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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겉표지가 여러 개의 창문처럼 된 구성이다. 제목이 의미하는게 뭘까 호기심을 자아냈는데 치매 진행중의 한 모습이다. <이책은> 서평 모집 당첨 도서.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읽은 소감> 처음에는 독특한 표지가 눈길을 끄네, 제목도 예사롭지 않네. 겉표지는 여러 개의 창문이 있다. 이 창문들 사이로 언뜻 보여지는 밀림을 연상시키는 초록색하며 빨간 옷을 입은 여인.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호랑이가 아니고 여인이네...책을 읽고 나니 표지의 느낌이 확연해졌다. 여러 창문이 의미하는 바 루스의 여러 마음들이자 여러 생각이 아닐까. 제각각의 창문으로 보여질만치 다양한 모습이구나. 치매를 앓으며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생각들은 갈래갈래 흩어지고 분산된다. 나중에는 자신이 분명 기억을 하는데 그게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그런일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리아리하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자리한다. 갈피를 못잡는 마음은 일순 울적했다가 충만해지고 허전하기도 하며 무상하다.
은퇴한 남편이 원해서 바닷가 별장에 둘이 살았는데 부지런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던 남편이 어느날 객사했다. 밖에서 발견해준 엘런이 있었지만 해리는 허망하게도 떠났다. 그러고도 자신이 혼자 살 줄은 몰랐다. 아들 둘은 각자 멀리 딴나라에 살며 안부 전화를 주고 어쩌다 다니러 온다. 큰아들은 가끔씩 자주 전화를 하지만 작은 아들은 한번 전화를 하면 오래하지만 자주 하지 않는다. 이웃들도 없고 오로지 바다를 바라보는 일. 바다 이전에 남편 해리가 그리도 가꾸던 정원이었지만 루스의 모습처럼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변해간다. 바닷가의 어쩌다 보이는 사람들이 풍경처럼 보이고 가끔은 해리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는 일상. 그러던 어느날 밤에 호랑이 소리가 들린다. 지독한 공포감이다. 호랑이의 거친 숨소리와 저벅저벅 걷는 듯한 발소리며...
큰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거기는 새벽인가 보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어머니의 말을 아들은 단박에 반박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를 어느 정도는 존중하면서 기분을 거스르려고는 않는다. 아들에게 호랑이 얘기를 하면서 루스는 자신이 없어진다. 호랑이가 있을 리가 있나, 그러나 분명 호랑이였는걸...어느날 밤에 호랑이 소리가 들렸듯이 어느날 불쑥 창밖에 여인이 택시에서 내린다. 여인은 곧장 루스네 집으로 오는데 덩치가 크다. 정부에서 보낸 요양보호사 프리다라고 한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프리다는 서류에 서명해 줄 것을 요구하며 한 나절만 계약조건이라고 한다. 혼자 있어서의 고적감은 사라지겠으나 혹시 불편하면 어쩌나 의구심도 들지만 왠지 프리다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프리다는 오빠의 택시라며 타고 오고, 타고 간다. 집안일을 어찌나 열심히, 반들반들하게 잘 하는지. 차츰 프리다가 옴으로써 집안도 깨끗하고 먹을 거리도 챙겨주며 무엇보다 젊은 프리다가 집안에 있으면 온기와 생기가 돈다. 그녀의 머리칼 색은 수시로 변화를 주면서 헤어스타일 또한 자유자재임이 보기 좋다. 말동무도 해주면서 프리다는 한나절에서 하루종일로 계약조건을 변경한다. 젊은 날의 루스 이야기도 들어주고 해리 이전에 선교사였던 부모님 이야기도 하게 된다. 거기서 나이차가 많은 첫사랑인 리처드를 만난다. 부모님을 도우러 온 의사였는데 루스는 얼마나 그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배를 타고 동행하게 된 상황에서 리처드는 이혼녀인 연상의 일본 약혼녀가 있음을 처음으로 밝히고 실연의 고통을 오래는 앓지 않는다. 첫사랑은 늘 부담감이자 조마조마하게 했는데 해리는 편안함이고 서로 다른 점도 존중하는 분위기라 결혼을 했다.
이런 리처드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고 루스의 초대에 리처드가 멀리서 온다. 90을 바라보는 리처드, 75세인 루스. 오랜 시간을 훌쩍 지나서 조우하는데 프리다가 모든걸 해준다는 전제하였다. 계약조건은 또 첨부가 되고...리처드와의 해후는 만족감을 느끼며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때 다 하지 못했던 대화를 하고...프리다는 작별인사를 하고 담날 오기로. 리처드가 프리다를 맨 끝 방서 봤다고 하자 거기는 둘째 아들방인데...문을 여니 책을 보고 있는 프리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루스가 묵으라 했단다. 언제? 내가? 왜? 그럴리가? 그렇다면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거에요 라고 따지듯 말하는 프리다. 리처드도 있고 루스는 난감해지고 자신이 그랬던가...당당한 프리다의 모습에서 곤혹스럽고 당황한 건 주인인 루스. 도대체가 어찌 된 일일까. 프리다는 루스의 태도를 보고는 외출하러 간다. 리처드와 루스는 침실에 들어가서 비교적 만족스런 잠자리를 갖는다.
