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녀의 첫 시집에 대한 나의 독법은 「열림」과 「닫힘」, 「사이」와 「경계」, 「새김」과 「지움」이다. 사물을 대하는 유아적인 동심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현상학적인 응시로 인해 보다 성숙한 시적 내용과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3쌍의 코드로 저자의 시적 상상력을 읽는다. 그렇지만 어떤 시들은 병적인 자폐와 뒤틀림의 흔적이 보이고, 시인의 눈에 담긴 풍경은 도회적이며 아파트에서의 일상적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적 풍경의 다양함을 위해 산골이나 바닷가로의 여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편식이 간혹 건강에 이로운 법이 있듯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시만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개인적으로 다음 7편을 추천한다. 먼저 〈드럼 연주법〉〈시소의 감정〉〈세모난 구멍이 필요해〉〈잃어버린 천장〉 모두 현상학적 응시와 시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각각 드럼, 시소, 수박, 바닥이란 사물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이 시적 상상력으로 화려하게 피어난 셈이다. 〈드럼 연주법〉은 가죽의 노래가 텅빔과 긴장 그리고 떨림으로 얼룩져 있음을 논증하고 드럼이 갖는 음악성과 리듬감에 야수성을 부여한다. 내용상 서양의 드럼보다는 동양의 북이 더 어울린다. 시인은 마치 광기 어린 드러머나 신들린 고수처럼 자신의 악기와 접신을 벌이는 듯하다. 〈시소의 감정〉은 시소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 사적인 체험을 철학적으로 형상화시켜 현대인의 실존적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시소의 균형을 맞추려면 몸무게와 신장이 서로 어울리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결코 혼자서는 탈 수 없는 시소지만 누구나 혼자서 타보게 되는 게 또한 시소다. 〈세모난 구멍이 필요해〉는 수박장수가 손님에게 수박이 잘 익었는지 증명해 보이는 행위에서 수박의 속내와 현대인의 감수성을 비유하고 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와 〈잃어버린 천장〉은 현재와 그림자를 잃은 싸늘한 주검처럼 뚜렷한 정체성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비가다. 자신의 본래의 색채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잠들어 있거나 침묵하고 있는 평범한 투명인간에 불과하다. 〈A 그리고, a〉는 씹을수록 맛있는 시다. 기호의 모순성과 시각성을 잘 살리며 상반된 두 존재의 삶과 반면에 자폐적이고 소통 불능의 동일한 정서를 묘사한다. 기호의 모순성이란 점에서 보면, 키가 계속 크는 사람과 키가 계속 크지 않는 사람이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슬픔과 악수하는 사람들〉과도 닮았다. 대문자로 표기된 작은 여자 A는 사실 깡마른 몸매에 키가 큰 아직 애인을 만들지 않은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소문자로 표기된 큰 여자 a는 아담한 몸매에 통통하고 다이어트에 나름 신경을 써보는 여자다. 시를 읽으면 음식남녀적인 소재를 가지고 상반된 성격과 식성을 가진 두 여성의 존재적 소외를 다룬 박철수 감독의 영화 〈301 302〉가 떠오른다. 301호와 302호의 두 여자처럼 A와 a의 삶도 다른 것 같지만 종국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실존적 소외의 음영은 어두운 버스 안에서 더욱더 짙어갈 뿐이다. 〈이 말을 당신의 의자에 앉아 쓰고 있다〉는 난해한 시지만 다양한 풍경의 편린들을 떠올리게 한다. 방안의 의자에서가 아니라 마치 흐린 날 오후 공원 벤치에 앉아 써내려 간 시 같다. 언뜻 시집은 독자와는 무관한 자율적인 뜨거운 생명력이 있다고 항변하는 시집의 노래처럼 들리기도 하고, 언뜻 시의 운명에 대한 풍자와 더불어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한 자조도 깔려 있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 여백과 쉼표, 기억과 망각을 떠나서 시를 말할 순 없음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최근에 읽은 시집 모두가 서양, 도시, 아파트, 커피, 카페, 일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여성의 시집이었다. 반대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집은 동양, 전원, 산수, 녹차, 도서관, 사유를 떠올리게 만드는 남성의 시집이다. 시집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할 때 한 수의 시든 시집 전체이든 51%의 좋은 느낌이 있다면 그 시를 정성껏 낭독하거나 시집을 사는 것이 좋다. 49%의 밋밋함과 실망은 깨끗하게 내버릴 수 있는 게 바로 인지상정이고 한 권의 시집을 대하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내가 산 시집에 모두 몇 수의 시가 실려있는지는 항상 궁금증을 일으킨다. 김지녀 시집에는 총 51수의 시가 실려 있다. 1부 17수, 2부 17수, 3부 17수. 시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 숫자에 집중해보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
|
2010년 정월 초하루의 첫 서평은 김지녀 시집 '시소의 감정'이다. 며칠 전부터 앞,뒤 잡스러운 내용 빼고 순수 시만 100쪽도 안되는 시집을 잡고 무던히 읽고 또 읽어본다.
