드문트의 삶은 방랑 그 자체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고, 두 밤 이상 한 곳에서 머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가는 곳마다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골드문트 곁에 남겠다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던 골드문트는, 잠시 머물던 수도원에서 본 마리아 입상에 매료되어 그길로 니클라우스라는 명인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된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갖게 된 ‘목표’였다. 그 목표를 이루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자신의 삶 전체가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기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을 오직 예술을 위해 바쳤다. 그 시간 속에서 골드문트의 작품 세계를 이끌어 간 것은 그의 영혼 안에 있는 친구, 나르치스였다. 자신이 학자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되살려내 준 유일한 한 사람. 골드문트는 오랜 방랑 속에서도 나르치스를 잊지 않았고, 늘 그리워했다. 정처 없이 살아가던 그에게 나르치스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존재였다. 어느새 예술을 향한 열망도, 니클라우스 명인에 대한 두근거리던 존경심도 사그라들어 버린 것을 알아차린 순간, 그는 다시 허탈함에 빠진다. 수많은 예술 작품들도 이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에게 실망감만 안겨 주었다. 또다시 그는 방랑을 꿈꾼다. 여름과 겨울을 느끼고, 세상을 구경하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혐오스러움을 맛보길 원했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고 싶었고, 그의 스승 밑에서 생활하며 배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직 방랑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신비’를 열망했다. 그 신비를 찾기 위해 그는 스스로 ‘결핍’을 선택한다. 방랑자는 언제나 무언가를 소유하고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적대자이며 원수였다. 그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두려워한다. 모든 존재가 덧없다는 것을, 일체의 생명은 끊임없이 시들어 간다는 것을, 우리 주위를 둘러싼 죽음의 불안을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방랑’이란 두려움의 대상이며, 모른 체하며 덮어 두었던 실제를 자각하게 하는 위협이기도 한 것이다. 나 또한 방랑은 두렵다. 그렇다고 아무런 자극이나 변화도 없는 ‘죽은’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동굴 속에 갇혀 살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누구나 경계에 서 있다고 했다. 나는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사람일까, 아니면 두려워 뒷걸음치는 사람일까? 이후 골드문트는 ‘흑사병’이 휩쓸고 간 마을의 처참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분노와 역겨움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골드문트는, 어느 수도원 벽에 그려진 예술가의 (흑사병을 목격한 체험에서 그린)그림에서 교훈을 얻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승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지만, 이미 니클라우스 스승은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의 딸 리즈베트도 병에 걸려 있었다.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한가운데 홀로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외로움 속에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시간을 낭비하며 일찍 시들어 버린 자신의 청춘을 생각하며 울었다. 백작의 애첩 아그네스와의 간통으로 인해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있을 때, 신부가 된 나르치스가 구원자처럼 그의 앞에 나타난다. 어릴 적 지내던 수도원으로 돌아온 골드문트는, 수도원장이 되어 조용하고 다정한 질서 속에서 전체를 다스리는 나르치스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초라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오히려 그런 골드문트 안에 있는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인정하고 상기시켜 준다. 과거의 모든 잘못에 대해 고해 성사를 한 이후로, 골드문트는 작품 만드는 일에 다시 몰두한다. 첫 작품으로 완성된 다니엘 수도원장 상을 본 나르치스는 크게 감탄한다. 예술이란 지식이나 학문에 비하면 진지하지 못한 영역이며, 정신과 사상만이 유일한 길이라 여겨 왔던 그의 고정관념에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예술을 얕잡아 보았던 자신의 교만을 인정한다. 앎으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오랜 세월 믿어온 무언가를 부정한다는 것이, 마치 지금까지 쌓아온 내 인생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르치스의 평정한 마음과 초연함과 평화를 부러워했었다고 고백하는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그렇게 보이는 자신의 삶 역시 ‘싸움’의 연속이라고 설명한다. 제대로 된 모든 삶은 다 그런 싸움과 희생에서 얻어지는 거라고. 그렇다. 나르치스에게서 드러나는 그 평화 또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부단히 싸워야 했고, 매일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평화를 얻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늘 새로운 희생을 했어야만 했다. 골드문트의 예술 작품이 수많은 방랑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작이 완성되어 갈 무렵, 골드문트는 또 다시 깊은 불안과 불만에 휩싸인다. 이전에 보았던 니클라우스 스승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기교 속에 묻혀 살게 될까 두려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부자유스러워지는 몸, 한곳에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될 몸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한 그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야 새로운 영상들이 떠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떠나는’ 삶이었다. 그는 멈춰 있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새로워지길 원했고, ‘살아 있는’ 자신을 부단히도 확인하고 싶었다. 모습과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두 사람의 치열한 몸부림은 닮은 듯하다. 골드문트가 떠난 이후로 나르치스는 온통 친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누빌 친구가 걱정되면서도, 그를 생각하면 기뻤다. 다시금 둥지를 부수고 모험에 나선 고집스러운 반항아처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그의 성품이 여전히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질서와 규율에 의한 모범적인 삶이,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삶이, 더러움과 피를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 몰입하는 삶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친구의 부재 속에서 나르치스는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한다. 어릴 적 골드문트의 마음을 흔들어 그에게 경고하고 그의 인생을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았던 것처럼, 이제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뒤흔들어 자신이 믿던 것을 의심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릴 적이나 자네의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자네처럼 정신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네. 그런데 내 소명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가르쳐 주었지.”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본다. 정신과 예술, 정착과 방랑, 질서와 혼돈, 삶과 죽음 등 양극 사이에서 두 사람은 좋고 나쁨을 구분 짓지 않으며 배타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가 선택한 삶을 인정해 주며, 그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간다. <모든 생명은 분열과 모순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삶, 잘 산다는 게 뭘까? 적어도 ‘타고난 운명’에 기대어 그저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순응하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며, 자기를 성찰해가는 것. 그 깨달음 뒤에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길을 찾아가는 것. 결과가 아닌 과정속에서 인생이 주는 풍요를 맛보며 꽃을 피우는 삶, 그것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멋진 삶이 아닐까. |
| 공연작품으로 접하게 된 서적. 원작을 접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책이라고 생각되며 문체와 묘사가 아름다워 물먹은 수채화와 유화가 동시에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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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대학로에서 하는 뮤지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를 보고 원작도 읽어보고 싶어 구매한 책이었습니다. 뮤지컬을 보면서도 감명 깊었는데, 책으로 다시 한 번 읽으니 새로운 감상도 들고 좋았습니다. 책에서는 골드문트의 여행 과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며, 이에 따른 골드문트에게 부여된 속성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수도 있었습니다. 책을 감명 깊게 읽은 분이 계시다면 나중에 기회가 되실 때 뮤지컬로도 한 번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