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원의 평론집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를 볼 때의 불편함과 부담스러움이랄까. 강준만의 공정성, 손석춘의 당위성, 고종석의 겸손...에 다가서지 못하는 나의 글발...뭐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평론은 내 양심을 계속 찔러대는 불편함을 주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명원을 주시할 것이다. 나와 같은 세대인 이명원의 평론집 [타는 혀]와 [파문]에 이어 [마음은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이하 마음)]를 손에 들기 무섭게 읽었다. 소설가 김도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듯 이명원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나를 쉼없이 긴장하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긴장과 불편함 속에는 굳어져가는 내 양심의 밑뿌리를 흔들어대는 바람이 있다. 이명원은 문학평론가이다. [타는 혀]라는 첫 평론집을 출간하면서 우리 사회의 '연고주의'와 소위 '김윤식 표절 논쟁'으로 패기를 인정받았지만, 대학교수로 가는 길목에서는 '왕따' 당했다. 이어 [해독]이란 평론집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아직 읽지 못했고, 세 번째 평론집 [파문] 역시 우리 문학계의 논쟁을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다. [파문]에서 이문열의 이데올로기와 서정주의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글은 정치적이다. 두 사람이 소위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이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성은 심각하게 왜곡돼 있는 점을 이명원은 세밀하고 정확하게 메스를 가하고 있다. 죽은 서정주도 그렇지만 살아 있는 이문열은 아직도 정치성을 띠면서 시론時論이 아닌 사론私論의 사론邪論이 읽는 나를 분노하게 했다. 이문열은 자신의 정치성향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매도하는 글을 자주 썼다. '홍위병'을 비롯해 나찌의 괴벨스 등 무시무시한 문화의 외피를 쓴 정치적 파시스트와 같은 레벨로 '타자'를 매도했다. 심히 문제다. 그 '왜곡된 정치성'을 이명원은 간단명료한 언어로 반박했다. 이명원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가난이 참으로 안스럽고, 가난의 힘으로 뿜어 올리는 용기의 글발에 압도되고, 용기와 솔직함에 자기성찰까지 담겨져 있어 나는 그의 글을 신뢰한다. 그는 익명의 대중성에 기대지 않고 오직 글쓰는 '나'를 말한다. 이것은 폭넓은 독서와 사유를 통한 정확한 지식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명원이 독서를 통해 "정서적 자극"을 받았다는 사람은 메이지시대 일본의 계몽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파문]에서도 그렇지만 [마음...]에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학문의 권장]이란 책인데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학문에만 전념해야 한다. 농업을 한다면 대농이 되라. 상업을 한다면 대상이 되라. 학자들은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낡은 의복과 소박한 음식, 그리고 추위와 더위도 아랑곳하지 말고 벼도 찧으며 장작도 패라. 벼를 찧으면서도 학문은 할 수 있다."(마음...79쪽)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장은 별 어려움 없이 읽히고 쉽게 다가온다. 적어도 내게는 로버트 풀검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같은 류의 문장처럼 느껴진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런 쉬운 문장에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정서적으로 자극을 받았다는 것은 책을 그만큼 쉽게 쓰겠다는 말이며, 읽히는 평론서를 내겠다는 다짐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평론가의 양심에 따른 주관적이지만 엄정한 글을 양산하겠다는 이명원의 굳센 의지를 행간에 담고 있다고 나는 읽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그의 책을 보면 이러한 엄정한 양심에 반하는 글을 아직까지는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쯤에서 자문한다.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지만, 이것이 업業이 될때는 일이다. 일은 아무리 좋아도 지겹고 권태롭다. "나는 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가". "나는 왜 회화를 보고 조각을 감상하는가". "나는 왜 음악을 듣는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개인의 확인이다. 철학적 용어로 슬쩍 덧칠한다면 실존의 확인이요, 칸트적 오성悟性에 들어가는 것, 곧 나를 알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욕구와 분노를 수반하면서 한 줄 한 줄 써내려간다. 그래서 쓴다는 행위는 나의 본질적 자아와 페르소나가 갈등하면서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순간의 기록이라서 영원하지 못하다. 문자란 쓰여진 순간부터 의미가 고정되어버려 내 생각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매개체이다. 그러한 언어를 기록하는 문인들의 고통을 이명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인들은 '쓴다'는 행위 속에 갇힌 수인囚人이다. 글이 쓰여지지 않을때, 그는 절망하며, 글을 쓰는 순간 그는 좌절한다. 글쓰기를 중단한 순간 그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며, 글쓰기를 시작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무능을 끊임없이 질책한다. 쓴다는 일을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는 문인들이 많은데, 이는 결코 엄살이 아니다. 