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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는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먼저 떠올린 것은 예전에 읽은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 두 책은 살짝 결이 다르다.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가 지리적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 책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역사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는 서일본의 규수[九州], 시코쿠[四國], 주고쿠[中國], 간사이[關西]와 동일본의 주부[中部], 간토[關東], 도호쿠[東北], 후카이도[北海道], 그리고 1872년 1차 류큐 처분을 통해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沖繩]까지 9개 지역의 30개 도시를 각 도시의 핵심적인 특징과 간략한 역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반면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는 고대는 도읍지였던 아스카[飛鳥], 후지와라경[藤原京], 헤이조경[平城京, 나라(奈良)], 헤이안경[平安京, 교토(京都)]를, 중세는 무인들의 근거지였던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源] 가문의 근거지인 가마쿠라[鎌倉], 오다 노부나가의 거성(居城)인 아즈치[安土],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大阪], 도쿠가와 가문의 도쿄[東京], 근대는 근대 도시에 해당하는 하기[萩], 가고시마[鹿兒島], 요코하마[橫濱], 기타큐슈[北九州], 히로시마[廣島]를 선택했다. 이 13개 도시를 중심으로 일본사를 소개한 셈이다. 이 13개 도시 중 약 38%에 해당하는 5개 도시가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두 책이 지향하는 바가 다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일본 고대의 도읍들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일본국가인 야마타이국[邪馬臺國]과의 관계는 불명확하지만, 우리는 일본 역사가 아스카 시대[飛鳥 時代, 592~710], 나라 시대[奈良 時代, 710~794],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 순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각 시대의 도읍지인 아스카쿄[飛鳥京, 592~694]인 현재의 나라현[奈良縣] 아스카무라[明日香村], 헤이조쿄[平城京, 710~740, 745~784]인 현재의 나라시[奈良市], 헤이안교[平安京, 794~1869]인 현재의 교토[京都]를 다루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이에 특이한 도시가 있다. 일본 최초로 격자형 도시계획인 조방제(條坊制)를 도입한 중국식 도성(都城)이었다는 후지와라쿄[藤原京, 694~710]다. 현재의 나라현 카시하라시[橿原市]에 해당하는 이 도시는 41대 지토[持統]에서 43대 겐메이[元明]까지 3명의 텐노가 16년간 머무른 ‘일본 최초의 도성’이지만, 711년에 불탄 후 재건되지 않아 잊혀진 도시였다. 후지와라교의 건설이 시작된 것은 지토 텐노의 남편인 40대 텐노[天皇] 텐무[天武]의 때였다. 그는 기존의 오오키미[おおきみ, 大王]를 대신해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こと, 天皇]이라는 호칭을 새로 제정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오아마 왕자는) 천황의 계승을 둘러싸고 672년 ‘진신의 난’을 일으켜 조카인 오토모 왕자와 맞붙었다. 피비린내 나는 혈육 간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는 오야마 왕자였다. 그는 오토모 왕자 편에 섰던 이들을 제거한 다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집권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먼저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력하게 보이기 위해 ‘대왕大王’, 즉 오오키미를 대신해 새로운 호칭을 제정했다. 새 군주 호는 한자로 ‘천황天皇’이라 적고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다. [p. 62]
아마도 저자가 이 도시를 아스카, 나라, 교토 사이에 포함시킨 것은 이 시기에 율령국가가 확립되고, 후지와라교라는 도성의 건립을 통해 텐노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음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천황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왕궁 주변으로 호족의 저택과 사원이 무계획적으로 들어선 아스카와 달리 새 도읍인 후지와라경에는 천황의 궁성을 중심으로 위계와 서열에 따라 왕족과 관인의 거주 공간을 배치했다. 이 같은 공간 배치를 통해 도성은 천황이 지상세계의 주재자임을 과시하는 일종의 기념비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p. 66] 사실 후지와라교 외에도 현재 교토부 나가오카교시, 무코시, 니시쿄구에 걸쳐 존재했던 나가오카교[長岡京, 784~794] 등의 단기간의 수도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추측도 지나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가(武家) 도시들의 흥망
일본의 중세라고 하면 가마쿠라[鎌倉] 막부(1185~1333), 무로마치[室町] 막부(1136~1573), 에도[江戶] 막부(1603~1868)로 이어지는 막부 시대를 떠올린다. 그 중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서 막부를 열었으니 제외하면 막부가 위치한 곳은 가마쿠라[鎌倉]와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東京]만 남는다. 비록 ‘** 막부(幕府)’라는 이름을 없지만,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의 사이에는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1573~1603)가 존재한다. 때문에 이 시기에 집권한 오다 노부나가의 거점인 아즈치 성[安土城, 1579~1582, 오늘날 시가현[滋賀縣]]과 도요토미 히토요시의 거점인 오사카 성[大阪城, 1583~1615]을 중세의 도시에 포함시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후지와라교와 마찬가지로 아즈치 성도 폐허가 되었기에, ‘관광’의 측면에서는 선뜻 선택할곳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측면에서는 다르다. 왜냐하면, 아즈치 성은 센고쿠[戰國] 시대의 군사적 기능에 중심을 둔, 돌과 흙을 쌓아 만든 야마지로[山城]에서 벗어나 정치적 기능이 곁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거대한 석조 기단[武者返し, musha-gaeshi], 금박 기와[金箔瓦], 그리고 성주(城主)의 권위를 상징하는 요새화된 높은 망루인 텐슈[天守]를 들 수 있다.
