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을 보고 한겨레21잡지도 보며 씨네21도 가끔보는 독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신문시장은 우편향적이며 그러기에 자칭 중도라고 생각하는 내가 볼만한 것은 한겨레밖엔 없다. 또한 언론의 불편부당과 정론직필을 장담하는 신문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고 있는 동시대의 언론적 양심을 나는 한겨레에서 찾는다. 한겨레문학상도 문학적인 양심과 소신에 따라 뽑힌 작품일 거라고 믿으며 가끔씩 찾아본 수상작들은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었으나, 이번 <권리>의 작품을 선정한 것에 대하여 나는 한겨레전체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작가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을 구입하고 덮기까지 내가 최종적으로 든 생각은 <이것도 문학이라니...="">하는 자조섞인 말과, 한겨레 문학상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 더 나아가 작가 <권리>와 한겨레문학상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추측이었다. 물론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작품에 별 하나를 주기도 너무너무 아깝다. 소설적인 다양한 시도와 실험은 앞으로의 문학의 발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의미있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 실험을 마구잡이로 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험과 깊이있는 사고에 의거하여 인간성에 대한 끝없는 고민,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뒤따른 후에야 시도할 수 있는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문학적인 깊이가 있다거나 작가의 신선한 발상이 있다고는 전혀(!), 정말 99.9%에 가까울 정도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정말 참담했다. 인문학의 위기, 기존의 서사기법에 대한 다양한 시도의 필요성이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동안 닦고 갈아 정착시켜온 소설적 형식을 무턱대고 파괴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수반한다. 그것은 작가의 문학적 실력과 소신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럴 수록 온고지신의 사고를 적극적으로 발휘해야한다. 그동안의 우리문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문학을 창조할 수 있는가, 그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깊이있는 다양한 사고를 토대로 하여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느냐 등의 고민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내 문학적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내 양심상 나는 이 작품을 한겨레문학상으로 추천한 것에 대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독자가 읽는 것 역시 별로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참담한 심정으로...권리>이것도>권리> |
| 이미 부정적인 서평을 상당수 접하고 읽은 작품이라서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그 예상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았다. 작가는 아직 작가로서 덜 성숙했다. 그것은 신인의 풋풋함과는 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작품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서사기법이나 소설형식을 파괴한 데 있지 않다. 그런 것이라면 이미 진작에 파괴되었고, 권리의 작품은 오히려 그렇게 형식상 독특하지는 않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길래 얼마나 심하길래 그런가 읽어봤는데, 결론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 그러나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 문제점 • 문장력 - 문장력은 좀 부족한 편이다. 생각이 좋고 소재가 좋은데 문장력이 부족하다면 그건 작가가 아니라 단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 기발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수식어를 배제한 분명한 문장은 긍정적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늘어지는 문장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장끼리의 응집력이 약하고 집중도도 떨어진다. • 쓸데없이 많은 각주 - 주위에서 아무리 말해봤자 스스로가 느끼지 않으면 와닿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단어를 수정하면 많은 각주들을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독자의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작가가 소설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에만 장점이 될 수 있다. 아직 작가는 그런 능력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 지나친 뛰어넘기 - 갑자기 납득할 수 없이 전개가 튕겨져나간다. 그것은 의도적인 거칠음이 아니라 서투른 생략이다. • 인용과 나열의 남발 - 다만 설익은 외침으로만 들린다. • 표현이 안 되고 답답한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그게 잘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 사람마저도 답답하게 만들어버린다. ● 장점 • 때때로 튀어나오는 단상들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단상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런 단상들은 단상에만 머물 뿐,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못하고 있다.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이런 생각들을 잘 발전시켜서 좋은 작품을 써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장편의 시초는 단상들이니까. 내가 이렇게 썩은 감자가 돼버릴 줄은. 쏟아지기만 하는 불완전한 에너지를 열정으로 오인했던 거구나. (p.111) 그것은 어떤 경직된 사회와 나 자신을 향한 토로에 가까웠다. 내 안엔 늘 모순된 감정이 있었다. 제도에 순응하면서도 동시에 거부하는 감정이 공존한다. 깨뜨리고 싶은 감정과 깨지고 싶지 않은 감정이 공존한다. 퀴즈를 매개로 만난 아이들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면서도 구조적으로 싫어한다. 