작품은 먼지처럼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쓴다'는 일의 고통스러움은 그가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할지라도, 매순간 제로zero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미적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쓴다'는 행위를 매혹과 비극의 수제비로 만든다." (마음...109쪽)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줄기찬 노력이 미학을 낳았고, 미학은 철학의 줄기로 발전되어 왔다. 철학의 뿌리가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되었다면, 줄기는 '누구인지 알아가는 나는 과연 아름다운가'로 이어져 간다고 생각한다. 뿌리와 줄기는 근원이다. 어떠한 근원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은 발전의 모태가 되지만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내가 말하는 근본주의란 비교우위를 부정하는 도식적인 이분법, 흑백논리, 전체주의 등 한 개인의 사고를 어떠한 틀 속에 짜맞추려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한마디로 정의定義 할 수 없다. 이명원의 글은 그러한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롭지만 강건하고, 강건함의 뿌리는 논리의 명료성에 있다. 내가 보기에 이명원의 평론은 논리적이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그의 글이지만 세상 일에선 서서히 그도 나이를 먹어가는듯 하다. 예를 들면 "'사막' 같은 세상에서 사랑이 '오아시스'라면, 나는 그것을 흔히 '신파'라고 규정하곤 했다. 그런데 그 신파 속에 지랄 같은 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마음...71쪽) 이런 문장은 그가 열혈의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슬쩍 보여주는 것 같아 읽으며 슬며시 웃었다. 문학 평론 하는 일을 평생 업業으로 삼으려 하며, 평론가의 '엄정한 주관성'을 양심에 기대어 쓰려는 이명원의 글을 나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음악, 문학, 미술 등 예술이 감동을 주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이명원은 그 가운데 내 양심에 호소하며 다가온다.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를 지향하려는 내게 이명원의 글은 자극제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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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소금밭인 날 도서관에 가서 고른 책이다.오직 제목이 끌려서 읽게 된 책,그래서 내용은 내 마음과는 많은 상관없는 책이다.그의 마음이 넓은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아픈 거친 소금밭이었다면,내 마음은 작은 부대낌으로 아픈 고운 소금밭이었나보다.그럼에도 나의 의식을 한 차원 끌어 올려 준 고품격 비평서다.아~ 이런 책도 있구나! 이런 방식으로도 책을 보는구나! 일반독자가 책을 보는 방식과 비평가가 책을 보는 방식은 차이가 있구나! 그러면서도 그의 비평에 많은 공감을 한다.깊이의 문제만 생각하고 넓이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한 독자인 나, 깜짝 놀라 눈을 뜬다. 그는 황석영의 <심청>을 작품의 밀도에서 바닥의 수준을 보여주는 졸작이라고 말한다.자신의 관점에서 함량미달인 작품들에 대해 과감한 비판의 메스를 들인댄다.기억으로 이루어진 파편적인 소설에 대해서도 구성의 묘미를 요구한다.윤대녕 소설의 매너리즘이 ‘위험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B급으로 격하된다.카프카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작가들에게는 ‘자기세계’를 만들기 위해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고언한다.카프카의 세계관에 가까운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란다.결론이 뻔히 보이는 소설에는 작가에게 더 교활해지기를 원한다. 책의 뒷 부분이나 표지부분에 당연히 따라 나오는 평,신문지면에 올라오는 평,여기저기 쏟아지는 찬사들을 우리는 매일 접한다.하지만 그런 글들이 출판사의 판매전략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도 알고 있다.그래서 책을 고를 때 찬사만 믿고 골랐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그런 것들을 그는 주례사같은 비평이라고 말한다.그의 글은 거침없는 비평이다.그만큼 그는 삶에 대한 애정이 큰 것이겠지..세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잘못된 것을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던가.그는 잘못된 것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질책한다.그래서 그에게 비평은 돌맞을 각오하고 쓰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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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사정을 좀 아는 이들에게 ‘이명원’이라는 이름은 논쟁 또는 파문의 이미지와 더불어 다가온다. 그가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들춰냈고, 김현 등 4•19 세대의 세대론적 인정투쟁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문학출판의 상업주의와 ‘주례사비평’을 열심히 고발해 온 이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문학평론가 치고도 드물게 섬세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유려한 문체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이명원씨가 <타는 혀> <해독> <파문>에 이어 네 번째로 펴낸 저서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는 논쟁의 날선 이미지에 가려진 그의 부드러운 면모를 확인시켜 주는 문학 산문집이다. ‘문학 산문집’이라는 것은 이 책이 본격 평론이라기에는 분량이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데다, 그 대상 또한 문학작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화와 책, 사회현상과 정치현실 등으로 다채롭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마음이 소금밭인 어떤 날, 저자는 도서관에 갔다. 