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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함을 넘어선 제목의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책을 펼쳐볼 용기가 필요해지는 문장의 무게라고 해야 할까. 죽음 앞에서 유쾌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유쾌함을 꿈꾸지만, 삶의 마지막이라고 하면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그저, 잘 마무리하고 싶을 테니까. 그래도 결국 용기를 냈다. 조금이나마 책을 알고 싶어서 펼치기 전, 표지부터 살펴봤다. 사람의 얼굴 형상과 손 모양의 일러스트가 있었다. 거기에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이라는 부제가 적혀 있는. 책을 펼치고, 조금 읽어 나가면 마주하게 되는 존재가 약해진 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듣기만 해도 걱정이 한가득 되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만나게 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드리우는 알츠하이머라니…. 그래서 더, 책을 펼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다시금 직면해야 하는 아픔일 수 있으니까. 아픔을 직면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안다. 저자의 다층적인 직업, 신학자, 윤리학자, 철학자, 페미니스트, 목사 어느 하나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임을 느낀다. 그녀만이 아니라 조금은 급격하게 변화되는 가족의 일상이 담겨있는 글을 만난다. 보다 정확한 워딩으로는 아버지의 질병으로 인하여 마주하게 된 ‘죽음’, ‘고통’, ‘기억’, ‘부재’에 대한 성찰을 마주하게 된다. 삶을 해석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는, 어머니는, 배우자는, 자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래서 저자의 도입부 문장은 나에게 신학이 무엇인지를 보편적인 틀로 바라보도록 교정해 주었다. 모두에게 필요한 신학이라고. 신학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삶의 해석학으로서의 신학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며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에게나 유효한 것이 아니다. 신학의 언어 핵심에는 경쟁이 최우선의 논리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아등바등 생존하기 위해 타자의 취약함을 쉽게 외면하던 우리의 삶이 정말로 정당한 것인지 따져 묻는 ‘보편적 질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8쪽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존버정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땅 위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타자가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을 물어오는 질문이랄까. 단 하루도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 인간이니까. 책은 그래서 저자의 삶은, 하루하루가 가족과 이웃, 케어센터 직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짐을 지속해서 보여준다. 병의 진행에 따라서 어려움이 펼쳐질지라도 서로를 북돋아 주고 사랑으로 이기는 사람들을 보게 한다. 맨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병원과 가족의 돌봄으로 사회화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듯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어른에게도 병원과 가족의 많은 돌봄의 시간이 필요하다. 번개처럼 빠르게 달라질 수도 있지만, 천천히 하나씩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소중한 순간순간마다 가슴 속에 담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되고. 그래서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 더욱 이해된다. 사랑하니까 그런 거다(책에서 직접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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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을 넘기고, 그저 책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느꼈다. 나의일 내가족의일 내주변의 일이 언제든 될 수 도 있는 일이다. 읽는내내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고 단순한 슬픔이 아닌 뭔가 심장이 아려왔다. 자식을 잊어가고 가족을 잊어가고 나자신을 잊어가는 건 너무 가혹한일인것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