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그림과 사진이 많이 담긴 책을 좋아하다 보니 이책또한 보게 되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여러 사진작가들의 바다 사진들도 좋았지만 사진들에 따라 남겨놓은 김경미 시인의 에세이 들이 정말 기대못한 수확이었습니다. 책을 펴낸 의도는 전시회를 기념한 사진집이었겠지만, 이 글들이, 글쓴이의 삶의 경험과 추억들이 써져 있는 글과 사진들이 어우러져 정말 멋진 수필집이 되었군요. 책을 보면서 느낄수 있었던 잔잔한 감동들이 단순한 사진집을 한단계 끌어올려 참 괜찮은 책이 되었습니다.
사진 하나하나에 대한 직접적인 감상보다는 글쓴이의 아담한 생각과 소중한 경험들... 그리고 시인의로서의 고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사진 하나하나에 대한 그녀의 감상문이라는것을 알게되게끔 만든.
기대못한 수확이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쁨은 ... [인상깊은구절] 한번은 친구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창가 쪽으로 앉은 아들이 갑자기 '비상시 문을 여세요'라고 쓰인 문을 열려고 낑낑댔답니다. 친구는 놀라서 무슨 짖이냐고 막 야단을 쳤죠. 그러자 아들은 경고글이 써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여기 "문을 여세요"라고 써 있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한 건데, 하면서 억울해 하더랍니다. 그러고 보니 '비상시' 세 글자는 한자였습니다. 한자를 모르는 아이로서는 읽을 수 없는 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경고글은 아이에겐 정반대의 문을 열라는 경고가 됐던 것입니다. 삶에도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는 사람에게만 보일, 모르는 사람에겐 정반대로 읽혀질 생의 경고나 비법들, 흰 도화지에 초로 쓴 글씨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열심히 배워 익히고 깨우친 사람에게는 보일, 생의 비상시에 바로 열고 나갈 수 있는 구원의 표지판이나 지시어들. ---------page93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둠이 밀려오는 밤바다를 지켜보면서 울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시간마다 오는 버스라 모두들 오랜 기다림에의 지루함과 행여 놓칠 것에 대한 불안이 뒤섞인 표정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저만큼에서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 카드를 꺼내들거나 내려놓았던 짐을 챙겨 들고 일제히 정거장 앞쪽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버스는 정거장 윗쪽에 내리는 사람만 얼른 내려놓더니 도망가듯이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허탈한 표정들이었습니다. 버스 뒤꽁무지를 향해 화를 내거나 버스 회사에 항의하겠다고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시 또 한 시간을 더 기다릴 것인지 택시라도 탈 것인지를 의논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삼 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똑같은 버스가 또 오는 게 보였습니다. 한 시간마다 오게 돼 있는 버스가 이삼 분만에 또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시금 차도 앞으로 나가 섰습니다. 저 버스도 그냥 가 버리는거 아니야, 불안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버스는 정확히 정거장에 와 섰습니다. 그때 정거장 앞으로 나가던 오십대의, 수더분해 보이는 한 아줌마가 한마디 했습니다. "말없이 그냥 떠나는 것들한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니까..." 저는 그자리에 멈춰 선 채 오십대 아줌마를 돌아봤습니다. 잠언이니 아포리즘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을 것 같은 중년의 수더분한 아줌마의 표정 속에는 살면서 얻은, 그 어떤 고급스런 학식에도 견줄 수 없는 생의 철학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중략- -------page14 |
| 탁 트인 바닷가,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아니하고 그곳에 설 수만 있다면. 왠지 모르게 바다는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만 같아서,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답답할 때마다 바다를 생각하나보다. 수평선 저 너머 하늘과 바다, 그 가는 틈새에 잡아먹힐 듯 사라지는 고기잡이배를 보면서, 같은 듯하면서도 매 순간 다른, 구름과 파도가 연출하는 장관을 감상하면서...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여유로운 자에게만 허락되는 행운이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홀로 바다를 거닌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사람 빼곡했던 해수욕장을 방문했던 기억이 바다에 대한 나의 전부라는 사실을 실로 지독한 불행이다. 이런 나에게도 바다는 왠지 모르게 마음을 열어줄 것만 같다. 모든 자연이 그러하듯, 바다 역시도 늘 그 자리에 머무는 존재이니... 수많은 사진집을 봐왔지만 많은 경우 기대가 실망으로 변화하곤 했었다. 사진과는 따로 노는 듯한 글,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싫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미처 가지지 못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이에 대한 부러움, 나와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경멸.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술술 적어나간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녀의 삶, 지극히 개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콤했다. 그녀의 글들은, 때론 금빛으로, 때론 회색빛으로 물들어버린 사진 속 세상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일부러 특정 사진에 맞추려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것은 솔직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글 하나하나에서 묻어나는 경험들, 남의 은밀한(?) 삶을 엿보는 짜릿함은 연이어 펼쳐지는 사진들로 인해 희석되어갔다. 바다로 가고 싶다, 마음껏 거닐고 싶다는 충동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순간을 가둠으로써 영원한 현재를 창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평면에 갇힌 현실이라는 점에서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손끝으로 어루만질 순 있지만 결코 내 눈 앞에 펼쳐지게 할 수는 없는...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다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