중략
밤에 호랑이 소리가 들리니 혼자 사는 루스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분명히 들린 호랑이 울음소리와 거친 숨소리, 발자욱 소리가 틀림없는걸. 반신반의했지만 이걸 믿어 준 사람이 프리다. 아니 기꺼이 앞장서서 프리다는 호랑이를 죽였고 손수레에 실어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호랑이와의 몸싸움으로 프리다는 상처를 입었으나 얼마나 힘겹게 루스의 고민을 해결했는가. 이런 고마운 프리다에게 루스는 거액을 주겠다는 각서를 쓰고 은행에 동행을 하고...뭔가 잘못 되었지 싶은 자각이 아예 없는게 아닌 상태지만 그렇다고 번복하는 추태는 부리고 싶지 않는 마음이 공존한다. 오빠라잖아, 죽은 엄마의 집이라잖아. 그 집이 조지로 인해 경매 처분 위기라잖아. 해리의 차를 판 돈과...
홀로 사는 부유한 노인을 상대로 한 사기는 뉴스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외로움과 고적감에 이골이 난 노인들은 약장사가 속이는걸 알지만 미끼로 그 순간만큼은 어머님, 아버님 하면서 노래와 춤을 보여주고 어깨 주물러주면 수고비라는 생각으로 약을 구매한단다. 속아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얼마나 외로움이 사무쳤으면...갈수록 부모 자식간 단절이 많아지고 고독사한 뉴스도 이젠 그리 놀랄 일이 아닌 세상이다. 루스의 외롭지만 고고한 일상에 느닷없이 파문을 일으키듯 나타난 프리다. 그녀가 분명 루스에게 활력이고 잠시지만 사는 것 같이 대우를 받았다. 루스 식의 답례라 하기엔 프리다도 속았음을 고백했고 자신을 믿어줬음을 깎듯이 인사하고 영원한 안녕을 한다.
현대인들이 암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질병이 치매라는 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만큼 기억을 잃고서도 살아간다는 일은 자신보다는 가족이 고통이지 싶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증 치매를 앓게 되면 환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정이 늘 이성을 앞서다보니 가족은 견디는데 한계를 느낀다. 환자라 여길라치면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하고, 또 망각의 시간대나 지점으로 돌아가면 답답함이다. 내 할머니께서도 미미한 치매를 앓으셨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누구냐고 물으셔서 큰손녀라고 말씀드리면 네가 아무개냐고 고개를 끄덕이신다. 잠시 뒤 또 누구냐고 묻는다...어쩌다 보는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물으니 대답도 잘 해드리지만 모시고 사는 가족은 늘 그런 지경이니 고문을 당하는 느낌.
주인공은 루스와 프리다 둘만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76 페이지가 여백이 없다시피 빽빽하다. 책을 읽다가 여백을 찾아본다는 건 지루함이다. 몰입이 덜 된다는 거다. 루스의 생각을 따라가지만 도대체가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생각인지. 모호한 상태의 나열은 숨막힘이고 답답함이다. 회상의 나열인지 미련의 나열인지 그랬으면 싶은 것인지. 프리다는 그런 루스를 다 이해한다는 듯 수긍하다 어느 순간 듣는둥 마는둥이고 때론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인다. 프리다의 속을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설정도 조마조마함을 더 부가시키며, 한편으로는 설마 아니겠지 믿고 싶은 마음도 갖게 한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장수하는 노년층이 증가하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노후는 최악이다. 노후의 삶은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에다 여유로움이고 싶다. 바램이다. 욕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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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노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건 커다란 행복인것 같다. 공원을 걸을때나 길을 걸을때 노부부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걸 보면 참 좋아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칠순이 넘은 시부모님은 시골에서 생활하시는데, 그나마 부부가 같이 계시니까 며느리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안심할 수가 있다. 하지만 만약 혼자 살고 계신다면, 건강은 괜찮으신지 자주 전화도 드려야 하고, 자주 찾아 뵈어야 할 일이다.