예전에 읽은 허균을 다시 읽었다. "관 뚜껑을 닫기 전까지 대장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저자에게 특히 울림의 컸던 허균의 글이라고 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독자를 공명하게 한 이 글은 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유된다. "마음이 소금밭인데도, 되도 않는 글을 써야만 한다는 거은 괴로운 일이다. 고통으로 속이 꽉 찬 개그맨이 사람을 웃겨야 된다는 아이러니가 그런 걸 거다. 내 안의 소금밭을 부지런히 갈기 위해서라도, 그 짜디짠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허균의 말을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붓두껍'을 닫는다고 해서 문인이 죽는 것은 아니다." “비평의 대상이 ‘문학’이냐 ‘영화’냐 아니면 ‘사회’냐 하는 질문은 오히려 사소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촘촘한 경계들을 가로질러 ‘다른 무엇’을 보고자 한다는 것이며, 이때 그것은 ‘현실의 구조’ 전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비평=삶’이라는 도식이 가능해진다.” <‘직업으로서의 비평’을 위한 한 비평가의 각서>라는 글에서 그는 비평이 텍스트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사회 전체로 시야를 넓힐 것을 요구한다. “사회적 ‘의제설정’ 과정에 문학비평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한국문학의 질적인 수준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에 있다”는 우울한 지적을 내놓는데, 그가 자신의 비평의 대상을 문학작품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또 다른 사정이 여기에 있어 보인다. 그가 다른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 일본문학에 논의할 만한 작품이 없어서 현장비평을 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토로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황석영씨의 소설 <심청>을 두고 “단적으로 말해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 규정하며, “윤대녕의 소설이 보여주는 인식의 아름다움과 스타일의 새로움도 이제 상투형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김훈의 문체를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다”라고 혹평한다. 그가 선호하는 글은 고종석씨의 것이다. “고종석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단 한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고종석의 글쓰기의 비밀이 ‘누이 콤플렉스’라고 명명할 법한 ‘아니마 지향성’에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김윤식씨의 문체를 두고 “허무의 진정성을 체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현보다 높이 평가하며, 김현에 대해서는 “텍스트에 굴복하는 척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텍스트를 지배한 비평가”였다고 다소 복합적으로 평가한다. 누군가의 이런 고백을 이끌어내는 글을 나도 쓰고 싶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심하게 반응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거칠게 고개를 가로젖는 이도 있을 것이고, 책을 읽는 도중 대체 글쓴이가 어떤 놈인가 궁금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서서히 깨닫는 바, 이런 글을 쓰려면 그만큼 내 삶과 그에 대한 고민이 깊어야 한다. 사람을 한 번 만나더라도 그 사람과 가슴 아픈, 혹은 가슴 시린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아무 의미 없이 보내는 내 일상일지라도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후벼파야 한다. 삶이 불편해질수록 삶의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
| 휴일을 모두 투자하여 밤을 꼬박 새워 가슴속으로 피를 토해가며 작성한 보고서...월요일날 퀭한 다크-서클을 자랑이라도 하듯 부서장 책상에다 정성스럽게 깔아놓았는데...잠시후...기대했던 부서장의 긴급 호출...ㅋ 고생했어...저녁에 한잔 빨자구 ㅎㅎ 라는 멘트가 나올 것을 잔뜩 기대하고 들어갔겄만...이걸 보고서라고 썼니? 뻔한 이야기를 x나게 어렵게 적어놓고...한 이야기 또 하고 다시 또하고...폰트는 또 이게 모니? 줄도 제대로 못 맞추고...으휴...이걸 너에게 맡긴 내가 잘못이지...나가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당장 넥타이를 풀어 부서장의 목에 두르고 꽈악 졸라주고 싶지만...집에 있는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이 머리속에 떠올라 죄송합니다...다음부터는 잘 하겠습니다...단 두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와 앉는다...당췌 일이 되지 않는다...끓는다...그래도 새가 빠지게 휴일을 희생하며 작성한 보고서인데...아무리 그 내용이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던져주는 것이 인간과 인간간의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겠는가? 쥐~미...니가 직접 써봐라...x또 모르는 것이 어서 비아냥거리는 것만 배워가지고...보나마나 그 좌식...내가 쓴 보고서에서 토씨만 좀 바꾸고 위로 보고해서 칭찬받겠지...띠바...짬밥이 웬수다...