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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어렸을 때 친구에게 처음 선물 받아 펼쳐보았던 책으로, 그 당시 부커상을 수상하여 막 유명해진 참이었다. 그땐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때였고, 다독을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1부는 물 흐르듯이 문장만 넘겨 읽었고 2부는 문장을 넘어오는 역겨움 때문에 채 읽지 못했다. 책을 덮은 후에는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 포르노적인 묘사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뜻 모를 거부감이 피부를 타고 올라오더라. 그러다가 문득,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졌다. 내용이 역겹다던 감상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6년 전보다 아는 것도, 느낀 것도 많아진 지금 읽으면,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하게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여전히 내용은 역겹고 불쾌했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은, 그 불쾌함의 원인이 명료해졌다는 것이다. 영혜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는 그의 가족이나, 그를 이해해 보려 한 적도 없으면서 전과 다른 낯선 면을 발견한 양 놀라던 남편이나, 그를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본인의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려 애쓰던 그의 형부가, 불쾌함의 원인이었다.
1부와 2부가, 그러한 불쾌함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영혜의 행동이 제멋대로 해석된다는 점이, 오히려 현실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영혜를 미쳐가는 사람으로 여기는 남편의 시선과 본인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시켜줄 뮤즈로 여기는 형부의 시선은 전부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맴돈다. 인혜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3부의 마지막에서야 결국, 영혜의 숨죽인 몸부림은 조금이나마 이해받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인혜도 영혜와 같이 손찌검을 맞는 딸이었고, 수레에 매달린 개였으며, 이해받지 못하나 그 어떤 것이든 감내해야 했던, 식물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만 보였던 세상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쌓아올려진 제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것마저 한계에 다다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흉내만 내고 있던 거라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데 흉내만 내느라 진짜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삶이라면, 짐승처럼 포효하느니 속으로 움츠러들어 흙과 하나가 되고 싶어지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지만, 끝까지 완독하기 너무 힘들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영혜에게 쏟아지는 모질고 냉정한 시선들, 폭력적인 시선들이 문장을 넘어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이해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숨이 막히고 맥이 빠지는 것들이었다. 현실의 몰이해와 손가락질이 그대로 재현되는, 허구의 것일 텐데도 결코 허구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 감각들을 그대로 받아내는 건 참 고된 일인 것 같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이 발화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라는 시선이 따라붙는 건 언제쯤 바뀔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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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읽고
한강은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로, 일찌감치 ‘한국 현대문학의 기수’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이렇게 촉망받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기회에 그녀의 작품이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소설가가 왜 굳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소재로 새롭고도 위태한 도전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197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80년 5월 광주는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광주 태생으로서의 한강은, 이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책을 쓰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녀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섬세한 표현력에 담아내려 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책을 읽으니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이 책은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을 달리 하여 80년 5월의 광주를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했다. 또, 평상시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다른 미시적 관점에서 이를 재조명한다. 무엇보다도, 현장감 있는 묘사와 살아있는 듯한 표현은 책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이 뚜렷하면서도 가슴이 아린 것들로 가득하다. 감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41년전 광주의 봄을, 작가는 충분히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해, 독자에게 박진감과 감동, 그리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명저를 남겼다. 나라를 위해 두렵고도 장엄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던 시민들의 존재만 잊지 않는다면, 이 책은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귀중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17쪽.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이 문단을 읽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번도 열사들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이것은 열사들이 목숨바쳐 지켜내려한 나라가 결국 그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은숙 누나’의 명쾌한 대답이다. 17쪽.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명징한 표현에는 작가가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듯했다. ‘은숙 누나’가 말했듯이, 당시 군인들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의 일부가 아니라, 권력욕에 눈이 먼 장교의 졸개들이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군인들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애국열사들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더욱 부각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76쪽. 바닥에 떨어진 유인물을 주웠다. 굵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그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유인물을 뺏고 그녀를 의자에서 끌어냈다. 학생들의 강한 민주화 요구에도 사복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탄압하였다. 이 장면을 찬찬히 읽어내려 가며, 문득 KBS 〈대화의 희열 2〉이라는 토크쇼 8화에서 80년 ‘서울의 봄’에 관한 자신의 경험과 소회를 밝히던 유시민 작가가 생각났다. “근데 11시 반쯤인가 됐는데 라디오에서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딱 발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왔구나. 이제는 덮치겠구나. 이제는 도망가야 해.’ 그래서 우리가 한 대엿 명 정도 있었는데, 남자들, ‘야, 도망가자. 이제 여기도 들어올 거야.’ 그러고 문을 타 여니까 밖에서 쇠사슬을 뜯고 있는 거야. (중략) 근데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거야. (중략) ‘여기도 왔어요, 빨리 도망가세요.’ 그러고 끊고 나오는데 딱 잡혔지. (중략) 그냥 이단 옆차기 바로 날아오고, 권총 딱 대고. ‘너 누구야. 이름 뭐야.’ 그냥 유시민이라 그랬지, 뭐라 그래.” 이 소설과 유시민 작가의 이야기는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일이 전라남도 광주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졌던 것이 80년 5월이었다. “제가 스무살 때 학생운동 이런 걸 하고, 유인물을 뿌리러 다니고, 데모를 하고, 이렇게 시작했을 때, 저는 될 거라고 생각 안 했어요. (중략) 그때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하면 못 해. 해야 되니까 하는 거지. 근데 왜 해야 된다고 생각하냐면, 너무 못나 보이잖아, 그냥 있으면. (중략) 못 이길 거 같은데, ‘에이 못 이겨.’ 그러고 그냥 가면, 너무 비참한 거야. (중략) 세상을 이렇게 해서 못 바꾼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걸 한다고요. 나를 지키려고요. 내 스스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비천하다, 비겁하다 이런 느낌을 안 가지고 살고 싶은 거지. 아니, 내 책임이 아니에요, 유신 체제 이런 거. 나는 그냥 그런 세상에 왔을 뿐인데.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근데, 그냥 가면 그런 감정을 계속 느낄 거 같애, 자기 비하의 감정을.” 군부독재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 쓰여진 대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변모하는 데에 있어서, 그 공을 민주화 운동에 몸소 뛰어드셨던 분들께 돌린다.
