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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내용면에서 모두 함량 미달인-
"형식과 내용면에서 모두 함량 미달인-" 내용보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날 수가 없다. 저자의 화려한 스칼라쉽과 찬란한 경력, 그리고 책을 도배하다시피한 유명 인사들의 찬문. 이것을 보고 책에 손이간 나는, '그것만' 보고 책을 고른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기획한 출판사 측에 잘못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변증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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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날 수가 없다. 저자의 화려한 스칼라쉽과 찬란한 경력, 그리고 책을 도배하다시피한 유명 인사들의 찬문. 이것을 보고 책에 손이간 나는, '그것만' 보고 책을 고른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기획한 출판사 측에 잘못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변증론에 관한 책이 아니다. 책 제목을 훨씬 가볍게 지었어야 했다. 기독 변증론이란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에 관한 숱한 의문들을, 마치 법정에서의 변호사처럼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변호하는 이론이다. 언뜻 재미있게 보이지만, 매우 어렵고 때로는 위험하며, 상당히 방대하고 깊은 지식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시각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변증론은, 재판의 판사처럼 또 일반 이론처럼 '결론'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는점이다. 공격에 대한 수비의 입장에서 그 입장을 '정리'하는데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완전히 함량 미달이다. 우선 이 책은 '소피의 세계'와 같이 대화체 소설 형식을 빌어, 대부분 저자가 재직하고 있는 학생들의 질문에 학과 교수인 저자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변증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아마도 이 책을 내고 나서 저자도 느꼈을 것이다. 이런 형식의 글을 쓰는 것이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또 이런 형식의 글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차라리 그냥 변증론에 대해 담백한 이론을 전개해 나갔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그 형식이 너무나 어설프다. 그 신선한 기획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평이한 이론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취했다면 그 형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못해, 글이 긴장감 없이 평면적으로 흐르기만 해, 마치 학생 상담 일지에 적힌 내용을 대화체로 만들어 전개한 느낌이다. 그 결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단순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저자가 전문 글쟁이도 아닌데 그냥 봐주지 별 걸 다 트집 잡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형식은 이 책의 내용과 결정적으로 관련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변증은 '의문'에 대한 '변증'이다. 그런데 일반 신도는 물론 신학자들조차 그것의 최종 목표는 일정한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 가깝게는 헤겔의 이론에 기댄 변증은 결론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의문 - 변증 - 의문.....의 순환 과정, 앞서 말한 '정리'를 지향한다. 따라서 변증론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적정 지점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내야지, 누군가가 재판 현장의 판사처럼 결론을 지어서는 안된다. 끊임없는 순환속에 의문은 더욱 다채로워지고 풍성해져야 한다. 기독 변증론이라면 더 깊은 의문,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논리, 기독인들을 더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 유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기독교라는 종교가 더 깊어지고 풍성하고 단단해지므로.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과정이 없다. 의문이 제기되고 순환되려는 순간, 마무리된다. 순환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의문'이 제기되면 저자의 '대답'으로 마무리되어,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건 뭐죠? - 이건, 이거란다. - 아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어요!'식의 구조여서, '잘 모르는 사람의 질문 - 잘 아는 사람의 대답' 식의 단순한 구조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내용이 단순하다 보니 앞서 설명한 평면적인 구조의 대화체 소설 형식이 편하게 다룰 수 있는 구조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변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색다른 형식으로 완성한 저자의 '신학개론'과 같은 느낌이 든다. 저자는 머리말에 더 전문적인 내용을 깊이 있게 못다룬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데, 정말 아쉬워해야 할 것은 그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기법'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저자는 너무 많은 주제와 내용을 말하려는 듯 보인다. 게다가 주제도 평이하며 난이도도 들쑥날쑥이다. 그러나 변증론이 잘 진행되는 글들을 보면 단 하나의 주제를 갖도 계속 의문과 반박과 또다른 의문을 순환시키면서 풍성한 내용을 끌어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논리의 정당성과 헛점 사이의 무수한 충돌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게 한다. 그게 변증론이다. (안셀무스의 멋진 논변의 보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변증론이 지향하는 것은 결론 (결론은 하나님만이 안다) 이 아닌 기법, 즉 그 순환 과정 자체이고, 그 치열한 공방의 최종 판결자, 또는 배심원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이다. 