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시키가. -_- 인간들마다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모든 인간의 비위를 동시에 전부 맞출 수 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잘 알겠지만...2002년 온 국민이 새빨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광장에서 거리응원에 여념이 없었을 무렵에도...이를 광적인 대중적 선동주의로 폄하하며...좀 조용히 살자고 목놓아 외쳤던(하지만 붉은 악마의 거대한 응원소리에 묻혀버리고야 말았다ㅋ)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는 말이다...결국 어떤 문화이건 간에...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컬트가 있는 것처럼...반대로 이를 x나게 미워하는 족속들도 있다...드넓은 바다에도 밀물과 썰물이 존재하는 것처럼...문화와 예술의 도도한 세계에도 역시 매니아와 안티팬들이 서로 힘의 발란스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비록 감정싸움이나 빈정거림이 있을 지언정...이들이 주먹다짐을 벌인다거나 알아먹기 힘든 개쌍욕을 날리는 몰지각함은 없는 사회...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구조가 아니고 무엇이랴...한 문학작품이 있다...이 작품을 토해낸 작가의 입장에서 난 이 작품을 딱 내가 뭔 짓을 해도 사랑해 줄 수 있는 팬 300명을 위해서 쓴 것이니...오직 그들만 내 작품을 읽고 만족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이들이 나의 작품이 외설에다가 읽을 가치조차 없는 대왕쓰레기라고 욕해도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해줄 수 있는 빠순이들만 만족한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그렇다..ㅋ 말도 안되는 수작이겠지...오케바리. ㅋ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이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가지게 되는 가치관은...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천차만별의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바...아무리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매우 지루하고 썰렁하며 따분하게 느낄 수도 있다...반대로 통속적이고 포르노틱한 소위 ''3류''라고 분류되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바로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곡 한번 읽어야만 할 작품으로 소개하고야 마는 막가파도 존재할 수 있다...물론 후자의 경우, 대가리에 똥만 찬 무시칸 넘이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실컷 해줄 수는 있을 지언정...그의 문학적 소양이 비인간적이라고 대놓고 까발릴 수는 없다...괜히 이야기를 했다가 후자에게 후장이 터질 정도로 두들겨 맞을 가능성도 있고...그 작품을 쓴 저자의 빠순이들에게 집단 다구리를 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그래서는 안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문학작품에도 열외는 없다...호감과 비호감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그 힘의 균형을 교묘하게 허물고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갖도록 하기위해 주야를 막론하고 쌩땀을 흘리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우리는 겁없는 이들을 가리켜 ''문학평론가''라 칭하고 있다...ㅋ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평론가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은 상당히 씁쓸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대놓고 반론을 던지기에는 예술가라는 입장에서 대중들에게 다소 쪽팔린 일이 아닌가...선술집에서 만난 양아치마냥 대놓고 맞장을 까자고 쌍스러운 욕을 날릴수도 없는 노릇이고 ㅋ 그저 조용히 작업실에 들어앉아 소주 한병을 들이 부으면서 속으로 한 소리 하겠지...쥐미...니가 한번 써봐라...씨불...ㅋ 남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간편한 일인가...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열라게 야리고 앉았는데...한 작품을 이루는 수많은 문장들 가운데 걸리지 않을 재간이 있을쏘냐...꼬투리 잡혔다 하면 이에 베이킹 파우더를 쏟아부워 한 껏 부풀려 놓은 뒤...저자의 인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관점을 적절히 배합하여 속을 벅벅 긁어놓을만한 훌륭한 비평을 내어놓는 것이지...ㅋ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엿같으 비평고는 반대로 호평도 존재할 것이 분명한 바...작가와 비평가들의 관계는 완벽한 대치구도라기 보다는 서로 공생하는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ㅋ 아님말구. 이 책의 저자는 패기넘치는 문학평론가다...그의 날이 바짝 선 비평은 선배고 나발이고 전혀 먹히지 않는다...시간낭비, 섹스 판타지 수준, 미학적 사기, 언어도단, 지성의 파탄 등 작가의 가슴을 후벼파는 독설(아마도 저자는 죽을 때까지 비평만 해야지, 괜히 작품을 썼다가는 엄청난 보복을 당할 것이 분명토다 ㅋ)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것도 인생후배에게서 듣는 비평이 썩 듣기 좋을리는 만무하지 않을까 ㅋ 어쨋든 이런 비평을 읽는 독자들은 즐겁다...적어도 수많은 작품들 중 명저를 선택하는 하나의 기준은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명심할 것은...비평가도 인간일 따름이기에...그의 관점에서 명저인 것이 나의 입장에서도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결국 내가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에...비평으로 때우기보다는 직접 일독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일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빌며...겁없는 젊은 비평가의 호쾌한 비평에 푹 빠져보실 분. 강추하노라.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