종이도 네 귀를 들어야 바른 이유
114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양심. / 그래요, 양심.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중략) /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지난 9년간 학교에서 배운 ‘5.18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10.26 사태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이듬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1979년 12.12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참극’이다. 이 말만 들으면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잘 요약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저 문장에는 광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교에서 흔히 배우는 거시적 관점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제공하는 미시적 관점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재해석한다면, 곧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 시민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일제히 봉기한 민주화 운동으로, 이때 시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거대한 민중의 한 지체로서 참여했으며, 이는 양심과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시민 불복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언급한 소설의 본문을 통해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한 개인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 개인은 어찌 보면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일지라도, 그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 때 창조해내는 시너지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정의를 례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사회의 변혁이나 개혁을 통해 바꾸고자 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또, 그렇기에 용감하고 대담하다. 그렇기에 위대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답을 찾지 못한 질문도 더러 있다. 가령, 한강이 왜 이 책을 집필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감히 추측컨대, 작가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본인의 삶에 대한 태도나 생활 속 행동에 변화가 있기를 바라고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 자신이, 한강이라는 사람이 80년 5월 고향에서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또 그 비극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미약하면서도 강인했는지를 알리고 싶었기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무거운 시대극으로만 치부되어 고리타분하고 읽기 힘든 책이 될 수도 있었으나, 작가의 탁월한 표현력과 묘사력은 이 책을 논픽션 보고서가 아니라 소설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례로, 제2장 〈검은 숨〉에서 ‘나’는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을 혼이 되어 묘사한다. 57쪽.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이 장면에서 한강의 거침없는 표현력을 엿볼 수 있었고, 또 그녀의 상상력에 감동받았다. 죽은 육의 살아있는 령이 자신의 주검을 빠져나와 그것을 보면서 본인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 소설의 전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또, 앞서 2문단과 3문단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은 독자에게 근현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였고, 개인이 섣불리 하기 어려운 행동을 민중 속에서는 그들 각자가 어떻게 실현하는지를 생생히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장마다 시점과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고, 그러면서도 인물 간의 관계가 복잡하지 않아서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광주의 모습과 개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퍽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플 정도였다. 평소에 당신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관계없이, 이 소설은 당신을 푹 빠지게 만들만한 매력이 흘러넘친다. 시대극으로서도, 소설 자체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기에 모든 이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표현이 다소 거칠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소설의 사실성을 더욱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1장 〈어린 새〉에서 ‘너’라고 불리는 주인공 ‘동호’는 군인의 총에 맞아 중학교 3학년 16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말 그대로 ‘군인들의 총칼에 으스러진 소년’임에 틀림없다. 제2장 〈검은 숨〉에서 서술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요절한 청년으로 불쌍히 여겨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광주의 민주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누구보다도 강한 양심과 행동력을 갖추었던,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들이다. 그런 그들이 2021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 줄기의 빛이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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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몰입이 잘 되는 장르다. 감정이입이 잘 된다. 그렇다보니 문학 작품 중 어둡거나 폭력적인 분위기의 작품은 꺼리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작품, 따스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작품을 편식하며 세상의 어두운 면을 다룬 작품이나 범죄 관련 작품은 피하곤 했다. 읽지 않겠다, 라는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니다. 막상 다음 책을 골라 들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어느새 내 손에는 밝고 경쾌할 듯해 보이는 책이 잡혀있다. 특히 사실을 기반으로 한 역사 소설은 어두운 시절을 배경으로 할수록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 싫어 더욱 피하고 싶다. 이것도 외면이라면 외면일 수 있겠다.
그런 내가, 한강의 신작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5.18을 배경으로 한 소설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소설의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구매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없다. 그래야할 것 같았다. 그래야 내 마음 깊은 곳의 부채감이 아주 조금이라도 상쇄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왜 부채감을 갖고 있는가.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는 것이 양심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5.18을 다룬 소설 『꽃의 나라』(한창훈)를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분노를 기억한다. 전혀 반대 지역에 사는, 역사의 흐름 선상에서 나의 인생이 조금도 겹치는 부분이 없는 사건이건만,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마치 내 손으로 그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숨어버리고 싶고 부끄러웠으며 아팠다. 쉬쉬하던 5.18을 어느 정도 양지로 끌어올렸을 만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해의 광주는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에 의한 좌파 세력의 폭도때문이었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보다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다. 누가 들을새라 입을 먼저 막아버리고 싶다. 그때의 광주를 지나온 사람들이 듣게 될까봐 가슴이 콩콩 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로 돌아와서, 이 소설을 읽다 심호흡을 위해 책을 몇 번씩 덮었다. 안 그러면 머릿 속으로 훤히 그려지는 장면에 압도되어 총알이 내 머리를 관통하고 칼집이 내 뱃속을 휘저어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피를 콸콸 쏟아내고 발가벗긴 내 몸이 그들의 손에 유린되는 것 같았다. 일곱 명이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1. 너에게 가자.(동호) 정대가 온다. 소년이 온다. 또다른 소년에게로. 동호는 정대의 죽음을 목격했다. 정대의 손을 놓치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동호는 열여섯 까까머리 중학생임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시민군의 허드렛일을 돕고 실려오는 시신들의 신상을 정리한다. 실은 정대를 기다린다. 그리고 정대 누나 정미를 기다린다. 사춘기때 모락모락 피어나는 첫 사랑, 정미 누나는 어디로 갔을까. 정대는 어디로 갔을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광주는 지금, 피바다다. 광주 시민은 과녘이다.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이며 가차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라는 왜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가. 심지어 임산부에게도 총을 쏘았을까. 왜 죽였을까?
