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10.0
리뷰 총점 종이책
이육사 시 세 편
"이육사 시 세 편" 내용보기
1. 강철로 된 무지개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켜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절정’은 최고의 상태나 경지를 의미한다. 시인
"이육사 시 세 편" 내용보기

1. 강철로 된 무지개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켜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절정은 최고의 상태나 경지를 의미한다. 시인은 어떤 상황을 이러한 절정의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이 시 1연에서 매운 계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매운 계절은 말 그대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이런 시기에 이 시의 화자는 채찍에 이끌려 북방까지 휩쓸려 간다. 겨울에 맞는 채찍이다. 가뜩이나 언 몸에 채찍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다. 몸이 남아날 리가 없다. 거기다 겨울이다. 고통이 최고조에 이르는 상태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북방으로 내쫓긴 시인은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에 이른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니 하늘이 곧 고원이라고 말해도 된다. 어쨌든 저 높은 하늘까지 내쫓긴 상황이다. 그곳을 시인은 서릿발 칼날진 그 위로 표현하고 있다.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 위에 서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신들린 무당이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고통의 극한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벗어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 있을 밖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시의 3연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곳에 서 있다. 무릎을 꿇을 수도 없다. 무릎을 꿇으면 서릿발 칼날이 기다렸다는 듯 무릎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으니 그냥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서 있으면 되는 것일까? 하늘도 지쳐 끝난 고원에 서릿발 칼날이 드리워져 있다. 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그곳에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고 그와 맞서 싸우기도 힘들다. 발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무엇을 들고 그와 맞서겠는가. 꼼짝 않고 서 있으면 목숨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사는 것인가? 서서 느껴야 하는 고통은 차치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상황이 시인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극한까지 왔다. 이보다 더한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니 무엇이든 해야 한다.

 

시인은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라는 시구를 슬쩍 마지막 연에서 내보이고 있다. 눈을 감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눈을 감는다고 외부의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눈을 감는 걸 외부와 단절하려는 의지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일단, 시인이 눈을 감고 무엇을 하는지 들여다보자. 그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생각을 눈을 감은 채 떠올리고 있다. 겨울을 강철로 된 무지개에 비유한 게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겨울-강철-무지개로 이어지는 시어들이 차가운 절망과 부드러운 희망 사이에 걸쳐 있는 듯싶다. 강철로 된 겨울 이미지가 냉혹한 시대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면, 강철로 된 무지개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주 작은 희망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문제는 무지개가 강철로 되어 있다는 대목이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가, 아니면 절망을 주는가?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겨울을 비유하고 있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겨울이라는 조건 속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를 역설적으로 사유한다. 강철로 된 무지개니 아무리 무지개라도 장밋빛 희망으로 볼 수는 없다. 강철로 된 겨울 속에서도 무지개는 피어난다.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북방 고원으로 내쫓긴 시인은 지금 눈을 감고 상상에 빠져 있다. 겨울로 된 강철 위에서 피어난 무지개를 그는 상상 속에서 떠올리고 있다. ()는 그만큼 절망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길을 시인은 상상 속에서라도 찾아내려 한다.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역설은 고통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의 마음결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셈이다.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가난한 노래의 씨”(광야)를 뿌리려 했던 이육사의 마음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릿발 칼날 진 고원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무지개가 피어난 세상을 상상으로 떠올렸다. 한 발짝을 더 내딛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극한의 고통을 그는 눈을 감는 행위로 맞서려 했다. 눈을 감는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극한의 상황과 거리를 두는 마음만으로도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금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에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육사는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과 마주하는 방법을 내면과 깊이 있게 대화함으로써 찾으려 했다.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역설은 이런 점에서 그가 시 작업을 통해 이른 절정의 미학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2. 가난한 노래의 씨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식민지 시대 시인인 이육사가 쓴 광야까마득한 날에시작된 한민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렸다. 어디서에도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는 태초의 공간은 말 그대로 혼돈과 다르지 않다. 하늘을 거스르지 않는 생명만이 하늘이 처음 열린 세상에서 살아간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르는 어떤 기운(氣運)이 광야에 넘쳐난다.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광야를 범()하는 생명들은 없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생명이 피어날 수 없는 광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시인은 광야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에 내포된 관계를 말하고 있다. 하늘이 처음 열린 그 광야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저마다의 생명을 뽐내며 생명으로 이어진 그물망을 이루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빛과 어둠이 차례로 나왔다가 물러가며 광야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을 키워냈다.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여는 드넓은 세계관은 한민족을 바라보는 시인의 생각을 에둘러 보여준다. 한민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다. 빛과 어둠만이 있던 세계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민족이라는 새로운 생명이 이루어졌다. 하나하나의 생명이 모여 작은 생명의 강을 이루고, 그 강들이 모여 거대한 시간의 바다가 만들어졌다. 광야에서 펼쳐진 한민족의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 한민족의 역사는 곧 생명의 역사이다.