처음 『밤, 호랑이가 온다』라는 제목을 보았을때, 추리소설이 아닌가 했다. 칠십이 넘은 노인이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랑이가 거실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꿈이려니 했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꿈이 아니었고, 실제 거실에 호랑이가 있었던 느낌이 들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호랑이가 나타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타났을때, 호랑이가 더 자주 보인다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뭔가를 노리고 온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었다. 호기롭게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어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편해져 왔다.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생길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루스는 칠십이 넘은 할머니로 바닷가의 별장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은 아들 둘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잠을 자다가 호랑이 소리를 듣고, 아들 제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가 깬듯한 목소리였고,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루스의 말에 꿈을 꾼게 아니냐고 말을 건넸다. 제프리의 행동은 어쩌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이기도 했다. 밤에 잠을 자다가 전화벨소리가 울리면 나이 드신 부모님들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깨게 된다. 어딘가라도 아프시나 하고 귀기울여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만, 호랑이가 나왔다는 어머니의 말에 아마도 꿈을 꾼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프리다라 불리우는 덩치가 큰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정부에서 보낸 요양사라고 하며 매일 오전 두 시간씩 루스 곁에 머물며 루스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루스가 느끼는 프리다는 다정했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깔끔하게 청소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외로웠던 루스는 프리다의 다정함이 마음에 들었고, 매일 그녀를 방문해 곁에 머무는 것이 좋았다. 프리다가 루스의 집에 왔어도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정글의 냄새와 킁킁거림, 정글의 열기는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점점 기억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깔끔했던 루스는 어느날엔가 머리가 가렵다는 것을 느끼고 몇 주일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던 프리다가 사실은 둘째 아들 필립의 방에서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프리다에게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프리다는 루스가 그녀의 집에서 머물도록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고, 프리다도 믿을수 없어졌다. 하지만 어느샌가 자신의 모든 기억들이 뒤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프리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나이 먹은 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벗이라고 한다. 외로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말벗 만큼 그들이 덜 외롭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시골에서 혼자 사는 노인분들에게 사기를 쳐도 그분들이 자꾸 사기를 당하는 것은 알고도 그러는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마음을 훔쳐 물건을 강매하고가도, 외롭기 때문에, 물건을 팔기 위해 애교를 부리고 웃음 짓고, 노래를 불러주는 게 싫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루스도 외로움을 견디기에 프리다가 싫지 않아 그녀를 곁에 머물게 했을 것이다. 루스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어쩌면 어딘가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외로운 노인 곁에 머물면서, 노인을 도와주는 척 하며 마음을 훔쳐 또는 다른 것을 훔쳐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멀리서 안부 전화만 했던 자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전화로 나누는 말 속에서 별일 없으려니 하는 건 자식들의 생각뿐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멍해 있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러한 결말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했지만, 오래도록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 젊은 작가인데도, 모호해지는 기억들 속의 파편들,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이에 대한 노년의 마음을 정교하게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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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어. 이야기의 전개가 절정을 치달을 무렵 나는 책장을 싱경질적으로 마구마구 넘겼다. 이게 뭐야. 뭔가 대단한 반전을 기대했는데, 뻔한 사기극이었잖아. 물론 술렁술렁 읽어 넘긴 후 결론을 읽고 나서 프리다가 사기치던 앞부분은 제대로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서 옮긴이의 말을 읽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차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오래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I don't wanna talk about it, how you broke my heart, if you stay..."
끝... 그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첫사랑의 설레임마저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노년에, 아직 사유의 자유가 영혼을 떠나지 않은 노년에, 아직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상처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노년에, 생각만큼은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어릴 적 자랐던 그 먼 시공을 가까이 고스란히 품고, 하루 하루 아직 뭔가가 더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고 눈을 뜨는 그 끝나지 않은 노년에.. 요양사 프리다는 이미 "끝난 것"에 대해서만 묻고 있었다. 끝은.. 끝이란 건.. 설령 그게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멀리'에 있다. 필립로스는 <에브리맨>에서 노년은 전투다 라고 했던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싸워 나가는 거다. 저벅저벅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 살아왔던 기간에 반비례한 기간만큼 먼 기억을 더욱 가까이 느끼며, 살아왔던 인생만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잊혀진채, 마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살아온 길을 추억하는 것 말고는 없는 것처럼, 고독과 우울 속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어 망각되는 것이 수순인양, 저항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치열한 내면의 전투이다. 시간과의 싸움. 기억과의 싸움. 삐그덕거리는 관절과의 싸움, 얇고 쭈글쭈글한 피부가 견뎌내는 외로움과의 대전투다. 나는 잘못했다.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해안가 외딴집에 홀로 사는 돈 많은 노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손쉬운 사기 범죄의 표적이다. 그 뻔뻔함 속에 뭔가가 있기를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우리는 노인이 계좌에 언제 끝날 지 모를 자신을 위해 현금을 남겨둔다면 가족이든 이웃이든 그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탈취해야만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스쿠루지 영감이 비난받은 이유는 돈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늙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사는 몸도 마음도 취약한 상태의 노인에게 마지막 남은 재화가 아직 노인이 되기 전인 모든 주변인의 표적이 되는 건 ..그건 매일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것처럼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만연화된 일상이라는 것. 그걸 먼저 간파해야 했다. 프리다의 사기 행각은 소설의 핵심이 아니라, 루스의 노년을 설명해주는 배경같은 장치였다. 루스가 앓고 있는 치매는 루스를 루스로부터 소외시킨다. 우리는 연속적인 기억과 그 기억의 작용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간들로부터 자아를 뽑아낸다. 그래서 기억의 단절은 자아의 상실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이 치매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정보를 주워들은 나는, 그녀의 시점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에서 모든 상황을 의심하였다. 