2. 왜 죽였지,(정대) 넋이 되었지만 형체도 없는 몸뚱아리지만, 왜 죽였을까. '너에게 가자' 하는 순간 한꺼번에 숨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너는 죽었다. 너도...... 죽었다.
3. 다만 너를 기억했다.(은숙) 불 하나 켜지지 않는 캄캄한 도시에서 울려퍼진 총성은, 너를 떠올리게 했다. 난간을 붙들고 떨고 있던 까까머리 동호. 너를 챙겼어야 했다. 은숙은 고작 세 살 어린 동호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간다. 끝까지 그곳에 남지 않았음을, 지금 혼자 살아있음이 죄스럽다. 은숙의 삶은 장례식이 되었다.
4.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시민군) 양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다.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죽음은 각오했지만 내 손으로 남을 죽이진 못했다. 그들이 시민을 죽이던 군인이었음에도, 나에게 총이 있었음에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군인들을 향해, 결국 총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쐈다. 그것도 시민군들 중 가장 어린 중고등학생을 향해, 그것도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일렬로 걸어오는 아이들을 향해. 살아있다는 것이 이렇게 치욕이 될 줄은.
5.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선주) 그때 동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더라면, 왜 아직 나에게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오지 않을텐데. 학살과 고문 이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다. 선주는 껍데기만 남았다. 계엄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던 마지막 저항의 밤에 트럭을 타고 메가폰으로 '불을 켜주십시오, 함께 나와 싸워주십시오.'를 외쳤다. 그리고, 이후의 삶은 고통 그 자체가 되었다. 몸을 증오한다. 도망간다. 더 안전한 곳으로. 그런데 자꾸만 따라온다. "누구야, 누가 오는거야." 소.년.이. 온.다.
6. 엄마 저쪽으로 가,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꽃 핀 쪽으로(엄마) 동호의 유언이다. 막둥이 동호. 그늘을 싫어했던 동호. 내 손을 이끌고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다며. 그런 우리 막둥이가. 죽었다. 몇 십년이 지나 할머니가 되었지만 얼마 전엔 동호의 뒷 모습을 보았다. 동호 따라 나섰건만 이름이 안불러진다. 바로 뒤에서 부르면 분명이 돌아볼 우리 막둥인데. 결국, 막둥이는 사라졌다.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7.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윤) 동호의 둘째 형님의 부탁이다. 윤은 유년의 열 살을 보낸 그 집을 떠올린다. 윤의 집은 동호네에게 팔렸다. 그리고 윤은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데 열살 때를 기억한다. 서울집에서 어른들이 나직나직 나누던 그 해의 광주 이야기를. 그리고 몰래 보았다. 광주의 이야기가 담긴 참혹한 사진들을. 그리고 쓰기로 했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해. 그때의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기억을 나눠달라고 했다. 남은 삶을 장례식 치루듯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날의 광주를 말해달라고 읍소했다. 윤은 어느새 80년 광주 현장에 갇혔다. 군인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총검을 휘두른다. 다행히 꿈이다. 꿈이었다. 2013년에 1980년 광주를 드나든다. 고통이 손가락 끝에서 심장을 조여온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213p)
이 소설을 읽으며 나에게 전해질 고통의 강도에 대해 미리 상상했다. 믿고 싶지 않을 사실들에게 대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미리 마음을 단련하고 소설 읽기에 임하고 싶었다. 초연한 마음으로 80년 광주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읽어내려가리라 다짐했었다. 실은 자신 없었다. 그리고 한 두 장 넘기지도 못한 채 단단히 먹었던 마음들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고통의 서막은 시작되고 있었고 차라리 아파하고 미안해하고 힘들어 해버리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끝까지 읽어나갔다. 이 소설은 소년을 중심에 놓고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서술해나간다. 그 점이 독자를 더 힘들게 할 것 같다. 그 어린 것들이 총을 들고 벌벌 떨면서도 나서야 했던 여러 사연들의 사열은 소영웅주의도 아니었고 과잉 공명심의 발로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문체는 아마도 시적일 것 같다. 이야기 중심의 서사라기 보다 심리적 표현에 치중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심리학서 느낌이 강하다. 그러면서 큰 줄기의 서사가 힘이 있다. 비록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이 소설을 읽음으써 일말의 부채감을 내려놓는다.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라도 그렇게 했을까. 인간의 잔학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더 이상 알기 싫다. 이미 역사 속 한 마디에 있는 5. 18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기에. 그러나 우리는 고작, 이런 소설을 읽으며 느낄 비현실적인 고통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책을 사서 읽는 것이라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 잘했어. 읽기 잘 했어. 그리고, 절대 잊지마. 그날의 광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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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3부작으로 불리는 책을 읽었다. 꿈을 꾼 이후 채식을 하게 된 '영혜'를 중심으로 이뤄진 세 장편은 그의 남편과 동서와 언니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내가 읽기에 화자 셋의 고통이라기 보단 영혜, 영혜의 주변, 언니의 고통이라고 생각된다. 직접적인 고통과 간접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의 느낌을 표현한 것만 같다. 실제로 없을 법한 것도 아닌지라 이해가 가는 것과 동시에 불쾌하다. 개중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은 한 번 읽고서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작가가 무엇을 적고자 했는지 전달은 되지만 그렇기에 다신 보고 싶지 않다.