자기 혐오자를 질색하면서도 나는 종종 자기 혐오에 빠진다. (p.113) “…… 열정이 지나치면 결핍감을 느끼게 마련이니까요.” (p.146) 무엇을 찾는지 알기 위해서, ‘분실물센터’에 서 있다는 역설! ‘분실물센터’에서 물건을 찾으려면 무엇을 찾는지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p.251) • 아직 영글지 않았지만 가능성 있는 의식 역시 이것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의식은 잘만 발전시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미 의식의 틀은 자리잡았다.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권리는 여타 가벼운 인터넷 작가들과는 좀 구분이 된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세계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 (p.53) 극단적인 인간은 늘 위기감을 느낀다. 어쩌면 그들은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딜레마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제록시안들의 목적은 세상을 복제하는 것이다. 클론, 초국가기업 등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 복제도 하고 있다. 60억 인구 중 어딘가에 복제주의자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복제하고 있는데도 순진한 기능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 척한다. 사람들은 혁명을 자살만큼이나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p.37) 우리를 죽이는 것은, ……(중략)…… 바로 시스템입니다. 그런 구조에서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미쳐서라도 자신의 놀이를 찾아내야 됩니다. (p.150) 그러나 문제는, 문학상은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현재 어떤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지도 모른다. 장바구니에 책만 집어넣는다고 다 만족할 만한 쇼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나는 그래서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것이 꺼려진다. 그러나 왜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런 위험을 줄일 수 있는가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어떤 출판사도 그 명성만을 믿고 책을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출판사도 모든 독자의 입맛에 맞는 책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와 문학상의 명성만 믿고 책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이 산다면 그건 바로 독자들이 만들어주는 권력 아닌가. 그래서 이런 모든 비판도 나는 출판사에 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권리는 다음번 작품을 보고 판단을 내리겠다. 개인적으로는 가능성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아직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작가는 ‘휴머니스트가 되는’(p.160) 것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음번 작품에서 자신이 섭취한 것을 충분히 자기화시켜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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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문학상 2004년 수상작.
최근(?)에 '왼손잡이 미스터 리'를 펴낸 권리의 등단 작품이다.
난해한 노가리, 짖궂은 농담, 통쾌한 독설. 이 정도로 권리의 소설을 묘사할 수 있을까.
마사루, 보드리야르, 박민규, 바타이유, 우라사와 나와키, 기타 등등.
그녀의 사유 경로와 나의 그것이 약간은 겹친다는 사실, 그래서 권리의 소설이 멋지다고 느껴질 수도. 어쨌든 삶이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니.
자살하고 싶어하는 오난이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자살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각종 싸이코가 등장하지만 진정한 싸이코는 없고.
인생은 왜 사는지 모르겠고.
한국사회나 일본사회나 답답하긴 마찬가지고.
대충 그런, 굉장히 사실적인 소설이다.
죽자, 죽자, 죽자.
먼 훗날에는 죽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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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소설을 접한 건 인터넷에서 여러 문학상 수상작들을 검색해보면서다.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에 관심이 있던 나는 그냥 문학상...으로 검색했고 여러 가지 문학상 수상작들을 훝어보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됐다. 제목부터가 '싸이코가 뜬다'. 정말 싸이코적인 기질이 느껴지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책에 상패를 수여한(?) 한겨레문학상이라... 보통의 진지하고 탐구적인 여타 문학상들과는 다른 현대적이고 젊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소개글과 목차를 보니~ 하~ 이 책 읽을만 하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구입했다.
읽.어.보.니
이건 뭘까? 무라마키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일본을 지향하는 혹은 동경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나의 기우였고 하~ 정말 이 책 재미있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야기를 전개하는 문장체 자체가 기성의 진지하게 탐구하는(!) 분들과는 다른 약간 반항적이면서도 생동감있는 그런 감이 잡혔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심오하고 훌륭한 노벨상을 탄 그런 소설이라 하더라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읽기 힘든 책이라면 그것은 재미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보통의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들이 그렇고 무슨 무슨 석학들의 저서가 그렇고 우리네 평범한 시민들이 읽기에는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글자 하나하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줘서 그냥 재미있게 읽게 되는 책이다.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서두에 나열된 구구절절한 배경묘사 또는 분위기 묘사 여튼 여타의 묘사들로 서술된 그래서 거의 누구나 그냥 대충 넘겨버리는 그런 서두다. 하지만 이 책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하고 싶은 말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사건의 중심을 보여주거나 바로 여기다~ 하는 식의 그런 몰입이 좋다.
