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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삶의 저자
"천재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삶의 저자" 내용보기
"머리에 인 짐은 무겁지,아이는 등에서 울지,치마는 흘러 내리지,비는 오지,변소에는 가고 싶지...."- 하성란, 그 여름의 수사, [여름의 맛]. 171면고 이어령 선생님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동반자인 강인숙 선생님을 모르고 있었던 내가 부끄럽다. 두 분은 서울대 국문과 동기 동창이다. 강인숙 선생님 역시 독보적인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영인문학
"천재의 그림자가 아닌, 자기 삶의 저자" 내용보기

"머리에 인 짐은 무겁지,
아이는 등에서 울지,
치마는 흘러 내리지,
비는 오지,
변소에는 가고 싶지...."
- 하성란, 그 여름의 수사, [여름의 맛]. 171면




고 이어령 선생님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동반자인 강인숙 선생님을 모르고 있었던 내가 부끄럽다. 두 분은 서울대 국문과 동기 동창이다. 강인숙 선생님 역시 독보적인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영인문학관장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평생을 악전고투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시대의 지성인 남편을 내조하면서도 자신 세계를 끝까지 지켜낸 강인한 투사였다.



남편은 선생님에게"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168면) 이었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남편을 위해 그의 잡무와 온갖 집안일을 자청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남편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그녀의 사랑법이었다.



헌신은 가혹했다. 원래 몸이 약한 데다 교사 일과 세 아이를 돌보는 일로 몸무게는 40kg 밑으로 떨어졌고, 갑상선 혹이 80cm나 자랐다. 대가족의 뒤를 시중들며 자주 시간을 침해당했다. 비극은 연달았다. 외손자의 돌연사와 장녀 이민아 목사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할퀴었다.



"돌아가신 지 1년 반이 된 남편이 보고 싶어서
울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10년 전에 떠난 딸과
12년 전에 간 외손자가 따라 나온다.
그 애들은 그렇게 아직 내 곁에 있다.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덮어져 있었을 뿐이다."
- 129면




저자는 모든 것을 내어놓으면서도 모든 일을 감당했다.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저자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감히 들었다.

여성에게 선택권이 없던 시대, 가족을 지키는 일은 곧 존재의 증명이었다. 더욱이 천재적인 남편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자신을 낮추며 버틴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만의 삶을 일궈낸 방식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병든 몸으로 가르치고, 아픈 마음으로 읽고 썼다. 근성을 넘어선 강한 자의식을 엿본다. 자신을 깊이 사랑했기에 주어진 역할과 애정을 끝내 놓지 않았으리라.

거기에 저자의 사랑은 한결같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신나는 일만 있어서 종일
남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하루가 너무 충만하고 좋았기 때문에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
어느 하루가 참 좋은 날이구나 싶으면
그의 부재가 가슴을 후빈다.
춘향이네처럼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수는 없는 것일까?"
- 143면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부 역할의 불균형을 피해의식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억울함 대신 자발적 선택으로 늘 앞서 생을 이끌었다. 서로에게 최적화된 방식으로 사랑을 조율했다. 남녀평등을 외친지 오래인 지금의 우리에겐 참으로 놀라운 경지다.


저자의 삶은 희생이었을까. 어울리지 않는다. 선택권이 거의 없는 시대에서조차 저자는 자신이 감당할 삶의 방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저자는 천재의 그림자가 아니라 온당한 자기 삶의 저자였다. 두 지성은 각자의 세계를 품은 채 평생을 동행했다. 



이어령의 아내이자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은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한 세대 여성의 삶의 보여주었다. 교과서나 논문이 아닌, 당사자의 육성으로 듣는 생생한 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의 여성들을 희생한 어머니로 단순화하기 쉽지만 저자는 그 프레임을 깨뜨렸다. 



40kg도 안 되는 몸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석 달씩 누워서도 책을 읽고 집필하는 모습은 자기 삶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모습이다. 이 복잡한 실존을 목도하며 나의 삶을 되돌아봤다.



완벽한 컨디션, 최적화된 환경을 기다리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힘. 일과 가정, 자아실현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양자택일이 아닌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 삶.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삶 앞에서, 나의 삶을 다시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질문들을 품으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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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사락 g******7 2025.12.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