노부나가는 군사 방어를 위해 편의적으로 쌓아 올린 센고쿠 다이묘의 산성과 달리 평지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초석과 기와를 갖춘 건축물을 지어 성곽의 안전성과 영구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리고 해자나 성벽 등의 인공구조물을 강화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축성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을 여타 센고쿠 다이묘와 달리 성곽의 중심에 수직으로 높이 솟은 ‘텐슈’를 쌓았다는 것이다. [p.198]
이처럼
노부나가가 해발 198미터에 달하는 아즈치산 정상에 다시 큰 돌을 올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약 34미터 높이의 7층 천수각을 지은 것은 이처럼 장대한 건축물을 건립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즈치를 방문하는 상인이나 외부인들은 시가지에 들어서기 전부터 높이 솟은 덴슈를 바라보며 그곳에 거주하는 노부나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식했을 것이다. [p. 203]
노부나가가 지향했던 통일의 꿈과 무가 도시의 건설사업은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어졌다. 전국적인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는 오사카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한 에도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앞선 아즈치의 축성 경험을 계승, 보완해 건설한 조카마치였다. 아즈치가 없었다면 오사카나 도쿄 역시 현재와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p. 192]
개항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도시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양대 본산인 조슈 번[長州藩]의 번청(藩廳)이 있던 하기[萩], 사쓰마 번[薩摩藩]의 번청이 있던 가고시마[鹿兒島]는 어떤 의미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하기[萩]는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옛 스승으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 1830~1859]이 있고, 가고시마[鹿兒島]는 유신 3걸 중 하나로 세이난[西南] 전쟁(1877)을 이끈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7~1877]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곳은 메이지 유신의 고향이자 일본 육군[조슈 번]과 해군[사쓰마 번]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조슈번이 존왕양이 운동과 도막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던 것은 단지 재정 개혁을 통해 얻은 수익금 때문만이 아니다. 다카스기 신사쿠를 비롯해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같이 메이지 유신에 앞장섰던 인사들은 모두 조슈번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함께 수학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p. 329]
하기[萩]나 가고시마[鹿兒島]와 달리 요코하마[橫濱]는 ‘개항’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요코하마’ 자체가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른 자유무역을 보장하기 위한 개항장에서 비롯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코하마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도시계획이 시행된 도시가 될 수 있었다. 1960년대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급속한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나토미라이21 사업’이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결과, 근대 건축물의 보전과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2005년부터 일본에서 살고 싶은 도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기타큐슈[北九州]는 1963년 군사 요충지로 육군조병창이 있던 코쿠라[小倉], 간몬해협에 접한 특별 무역항 모지[門司], 일본 최초로 근대적인 제철소가 들어선 야하타[八幡], 제철 및 기계 산업이 번성한 공업도시 토바타[戶畑], 수출입 항구인 와카마츠[若松] 다섯 개의 시가 대등합병되어 만들어진 도시다. 아마도 이것은 규슈[九州] 북부의 여러 공업 도시들이 야하타 제철소 설립 이후 도카이만[洞海灣]을 끼고 철강업과 그 연관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공통점때문이 아닐까?.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원재료 수입처가 다양화되고, 상품 수출의 입지적 장점이 사라지면서 야하타 제철소의 철강 생산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제조업 중심의 지역경제가 활기를 잃고 인구마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 문제가 부각되었다.