대체적으로 일본 유학 중에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 모티브다. 하지만 사실은 자살에 관한 장광설이기도 하고 젋은이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본질의 탐구이기도 하다. 나 또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삶이란 무엇이며 나란 누구인가'하는 명제에서 바둥대고 있기 때문인지 확실히 먹음직하게 느껴진다. 단지 중간에 너무 혼자만의 독백으로 치달은 점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 건조한 계절에 읽어봄직한 맛깔스런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일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파스칼 - [인상깊은구절] 죽음은 음모에 가까웠다.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픔이란 거리가 멀어지면 희석되는 것일까? 웬일인지 전혀 슬프지 않았다. 죽음 앞의 초짜는 가짜 눈물을 쥐어짜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이후로 사람과 접촉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워졌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그만큼 멀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거리두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인간관계의 법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데 말이다. '너의 손가락이 힌트야. 네가 찾고 있는 것, 네가 일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문제가 곧 답이고 답이 곧 문제로다. "망할, 웬 선문답이야" 하며 나는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몹시 수상하게 보이던 손가락의 개수는 넷, 다섯, 여섯, 여섯!' 분명 여섯 개였다. 그러니까 두 손 합쳐 열두 개. 나는 어릴 때 암산학원을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숫자놀음에 능하다. 나는 사이코와 보바의 손을 의식적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손가락이 기형적으로 생긴 사람은 나뿐이었다. 마치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이 된 기분이었다. 소외란 예상치도 못한 시간에 초인종을 눌러대는 짜장면 배달부 같다.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린 다시 '던져진' 존재가 됐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차가운 세상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감각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게릴라 피시가 되고 싶었다. 재부팅해서라도 무(無)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욕망과 인간적 고뇌가 사라진 상태. 운명 때문에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죽어버린 상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혹시 아기들이 울부짖으며 태어나는 이유도 세상의 차가움에 놀랐기 때문이 아닐까? 금속 물체에 닿는 것 같은 차가움이 아기들을 몹시 서글프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들은 울고 또 보채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상동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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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케, 사이코, 퀴즈연구회 사람들 등 이 이야기에는 수많은 마니아(혹은 오타쿠)들이 등장한다. 소유해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그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렇게도 소유하려하고 집착하는 것은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안감은 이미 근대에 시작되었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라는 긍정적 어조의 말은 푸코의 저작에서는 ‘지식은 권력’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이성에 집착하는 근대인들로부터 푸코가 읽어낸 것은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의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불안감을 지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어쩌면 지식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퀴즈’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퀴즈 연구회 사람들과 근대의 백과사전파 사람들은 그리 멀지 않은 듯 하다. 특이한 것은 정답사회의 사람들이 그들을 사이코로 치부할 때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남자친구 고로케가 군대에서 죽고 나서 오난희가 일본 소케 대학 기숙사에서 한밤중에 만나게 되는 사이코라는 인물은 사실 불안감을 어쩌지 못하는 난희 내면의 사이코였는지도 모른다.
“스물 몇쯤 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어. 스물세 살에 카프카는 변호사 사무실에 서기로 일하면서 글을 썼어. 일과 노동의 분립이 어려워 고생스러워했지. 조지 오웰은 유럽에서 부랑자로 살더니 <파리 런던="" 방랑기="">라는 처녀작을 냈어. 고흐는 화상점원, 목사로 일한 적도 있어. 넌 삶과 꿈 중 무엇을 택할래?” 스물세 살인 내 주위에는 온통 열심히 사는 사람들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방학인데도 몇 개씩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만날 시간을 내기도 힘들어하는 친구들이나 도시락 두개씩 싸들고 다니며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그 틈바구니에서 시험을 준비하면서, 몇 년 후의 나는 삶 쪽에 치우친 생활을 하면서 카프카처럼 ‘일과 노동의 분립이 어려워’ 고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작가가 이 곳 저 곳 여행을 다니고 글을 써서 책을 내는 동안 내가 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6차 교육과정에서는 국민윤리가 아니라 윤리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구별해내는 능력만 키우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다들 치열한 경쟁이랄 것도 없이 좋아하는 것만 하며 즐겁게만 지내는 것 같아 보인다. ‘고등수용소’에서 교육과정을 열심히 달려온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어 놀고먹기만 한다는 말은 이시대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듯해 보인다. 이를테면 정답사회를 위한 훈련 연한이 연장된 셈이다.