그녀의 기억은 사실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키스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남자일까? 프리다가 조지와 합작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50년 전의 그 감정을 그대로 불러오는 것을 읽으며 먹먹한 슬픔을 느꼈다. 90살이 된 남자에게 18세 소녀가 사랑했던 남자에게 느꼈던 똑같은 지적 열등감과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들... 그 끝나지 않은 노년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밤을 지나면서 여운이 되고, 슬픔을 주었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건 무얼까. 위엄? 기품? 고독? 위용? 어쨌든 호주의 바닷가 별장같은 집에 홀로 사는 75세 노인 루스는 호랑이를 본다. 호랑이는 소설의 제목에도 소설의 시작에도 소설의 끝부분에도, 소설의 중간중간에도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독자도 주인공에게도 직접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소리로 왔다가 냄새로 왔다가 요양사 프리다와의 걸레대첩에서 치열한 결투를 끝에 마지막 순간에는 칼에 찔려 잔인하게 죽지만 그렇게 루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문학적 해석을 어떻게 내리는지 궁금하다. 중요한 건 단지 그녀에게 보였다는 것.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한 존재였다는 것. 위협적이었지만, 그를 보살피던 프리다가 용감하게 죽여버렸지만, 결국 그녀를 그렇게 데려가 버렸다는 것이다. 가시기 마지막 한 달간을 병원에서 지내셨던 내 할머니는 나를 키워주셨다. 어린 내가 밥을 안먹는다며 뛰어다니는 놀이터까지 밥과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니며 한 숟갈만 한숟갈만 애원하듯 떠먹이며 키우신 내 할머니가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내가 그분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댁은 뉘슈' 하는 듯한 그 낯선 표정에 나는 슬픔으로 무너져내렸다. 이미 그 때 할머님이 더이상 내 곁에 안계사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 계신 할머니는 늙어 쪼그라든 몸 뿐, 내 할머니의 영혼은 먼 곳 어딘가에 계셨다.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말투는 할머니인데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그곳에 없는 누군가와 계속 말씀을 나누셨다. 또 다른 날 찾아뵈었을 때는 간호사가 기저귀를 갈아채우는 걸 목격하였다. 아무도... 치매 앞에.. 존엄성을 지키며.. 근엄하게죽을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의 끝 노년은 전투다. 막상 장례식 때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 병원에 계실 때 내겐 잘있으렴, 인사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기에.. 그래서.. 보내드렸기에.. 무서운 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에도 오늘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소망하면서, 뭔가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지금의 내가, 마치 소녀 때처럼 그때와 변함없는 기억과 감정을 가졌는데, 그것이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걸 문득 문득 깨닫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평범하던 일상 속에 갑자기 5년 전에 세상을 뜬 남편의 부재를 깨닫고, 장성해서 독립한 아들의 존재를 깨닫고, 길가던 이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두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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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의 할머니 루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지만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네시.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의 울림. 몸집이 거대함과 의도를 암시하는 숨소리의 울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을 그녀는 호랑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떨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가보니 호랑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새로운 느낌, 대단히 중대한 느낌.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p. 11) 정말로 대체 그 소린 무엇이었을까? 아들 제프리의 말대로 꿈결의 연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느꼈던 그대로 이제껏 별 탈 없이 굴러왔던 인생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다음날. 과연 그 호랑이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정체모를 한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육중한 몸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그 존재감의 과시와 이름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화상으로 자주 드러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가 얼른 연상되는 그녀는 루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는 자기가 루스를 돌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루스는 썩 내키지 않는 그녀를 자신의 둥지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프리다는 막무가내다. 역시 호랑이는 프리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 이 느닷없이 도래한 두 여성의 흥미로운 동거 이야기는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여성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 우리는 루스의 과거를 보게 된다. 그 과거에서 드러나는 루스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루스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 해리와 똑같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에 프리다의 출현은 그녀의 조용한 삶의 수면에 문득 생겨난 파문과 같았다. 느닷없는 동거는 변함없이 돌고 돌았던 궤도의 이탈이었다. 그건 지금껏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위험이었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갇혀 있던 삶에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모험은 탈옥에서 오는 두근거림이었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이가 다시 예전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대한 병장이 다시는 부대를 뒤돌아보지 않듯이. 그녀의 이름이 하필이면 '루스'인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루스'는 잃어버리다란 뜻의 'lose'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점점 상실(lose)해 간다. 이로서 호랑이 소리가 암시했던 중대한 일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건 바로 이제 다시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신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는 과거의 삶을 상실해야 했을까? 작가 피오나 맥팔레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해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루스라는 존재 때문에 노년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노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외감, 무력감을 말하는. 분명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식상한 표현이 될 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남성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여성은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물론 결말은 이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루스와 프리다, 그녀들 모두에게 닥쳐온 비극은 누구 때문이었나? 바로 남자들이다. 루스가 프리다에게 날로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예전의 연인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한 집착이 프리다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을 낳았다. 프리다는 남자 친구 조지를 신뢰했다. 그녀가 루스를 찾아와 헌신적인 노동을 한 것도 조지 때문이었다. 루스와 프리다. 둘은 결국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다. 독립적으로 뭔가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루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들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전화로 걱정을 전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리처드조차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지만 정작 그녀가 얻는 것은 소외와 착취 뿐이었다. 