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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빌라도의 예수’를 손에서 놓았습니다. 410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었지만 어제 오후 4시간을 더위와 씨름한 결과입니다. 또 다시 이 소설은 나름대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본질적인 예수’와 ‘교회’를 더욱 굳게 확신한 것입니다.
책장을 덮은 후 ‘빌라도의 예수’라는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은 단지 소유적 의미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용된 언어인 그리스어(헬라어)의 문법적 특징을 추인해 볼 때, 이 소설은 3가지의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빌라도의 삶에 기억된 예수입니다. (소유적 예수)
둘째는 빌라도의 사유와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수입니다.(대상적 예수)
셋째는 빌라도의 신앙의 주체로서 삶을 주도해 가는 예수입니다.(주격적 예수)
이런 구분은 빌라도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지 주관적 대상으로만 각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종일관 빌라도의 시각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빌라도의 내적 변화만이 아니라 그의 삶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우리 주변의 예수는 너무 지나치게 주관적 예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늘 아쉽습니다. 자신의 소유로서만 인식되는 예수상은 분명 오해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을 쉽게 고치지 못합니다. 주관적 소유가 아닌 객관적 실체로서의 예수, 단지 영적능력의 제공자로서가 아니라 ‘몸’ 전체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예수의 상이 다시 필요한 때인데도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성전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1세기 율법의 지배시대 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주제입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자유는 ‘스스로 가두고 살아가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이 소설의 전반부(필라투스-예루살렘)까지는 신화와 고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변동, 성서해석학, 구약성서신학에 대한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긴장해서 읽게 되더군요. 전이해가 많이 필요한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터널을 지나오자 후반부와 종반으로 갈수록 소설적 묘미에 흠뻑 심취할 수 있더군요.
주제의 깊이와 함께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 어려웠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
하나는 역시 신화의 인물들을 장황하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신화에 대한 짧은 견해가 문제였겠지만 집중해서 읽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인물들의 관계가 단순화 되는 것은 그 고통을 많이 해소해 주기는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성서해석학이라는 독특한 분야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의 형성사에 대한 이해(‘예루살렘’의 요시야 왕과 신명기의 형성사)는 우리 주변의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독특한 부분입니다. 서양학계에서 주로 언급하고 있는 의견이라 어떤 독자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용어표현에 대한 이해인데요. 책을 정리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 써 봅니다.
(1)183쪽의 ‘신명기 신학관’:일반적으로는 ‘신명기 사가’ 또는 ‘신명기 학파’라고 합니다. 신명기의 견해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려는 일종의 학파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학파로는 ‘역대기 학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역대기서와 에스라-느헤미야의 기본적인 역사이해를 대변하는 학파입니다. 문제는 이 두 학파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최근에 확실히 증명된 것 아닐까요?)
(2)386쪽의 ‘실재로 보았소?’: 대화의 맥락상 ‘실제로 보았소?’가 타당할 듯 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실재'는 '실체(reality,real bod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 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맥락을 따르면 ‘실제로(사실로) 보았소?’ 즉 ‘진짜 봤냐?’는 의미가 더 부합된다고 여겨지는군요. 소설 후반부에서 중요한 대화 중의 하나라고 여겨졌거든요. 만약 ‘실재’의 의미라면 이 문장은 “실재를 보았소?” 즉 ‘실제 살아난 몸을 보았소?’라는 표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타인지, 작가의 의도적 표현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소설책도 어느덧 1만원 시대가 되었군요. 하지만 작가의 열정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마음의 더위를 날려버릴만큼 시원한 사유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기에는 그만입니다.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상상력이 웅대하게 빛을 발하는 장편을 대하는 기쁨 또한 그에 못지 않게 큽니다. 덕분에 시원한 오후였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빌라도가 놀란 것은 예수의 신속한 이동이었다.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가버나움에서조차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카이사리아 정보대장이 예수를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 같다고 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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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빌라도, 혹은 윤리적 주체 - 정찬 빌라도의 예수」 정찬은 2004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빌라도의 예수에서 윤리적 주체의 문제를 소설적 사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인 빌라도의 시선으로 되살아나는 예수의 형상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광야에서 ‘광주 주체들’이 펼쳐낸 타자의 윤리학을 밑바탕으로 그려지고 있다. 순결한 인물의 이미지가 여전히 예수의 형상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예수’의 강렬한 형상 역시 이 작품의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예수는 스스로 예언자임을 선언했다. 예언자는 특별한 존재다. 피조물 가운데 예언자보다 더 특별한 존재는 없다. 특별한 존재는 특별한 식탁에 앉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식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인, 세리, 농부, 어부, 떠돌이 노동자, 대장장이, 석공, 양치기에서 병등 자, 파산한 자, 버림받은 자, 누더기를 걸친 자 등등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의 식탁은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방인과 여자도 불러들였다. 창녀도 있었다. (315쪽)