현실에서 제철소의 매연과 분진이 일으키는 피해는 심각했다. 1960년대 야하타, 도바타, 와카마쓰로 둘러싸인 도카이만 일대는 제철소를 비롯해 각종 공장에서 내다 버린 폐수로 오염되어 대장균조차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1961년 당시 야하타 제철소에 설치된 62개 굴뚝에서 하루에 내뿜는 분진의 양은 27톤에 달했다. [p. 421]
결국
환경공해의 개선을 바라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에 시 정부 또한 반응하기 시작했다. 기타큐슈시는 환경청이 중앙정부 부처로 만들어지기 전인 1971년에 ‘공해대책국’을 설치하고 공해 방지 활동에 나섰다. 시 정부와 시민사회의 꾸준한 환경 오염 방지 활동의 결과 기타큐슈는 1985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간한 환경백서에서 ‘잿빛 도시에서 녹색 도시로 변모’한 곳으로 소개할 정도로 공해문제를 해결하며 친환경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p. 422]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규제 완화와 장기간에 걸친 민간 주도형 지역개발 사업으로 도시재생을 추진해 온 피츠버그의 사례를 참고한 도시재생계획인 ‘기타큐슈 르네상스 구상’도 한 몫했다. 그 결과 경기침쳬와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 도시재생을 통해 생활환경에 대한, 비교적 높은 수준의 만족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지방 도시가 소멸 위기에 처했다는 현재의 ‘지방 소멸론’은 지역 주민의 공포심만 부추겨 수도권 집중과 부동산 투기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를 찾아 도입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인구와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정체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나름대로 자족적인 주거환경을 유지하는 도시와 지역을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p. 426]
히로시마[廣島]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가 투하된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메이지 정부가 주둔군 성격인 진다이[鎭臺]를 이곳에 추가로 신설하면서 군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888년 주고쿠[中國]와 시코쿠[四國] 일대를 관장하는 일본 제5사단의 사령부 등이 들어선 이후 일본 유수의 군사도시이자 6대 도시로 성장했다. 청일전쟁(1894~1895)때에는 일본군 최고 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을 이곳에 옮겨 전쟁을 지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서일본 지역의 병력을 총괄하는 제2총군사령부가 설치될 정도였다.
청일전쟁 이후 히로시마는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벌인 대외 침략 전쟁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종착지가 되었다. [p. 438]
이런 점을 고려하면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것은 히로시마가 군사도시로 성장해서 대외 침략 전쟁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된 업보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의 히로시마는 ‘평화의 도시’로 불린다. 다만 일본의 우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보통 국가화’를 외치는 이들이 늘어나도 여전히 ‘평화의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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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역사책, 일본사 교양서적으로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는 일종의 역사기행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가는 해외여행지가 일본인 만큼, 일본을 가기전에 가는 곳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을 챙기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일본 내에서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이라던가,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의 상징성. 반대로 교토 유력 관광지(거대 신사나 사찰)가 실은 한반도계 도래인이 조성했다는 사실 뭐 그런거! 이런 역사적 지식을 알고 있다면 조금 더 풍성한 일본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이 포스팅을 쓰는 본인은 일본여행 목적이 늘 한일관계유적지 답사였다. 현재 일왕가의 선조라 불리는 야마토 왕조는 7세기 무렵 수립되었다. 바다 건나 한반도는 통일신라, 대륙은 수-당 통일제국. 이런 국제 변화에 대응하고자 일 왕실에서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시작한다. 예컨데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 등도 이 시기에 왕실 주도로 집필되었다. 이 역사서들은 천황제의 이데올로기 확립 및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집필되었기에, 허위와 과장이 넘쳐난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당대에 집필된 중국 역사서나 한반도 역사서를 교차검증이 필수다. 