프리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남성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불신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초반 해리의 죽음에 나왔던 앨런이라는 존재가 참 의미심장해진다. 앨런, 그녀는 착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5년 전 남편 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해리는 늙어서 '시궁창의 개'처럼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해리 앞에 가던 차를 멈추고 다가와 그렇게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바로 앨런이었다. 루스는 그녀를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불렀다. 루스는 앨런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진 낯선 이가 어느 날 나타나 다른 어떤 이유 없이 오로지 선의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앨런이 그 증거였다.(p. 32)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가능성이 무엇보다 여성에게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한 정도의 구원은 소설에서 오로지 앨런만이 준다. "당신은 정말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이에요" 필립이 말했다.(p. 369) 다른 이는 아무도 루스에게 주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전의 연인 리처드도, 두 아들도. 남자들은 사실 루스가 키웠던 수컷 고양이와 같았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토해서 더럽히는 존재들. 그걸 프리다가 걸레로 말끔히 닦아내듯 치유를 줄 수 있는 건 앨런 뿐이었다. 프리다도 줄 수 있었다. 루스는 (진짜였는지 연기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랑이를 해치운 프리다를 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안전을 그녀가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루스가 프리다가 하자는 대로 군말없이 한 것도 앨런이 주었던 것을 프리다가 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스는 앨런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아울러 프리다에게도 고마웠다. 프리다는 집과 고양이와 루스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쏟으며 자기 몸이 닳도록 일했고 호랑이를 쫓아내주었다.(p. 266)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프리다마저 루스와 똑같이 여전히 남성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리다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다면, 루스 역시 더이상 리처드나 아들들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프리다와 연대하려 했었다면 아마도 결말의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앨런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난 프리다와 겨우 몇 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앨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p.367)
소설의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앙리 루소의 '이국의 숲에서 우산을 든 여인'의 그림이 나온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홀로 우뚝 섰을 때 가지게 될 자유를 뜻하는 그림인데 커버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바로 이런 소설인 것이다. 결국 루스를 두려움에 젖게 했던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남성 혹은 그 남성에 여전히 얽매인 자신이 아니었을까? 좀 더 보편적으로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이 소설은 독립적으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거나 의존하지 않는 것. 그런 이유로 루스가 하필이면 노년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노년이란 무엇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남성, 여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그것들이 삶을 좀 더 쉽게 걸어가게 만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우리의 보행을 어렵게 하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내 걸음만 늦춰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도 잦다. 이 소설은 문득 그런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비록 이 세상에 온통 흙비가 내리더라도 나 홀로 우산을 받치고 견디려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연대도 그 때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독립한 나가 될 수 있었을 때에. 난폭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소설이 거꾸로 보여주듯이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홀로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 뿐이다. 프리다와 루스는 그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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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답답해왔고, 그 다음은 안타까움이었다. 답답한 이유는 노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은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인 루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두 아들은 전화통화만으로도 자신의 어머니를 충분히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웃들은 조금 달라 보이긴 하지만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없는 루스에 적극적인 행동을 할 생각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호주의 한 할머니 이야기였지만 우리 이웃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루스는 한적한 바닷가 별장에서 홀로 지내는 부유한 노인이다. 시내서 살다가 은퇴한 남편과 함께 노후를 보내기 위해 어촌으로 들어왔다. 몇 년 전, 남편이 사망하자 엉거주춤, 그대로 바닷가 별장에서 홀로 지내게 된다. 아들이 둘 있지만 혼자 된 어머니를 살뜰하게 챙기지 못한다. 보통의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루스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전화로 안부를 묻는 자식들에겐 늘 잘 지낸다고 말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바닷가 마을에서 일흔이 넘은 노인이 혼자 살고 있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스는 혼자서 잘 살고 싶지만 혼자사는 노인에게는 이런 저런 위험한 일들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루스에게도 호랑이라는 탈을 쓴 위험이 찾아오고, 결국 그 위험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랑이는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모든 위험의 은유였다. 루스에게는 치매와 골절상, 사기꾼 등등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이 위험으로부터 노인을 보호해줄 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조금만 더 관심 있게 지켜봤더라면 노인의 마지막 삶은 좀 더 행복했을 것이다. 프리다의 느물거리는 횡포나 마을사람들의 방관, 자식들의 유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루스를 공포에 몰아넣은 호랑이였다. 나도 곧 노인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몸이 버티는 한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하지만 노인이 혼자 사는 것은 어린 아이가 혼자 사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이 책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혼자 된 노인에게는 아이처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자식들이 할 수 없다면 국가에서 해주어야한다. 노인들은 그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젊은 시절 국가와 사회에 적절한 세금을 내고 봉사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노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 아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노인을 돌보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밤은 호랑이가 거실에 어슬렁거리는 것만큼 무섭고 힘든 시간이다. 밤에 아이를 혼자 집에 두지 않는 것처럼 노인들에게도 충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살뜰히 전하는 내용이었다. |
최근 사회가 노령화되면서 홀로된 노인들을 노린 범죄 역시 무척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마음이 헛헛하고 외로운 노인분들 곁에서 자식처럼 살갑게 돌보며 야금야금 그들의 재산을 탐하는 사기꾼들 이야기. 때론 흐려진 그들의 정신을 이용해서 더욱 악랄한 범죄를 계획하고 행하기도 하는 비정한 현실.