예수를 예수답게 하는 이유가 인용문에는 잘 나타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고, 귀천(貴賤)의 혈통을 구분하는 당대 사회에서 예수는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세계의 ‘윤리’를 실천한다. “기묘한 존재”라는 말에 드러나는바, 성전(聖殿)의 권력을 수호하려는 존재들에게 예수는 권력의 폭력으로는 쉽게 동일화할 수 없는 ‘외부’의 대상으로 비쳐진다. 빌라도는 “꿈이 현실을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네”(279)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예수는 세계종교의 중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이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점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가난한 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을 당대의 현실에서 실천했으며, 그 실천을 통해 세계종교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주체의 현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로 표현되는 정찬의 꿈은 예수라는 윤리적 주체가 꿈꾸었던 세상과 이어지고 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사상은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제물이었”(401)다는 사울의 말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울은 빌라도에게 “그 장엄한 드라마는 지금 인류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것은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넘어 로마로, 에스파냐로, 갈리아로, 게르마니아로 퍼져나갈 것”(401)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울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하지만, 빌라도의 생각대로 장엄한 드라마는 ‘통속화된 드라마’로 변질되어 실현되었다. 도덕성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이 빌라도의 예수의 서사구조에도 면면하게 흐르고 있는 셈이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직에서 물러나 필라푸스 산에서 홀로 기도를 하며 여생을 보낸다. 그에게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냉담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408) 빌라도는 이러한 ‘인간 예수’를 살해하는 과정에 가담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찬은 빌라도의 시선을 통해 인간화된 예수의 삶에 드리워진 소설적 진실을 이야기한다. 예수가 실천한 윤리적 삶은 돌려 말하면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한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 신인(神人)의 형상은 바로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하는 예수의 형상을 대변한다.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의 윤리적 삶에서 도래해야 할 세상의 모습을 엿본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 앞에서 예수가 고통 받는 타자들과 함께 했다면, 빌라도 역시 예수의 고통 받는 얼굴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기도하는 빌라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신의 소리를 겸허한 마음으로 들으려고 했을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권력 욕망의 허망함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타자를 동일화 과정이 불가능한 무한한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순수한 인물들은 타자의 무한성을 실현하는 인물들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꿈꾸는 세상은 독백과 대화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어쩌면 정찬이 빚어내는 관념의 성채를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종교적 인물에게 어울리는 윤리적 감성의 미학이 인물의 구체성을 지우는 소설 방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소설의 전통이 희박한 한국문학의 현황 속에서 정찬의 관념소설은 독특한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 그 독특함이 단지 ‘관념소설의 독특함’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념이 현실로 내려서는 자리를, 그래서 다시 현실이 관념 속에서 풍부해지는 자리를 끊임없이 성찰할 때 정찬 소설의 문학적 위상 역시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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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찬이이라는 작가를 잘 모른다. 이 책은 언론에서 관심을 표현한 것을 보고 사서 읽었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빌라도의 입장에서 본 예수가 책의 내용이다.
어릴 때는 성경이 무척 어려웠다. 이 책 저 책 몇 십 권을 읽고 난 뒤에야 아 성경을 약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신약성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내용들이 기록된 것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한 것처럼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사도신경을 외우다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질적으로는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도록 한 것임에도 말이다. 아니 유대인 전부가 아니라 개혁이 이루어지면 손해를 볼 기득권이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유명하게 된 빌라도의 관점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시작은 취리히의 알프스 영봉 필라투스 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본디오 빌라도는 음역이고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본래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이 소설에서는 메테리우스의 입을 빌려 그리스 신화가 예술적 충동에 사로잡힌 시인들의 작품이라면 성서의 많은 부분은 국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171-172쪽)이라고도 하고, 성서는 환상과 기억이 뒤섞인 공간이라고 하기도 한다(197쪽). [인상깊은구절] 작가 정찬은 빌라도의 예수에 그윽한 신성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이 소설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다. 신화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빌라도의 예수는 상당히 정치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의 기독관(基督觀)에 처음부터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뚜렷하다. 예수가 헐어버리는 하느님의 집은 다시 세울 수 없다. 예루살렘이 ‘죽어버린 성전’이 되면, 예수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된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어린 양의 피를 보지 않아도 좋다.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가 그 피를 대신 흘렸기 때문이다(작가 이윤기의 작품해설 418-419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