언젠가부터 젊은 시인들의 시가 아무리 읽어도 감정이입이 잘 안되는 난해함과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시는 마음을 아름답게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져야하는데, 읽는 이에게 부담을 주고 동화되지 못하는 시를 놓고 그 깊이가 어쩌니저쩌니할 때마다 역겹기만하다. 아마도 그들은 나의 시적 감미 수준이 낮다고 질타하겠지만, 어쩌랴? 시가 시인의 마음을 넘어 지면에 활자화하였다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독자와 공감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었을 것인데, 다수가 외면하고 소수의 분들만 희열을 느낀다면 마이너리티에 속해야 하지 않을까? 소통의 지평을 넓혔느니, 문학의 쟝르를 확장하여 풍요롭게 했느니 하는 미사여구는 왠지 공허한 지자의 항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Kenneth Gergen은 그의 저서 "흡수된 자아: 현대생활과 정체성의 딜레마"에서 전자매체의 발달과 사회환경의 급변 때문에 현대인들이 겪어야하는 어려움에 대해, 낭만주의적 자아관과 근대적 자아관 모두가 사라져가고 있고, 그러다 보니 진실한 자아(authentic self)라는 개념이 희미해져서, 결국 사회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린 자아(saturated self)는 전혀 없는 자아(no self at all)가 되고 만다고 하였다.
오랜만에 시에 대하여 한 필 하려니 서설이 길었다. 김지녀 시인의 '시소의 감정'을 읽고 느낀 첫 소감은 감성을 사물화 시키는 능력과, 그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귓속에서 자라나는 돌멩이에 관한 기록이다
대단하다.
이 시인의 이름은 아마도 "오르골 여인"으로 2007년 제1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을 하면서 알려졌는가보다.
이외에도 '드럼연주법'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자장면을 먹으며'를 떠올렸고, '오랫동안'도 좋았고, '세모난 구멍이 필요해'에서 느낀 유년의 추억, '기쁘거나 슬프거나'와 '아홉개의 손가락으로 쓰는 편지'등에서 많은 사념의 시간을 보내었다.
이렇게 쓸려니 끝이없다.
대학시절 시평을 써본 후 이런 류의 글을 적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잊혀져가는 감성을 되살려, 상당히 괜찮고 마음에 드는 시인의 시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인년의 새로운 행운이라 하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
어릴 적 '시'는 그냥 '시'라고 생각했고 가장 쓰기 쉬운 작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에 와서 직접 '시'를 써보면서 어쩌면 글과 이야기를 함축하는 '시'야말로 가장 어려운 글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래서 '시'는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당신이었고, '시'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문학동아리었으면서도 시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읽었고, 그래서 인지 제 '시'를 보신 졸업선배들 말씀으로는 '시'는 나열하는 것이 아니니 시를 잘쓰려면 많은 시를 읽어보고 필사를 해봐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전시는 이야기하는 '텔링'이었지만 요즘에는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한다고 하셨는데, 그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소의 감정'을 읽고 요즘 현대시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이미지로 모든 이야기를 전달하고 간략하게 해놓은 현대인들의 특성을 반영하는 듯 말입니다. 문학은 언제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또한 시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요? 요즘 시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시집의 제목인 '시소의 감정'이라는 시는 특히 항상 불리우는 언니라는 소재를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이야기 합니다. '언니'라는 무게감을 시소로 표현한 작가 김지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것같습니다. '언니'라는 공통적인 명사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생각을 저절로 든답니다.
시집은 좋은 것이 더 있는데, 한편한편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다보면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고 그 뜻을 곱씹어 볼 수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가을에는 시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집을 덮었지만 또 몇번이나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만큼 많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시'이니까요.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브레히트 |
|
정말 오랜만에 시를 접했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나던 감수성 예민한 그 시절을 끝으로, 시집을 손에 잡아본 기억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홉이라는 숫자 끝으머리에 서 있어서 일까. 괜시리 멋진 시 한편을 놓고 사색에 잠기고 싶어하는 건.