이 책은 야마토 정권이 도읍을 정한 아스카 시대부터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당시 야마토 정권은 어느 한 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고 현재의 나라현 일대를 전전하며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새 궁을 짓고 처소를 옮겨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군주가 권좌에 오를 때 마다 새 궁을 지어 처소를 옮기는 관행을 ‘역대천궁’이라고 부른다. 언어학자 중에는 궁을 지칭하는 ‘미야’와 장소를 말하는 ‘도코로’의 ‘코’를 합친 ‘미야코’가 도읍을 뜻하게 된 것은 계속해서 궁을 옮기는 역대천궁의 전통에 따라 궁이 있는 곳을 도읍으로 부르던 언어 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p 026 ‘역대천궁’의 관행이 남아있던 당시 천황가가 아스카로 천궁한뒤, 1세기 동안 그 자리를 지켰던 이유는 아스카가 ’소가 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소가 씨는 백제계 도래인이으로 추정되며 딸들을 천황가에 시집보내고, 외손들을 천황으로 옹립하는 등 야마토 정권을 좌지우지 하던 강력한 호족이었다. 일본 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시간대 역사서인 《수서》에 따르면 수문제는 견수사에게 왜의 정치가 후진적이라고 힐난했다. 이러한 《수서》에 실린 기사로부터 3년이 지난 뒤, 왜는 쇼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한 ‘관위12계’, ‘17조 헌법’등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견수사 보고에 따라, 진행된 정치개혁으로 추정된다. 물론 《일본서기》에는 《수서》에 적힌 수 문제의 힐난은 적혀있지 않다. 이유는 앞서 말한 역사서 편찬 목적 때문이다. 천황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집필된 역사서인데, 수 문제의 일왕가 비난을 적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가 씨를 멸망케 한 잇시의 변은 야마토 조정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살해 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고교쿠 여왕은 정변을 주도한 동생 고토쿠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잇시의 변 당시 또 한 명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나카노오에 왕자가 소가 씨를 대신해 야마토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새로 즉위한 고토쿠 대왕은 나카노오에 왕자 드으이 도움을 받아 일련의 정치 개혁을 안행했다. 먼저 ‘다이카’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개신에 관한 조’를 내려 호족 세력이 보유한 인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로 이양하는 대신 이들에게 식봉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공지공민’에 관한 원칙을 표명했다. p 044 고토쿠는 아스카를 벗어나 나니와(현재의 오사카)로 천도했다. 이 과정에서 고토쿠와 나카노우에 황자의 의견이 엇갈렸고, 나카노우에 황자는 자신의 지지세력들과 함께 아스카로 돌아간다. 결과적으로 고토쿠는 갑작스레 사망하고, 왕위는 나카노우에 황자의 모친이자 전 천황인 고교쿠 여왕에게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다시 아스카로 천궁하였는데, 다시 아스카를 떠나는 일이 발생했으니 다름아닌 백제 멸망이다. 당시 한반도에선 나당연합군 전선이 고구려와 백제를 몰아내고 있었다. 백제 멸망시점이 바로 고교쿠 여왕이 재차 왕위에 올랐던 시기다. 백제와 친밀했던 천황가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견했다. 결론만 말하면, 백촌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백제 부흥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천황가는 혹시나 나당연합군이 일본까지 처들어올까 두려워하며, 한반도와 인접한 지역에 산성을 쌓고, 아스카보다 조금 더 내륙에 있는 지역으로 천궁한다. 여기서 질문! 고대 천황들이 도읍으로 정했던 아스카는 고대도시인가? 아스카가 고대도시가 맞는지를 논하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도읍과 고대도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왕궁만 있어도 도읍이 성립할 수 있으나, 고대 도시는 다르다. 고대 도시가 되기 위해선 도시적인 경관과 함께 강력한 왕권이이야 말로 제일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아스카 시대 일왕들은 여러 호족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며, 왕권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카는 일본 고대국가의 ‘도성’이지만, ‘고대 도시’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헤이조경은 율령국가의 수도로 7대에 걸쳐 784년까지 불교와 함꼐 번성을 누렸다. 그 사이에 쇼무 천황은 역병과 내란을 피해 일시적으로 구니경, 나니와경, 시가라키경으로 거처를 옮긴 적도 있다. 그렇다고 천도를 단행하지는 않았다. 율령제가 정착하면서 관인의 숫자가 많아졌고 그에 따라 이전처럼 간단히 천도를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8세기 후반 새로이 천황에 즉위한 간무는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천도를 지시했다. 