채식주의자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 읽고 또 읽었다. 마치 내가 꾼 꿈 같아서, 내가 겪은 실제 일만 같아서. 그 감각과 두려움이 너무나 생경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영혜는 이러한 꿈을 겪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온전히 자신만 느끼고 두렵기 시작한 꿈을 어떤 사람이 멀쩡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삼분의 일 가량은 영혜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을까. 극단적이지 않았더라면 영혜가 정상의 범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영혜의 변화는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되고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날고기를 씹던 것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짐승이었을까. 내가 그랬나. 나는 그럼 사람인가 짐승인가. '채식주의자' 속에서만 바라본다면 영혜가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조차도 저순간만큼은 내가 역겨웠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나는 결국 무엇인지.
영혜는 숨쉴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영혜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영혜 자신만으로 본다면 결코 영혜는 미치지 않은 것이다. 숨쉬고자 하는 마지막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몽고반점
외골수인 형부가 무엇을 찍고 싶었는지, 무수한 꽃과 잎들 속에서 어떠한 장면을 담고 싶었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벗어난 형부의 욕망은 더욱 더럽고 추악하다. 어쩌면 전부 내던질만큼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형부는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예술을 앞세워 채운 성적 욕망은 계속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무 불꽃
영혜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었다. 미친 사람이 영혜였기에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영혜로부터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인 지아가 방어기재가 되지 않았더라면 언니도 영혜처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언니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영혜의 모습이.
주변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환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과 극단의 조치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자신의 원하던 것의 답을 찾았다. 해방의 길을 얻었다. 그와 반대로 언니는 혼돈 속으로 집어던져졌다고 생각한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읽고 나면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누가 가장 '고통'인가. 그건 아무런 해답을 얻지도 표면적인 방어기재로 인해 찾지도 못하는 영혜의 언니이지 않을까.
영혜의 언니가 '정상'이라는 범주 속에서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고통이라는 숲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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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접했을 때, 표지의 아름다운 꽃들과 감수성 넘치는 제목 때문에 소나기 같은 성장소설인가 했다. 크게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맨부커상 수상작가인 한강작가의 저작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첫 장을 펴자마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슬픈 기억을 담담히 묘사한다. 내가 동호였다면, 내가 그곳의 시민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여러 차례 반문해 보았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잊지 말아야 할 슬픈 역사를 문학의 형태로 남겨주신 작가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부디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공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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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 내려오면서 한강 작가님의 책 ‘소년이 온다’를 가지고 왔다. 기차 안에서도 오후 시간 카페에서도 숙소에서도 이 책을 읽었다. 한강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어보는데 ‘작가’는 정말 글을 쓰는 게 다르구나를 느끼며 문체에 감탄하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갔다. 5.18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소설을 읽으며 계엄군의 잔인성에 인상이 찌푸려질 때가 많았다. 그들이 인간의 생명을 짓누르면서 보이는 무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매 장이 인상깊었지만 그 중에서 나의 마음 속에 가장 남은 문장은 책 95쪽에 있는 다음 문장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질문이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잘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그저 오늘 사랑하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싶고 재밌는 프로를 보면서 웃고 싶고 단 과일을 먹고 싶고 자녀의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통의 일상을 함께 하고 싶은 것. 그것이 인간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 아닌가. 내가 그렇다면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면,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살고 싶다면, 내가 죽기 싫다면, 내가 총에 의해, 칼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인간인 다른 사람들을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죽어도 되는 것처럼, 고문받고 찢기고 베이고 피가 나도 그리고 그 피가 멈추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매 장이 슬펐지만 마지막 6장을 읽을 때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수의 한 책방에서, 조용한 그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아직 자녀가 없지만, 그래서 그 아픔을 미처 함께 헤아릴 수 없음에 송구한 마음 뿐이지만 자녀를 가져본 적도 없는 내가 생각해도 마음이 미어졌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그 슬픔.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가슴에 자녀를 묻어야 하는 그 아픔, 후회, 눈물. 꽃 피는 쪽으로 걷자고 하던 그 예쁜 아이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음에 나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상대방도 나와 같은 인간임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받고 싶은 따뜻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고 내가 받고 싶은 존중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다. 상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방도 원할테니까. 그리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 권력, 명예, 내 욕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람의 목숨이다. 사람의 생명이다. 나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야 한다면,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맞다. 내가 내려놓아서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다면,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이 고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도 고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 싶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총칼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신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해주신 그 모든 발걸음에, 그 희생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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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년이 온다』
소년은 왜 그곳에 남았을까
친구를 찾아 나선 중학생 소년이 있다. 시체가 안치된 곳이면 어김없이 들렀지만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소년은 도청 민원 봉사실에 들렀다. 그곳 복도에 죽은 이들이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었기에 이들은 병원이 아니라 민원 봉사실 복도에 누워 있는 것일까? 중학교 3학년이라는 열여섯 소년은 왜 이런 곳에서 (죽은) 친구를 찾고 있는 것일까? 피비린내가 봉사실 복도를 덮고 있다. 복도 벽을 따라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누워 있다. 소년은 친구를 찾기 위해 그 사람들(사실은 시체인)을 들여다본다. 차근차근 살피고 싶은데 오래 들여다볼 수가 없다. 저리 끔찍한 모습을 한 존재가 한때는 숨을 쉬고 말을 하는 생명이었다니.
교복을 입은 누나가 손이 너무 모자라다며 소년에게 도움을 청한다. 천을 잘라 복도에 누운 사람들, 그러니까 시체들을 덮는 일이다. 여고 3학년인 은숙, 양장점 미싱사인 선주와 한 조가 되어 소년은 총에 맞고, 칼에 찔려 몸 곳곳이 허물어진 시체들을 수습했다. 죽은 이들의 성별과 나이, 입은 옷과 신발 등을 장부에 기록하고 하나하나 번호를 매겼다. 이 기록을 보고 사람들은 실종된 가족들을 찾았다.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간단하게 염을 하고 입관을 하는 과정까지 소년은 장부에 기록했다.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을 태극기로 감싸고 그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가족들이 소년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들을 죽인 것은 바로 나라가 아니던가.