길디 긴 이 이야기는 결국 한 편의 유서이다. 며칠 전 중국의 2,30대 젊은이들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뉴스를 봤다. 이야기에서도 몇 명의 젊은이가 자살을 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순간의 즐거움만 추구한다고 지탄받는 젊은이들이 자살을 하는 것을 두고 즐거움의 극한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눈에는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좌절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만 보이는데. 이런 세상에서는 죽는 것이 정말로 겪어야 할 고통의 양이 가장 적기 때문에 가장 많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인상깊은구절] “스물 몇쯤 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어. 스물세 살에 카프카는 변호사 사무실에 서기로 일하면서 글을 썼어. 일과 노동의 분립이 어려워 고생스러워했지. 조지 오웰은 유럽에서 부랑자로 살더니 <파리 런던="" 방랑기="">라는 처녀작을 냈어. 고흐는 화상점원, 목사로 일한 적도 있어. 넌 삶과 꿈 중 무엇을 택할래?”파리>파리> |
| 21세기형 딜레탕트 오타쿠의 출현... 주인공은 주로 일본 대중문화를 트리비얼리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종횡무진한다. “...과잉 생산의 시대에는 결핍감을 느끼는 불안한 자아들이 떠돌게 마련이야.” 군대에 갔다가 일본 아니메 여자 캐릭터가 그려진 속옷을 입고 있다 걸려 집단 구타를 당하고, 결국 ‘결국 삶과 죽음은 하나다’라는 다잉메시지를 남기고 자살한 남자 친구 고태양을 기리며 일본으로 출발하는, ‘발랄한 자폐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자살가 지망생이고 사이코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주인공 오난이... 그녀는 일본에서 1년여의 시간을 교환 학생으로 보내고 정해놓은 날짜에 죽을 심산이다. 그리고 그 사이 일본의 소케대 퀴즈 동호회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거기서 그녀는 진짜인 자아가 아니라 다른 자아에 대한 파악 또는 다른 자아에 대한 인식 혹은 그로 인한 지식의 확장(소폭의)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자아를 가진 수많은 일본의 모라토리엄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모라토리엄 인간의 등장은 팽창해 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이클과 맞물려 있어. 세계 경제는 자유, 평등, 연대를 목표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발전해 가고 있잖아. 선진국에서는 국가 경제가 증대됨에 따라 다양한 사회보장제도가 생겨나 일을 안해도 먹고살 수 있게 됐지. 이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고민하는 햄릿들은 죽어버렸어. 젊은이들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스펀지처럼 흡수하는데 능해. 마약, 섹스 산업이 불황을 겪지 않는 이유지.” 이들 시마다, 마시마로, 마초, 헨타이, 가츠, 사이코 등 다양한 일본의 젊은이들(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이기도 한)은 퀴즈(퀴즈 동호회의 회원들), 삼국지(마초), 도라에몽(마시마로), 헨타이(시체) 등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를 통해(서만) 쾌락을 느낀다. “중독은 빠른 시대와 느린 마음 사이의 평정을 찾게 해주는 놀이다. 속도의 시대를 사는 질풍노도의 자식들은 <슬램덩크>나 <드래곤볼>이나 세가 등 성적과 무관한 것들을 끌어안고 산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자신(自身)을 찾기 위한 것에 전 에너지는 낭비해야 하는 시지푸스인지 모른다... 저는 중독이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무언가에 빠진다는 건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 선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모방은 할 수 있어도 창조는 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중독입니다. 중독은 죽음의 징조가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쾌락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그들과 보낸 일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오난이는 자신이 애초에 계획한 자살의 시점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에게 보낸 자살의 십계명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자살의 십계명=""> 1조. 아무도 믿지 않는다. 2조. ‘NO''라고 답한다. 3조. ‘왜?’라고 묻는다. 4조. 미친 척하고 두려움을 받아들인다. 5조. 명랑성을 유지한다. 6조. 변태를 만난다. 7조. 호모 루덴스가 된다. 8조. 야생의 상태가 된다. 9조. 유서를 쓴다. 10조. 죽음을 살았음을 깨닫는다. 이 십계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과학적 단계를 거치게끔 만들어졌다. 