김지녀. <오르골 여인>외 5편으로 세계문학 1회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 <<시소의 감정>>은 3부로 나누어 져 있다. 무지한 내가 무엇을 기준으로 3부로 나누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확실한 건 내가 느끼기에 시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접해 본 시집이라 적응이 쉽지도 않았지만, 특히나 1부에 있는 열 일곱 편의 시들은 조금 어려웠다. 때문에 짧은 글이지만 오래 생각해 보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2-3부에서는 좀 더 친숙한 시를 접할 수 있었다. <1978년식 취미>를 보면서, 나는 나도 1981년식 취미를 가져야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마치 가까이에 있는 친구가 하는 말처럼, 이 시들이 나오는 거리가 먼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이 너무나 편안하게 잘 이야기 해주고 있다는 느낌. 그야말로 친숙함, 인 것 같다. 너무나 어려운 철학적인 언어들로 이해하기 힘든 것도 아닌, 우리가 조금 되짚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 하고 있기에 시를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풍요로웠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낙엽을 보며 읽는 <시소의 감정>은 나의 감정까지도 기울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 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이 겨울의 초입에서 좋은 시집을 접하게 되어 좀 더 풍요로운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계절이 될 듯 싶다. |
|
하얀 바탕에 연두색 무늬는 너무도 눈에 띈다. 또 한 '시소의 감정'이란 제목 자체도 순수함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시집을 접하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하였다. 표지와 같이 순수한 동시 수준을 생각하며.. 사실 동시를 기대하며 읽은 본인의 마음 때문인지 여기 있는 모든 시들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나오는 몇 편의 시를 감상할때가 생각난다. 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단지 그것을 글로써 대할 때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내용. 그러나 시인에 대해 알게 되고, 또 그 시가 쓰여진 시대적 상황을 배우고 하면서 차츰 차츰 그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느낄 수 있었다. 시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 단어가 사실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메모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메모를 하면서 정말로 시인이 이런 의도로 이것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때다 많았다. 정말로 작가의 의도대로 우리는 배우고 있는 것인가. 국어 선생님이 정말로 그 작가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은 이상 완벽한 해석은 불가능 하리라 생각된다. 이 시집에 있는 시들도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시인 김지녀라는 분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지만 그다지 해석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햇다. 다만 시집의 맨 처음에 써 있는 말인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자 많은 시들에서 그 아픔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표지는 매우 밝으나 모든 시에서 어둠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부드러운 드라마식 영화나 해핑 엔딩을 좋아하는 본인은 이 시집에서 다소 당혹감을 느낄때가 많았다. 시소의 감정이라는 제목 자체도 동심이 느껴지기 보다는 음산함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사실 이 시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본인이 서평을 쓴다는 자체가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본인과 같이 평범한 일반인이 느끼는 솔직함 감정이라고 봐주었으면 한다. |
|
살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방법은 가끔씩 시를 통하여 마음을 확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목인 시소의 감정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이 어떤지 한번 생각을 해보았다.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전에 또한 좋은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현재의 삶에 충실한다는 것들을 시속의 내용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때론 많은 아픔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정화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세계에서 시가 가장발단된나라는 이란이라고 한다. 거기에서는 시를 추앙하여 대표적시인들은 국부로써 존경까지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불안전한 사회는 아니다 다만 서구적인 시각으로 볼때만 우리들에게 나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외국은 우리나라를 불안한 나라들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삶은 즐겁고 행복하다. 시가 발달되고 마음이 풍요로운 삶이 계속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사회는 더욱 더 행복해질것이다. 시를 통하여 내안의 내면을 정화해서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
|
시를 읽었다. 간간히 시를 읽었지만, 한 권의 시집을 끝까지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작년 한 해 읽은 시집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시를 안주지 못했다. 아니, 시를 읽지 못했다는 게 더 맞다. 김지녀의 시집 『시소의 감정』을 시작으로 시를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지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가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그건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리라. 시인에게 모든 것은 시로 귀결되는 건 당연한지 모른다. 아니, 시를 쓰는 동안만 시에 집중할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안다. 나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튼 김지녀의 시는 시가 가진 거리감보다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내게 그러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 때문이다.
에이, 라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하다 낮에도 밤 같은 방에서 작은 여자 A는 밥 먹고 잠잔다 그리고 가끔, 웃는다 아직 오지 않은 애인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요리를 한다 매일 작은 여자 A와 무관하게 큰 여자 a는 계란을 삶는다 아직 떠나지 않은 애인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흰자에서 노른자를 골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웃는다 가끔, 초인종이 울리기도 한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말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문을 열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이, 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작은 여자 A와 큰 여자 a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덜컹거린다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다 - p. 30~31 <A 그리고, a> 전문
재미있는 구조의 이 시는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울컥하기도 한다. 작은 여자A 와 큰 여자a는 같은 여자이거나 다른 여자이거나 그럴 수 있다. 아니면 당신이거나 나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주의깊게 관찰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애정을 갖고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문득, 내가 밥을 차리는 모습이나 물이 끓는 주전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떨까 묘사하고 싶어진다. 뜨거운 김이 나오는 주전자 입을 주시하며 비스듬히 서 있는,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식탁에 앉자 큰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내어 작은 접시에 덜어 놓는, 걸레를 빠느라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베란다에 기대어 분주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모습 말이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시가 있다.