저자는 단지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양적 도약에서 질적 도약으로 가는 그 길을 배심원에게 현명하게 유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에 대한 지적과 함께 정말 하고 싶은 쓴소리가 있다. 이건 출판사 측에 하는 말이다. 책이 왜 이렇게 비싼가? 2백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 신국배판으로 치자면 170~180정도가 될 책, 가격이 8천8백원이다! 요즘 이렇게 얄팍하게 책을 내고 약간의 포장을 씌워 비싸게 받는 출판사들이 너무 많다. '책은 양이 아니라 질로 말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시집이 아닌 이상 그건 멋있자고 하는 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를 어느 정도 채워줘야 한다. 더욱이 맛도 없고 배도 채워주지 못한다면 짜증만 난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값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출판계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또 우리나라의 책값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전체적으로 싸다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프레미엄이 붙는 유명 해외 작가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싸게 책정됐는지. 출판사 측에서는 독자들은 출판사 사람보다 몇 십배 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하면 책은 돈 주고 사라고 권하고 아니면 내가 몇 권을 사 선물한다. 하지만 이렇게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책정한 책이라면, 사지도 못하게 하고 내가 대표로 사 사람들에게 빌려준다. 이 책이 나온지 얼마 안되지만, 맘 잡고 읽으면 2시간이면 뚝딱 읽을 책, 벌써 20명 가까이나 되는 동료 신자들에게 빌려줘 이 책을 '공짜로' 읽었다. 그리고 아예 공공장소에 비치해 수많은 사람들이 '공짜로' 읽게할 작정이다. 저자에게도 실례가 되는 이런 '짓'은 더 이상 하지 말기를. 차라리 대화체 소설 형식의 책이라면 이 책의 두 배 정도로 만들어 신국배판으로 만들면 저자도 할 말을 다하고 책 읽는 사람도 만족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h***h 2004.08.06. 신고 공감 2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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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습니다. 지적인 욕구들이 충만해 채워집니다.
"^^재미있습니다. 지적인 욕구들이 충만해 채워집니다. " 내용보기
이 책을 읽고 아직 초신자인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친구는 굉장히 질문이 많다. 아직까지 이 책에 나온 질문을 내게 한 것은 아니지만, 또 지금까지는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내가 예전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질문하였던 선악과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친구가 물어온다면 수려하고도 명확한 말로 얘기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똑똑하기 때문일까?
"^^재미있습니다. 지적인 욕구들이 충만해 채워집니다. " 내용보기
이 책을 읽고 아직 초신자인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친구는 굉장히 질문이 많다. 아직까지 이 책에 나온 질문을 내게 한 것은 아니지만, 또 지금까지는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내가 예전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질문하였던 선악과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친구가 물어온다면 수려하고도 명확한 말로 얘기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똑똑하기 때문일까? 책속의 저자는 너무도 수려하고 예리한 말 날카로운 지적으로 우리의 신앙 궁금증들, 성경속 궁금증들을 풀어나간다. 지금까지 많은 목사님들이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셨지만 저자의 질문으 그 대답을 뛰어넘는 정확함과 즐거움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다 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기 어러운 것들에 대한 것이 명확해졌고, 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확실해졌으며 성경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에 지적인 욕구가 충만해짐과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화체의 설명이 나로 하여금 쉽게 이 책을 읽어내도록 하였다. 재밌는 책이다!
k*****0 2004.08.05. 신고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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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기다렸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책을 기다렸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용보기
기독교변증이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C. S. 루이스가 떠올랐다. 물샐 틈 없는 논리로 꽉 찬 그의 책을 여럿 읽은 까닭도 있겠지만,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인정받는 그의 저서가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책을 읽노라면 힘이 든다. 논리적인 책읽기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게 사
"이런 책을 기다렸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용보기