나는 자살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일종의 페티시스트다... 나는 마치 자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 같았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쓰려져 가자, 내 청춘의 절대온도는 불가항력적으로 식어갔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 나는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서 나는 삶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죽음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마시마로, 마초, 헨타이, 노브라, 시마다, 머피와 마지막 파티를 하고, 그들 한 명 한 명을 차례대로 껴안아주고 안녕을 고한다. 소설 전체가 바로 주인공의 유서였음을, 하지만 그녀가 추구한 것은 자살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변신’임을 알리면서... ‘정답’만을 강요하는 ‘오답 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소설의 주인공들 그리고 우리들은 무수한 정보 내지는 지식을 21세기형 단위(아직 무어라 확정하여 지칭하기는 곤란하지만, 여하튼 과거와는 다른)로 받아들인다. 허지만 과거에 비하여 혁신적으로 발달한 정보와 지식의 전달 체계를 지니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전달받은 정보나 지식의 가치에 대하여는 무감하다. 우리들에게는 정보와 지식을 전달받고 그것을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보와 지식의 양과 속도가 중요할 뿐 그것의 활용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판단의 준거틀이 바로 21세기 이전의 사고의 룰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뒤바뀐 정보와 지식의 전달과 확산 양태는 새로운 룰을 생산하고 있는 중일런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자살이 실은 자살이 아닌 위대한 변신이 되듯 지금 이 순간 모든 정보지식의 수용자인 우리들은 과거의 시스템으로부터 새로운 시스템으로 옮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ps1. 책을 모두 읽은 후, 79년생이라는 작가의 탄생년도를 한참 들여다 보았다. 책에 등장하는 딜레탕트(어슬픈 지식인)를 위한 퀴즈형 지식들이 79년생용 정도인 거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아래인 작가의 잡학이 나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크게 위축되었다. 이또한 딜레탕트의 운명이다. ps2.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8회의 박민규와 9회의 권리... 이전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들과는 크게 다른 소설들이다. 진보진영의(많이 탈색되었다고는 해도) 한겨레신문이 보다 오픈된 마인드로 작품을 선정해준 것이 고맙다. 하지만 그런 신문의 문학상에 이런 글을 보낸 작가들에게 먼저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자살의>드래곤볼>슬램덩크> |
| 어릴 적 우리는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 속에 섞여있는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살아간다. 긴 호흡 뒤 우리에게 이해하지 못할 사람도 용서하지 못할 잘못도 없다. 그러나 가쁜 숨 몰아쉬며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에겐 이해와 용서를 위한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다른 생각을 펼쳐내는 사람, 보편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매순간 용기내어 자신의 생각을 지켜내거나, 세상의 시선에 무신경해져버리는 수 밖에...... “ 미쳤어, 정말~ ” “ 어유 내가 미쳐~” “ 돌아버려~” “ 미친X, 미친Y” “ 완전히 돌았구만. 걔 싸이코 아냐?” 우리는 달린다. 열심히 달리다 문득,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몸과 마음이 휘청인다. 나는 이제 가눌 수 없는 몸을 억지로 달리게 하지 않으리라. 이런 나는 누군가에게 사이코다. 너 또한 나에게 사이코이지 않은가? |
| 한겨레문학상이 어떤 성향의 작품에 수상했는지도 궁금했거니와 일단 소설 제목이 파격적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냈다. 싸이코라는 단어의 중첩성(한국에선 정신병자라는 의미를, 일본에선 최고라는 뜻을 지닌)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예의 치기어린 젊음에서 나오는 비판성과 일탈성 덧붙여 학자적인 탐구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파헤치고 재단하고 야유하며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열정과 휴머니즘을 잃어버린, 표준인간이 주무르는 세상에서 유일한 대안은 자살인가. 작가는 특별히 자살을 미화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삶들의 무의미함을 경계하는 대안적 의미로서의 자살에 무게감을 실어주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자신의 삶을 곱씹어보라고 이야기 한다. 