은숙이 소년의 물음에 답한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17쪽) 권력을 잡기 위해 시민들을 죽인 군인들은 결코 ‘나라’가 아니라고 은숙은 말한다. 그럼 나라는 무엇일까? 당연히 국민들을 지키는 게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군인들을 보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지 않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에게 맞선 시민들은 따라서 나라와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못된 권력자와 맞서 싸우는 게 된다. 그러니 죽은 이들의 몸을 태극기로 감싸고, 뜨거운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를 수밖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시신들은 이제 상무관으로 모여졌다. 말없이 누워 있는 그들을 보며 소년은 임종한 순간의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소년은 그때 분명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빠져 나가는 어린 새 같은 것을 보았다. 지금 이곳에 누워 있는 저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어린 새가 빠져 나갔을까? 원래대로라면 소년은 지난주에 중간고사를 봐야 했다. 시험을 마친 일요일에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인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지도 모른다. 시험을 보고, 친구와 더불어 운동을 해야 할 소년은 왜 시신들이 널려 있는 이곳에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하는 사회를 살고 있어서일까? 소년이 그런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누가 소년을 이런 끔찍한 상황에 빠뜨린 것일까?
계엄군이 오늘 밤 도청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도청에 퍼졌다. 은숙은 소년에게 집에 가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도청에 남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시간을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이 남은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다. 도청에 남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도청에 남았다. 친구를 찾아 길을 나선 소년 또한 도청에 남았다. 소년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보았다. 소년과 정대는 손을 맞잡고 뛰다가 귀를 찢는 총소리에 놀라 뒤돌아 뛰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는 총을 맞았다. 그런 정대를 놔두고 소년은 계속 달렸다. 빌딩 옥상에서 총을 쏴대는 저격수가 무서워 소년은 정대에게 가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정대는 끝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대 누나인 정미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장에 다니는 정미는 동생을 대학 보낸 후에 자신 또한 대학에 가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정대를 찾아 나선 게.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지만, 끝내 소년은 친구를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소년은 죽은 이들이 모인 곳에서 묵묵히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도청을 찾아와 손을 잡아끌었지만, 그 손을 뿌리치고 끝내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는 곳에 남았다. 소년은 엄마에게 여섯 시가 되면 도청의 문이 닫힌다고 했다. 문이 닫히면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안심을 하고 집으로 갔다. 엄마와 소년이 만난 마지막 날이었다.
소년은 왜 이 날 도청에 남았을까? 소년은 그날 죽은 이가 정대가 아니라 형들이었다고 해도, 아버지였다고 해도, 엄마였다고 해도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모인 그 누구였다고 해도 역시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생명의 본능이니까. 소년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45쪽)라고 거듭 다짐한다. 저격수의 총에 맞는 게 두려워 친구를 외면한 그 상황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소년은 죽음이 도사린 도청에 끝까지 남았다. 자신까지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 소년은 꿋꿋이 도청에 남았다. 죽음으로 ‘양심’을 지킨 이 소년의 결단에 그 누가 가타부타 말을 할 수 있을까
열여섯 소년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외쳤다. 친구가 왜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죽어야 했는지 소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군인들이 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는지 소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상무관에 놓인 저 끔찍한 주검들을 볼 때마다 소년은 가슴이 한없이 미어진다.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소년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엄마 또한 소년을 도청 밖에 있는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런데도 소년은 도청에 남았다. 이것만이 자기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친구의 죽음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 소설의 2장인 ‘검은 숨’에서 소년이 찾는 친구(정대)의 행방을 밝히고 있다. 총에 맞아 죽은 정대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버려졌다. 수많은 시체들이 탑을 이룬 곳에서 정대는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51쪽)라고 묻는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을 죽인 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그들의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 왜 자기를 총으로 쏘았느냐고, 왜 자기를 죽였느냐고 묻고 싶다. 이유도 모른 채 죽은 이 아이의 깊은 슬픔을 그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죽은 이는 말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살아 있는 우리가 그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해야 죽은 이들이 내뱉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고? 죽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 말을 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지 않으면 죽는 자는 결코 말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 날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죽은 이들의 한을 풀려면 산 자들이 똑똑히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어떻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산 자는 어떻게든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서 벗어나려 할수록 죽은 이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 자기들을 기억해 달라고 한사코 매달린다.
살아남아서 슬픈 사람들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러니까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는 게 된다. 3장 ‘일곱 개의 뺨’에 나오는 은숙이 그렇고, 5장 ‘밤의 눈동자’에 나오는 선주가 그렇다. 그들은 소년과 더불어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했지만 소년과 함께 죽지는 못했다. 어린 아이가 죽은 자리에서 그들은 살아남았다.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그들은 뼈저리게 느낀다. 소년이 죽은 자리에서 그들도 죽어야 했다. 그러면 살아서 겪는 이 아픔을 저 멀리로 내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들은 살아남았다. 몸만 살아남은 게 아니다. 기억도 살아남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 끔찍한 기억이 곧 삶이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근무하는 은숙은 서적을 검열하는 사내에게 일곱 대의 뺨을 맞았다. 요철이 없는 얼굴에 입술이 얇은 사내는 수배 중인 번역자가 어디에 있는지 대라고 했다. 은숙은 보름 전 교정지를 보여주기 위해 번역자를 만났을 뿐이다. 사내는 이를 빌미 삼아 은숙의 뺨을 일곱 대나 때린다. 그녀는 뺨을 때린 사내에게 맞서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어찌 하면 이 순간을 잊을까 생각한다. 다음 날, 부풀어 오른 뺨을 목도리로 가리고 은숙은 출간 예정인 희곡집을 받기 위해 검열과에 들른다. 가제본 여기저기에 먹줄이 그어져 있다. 먹줄이 그어진 부분을 빼면 책으로 낼 수도 없을뿐더러 공연을 할 수도 없다.