<밤, 호랑이가 온다>의 주인공 루스는 70대의 할머니로, 경제적 여유를 즐기며 평온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때론 홀로 외롭기도 했지만 그런 것이 노년의 삶이라 적응하며, 오직 자식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 독립적인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을 마지막 자존심으로 여기며 생활해 가던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한밤중에 들려오는 호랑이 울음 소리. 그것이 불행이 시초였을까. 뒤이어 갑작스레 그녀를 찾아온 정부에서 보냈다는 요양사 프리다. 그녀는 살갑고 효율적으로 그녀의 생활을 돕고, 어느 새 그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만큼 깊이 파고든다. 출퇴근하는 줄로만 알았던 공공 요양사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집에서 살고 있었고, 그녀의 오빠로만 알고 있었던 택시기사 조지는 알고 보니 그녀의 연인이었으며 그녀와 공모해 루스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였는데... 그러나 결국은 프리다 역시 조지에게 사기를 당한다. 이렇게 홀로 사는 노인들은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쉽상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저자의 서사 과정이 매력적이다. 읽다 보면 잔잔한 와중에 무언가 곧 터질 것만 같은 공포 영화가 연상된다. 긴장하며 읽게 되는 심리 스릴러 느낌.
실제로 치매에 걸린 자신의 두 분 할머니를 위해 저자가 쓰기 시작했다는 이 소설은 노년의 삶에 대해 굉장히 실제적으로 그려내면서, 심리적으로 느낄 그들의 당혹스런 감정에 대해서도 사실적으로 서술해 내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듯한 환경 속에서 의심이 들면서도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기억력 때문에 어느새 프리다에게 어쩌면 조종당해버리고 마는 루스. 나 역시 나이가 들어 심신이 약해진 상태라면, 누군가를 더욱 의지하게 되고 판단이 흐려지지 않을까.
나도 나이가 들겠지. 기품있고 지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호랑이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시초로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루스처럼, 나 역시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게도 될테지. 맑은 정신으로만 유지되지 못할 노년은 사실 좀 두려워진다. 루스가 느낀 불안감이 미래의 내 얘기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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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를 통해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독후감입니다. 본 독후감은 간서치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에 이상하다 싶은 말이 루스에게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루스는 제프리의 얼굴이 놀이동산의 요술거울인 양 바라보다가 이제 아들이 어머니를 걱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다, 아들. 괜찮아.”루스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 미안하다 다시 자거라.” “정말 그래도 되요? 제프리가 말했다. 하지만 아들의 목소리에는 안개가 덮여 있었다. 그는 벌써부터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10쪽) 루스는 아들 제프리에게 전화를 걸어 호랑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휴양지에 바닷가 마을에 아름다운 풍경에 왠 호랑이란 말인가! 아들은 어머니의 말에 불안감을 느끼지만 이내 농담처럼 넘긴다. 그 날 이후, 프라다라는 요양사가 찾아온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리켜 정부에서 보낸 요양사라고 한다. 프리다가 온 날 이후에도 계속해서 루스는 호랑이의 흔적을 보고 소리를 듣게 된다. 루스가 울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끔찍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울었다. 머리 감는 것을 잊은 채 그런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가려움증이 계속되도록 놔두었다는 게 너무 섬뜩할 만큼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이 되면 루스는 이나 다른 기생충이 생긴 건지 아니면 가렵다고 상상하면서 미쳐가는 건지 걱정했다. 아침이면 이런 두려움에 번질거리는 얼굴로 잠이 깨어 머리를 긁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곤 했는데 이제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머리를 감지 않았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는 점을 프리다가 일깨워 준 것이다. (103쪽) 루스는 머리가 계속 가려웠다. 그런데 그 가려움이 자신이 머리를 감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가 생긴 걸까, 기생충이 생긴 걸까 홀로 고민하면서 자신이 ‘가렵다고 착각하고 긁고 있는 건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면 이 가려움이 가시지 않아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픔도 있었을 테지만 그 아픔조차도 잊을 만큼 머리가 가려웠다. 첫사랑 리처드가 오기로 했다. 그녀는 단장을 해야 한다. 그가 보기에 루스는 남편을 잃은 홀로된 독거노인이 아닌, 옛 추억을 더듬고 싶을 만큼 곱게 늙은 아가씨로 보이고 싶은 것이다. 리처드가 집에 방문하기로 해 더 이상은 루스의 안 감은 머리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프리다가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이제 루스는 자신이 머리를 감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에 어질어질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사이자 의사이셨고 선교사였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존경하는 딸이었고 그녀도 명석해서 아이들의 발음교정 교사였다.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마음은 늙지 않은 그녀가 자신이 머리 감은지도 모르다니! “난 혼자가 아니에요.” 