 

이 시의 4연에서 시인은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이 내린다는 건 생명 활동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늦겨울이나 초봄에 피는 매화는 저 멀리서 홀로 아득한 향기를 피우고 있다. 겨울이 되면 생명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모든 기운을 땅 속 뿌리로 모아서 그들은 한겨울의 고통을 견딘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봄은 분명히 온다. 봄이라는 희망은 결국 시간 속에서 갈무리되는 힘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 봄을 기다리는 시점이다. 매화 향기조차 아득한 이 상황을 다른 생명들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희망의 봄은 눈이 내리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까마득한 미래와 이어져 있다.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의 역사에 개입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뭐라고 생명에 개입한다는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시인은 조물주가 아니다. 조물주가 아닌 시인이 생명의 역사에 개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생명의 힘을 일깨우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대가로 땅 속에서 죽어야 한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꽃은 피어나지 않고, 그러면 열매 또한 맺히지 않는다. 시인이 이야기한 가난한 노래의 씨는 이러한 씨앗의 희생정신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시인은 스스로 씨앗이 되려고 한다. “뿌려라라는 명령형 어조는 새로운 역사를 향한 시인의 꿈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희생의식은 달리 말하면 구원의식을 의미한다. 눈 내리는 불모의 상황을 이겨내는 힘을 시인은 씨앗의 힘에서 찾고 있다. 씨앗은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길을 연다.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은 이러한 씨앗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마는 신성한 동물이다. 그 말을 타고 올 초인 또한 당연히 신성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인은 눈 내리는 겨울의 불모성을 넘어서는 인간=생명이다. 시인은 백마를 타고 오는 굳건한 생명의 힘을 노래한다. 초인은 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울부짖는다. 울부짖음은 생명이 토해내는 절절한 힘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희생을 한 자리 위에서 초인은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생명은 이렇게 겨울의 불모성을 넘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광야로 나아간다. 이육사가 처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민족의 역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힘을 도래하는 초인으로부터 얻고 있다. 물론 초인이 도래하는 시점은 미래(천고)로 설정되어 있다. 지금은 눈이 내리는 겨울이다. 그 겨울에 시인은 스스로 희생하는 씨앗이 되려고 한다. 이육사의 광야는 기어이 겨울=시련을 넘어서려는 시인의 비장미로 넘쳐난다. 비장미는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정신에서 뻗어 나온다. 까마득한 날에 비롯된 한민족=생명의 역사와 마주함으로써 시인은 생명을 해치는 근대 제국주의와 맞서는 힘을 불러내고 있다. 그에게 광야는 그런 생명의 힘이 생성되는 자리이다. 광야는 역사의 처음이자 역사의 지속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터전인 것이다.

 

 

 

3. 강 건너간 노래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 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같이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밤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 갔소.

- 이육사, 강 건너간 노래

 

 

섣달 보름, 달 밝은 밤에 시인은 노래를 부른다. 때가 때이니만치 서러운 노래이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는 밤에 부르는 노래는 제비가 되어 강 건너로 날아간다. 강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늘이 있고, 사막이 있다. 하늘에는 끝이 있을까? 사막에는 끝이 있을까? “못 잊을 계집애를 찾아 강 건너로 날아간 어린 제비는 금세 지쳐 그만 어느 모래불에 떨어져 타서 죽는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시인은 섣달 보름날을 견딘다. 차가운 달밤에 계집애 얼굴이 눈앞에 어른댄다. 강 건너로 가도 계집애의 행방은 묘연하다. 아니, 그녀는 지금 시인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린 날개를 달고 강 건너로 날아간 제비를 기다리며 시인은 노래를 부른다. 메아리가 없는 노래이다. 허공 속에 흩어지는 노래이다. 강 저쪽으로 건너간 노래는 강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소리는 하늘 높이 솟았다가 이내 사막의 모래불로 떨어진다.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그는 노래를 부른다. 이쪽에서 부르는 노래는 저쪽으로 건너가 흩어진다. 사막 위로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고, 푸른 하늘 아래로는 사막의 모래밭이 펼쳐져 있다. 무한(無限)이다. 인간의 노래=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자리에 하늘이 있고, 사막이 있다.

 

시인이 잊지 못하는 계집애는 하늘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시인이 부르는 노래를 그녀는 듣기나 하는 것일까? 한 맺힌 소리가 강 건너로 제비처럼 날아간다. 계집애는 어디에도 없고, 시인의 노래는 텅 빈 채 허공으로 흩어진다.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노래는 눈물 먹은 별이 되어 이 밤을 비춘다. 밤이면 눈물을 먹은 별들이 슬픔에 빠진 시인을 조상(조문)한다. 밤이 되면 임을 잃은 슬픔이 더욱 심해지는 것일까?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라는 구절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계집애와 이어진 옛일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무지개보다 고운 옛일이지만, 눈물 먹은 별들이 조문을 올 정도로 시인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강 건너로 흘러갈 뿐이다. 노래가 흘러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는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떠다니고 있다. 이육사가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시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 보면 그가 부르는 노래는 정확히 광복을 향한 한없는 열망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꼭이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 편의 시에는 다양한 의미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육사 시인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리 없다. 그가 추억하는 계집애는 기억=생각만으로도 시인을 슬픔에 빠뜨리는 압도적인 대상이다. 시인은 자신을 압도하는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는 한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계집애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밤하늘에 뜬 별들만이 그 슬픔을 위로해주고 있을 뿐이다.

 

강을 건너간 노래는 지금 어디를 흘러가고 있을까?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육사는 고향을 떠나 어린 날개를 달고 이곳저곳을 흘러 다녔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른 곳을 꼭이 고향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시인은 고향 밖에서 고향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이 노래를 통해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계집애도 고향을 떠났지만, 시인도 고향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고향을 향해 부르는 노래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눈물 먹은 별들로 상징되는 한의 정서는 이렇게 고향을 잃고 방황하는 식민지 시대인들의 비애로 승화된다. 개인의 한스런 노래가 민족의 한스런 노래로 변주되는 이 지점이 이육사가 살아온 시대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는 어떻든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인 것이다.

 

 

 

o*****s 2018.03.01. 신고 공감 5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