‘광주’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죽은 자는 여전히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고, 산 자 또한 여전히 깊은 슬픔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다. 열아홉 살의 여름이 오기 전만 해도 그녀는 사과처럼 볼이 붉은 삶을 살았다. 끔찍한 여름을 보낸 후 은숙은 이십 대의 청춘을 즐기기보다 어서 빨리 늙기를 바랐다. 늙어서 그 여름에 일어난 기억으로부터 헤어나고 싶었다. 빨리 늙기를 소망하는 여자에게 시간은 참으로 느리게 흐른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아픔은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는다. 사내에게 맞은 뺨이야 시간이 흐르면 아물 테지만, 그 여름 이후로 텅 비어버린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채워질 줄 모른다.
은숙은 말한다.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87쪽)고. 그날 밤 열한 시 경 희생자를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는 (김)진수가 총을 맨 채로 여자들이 모인 방을 찾았다. 그는 여자들을 향해 세 명만 남아달라고 했다. 아침까지 가두방송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죽는 게 두렵기도 했다. 끔찍하게 죽은 이들을 많이 봤는데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남기로 한 세 여자 중에는 같이 시신을 수습하던 선주도 있었다. 진수는 도청을 나서 집으로 가는 여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나오도록 해달라고 외쳤다.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차면 군인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남대 부속병원의 한 병실에서 은숙은 메가폰을 쥔 여자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라고도 외쳤다. 그 소리가 지나간 자리를 수천 사람이 내딛는 군홧발 소리가 지나갔다. 마침내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울려왔다. 은숙은 귀를 막지도, 눈을 감지도, 고개를 젓지도, 신음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만 같이 나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난 동호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온몸을 떨면서 동호에게 말했다. 지금 나가야 살 수 있다고. 그렇게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 날 이후 은숙은 죽은 이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쪽)라는 연극 속 대사가 곧 그 날 이후 그녀가 살아온 삶이었다. 장례식으로서 삶이란 무엇일까? 죽은 이와 사는 삶 말고 달리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연극 무대에 오른 소년을 보고서도 동호를 떠올릴 만큼 그녀는 그 날의 현장에 깊이 매여 있다. 죽은 자를 애도해야 산 자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다. 자기 삶을 장례식으로 삼은 여자가 어떻게 마음 편히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낼 수 있을까? 그녀는 죽은 자를 가슴에 품음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살아남은 게 끔찍한 비극이 되는 상황이 참으로 애달프지 않은가.
은숙만 그런 게 아니다. 4장 ‘쇠와 피’에 나오는 ‘나’ 또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힘겹게 생을 붙들고 있다. 도청에서 살아남은 ‘나’는 곧바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내 삶의 어떤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허용되는 건 오직 미칠 듯한 통증, 오줌똥을 지리도록 끔찍한 통증뿐이라는 것을.”(105쪽) 몸 속 깊이 체험했다. 2인 1조로 나오는 한 끼 식사를 상대보다 더 많이 먹기 위해 도청에서 함께 싸운 동지(김진수)를 외면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김진수는 자살을 했다. ‘나’는 광주의 그 현장을 증언해 달라는 연구자에게 김진수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외친다. 추체험은 체험이 아니라는 것. 온몸을 파고드는 그 지독한 아픔은 오로지 그것을 겪어본 이들만 알 수 있다는 것.
‘나’는 스무 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집으로 보낸다는 지도부의 지침을 바로 그들 자신이 거부했다고 고백한다. 살 날이 많이 남은 그들은 왜 죽음의 광장에 남은 것일까? ‘나’는 양심을 이야기한다. 양심이란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116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죽기 위해 도청에 남은 게 아니다.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 느낌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은 도청에 남아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계엄군이 도청에 다다를 즈음 김진수는 어린 학생들을 향해 항복하라고 외쳤다. 총을 버리고 살아남으라고 외쳤다. 자신은 목숨을 걸면서도 다른 이는 살라고 외치는 이 숭고한 마음이 양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고문자는 무엇보다 사람들 마음 깊이 자리한 양심을 깨뜨리려고 했다. 식판에 담긴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으면서 ‘나’와 김진수는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식욕만큼 강렬한 욕망이 어디에 있을까? 실제로 어떤 이들은 더 많이 먹으려고 으르렁대기도 했다. 이 장면을 본 고문자가 얼굴에 득의의 미소를 짓는 순간, 한 아이가 그들 사이에 몸을 밀어 넣으며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119쪽)라고 더듬대며 말했다. 고문자는 양심을 말하는 이들을 짐승으로 만들려고 했다. 한 줌의 음식 앞에서 그들이 외치는 양심이 덧없이 무너져 내리기를 바랐다.
밥 앞에서 양심이 무너지려는 찰나 한 아이(이름이 김영재이다)가 ‘죽을 각오’를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김진수의 공허한 눈과 마주쳤다. 영재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외삼촌의 목공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두 살 많은 외사촌형을 따라 시민군이 되었다. 도청을 사수하는 마지막 새벽 외사촌형은 죽었고 영재는 잡혀서 이곳까지 들어왔다. 외사촌이 죽은 이야기를 하면서는 울지 않던 아이가 지금 뭐가 가장 먹고 싶으냐는 물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카스테라가 먹고 싶다던 아이는 이후 십 년 동안 여섯 차례 손목을 그었다. 사람을 죽일 뻔했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영재의 얘기를 김진수를 통해 들었다. 그리고 그 김진수마저도 자살을 했다.