루스가 말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처음 나타났을 때 루스는 혼자였고 제프리는 오지 않았다. 루스에게 다시 잠을 자라고 했으며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일에 관해 농담을 했다. “아드님은 사람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있는데도 어르신을 혼자 둔 거에요. 침대에서 자다가 잡아먹히지 않았으니 다행이에요.” 루스는 초조해서 웃었다. 이 웃음의 의미가 얼마나 투명하게 들여다보일지 알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나왔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침대에 누운 자신의 얼굴 위에 호랑이의 뜨거운 얼굴이 바싹 다가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199쪽) 호랑이가 처음 나타났다고 했을 때, 그것은 루스의 치매의 전조였다. 그런데 첫째 아들 제프리도 둘째 아들 해리도 오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이 치매인지도 모른 채 점차 기억을 잃어갔다. 남편이 죽었는지도 헷갈렸으며, 차를 팔았는데도 운전할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끝에는 호랑이의 의미와 함께 반전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반전이 안타까움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가족보다도 인터넷, 뉴스 등과 대화를 나누고 정작 가족이 어떤 마음인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경고를 주는 것 같다. 제프리를 욕하고 싶지만 왠지 이상하다고 여겼던 동네주민들도 루스의 상태를 간과했다는 사실이 더 잔인하게 와 닿는다. 호랑이는 대체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불안감이었을까, 아니면 불안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까. 아니면 진짜로 호랑이가 있었을까. 나는 책을 읽으며 너무 그 존재가 궁금해 읽는 중간에 끝을 봐 버렸지만 그때도 충격이었고 다시 돌아와 끝으로 갈수록 더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 피오나 맥팔레인의 다음 신작이 기대되는 이유는 이 책이 치매노인에 대한 것을 무엇보다 잘 파악했으며, 심리묘사가 탁월해 문장을 더듬어가며 읽은 기분이었다. 가히 명작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루스와 같은 연세가 되어 가시는 부모님과 주변인들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야겠다는 교훈을 호랑이의 존재를 생각하며 다시 깊게 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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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hundred"소위 100세 시대라 한다. 삶의 질과 상관없이 수명만 연장 된 삶과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중 하나인 치매와 노인의 고독이라는 난제로 밀도있게 구성된 소설이다. 어느 누구나 늙어간다는 명백한 사실앞에 속수무책으로 호랑이가 다가오듯 어둠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주인공 루이스는 밤에는 정글냄새가 나며 낮에는 유칼립투스향이 나는 정신의 이중성으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설상가상 도움을 주려고 온 프라다의 존재는 결국 이중의 아픔을 주는 가해자이다. 지난 삶의 에피소드와 전 남편의 기억.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같은 중년의 로맨스가 생의 파노라마처럼 기억의 편린으로 채워진다. ............. 죽음의 문턱에서도 나의 기억 나의 의지 나의 바램 나의 후회가 선명해지길 바라며 시간이란 퇴화하는것이 아닌 진보하는 것이어야한다. 또한 삶은 파괴되지 않고 자연스레 소멸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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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근처 그림같은 집에 혼자 살고 있는 루스의 삶은 고요하고 정적이다. 창문가에서 해질녘의 바다를 내다보며 보내는 시간들의 속도가 다소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주인공은 벌써 75살의 나이다. 하지만 조용한 루스의 일상이 비밀스럽게 속삭이고 자꾸 궁금하게 된다. 책의 전반적으로 도는 색은 무채색이 아니라 열대지방의 신비롭고 선명한 빛깔이다.
어느 날 루스의 집을 찾아온 프리다라는 여자가 이러한 활력에 한 몫을 한다.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 정부에서 보낸 요양사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프리다는 마치 프리다의 그림 속 여자처럼 굳건한 육체미의 외양을 뽐내며 정적인 루스와 비교되듯 몸짓 하나하나가 신선한 힘을 발산한다.
루스가 프리다의 도움으로 머리를 감고 밥을 먹고 집을 마룻바닥이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청소되는 등, 여러가지로 루스는 프리다에게 의지하게 되고 위안을 받는다. 프리다의 넘치는 열정 때문일까 루스는 가끔씩 그녀에게서 강압이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해도 그녀가 없는 루스의 이전 삶이 어땟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평범한 듯 보이는 루스에게 시선을 뗄 수 없는 한 가지이며 책의 맨 처음장면에 새벽에 잠을 깬 루스에게 나타난 것이 있다.
"루스는 새벽 4시에 잠이 깨었고 흐릿한 뇌가 '호랑이'라고 말했다...루스는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집 안이 조용해지면...멀리서 나지막이 킁킁거리는 소리에 이어 뭔가를 탐색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고양이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공포의 흥분상태로 달려가더니..반쯤 열린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거실에서 이상한 울부짖음이 터져나오다가 뚝 끊겼다..킁킁대는 소리에 루스는 침입자가 호랑이라는 걸 확신했다"
한 새벽날, 루스는 방 밖에 호랑이의 존재를 느낀다. 킁킁거리는 소리, 정글의 숲냄새, 앵무새의 기척. 그 후로 그녀는 호랑이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또 이따끔 방 밖에 또다시 찾아왔음을 느낀다.
