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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란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쓴,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의 이름 없는 진중(陳中) 일기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난중일기>라는 책 제목도 정조(正祖) 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을미년(1595년)을 다룬 소위 ‘을미일기’가 분실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원본이 흘려 쓰는 글씨인 초서(草書)로 되어 있어 후대에 해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난중일기>는 ‘일기’의 속성을 짙게 가진다. 이는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임진장초(壬辰狀草)>를 보면 알 수 있다. <임진장초>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동안 쓴 공식 기록문서인 장계(狀啓)를 모은 것으로 <난중일기>와 달리 아랫사람을 시켜 정확하고 반듯하게 쓰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난중일기>는 독자를 예상하지 않은 글이다. 그러나 여타의 일기처럼 독자의 ‘관음증(觀淫症)’을 충족시켜주는 글은 아니다. 오히려 공적 보고서를 떠올릴 만큼 딱딱한 느낌을 준다. 아니 애당초 <난중일기>는 전쟁을 앞두고 그리고 전쟁 중에 장수로서 기록해야 할 군무(軍務)에 방점을 찍은 진중일기인 만큼 일반적인 일기처럼 풍부한 감정과 부드러운 문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셈이다. 그렇기에 <난중일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은 알지만 읽지는 않는 그런 글이 되었다. 여기에는 초서체 한문으로 쓰였다는 언어의 장벽, ‘업무일지’처럼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부분이 많은 내용도 한 몫을 했다. 그래서 <난중일기>대신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는 것이 아닐까 노승석의 <쉽게 보는 난중일기>도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중복되거나 사소한 내용은 생략하고 어려운 전문용어는 쉬운 한글로 바꾸어 표기했다. 하지만, <난중일기> 아니 일기 형식이 가지는 태생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난중일기>를 읽어야 하는가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성웅(聖雄)’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입받아왔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우리는 이순신을 인간을 벗어난, 무결점의 존재와 같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비(非)인간성이 그를 존경하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만든 셈이다. 이런 모순된 감정에서 벗어나 제대로 이순신을 이해하려면, 그의 사적인 감정이 어느 정도 녹아있는 일기, 즉 <난중일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 먼저 모친에 대한 부분을 보면, 아래에 인용된 병신년 5월 4일 일기처럼 그리움과 걱정이 드러나 있다. “이 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나아가 장수를 비는 술을 한 잔도 올리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p. 205] 그러니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위해 내려가는 도중에 잠깐 어머니의 모습을 뵐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도리어 그녀의 부고를 접하고 가슴이 찢어지듯 할 수 밖에. “일찍 식사 후에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의 길로 나갔다. ∼ 중략 ∼ 얼마 후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蟹巖)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pp. 232-233] 원균(元均, 1540-1597)에 대한 부분은 불신과 비난으로 가득 차있다. 계사년 5월 30일 “원수사(원균)가 송응창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 그는 공문을 내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 하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 가소롭다. 명나라 신하가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p. 83]
계사년 8월 26일 “홍양 현감도 와서 명절 제사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p. 99]
갑오년 1월 19일 “소비포 권관(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활 쏘는 병사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간다”는 말을 들었다. 원균과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눈독들인 여자들을 다 관계했다고 한다.” [p. 110]
갑오년 4월 12일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 했다. 이억기와 원균, 구사직이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원균이 거짓으로 술 취한 체하고 광기를 마구 부려 무리한 말을 해대니, 순무어사가 매우 괴이함을 이루다 말하지 못했다. 원균이 의도하는 것이 매우 흉악하였다.” [p. 123] 물론 원균만 이런 뒷담화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행주산성의 영웅 권율도 이순신의 뒷담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을미년 4월 30일 “아침에 권율의 보고문서와 기(奇), 이(李) 두 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p. 165] 게다가 계사년 8월 25일 일기에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고 새벽에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명령했다는 내용을 보면, ‘성웅 이순신’에 대한 환상이 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중일기>는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일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난중일기>에서 발견하는 이순신의 진면목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