김진수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피투성이 도청 앞마당에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사진이었다. 연구자는 ‘나’에게 김진수가 이 사진을 남긴 이유를 묻는다. ‘나’는 무슨 권리로 자신에게 그것을 묻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나’는 연구자를 향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거냐고?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이냐고?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던가. 광주에 투입된 군인들은 더 많은 포상금을 타기 위해 가차 없이 무고한 시민들을 죽였다. 죄 없는 시민들이 죽어간 자리에서 살인을 명령한 권력자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나’는 말한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이라는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135쪽)라고. 그리고 묻는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같은 쪽)라고. 날마다 싸우는 이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 것인가? 오로지 죽음으로만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 사람에게 당신은 또 어떤 말을 들려줄 것인가? 살아남아서 슬픈 사람들이 던지는 이 질문을 그저 망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참으로 서글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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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us est parere, qui ad imperandum ius non habet! 20대 초반, 라틴어교재에서 본 내용 중 특별하지 않은 이 문장에 마음이 끌렸다. 이후로 나는 이 문장을 애지중지하며 사용했고, 책을 살 때마다 첫 장에 이 문장과 서명을 해놓았다.
“복종한다는 것은 명령하기 위한 법을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 속한(eius) 것이다.”
이 문장에 무언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문장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도 아니고, 내 삶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준 것도 아니다. 그냥 라틴어 공부를 위해 교재를 보면서 한 눈에 들어왔던 그런 문장일뿐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오래전에 듣고 있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 수상을 기회로 ‘희랍어시간’이란 책은 처음 알았다. 한강 작가가 이슈되기도 했고, 그래서 한강이란 작가가 있구나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채식주의자’는 너무 유명했기에 익히 알고 있던 작품이지만, ‘희랍어시간’은 전혀 알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20대 초반에 전공 때문에 고대 그리스어(헬라어, 희랍어, 신학을 전공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헬라어’라고 불렀다.)를 몇 년간 배웠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고, 제목 자체에 반가움도 있었다. 어떤 내용일까?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던 그 밤에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주문했다. 책은 갑자기 예약 대기로 모두 바뀌면서 제때 출고되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려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받아 들었다.
‘희랍어시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주 상세한 묘사와 묘사가 이어지는 글이었다. 특히 한강 작가가 선택한 희랍어는 중간태 형태의 단어가 중심이다.
헬라어에는 능동태 수동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태라는 것이 있다. 형태는 수동태와 비슷하게 변형되지만, 뜻은 중간태로 해석된다. 대표적인 중간태 변형은 ~ομαι 동사다. 중간태는 주어가 어떤 면에서 그 주어 자체에 관계하거나 또는 주어 자체에 속한 무엇에 대해 동작하는 것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αρχω(내가 지배하다)란 동사가 중간태가 되면, αρχομαι(내가 시작하다)란 뜻이 된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 초반에 나오는 단어는 διεψθαρθαι(손상되었습니다, is corrupted)다. 이 단어의 뜻이 ‘희랍어시간’ 전체에 흐르는 주인공 여성의 시각과 생각을 사로잡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열입곱살에 만난 인연, 한국과 독일, 그리고 아들, 사설 희랍어 아카데미에서의 시간들, 주인공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노선들이 얽히고설켜서 사건의 실타래를 풀 듯이 이야기는 흘러간다. 가끔 희랍어의 기본 단어와 변형에 대해서도 기록이 되어 있지만, 한강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어쩌면, 자신이 끌어나가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희랍어 단어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독자(讀者)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생경한 표현의 작품처럼 보일 수 있다. 대화는 거의 없다. ‘희랍어시간’에는 주인공을 따라서 모든 동작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어지고, 심지어 그에 따른 생각까지도 묘사로 그려진다.
한국어에 ‘생경하다’란 말이 있다. 영어로 ‘It's strange’라고 표현되는 것보다 ‘생경하다’가 얼마나 더 정감이 가도록 느껴지는지, 어느 날 어떤 장관은 ‘생경하다’란 말을 사용해 그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은 생경한 표현으로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이 글을 영어나 프랑스어 등으로 옮기면,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그들의 감성에 충분히 깊게 호소할 수 있는 문장력이 되겠다”싶었다. 한글로 쓰인 ‘희랍어시간’보다 영어나 프랑스어로 쓰인 ‘희랍어시간’을 읽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리스어로 쓰인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은 어떤 느낌일까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것 또한 생경함의 연결 선상이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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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노벨상을 받던 날, 눈부신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렸다. 문단에서는 예측을 한 이들이 있었다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예상치 못했다. 뉴스를 보던 남편이 나보다 먼저 알고 빅뉴스를 전해줬다. 소스라치듯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벼락처럼 거실로 뛰어나갔다. 내 두 눈과 두 귀로 확인하는 호사를 누렸다. 남편과 함께 한강이 내려주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강 책 세트를 주문했다. 남편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을 때 나는 <희랍어 시간>를 집어 들었다. 난해하다는 반응이 있어 긴장을 했다. 어라, 첫 문장부터 아는 경구가 나와 반갑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예상보다는 잘 읽혔다. 보통 소설처럼. 남 주인공이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다가 나는 멈칫거린다. 중요한 장면은 내 눈 속에, 내 감각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본다. 그동안 순간을 살아 내지 못하고 유예하는 삶의 태도를, 톺아보며 여백 사이에 메모한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깊게 보고, 오감으로 보면서 내 눈 속에 형상을 아로새긴다.’(아, 재독 하면서 남자 주인공이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 실명할 것을 예견하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임을 알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2장과 3장으로 넘어가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안개가 내려앉더니 어느 순간 30미터 앞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 한글이라 글자는 눈에 들어오나 맥락이 부서져 버린다. 그(남주인공)인 줄 알고 한참 읽다 보면 그녀(여주인공)가 등장해 있고, 그녀라고 여기며 읽어나가다 보면 돌연히 그가 나타나기도 해, 뒤엉킨 실타래를 만지고 있는 듯하다. 화자(주인공) 이름이 없어서 더 어수선하다.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현실에서 과거, 과거에서 꿈,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에도 과거의 기억과 꿈이 혼재되어 있다. 정신 줄을 놓게 된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또, 글자에 눈을 고정시킨다. 마치 한자로 된 시를 읽을 때처럼 난감하다. 