기독교변증이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C. S. 루이스가 떠올랐다. 물샐 틈 없는 논리로 꽉 찬 그의 책을 여럿 읽은 까닭도 있겠지만, 우리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인정받는 그의 저서가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책을 읽노라면 힘이 든다. 논리적인 책읽기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번 읽게 되고, 그러면서 그의 필력에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이다. 정성욱 교수의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변증》은 달랐다.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티타임'에 나누는 듯한 대화 속에 기독교 원리들을 담고 있다. 책상 앞에 정좌하고 앉아서 숙독할 게 아니라 지하철에서 펼쳐 읽고, 밥상을 치운 자리에서 꺼내 읽어도 충분하다. 그만큼 술술 읽힌다. 그러나 내용은 조밀하여, 차마 안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나의 암담한 지식의 영역을 속시원히 밝혀 주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학생들, 혹은 교인들이 정성욱 교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곧 나의 질문들이었고, 나는 나의 무지함을 슬쩍 숨긴 채 어깨 너머로 기독교를 알아 갈 수 있었다. 대화 형식의 편집이 주는 묘미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그리고 본문을 두 가지 색으로 인쇄하여,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책읽기를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본문에 사용된 중요 용어를 정리해 주고 있어서 유익했다. 똑같은 책읽기에 지친 독자, 자신이 가진 기독교라는 종교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성경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 독자,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를 좀더 조리있게 설명해 주고 싶은 열망이 있는 독자라면 올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s****u 2004.08.11.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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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폴 님께서 쓰신 글에대해..
"아래 폴 님께서 쓰신 글에대해.." 내용보기
꼭 그렇게만 봐야할까요..님께서 말씀하신걸 보면. 문제는 책제목과 책의 가격에만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만.. 제목은 기독교 변증인데 변증론에 관한 내용은 없다.. 아마도 변증론에 관한 수준 높은 책을 많이 읽어보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입니다. 티타임이 뭔지는 아시죠? 저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책의 제목을
"아래 폴 님께서 쓰신 글에대해.." 내용보기
꼭 그렇게만 봐야할까요..
님께서 말씀하신걸 보면. 문제는 책제목과 책의 가격에만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만.. 제목은 기독교 변증인데 변증론에 관한 내용은 없다.. 아마도 변증론에 관한 수준 높은 책을 많이 읽어보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입니다. 티타임이 뭔지는 아시죠? 저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책의 제목을 처음 보고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변증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지만 저로서는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거든요. 역시 이책은 저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저같은 초보에게는요.  세상에는 수많은 독자가 있고 각자의 수준도 다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만.. 아마도 님께서는 상당한 수준의 관련 지식과 수준을 갖고 계신듯 합니다. 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책이 이토록 형편없는 책으로 몰락한 다는 사실에 좀 놀랍구요. 아마도 님의 구미에 맞게하려면 책 제목을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이야기' 이렇게만 정했다면 님께서 그렇게까지 신랄한 비판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책의 가격도 님께서 말씀하신게 이해가 안될정도로 기타 수많은 다른 책들과 비교해봐도 전혀 비싼거 같지 않습니다만.. 책의 가격은 양보다 질이라는게 멋있자고 하는 말이라구요? 웃음만 나옵니다. 그럼 어린이 동화책은 얇디 얇은것이 왜이리 비싼걸까요? 천원주기도 아까운 페이지수인데.. 님께서는 아마도 무조건 비싼 책은 두꺼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네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란 말이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주위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읽게 해주셨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부분에 박수를 보냅니다. 책을 펴내는 저자가 목적이 여러가지겠지만.. 물론 모든 판매 수입이 저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이 책은 판매 수입을 올리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적어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몰랐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알고 더욱 신앙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 한 사람으로써 몇자 적어봅니다..
p****9 2009.09.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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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으로서의 기본소양을 쌓는 데 유용할 듯
"신앙인으로서의 기본소양을 쌓는 데 유용할 듯" 내용보기
1. 요약 。。。。。。。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마친 저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과 한 대화를 책으로 엮었다(대부분은 사실이나 일부 윤색은 있었던 듯). 질문과 답변의 내용은 대체로 기독교 교리의 타당성과 유효성에 대한 변호들인데, 책 제목처럼 그리 무겁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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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마친 저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과 한 대화를 책으로 엮었다(대부분은 사실이나 일부 윤색은 있었던 듯). 질문과 답변의 내용은 대체로 기독교 교리의 타당성과 유효성에 대한 변호들인데, 책 제목처럼 그리 무겁지 않은 선에서 대화들이 오고간다.

