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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착하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으며 자라왔다. 나에게 ’착함‘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론 거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과 행동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을 ‘착함’이라 포장하며 지나온 순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람을 선과 악으로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을 지향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란 온전히 어느 한 편에 설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의 불행을 보며 기뻐하기도 한다. 어느 때에는 타인에게 인정을 베풀기도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뒤얽혀 공존하는 세계, 그것이 인간의 내면일 것이다. 안락하고 따스한 가정, 밝음과 올바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온 소년 싱클레어는 조금씩 ‘다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보고 배운 밝고 순수한 세계와는 거리가 먼, 금지된 세계, 어둠의 세계였다. 그는 어설픈 호기심에서 시작한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크로머’라는 깡패 같은 친구에게 협박을 받게 되고, 그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밝음’이라는 익숙한 원칙 속에서 살아온 싱클레어에게 ‘어둠’의 세계는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다. ‘왜 나는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지어냈을까? 왜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벌였을까?’ 뒤늦은 후회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 어떤 답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싱클레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친구, 데미안. 데미안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해 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이 들려준 ‘카인의 표지’에 관한 이야기는 싱클레어의 내면에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성경에서 아벨을 죽인 카인을 용기 있고 대담한 인물이라 평가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던 성경의 가르침, 선과 악의 주체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부모님이 바라는 ‘밝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한 싱클레어는 술과 향락, 방탕함과 무절제 속에서 길을 헤매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가 간절히 원하고 기다렸던 것은 자신과 함께해 줄 친구였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 남몰래 숭배했던 소녀 베아트리체,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준 에바 부인. 그들 모두가 싱클레어에게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고 길을 안내해 준 친구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끊임없이 그리워한 존재는 데미안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의 눈빛을 그리워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싱클레어가 그려 보낸 새 그림에 대한 데미안의 답장에 등장하는 아브락사스. 신이면서 사탄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닌 존재이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아브락사스에 대해 이해를 넓혀 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힘이 커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쓰지 않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 그것만이 ‘자기 자신에게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다르다, 반항한다, 비범한 것을 바란다면서 은밀히 만족하지요. 만약 온전히 자신의 길을 가려는 자는 그것마저 없어야 해요.”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신뢰가 굳어가는 것. 그것이 나의 내면에 있는 힘을 키워주고 나를 발전시켜 가기도 한다. 그러나 ‘밝음’에서 시작한 생각에 은밀한 만족과 오만함이 더해지면 오히려 ‘어둠’에 지배당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다. 비범을 지향하려다 오히려 평범 이하의 삶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꿈을 좇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라 자신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이목과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적 욕구로 가득 찬 나를 보게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순수함을 추구하고 살아보려 하지만 결코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나’라는 사람 안에 수많은 자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말한다. 사람들은 서로가 두렵기 때문에 서로에게 도망치는 거라고. 귀족은 귀족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는 학자끼리.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한 번도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사람은 어떤 무리에 속해 있는 것으로부터 사회적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인 두려움과 외로움은 내가 ‘나를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나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른 채 그저 무리가 있는 곳에 몸을 담고 사는 ‘안정’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표지를 달고 있는 우리를 이상하다고, 심지어 미쳤다거나 위험하다고 간주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았다. 우리는 깨어난 자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자들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완벽히 깨어 있는 상태가 되고자 노력했다.”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통해 싱클레어는 자신이 지닌 ‘표지’를 발견해 간다. 그리고 그 표지는 점점 뚜렷해진다. 이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어 가는 싱클레어를 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은 싱클레어인데 왜 책 제목이 데미안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데미안’이라는 인물은 싱클레어가 닮고 싶어하는 이상향의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는 <데미안>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물로 존재한다기보다, 싱클레어의 내면에 숨어 있는 ‘데미안’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작은 ‘어둠’ 하나에도 움츠러들곤 했던 여리고 소심한 소년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직면하고 그것과 싸우려 애쓴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애씀의 시간을 통해 그가 얻고자 한 것, 그것은 밝음의 세계도 어둠의 세계도 아닌 ‘나의 세계’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방황 속에서도 길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그 과정이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고 어설픈 싱클레어의 모습이 마치 지금 나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낯설고 불편한 일이다. 그럼에도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는 것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나에게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향하는 바, 깨고 나와야 할 이유가 분명하기에 지금 겪고 있는 잠깐의 방황은 감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싱클레어는 자신 안에 있는 그를 만났을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