모르는 한자도 찾아야 하고 해석이 난해한 구절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할 때처럼, 눈을 지릅 뜨고 읽어 내려간다. 책이 두껍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속절없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당치 않은 신념이 생긴다. 드디어 191쪽을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1판 31쇄’가 보인다. 역시 노벨상 작품이라 많은 사람이, 내가 산 것처럼 이 책을 샀구나! 노벨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 덕분에 책이, 기염을 토해 낸 것이다. 내가 믿고 보는 이동진 평론가가 유튜브 ‘파이아키아’에서 <희랍어 시간>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금은 보화보다 귀하고 값진 선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슴푸레하게 낀 안개 외 선물 따위 받은 게 없다. 오우, 선물을 받은 것이 있다. 은유와 비유 문장을 수도 없이 만났다. 마치 언어영역 수능 공부한 문제집에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은 것처럼, 나도 은유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뱀이 지나간 것처럼 구불구불한 밑줄 여백에 휘갈긴 메모도 남겨 놓았다. 왜 나는 선물을 못 받았을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메모한 부분을 삼킬 듯이 빠르게 훑어보았다. 감이 오지 않았다. “점자처럼 읽은 자만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라고 이동진이 했던 말이 얼핏 떠 올랐다. 문학작품은 단계가 여러 겹이다. 겉 이야기, 속 이야기, 작가의 의도 등이 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외모(겉모습)와 말투 정도였다면 두 번째는 그가 취하는 태도가 보일 것이고 세 번째는 속마음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반복 독서’를 해보기로 한다. 두 번을 읽었을 때 그의 태도가 보였지만, 아직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책을 펼쳐 들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처음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다, 두세 번 가면 가깝게 느껴지듯이 책도 그와 같았다. 40년 지기와 대화하듯 막힘이 없었다. 작가의 의도와 인물 간의 맥락 등 쾌청한 하늘을 다 보여줬다. 주인공 입장에 각각 감정이입이 되고보니, 그네처럼 감정이 치달아 오르내리기도 했다. <희랍어 시간>은 어려운 낱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문장이 난해한 것도 아니다. 다수가 어려워하는 까닭을 나름대로 알아내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갖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한강은 문득문득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생각들을, 대화 틈새에 배치한다. 뜬금없어 보이는 그것이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고 꿈 내용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초집중을 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을 때는 온전히 몰입해서 읽어야 된다는 메시지를, 작가가 행간 곳곳에 심어 놓은 듯하다. "이 소설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다." 여주인공 어머니가, 여주인공 임신 중에 장티푸스 약을 한 움큼씩 복용한 것이 화근이 된다. 여 주인공이 청각을 잃게 된다. 남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어 간다. 집안 내력으로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인 주인공도 머지않아 빛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소리를 잃어버린 여자의 만남이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구조다. 그 둘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다. 그것을 극복할 여지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새해 벽두에 만난 <희랍어 시간>, 그 안에서 달포 정도를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책에 나온 문장들과 장면들이 수시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이 책과 사랑에 빠졌을까? 반복 독서를 두 번도 아닌 세 번을 했다. 책 대부분을 필사까지 해 가면서 깊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한강이 청각과 시각을 잃은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여러 겹으로 길을 내주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사는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지도도 그려 놓았다. 내가 두 주인공의 마음과 목소리에 세세하게 귀 기울였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그들이 장애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남편이 겪는 애로사항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남편 편마비로 살 게 된 지 어언 천일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견딜 수 없이 떨리는 왼팔을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는다.” “투명한 테이프로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이 굳어 있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녀가 잠들지 못한 것을 모른다. 간밤에 이 방에서도,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녀가 잠들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 뜨거운 물과 아이의 거품비누로 오랫동안 샤워를 한 뒤, 식탁 앞에 앉아 희랍어 공책을 펼친 것을 모른다. 얼음 아래 수십 갈래 길을 더듬듯 죽은 희랍어 문자들을 적고, 견딜 수 없이 생생한 모국어 문장들을 끈질기게 이어 적은 것을 모른다.”(p.181) 사람 간 소통을 잘하는 비결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상대와 소통을 잘 못하는 것은 윗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의 상황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초집중해서 책을 읽어야 책 내용 전체가 보이는 것처럼, 상대방이 전하고자 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오감으로 느낄 줄 알아야 된다. 남편 속(마음과 몸)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나도 남편을 잘 모른다. 일상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덜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자. 한 발짝만 더 나아가 보자. 이제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감정이입과 공감대라는 무기를 장착했으니 남편 속으로 풍덩 들어가 보자.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수 있는 교두보를 놓아 보자. 텍스트는 책이다. 남편에게 한강 책은 조금 어려울 것이다. 그가 조*을 좋아하니 그분 책으로 물꼬를 터 보자. 우리나라 문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대문호 한강, 그녀로부터 ‘승화’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선물 받았다. 한강 작가를 알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졌음을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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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캄한 불빛의 집 ]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거울 저편의 겨울 ]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름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 서시 ]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 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작해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저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서울의 겨울 ]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 첫새벽 ]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 어느 날, 나의 살은 ]
물과 같았다가 그 다음 날 눈 떠보면 담벼락이었다가 오래된 콘크리트 내벽이었다가 먼지 날리는 봄 버스 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토할 때는 누더기 침걸레였다가 들지 않는 주머니칼의 속날이었다가 돌아와 눕는 밤마다는 알알이 거품 뒤집어 쓴
어느 날 눈떠보면 다시 물이 되어 삶이여 다시 내 혈관 속으로 흘러 돌아와가
[ 저녁 잎사귀 ]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솥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 소/라/향/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