 

 

2. 감상평   

 

     제목은 참 잘 뺐다. 그런데 책의 내용이 제목이 가진 무게를 제대로 지탱해내지 못하는 듯하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서평을 봐도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글들이 몇 개 보인다. 제목을 보고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편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탁월한 책인가 싶어 읽기 시작했다면(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 약간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내용과 형식 자체는 기독교 진리를 전달하는 데 두고 있다는 건 맞지만, 책 뒷표지에 실려 있는 추천사들처럼 ‘시원하게 정리해 줄 해갈의 답변서’(김삼환)나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난 오아시스’(김진홍), ‘복음주의 지성계의 차세대 리더 정성욱 박사가 온몸으로 쓴 포스트기독교시대의 사도행전!’(유종성, 두란노출판본부장) 까지는 전혀 아니다. 책의 내용에 큰 문제가 있다고 까진 할 수 없지만, 탁월한 수준이라고는 말을 못하겠다.

 

     책의 스타일은 약간 변주를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올드(old)하다. 물론 진리의 내용이야 시대에 따라서 변개시킬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 전달 방식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이 저자가 쓴 다른 책들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왜 이분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지 이 책을 통해서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자라는 이유에서라면 좀 슬플 것 같다.) 무엇보다 요새 사람들은 이 책에 실린 정도의 머리 아픈 내용도 읽기 싫어하지 않던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변증보다는, 기독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기본적인 소양을 쌓는 데 좀 더 유용할 것 같은 책.



p*********n 2014.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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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에 나누기’도 아까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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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에 나누기’도 아까운 이야기들.   본서의 저자는 옥스퍼드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제자로 하버드-옥스퍼드를 졸업한 소장 신학자이다. 이 책의 뒤편에는 ‘혼란의 시대를 시원하게 정리해 줄 해갈의 답변서’라는 문구와 함께 장신대학교 총장 등 기독교계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난 이 책의 주요 논점들을 모조리 논박하려고 한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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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에 나누기도 아까운 이야기들.

 

본서의 저자는 옥스퍼드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제자로 하버드-옥스퍼드를 졸업한 소장 신학자이다. 이 책의 뒤편에는 혼란의 시대를 시원하게 정리해 줄 해갈의 답변서라는 문구와 함께 장신대학교 총장 등 기독교계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난 이 책의 주요 논점들을 모조리 논박하려고 한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을 발군의 실력 가진 귀한 인재(진홍)라는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고작 이 정도 뿐이라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먼저 챕터 2를 보자. 정성욱은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해 주는 주요 증거로써 40명의 저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1600여 년에 걸친 세월의 기록이 모두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큰 증거가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왜 저자는 그 자신이 입증해 보여야 할 논제를 마치 자명한 사실인양 거론하고 있는가? 구약의 아가서를 보라, 그 책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남녀 간의 짙은 사랑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신약을 보라. 거기에는 마르틴 루터가 쓰레기 복음이라고, 바울과 요한 등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 못한 야고보의 공로주의 문헌이라고, 따라서 정경에서 제거되어야 할 문서라고 지칭한 야고보서가 있다. 이런 실례들을 정성욱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설령 정경에 담긴 책들의 주제가 비슷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다른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소유한 집단의 검열의 결과라고 말이다. 이러한 검열의 결과가 바로 외경과 위경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1600여 년이 흘렀고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적 입장이 담긴 문헌들이 수 많은 저자에 의해 계속 기독교회에서 끊임없이 출간되어 왔다는 예만으로도 어느 정도 다른 방식의 설명이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 가지 더, 이 챕터에서 정성욱 C.S. 루이스를 거론하면서 기독교 변증의 유용한 방법으로 자연법에 호소하고 있는데 요즘과 같은 공약 불가능성의 시대에 자연법을 믿는 철학자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버마스 같은 구닥다리 빼고.) 이런 한물간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이유가 뭔지 난 잘 모르겠다.(설마 현대 사상을 잘 이해 못하는 건가?)