비대해진 사원세력을 정리하고 후지와라 씨와 같은 귀족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도를 선언한 것이다. 여러 우여곡적을 겪은 끝에 결국 794년 지금의 교토에 해당하는 헤이안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헤이안경으로 천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헤이조경 일대는 다시 논밭으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궁궐 터의 위치조차 잊혔다. p 096 백촌강 전투 이후 왕실은 후지와라 경으로 천도한다. 후지와라 경은 중국의 도성제에 기반하여 조성된 도성되었다. 이미 동아시가 각국에선 도성제를 갖추고 있었기에, 어찌보면 조금은 늦은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지와라 경이 도성 역할을 한 건 고작 16년. 그 이후엔 헤이조경으로 천궁한다. 헤이조경이 도성 역할을 한 건 백 년이 채 안된다. 이후로 우리가 잘 아는 헤이안 시대, 교토 천년의 시대가 열린다(후지와라 경, 헤이조 경이 몰락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건 생략). 후지와라경에서 헤이조경으로, 다시 나가오카경을 거쳐 헤이안경으로 천도가 거듭되면서 야마토에 본거지를 둔 호족들은 고향에 대한 유대감이 점점 약해졌다. 그 결과 야마토를 떠나 헤이안경으로 아예 이주를 결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야마토뿐 아니라 멀리 북쪽과 서쪽의 변경에 사는 지방 호족 또한 이주했다. 이처럼 고향을 떠나 헤이안경으로 이주한 지방 호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독립성을 상실하고 천황 권력에 귀속된 궁정 귀족이 되었다. p 114 헤이안경은 모든 면에서 이전 도성들과 비교했을 때, 일본 도성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천황의 권위도 그동안의 부침을 벗어나 정점에 이르렀고, 행정 등 정무도 자리가 잡힌 뒤였다. 점점 천황은 행정 실무에서 손을 떼고, 권위의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자연스레 천황을 대신해 현실정치를 주관하는 대리인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섭정’과 ‘관백’이다. 훗날 외척인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을 차지하며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되고, 더 오랜시간 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을 차지하여 권력을 차지하는 등 섭정과 관백은 천황보다 더 앞에 있는 실질적인 권력가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되어버린다. 여러 도시 문제 가운데 당시 사람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배설물의 처리였다. 한 사람당 하루에 배출하는 분뇨의 양을 대략 0.5리터 정도로 추산해, 헤이안 경의 인구를 10만 명으로 어림잡으면 연간 분뇨배출량은 1만 8,250킬로리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 일본에서 사람이나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만들어 농사에 재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이후 중세부터였다고 한다. 따라서 인분의 활용법을 알지 못했던 헤이안 시대는 흐르는 강물에 배설물을 투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처리방식이었다. 귀족들은 대로 옆에 흐르는 도랑에서 물길을 끌어와 측간을 거쳐 다시 도랑으로 흘려보냈다. 오늘날의 수세식 화장실과 유사한 처리 방식이지만 문제는 대로 옆 도랑으로 흘려보낸 용변이 쌓여 물길을 막거나 사람들이 통행하는 도로로 흘러넘쳐 악취를 풍기기 일쑤였다는 점이다. p 129 각종 배설물 처리와 더불어 헤이안경에 거주하는 이들을 괴롭힌 또다른 문제는 빈번히 발생하는 자연재해였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천도 직후인 9세기에 발생한 지진 가운데 진도 6이상의 강진만 하더라고 모두 6차례 확인된다. 이 가운데 887년에 발생한 ‘난카이 대지진’은 수많은 민가와 관청에 피해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건물이 무너져 압사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헤이안경은 목조 건축물이 대부분이어서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화재 역시 지진 못징낳게 커다란 피해를 일으켰다. 대화재로 천황의 거처인 다이리가 소실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p 130 앞선 도읍이었던 후지와라경 역시 배수시스템과 공중 위생문제로 폐도가 되었기에, 헤이안경 역시 발전이 없었다면 폐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헤이안경은 폐도는 커녕 도읍으로써 천년동안이나 존속한 것으로 미루어볼때,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없는 내용이긴 하지만, 교토 도시문제 해결에 앞장선 사람들로는 도래인 하타씨 일족을 들 수 있다. 6세기에 이미 거대 집단이 된 도래인 하타씨는 열도 곳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중 하타씨 거대세력 일부가 교토에 자리를 잡았다. 하타씨는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등 도시개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지닌 집단이었다. 이런 하타씨가 교토에 자리잡고 제방공사(대언천 제방), 경제기반 발달(농/광/상업 등)등을 이끌며 교토 도시개발에 앞장섰던 것이다. 리뷰는 여기까지! 앞서 말하긴 했지만 일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