"호랑이 소리가 들려, 숨을 헐떡대면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집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씀하신거에요? 아, 엄마. 호랑이는 없어요. 고양이나 꿈일 거에요"
책을 읽으면서 75살 루스를 통해 젊은 내게 노년이 바로 앞에 찾아온 것처럼 현실감있고 깊게 느껴졌다.
그간 노년세대에 대한 나의 편견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꽃다운 시절 첫사랑이던 리처드를 다시 만나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하고, 사랑을 나누며 그녀의 감정과 감성, 자존심이 젊은이들의 것과 같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벌써 40여년 전, 선교사 부모를 따라 피지에서 보냈던 때, 거기서 리처드를 만나 함께했던 추억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며 그 감정의 연장선으로 리처드를 만난다.
하지만 몇십년 만에 만난 리처드가 루스에게 청혼할때 그녀가 슬픈 농담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처럼 흘러간 세월의 비정함, 씁쓸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로스의 삶엔 멀리 사는 두 아들이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재회한 첫사랑 리처드, 얼마 전 죽은 남편 해리, 바로 곁에서 그녀를 돌보는 프리다, 밤에 가끔씩 출몰하는 호랑이가 대부분 그녀의 의식을 차지한다.
노년이 되면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이 외로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과 감성이 말랑말랑하고 새로운 만남이 열려있는 걸 보며 설렘 또한 느껴진다.
비밀스럽고 무언가 분명하지 않게 흘러가는 책의 분위기를 보고 호랑이의 존재를 빨리 눈치 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상상력과 비유가 매우 독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또 반전있는 이야기가 책에 마음을 더 이끌리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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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어떤 결정을 내려야하는 순간이 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선택을 한다. 그 경험이 책으로 부터 온 것이든 몸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든 기억을 벗어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해보이고 또한 옳지 않은 듯 느껴져 쉽지 않다. 사실 우리는 다 기억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매 순간 우리의 이전 기억을 누르며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기도 한다. 또는 이 기억들이 엃히고 설키어 새로운 기억을 창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를 지탱해주던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 의해 나의 기억들의 진위여부를 부정달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피오나 맥팔레인의 신작 <밤, 호랑이가 온다>는 나이가 먹어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는 시기, 자신의 기억을 타인에 의해 거부당하면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을 가상의 호랑이라는 존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남편을 잃고 혼자 조요한 섬에서 생활하면 루시할머니는 재산도 넉넉하고 허리는 약간 안좋지만 손발은 건강해 혼자서도 우아하고 건강하게 살아간다. 그런 할머니가 어느날 밤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다. 할머니는 불현듯 엣날 어릴 적 피지섬에서 살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거실에 호랑이가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본 것도 아니고 그냥 느끼기만 한 것인지라 자신이 칠십이 넘은 노인인지라 자신의 생각에 자심감이 없어지고 아들에게 전화를 하지요. 먼 곳에 사는 아들은 그저 꿈일거라 일축하는데 할머니 집으로 프리다라는 요양사가 방문합니다. 처음엔 그저 한 두시간 와서 돌보는 듯 하지만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데 자기가 있으라 했다고 어느새 방 하나를 차지하고 너무나 자신감 있고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루시할머니는 자신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그녀의 영역을 잃어가지요. 자기의 기억은 아니라고 하는데 칠십넘은 늙은 사람이기에 그녀 자신조차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으니 프리다를 온전히 믿지도 못하고 자신의 기억도 믿지 못해요. 점점 혼동이 오고 나중에는 뭔가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프리다에게 돈을 내어주고 말아요. 읽으면서 머리가 무거워졌어요. 누구나 늙고 병들고 오랜 세월 사용한 뇌가 고장신고를 낼 수 있는데 루스할머니가 겪은 일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에만 그칠 수 이는 일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쉽게 읽고 넘어가지지가 않더군요. 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다가올 수 있는 일, 아니 세상 어느 한 구석에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여겨져서 이리라. 홀로 있는 이에게 다가온 낯선 이들, 그리고 그들의 행태가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의 묘미를 치매노인의 잃어가는 기억의 슬픔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맘먹고 사기치러 들어온 프리다와 프리다를 믿지 않으면서도 믿으려 의지하려 노력하는 루스할머니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부부 사이는 둘 이외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이들의 관계 역시 그 두 사람만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 티격태격 불신 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버린 정이 암묵적으로 표출되는 장치들이 이 소설의 진가이다.
프리다를 믿지 못해 그녀의 가방을 뒤지고, 방을 뒤지면서 루스는 무엇을 찾고 싶었던걸까? 그녀의 방에서 찾아낸 아버지의 화석을 자신의 것이라 우기는 프리다를 보며 자신의 아버지 것인지 알면서도 자신으 기억이 잘못된 것일거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면서도 순간 순간 자신의 나이를 상기하며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속이 상하고 이 놈의 기억은 좀처럼 회복이 되질않는다.
회복되지 않은 기억을 붙잡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루스할머니가 그렇게 짠할 수가 업었다. 그 속에서 느낀 불아남이나 소외감은 사실 치매 노인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대부분이 그렇다. 나들 아직은 괜찮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뿐인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