 

성경의 해석과 적용의 관계에서 정성욱은 해체주의 문학 이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전혀 그 이론의 도전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해체론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의 진위를 결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앞서 과연 텍스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마련할 수 없다. 해체론의 작업으로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집어낼 수 있는 토대가 모조리 제거된 것이다. 저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면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자만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불신자는 근원적으로 텍스트 의미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의 의미를 통한 불신자에 대한 전도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자면 정성욱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는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의도한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약 기자들의 구약 인용, 예컨대 마태복음 기자의 호세아서 인용 등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음으로 나는 챕터 5 9를 함께 묶어 논의하겠다. 이 두 챕터에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악의 문제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의도로 주관하는 이가 신이라면 이 세계의 악마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마저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선악과를 주었을 때 이미 신은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취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닌가? 정성욱은 죄의 원인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고 신은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라 함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라 하여도 이단이고 원인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성욱은 이단인가?) 정성욱은 신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방도로 신이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궁지에 몰고 있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낄낄.

 

그 다음은 챕터 8이다. 이 챕터의 앞 부분은 사실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 부분을 간략히 추린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부분은 불신자와 신자의 접촉점 파트다. 첫째, 둘째는 언급할 가치마저 없으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만약 니체에게 이런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그는 마지막 인간이라 비난하지 않을까?) 내가 겨냥하는 것은 3번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의 보편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의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기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성욱은 남편의 간음을 장려하는 문화권은 없으며 살인과 절도를 권유하는 문화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웬걸? 나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다윈주의가 가장 멋지게 설명해낼 수 있는 모범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생각한다. 진화 심리학의 기본 테제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은 진화의 산물이다 는 것이다. 살인과 절도를 장려하는 도덕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개체가 담지하고 있는 유전자는 종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자연 선택을 통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챕터 11에서 정성욱은 성경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과학적 실례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내가 인정하는 것은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즈가 인정하였듯이 다윈주의 역시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전제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킨스의 완고한 입장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챕터 12 13장에서 나는 좀 다른 지점에 서서 이 책을 비판하고자 한다. 13장에서 정성욱은 장로교와 감리교, 가톨릭 사이의 차이는 그다지 심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러한 교파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을 제국주의적인양 이야기 하고 있다.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근대적 담론들을 거대이야기라 비판하였던 리오타르의 주장이 오히려 기형적 거대이야기의 입지를 점유했던 것처럼 이러한 정성욱의 생각이야말로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고집하는 제국주의적 사고라고 생각한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의 도르트 회의에서 일어난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논쟁이 과연 사사로운 것이었는가? 루터와 칼뱅의 입장과 트렌트 공의회의 로마 카톨릭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가? 난 사실상 아르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의 다른 모습을 한 재탄생이라고 생각한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에서 죽지 않았으며 로마 카톨릭과 아르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 한 것이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칼뱅주의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였던 신의 택자들을 향한 주권적인 선택(선택의 원인이 오로지 신에게만 있고 택자에게는 존재하지 않음)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이에서 말미암는 구원 사역에서의 전적인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부인하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나는 이러한 A-C의 입장을 따르지 않으면 로마서 등 성경의 상당 부분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로교와 가톨릭 사이에 과연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지 의문이다. 정성욱이 공통점으로 내세우는 삼위일체 신관 역시 나는 장로교, 특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를 작성한 신학자들과 로마 카톨릭의 입장과는 현저한 차이가 난다고 보고 있다. 12장에서 거론되는 여성안수 문제 역시 진정 기독교회가 성경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인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고 여기고 있다. (지면상 나는 이 문제를 더 다루지는 않겠다. 이미 다른 주제로 나는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 난 이러한 정성욱의 입장이 그가 칼뱅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연유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의 스승 알리스터 맥그래스 역시도 그의 이신칭의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칼뱅주의의 법적인 칭의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소위 관계적 칭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성화를 칭의에 끌어들인다.)

 

이것으로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티타임에 나누기도 시간이 아까운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맥그래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신학도들 사이에 상당한 추종자를 가지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이토록 저급한 것인지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f*****l 2007.02.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