끝없이 탐구하는 학문의 영역에서 발견해 내지 못했던 눈물과 따뜻함을 사람 속에서 발견하는 화자는 현대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끝없이 양산하는 '재미없는' 인간들과는 달리 진지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는 어찌보면 사이코(이상한 사람)가 아닌 진정한 사이코(최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참된 존재의식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현실과 양립할 수 없는 본원적 모순으로 인해 화자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비극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산뜻한 문체로 다가오기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냉소와 더불어 유유자적한 달관과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 나름대로 확립한 특유의 자살관에서 나왔을 법 하다. 젊은 작가 시각의 한계로 인한 등장인물들의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사건들(이를 일본인들 특유의 국민성이라고 이야기한다면 할 말이 없겠다)이 몇 있었고, 지나치게 일찍 노정된 주제의식(마치 상실의 시대 아류작을 읽는 듯한 느낌의), 무라카미 류의 69를 읽는 듯한(Festival에서 극 전개의 최고조에 이르는 방식이나 류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싱거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는 처녀작이라는 이유로 너그럽게 커버될 수 있으며 인물들의 정적인 내면묘사, 뚜렷한 갈등구조 구축과 개성의 표출 등을 통해 좀 더 독자들을 몰입시키고 빠져들게 할 수 있다면 차후 작품들 역시 충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될 듯하다. 많은 교양과 배울거리가 나열되는 덕분에 지적인 결핍감을 충족시킴에 있어서는 매우 괜찮은 소설이었다. 참 삶을 추구하는 화자의 지식 지상주의적이고 들떠있는 모습들을 통해 환경을 공격하지만 그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일반의 모순된 심리와 딜레마를 적절히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작가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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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표지에 소설가 박범신이 남긴 서평이 있었다. "전통적 소설문법으로서의 '인물'과 '서사'가 없다"는 게 주된 얘기였다. 나 또한 제대로 공감하는 바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있을 지언정 어느 게 현재고 과거인지, 또한 어디가 현실이고 공상인지 구분하기 쉽지가 않다..
'싸이코'를 다각도로 조명한 <싸이코가 뜬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별명도 특이하다. 주인공 이은 '오난이'이고 그녀가 가입한 퀴즈클럽(퀴즈연구회)회원들의 별명 '헨타니, 마시마로, 마초, 머피, 노브라'에 이어 고등학교 친구였던 '고로케, 가위'까지 죄다 희안하다.
자살을 계획중인 오난이의 사상이 소설 구석구석에 베어있다. 글 자체가 유서로서의 모양을 하고 있기도 하고, 갖은 고뇌를 담은 일기같이 보이기도 했다. 음악가나 소설가(특히 일본)에 대한 방대한 지식의 양에 놀랐다. 엉렵지 않게 버무려 쓴 글은 쉽게 읽혔고 고등 수용소(고등학교), 고양이 창고 따위의 자신만의 언어가 기발하게 느껴졌다. 읽다보면 그녀만의 사전에 동화되는 느낌이랄까. 페이지의 아래쪽에 ☆, ★로 표시된 각주가 여럿있는데 혹자는 각주가 너무 많아 읽는 데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재밌다고들 하니 사람 마다 다른 모습으로 수용 하는 게 확연히 드러나더라 싶었다.
유독 오난이는 한국사회와 일본사회를 비교하는 논조의 얘길 많이 한다. 별 다른 사상도, 논조도 없는 내게는 수긍이 갈 만한 주장이었는데, 오난이의 주장이 논리적인지 비논리적인지를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게 문제다. 야광도시와 사이코(さいこう, 최고)가 묵고 있던 기숙사 333호는 다소 난해했다. 일상생활에서 보통 접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열거하는 오난이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으므로….
때로는 이게 소설인지 작가 자신의 실제 이야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 같으나 '오난이'하면 '권리'가 떠올랐다. 오난이의 비판 정신은 크게 살만했으나 그녀의 사상에 모든 걸 동조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기발하다'는 데에 한 표를 주고 싶다. 많은 지식을 한 책에 집어 넣으려고 하여 빙빙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 마냥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적응하게 되면 술술 읽히는 책이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만나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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