키가 계속 크는 사람과 키가 계속 크지 않는 사람이 만 나 악수를 하고 있다
아주 커다란 바지를 입으면서 바지 밑단으로 빠져나오는 또 커다란 발을 보면서 키가 계속 크는 사람은 구부정하게 버스를 타고 어깨동무도 없이 길거리를 타박타박 걷고 대문짝만한 이빨을 보이면서 아래로 아래로 눈길을 주고
계속 키가 크지 않는 사람은 아주 작은 신발을 신고 발 닿지 않는 의자에 앉아 발을 흔들거리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모자를 벗고 손을 내밀면서 위로 위로 눈을 맞추고 있다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저렇게 나란히 서서 기타 를 치고 노래한다면 이 끝과 저 끝의 중간쯤에서 슬픔도 만나 몽글몽글한 웃음이 될까 가슴 닿는 포옹 한 번쯤 할 수 있을까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감싸 쥐며 악수를 하고 있다 키가 커서 키가 작아서 슬픔과 슬픔이 만나서 반갑게 웃고 있다 - p.61 <슬픔과 악수하는 사람들> 전문
김지녀의 시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던 시는 바로, 시집을 열면 마주하는 첫 번째 시다.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 시를 읽을 때까지 맴돈다. 그건 이 시집 전체를 보면 좋은 건 아닐 수 있다. 대표적인 시로 각인되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반할 수 밖에 없는 정말 아름다운 시다.
이것은 귓속에 자라나는 돌멩이에 관한 기록이다
귓가에 얼어붙은 밤과 겨울을 지나 오랫동안 먼 곳을 흘러왔다 시간을 물고 재빠르게 왔다 부서지는 파도의 혀처럼 모든 소리들은 투명한 물결이 되어 나에게 와 덧쌓이고 뒤척일 때마다 일제히 방향을 바꿔 내 귓속, 돌멩이 속 으로 돌돌 휘감겨 들어간다
이것은 소리가 새겨 놓은 무늬에 대한 기억이다
돌멩이의 세계에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닫고 누워 처음으로 지붕이 흘려보내는 말을 들 었을 때 나는 캄캄한 밤을 떠다니는 한 마리 물고기에 불 과했다 몸에 붙어 있는 비늘을 하나씩 떼어 내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 지붕에 가닿을 듯 그러나 가닿지 못하고 지붕 위에서 소리들은 모두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사라졌다 빗 소리가 해를 옮기는 동안, 내 귀는 젖어 척척 접히고 나는 자꾸만 아래로 가라앚아 갔다 천천히 단단해지며 돌멩이 가 또 한 겹, 소리의 테를 둘렀던 것이다
언젠가 산꼭대기로 치솟아 발견될 물고기와 같이, 내 귓속에 는 소리의 무늬들이 비석처럼 새겨져 있다 p. 15~16 <耳石> 전문
김지녀의 시는 일상의 관찰과 기록, 동화적 소재를 통해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슬픔을 달래는 작업을 하는 듯 보인다. 시 <오르골 여인>를 보면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 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기린과 나> 에선 껌벅이는 눈, 기린이 긴 혀로 날름거리며 나를 핥고 있다 / 나는 콧등에서 발등까지 순식간에 흐물거리다 녹아내린다 / 이것은 적도가 내 몸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 / 한차례 소나기 후, 오후가 끈적해졌기 때문 / <마녀의 저녁 식사>란 시도 그렇다. 그림자는 남쪽으로 걷지요 동시에 / 난 북쪽으로 떠나요 / 슬픈 얼굴로 그림자를 행해 안녕, / 크게 손을 흔들며 안녕, / 그림자와 멀어질수록 자꾸 웃음이 나요/
이런 시도 좋다.
이곳에서 나는 망명한 짧은 역사(歷史)가 된다
나는 내 방이 없다 창문과 책상과 침대가 없다 침묵은 나와 다른 시간에게 겸손해지는 일
당신은 나를 짚어 가며 아무 곳에나 쉼표를 찍고 두세 페이지를 쉽게 건너뛸지도 모르지만 나를 떠나 다시 나에게로, 회귀본능의 어류처럼 내 기억은 당신의 길 밖에 있다
가는 비가 내리면, 나는 당신이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책의 어디쯤에서 선사시대의 금 간 유물처럼 단단해진다 들춰 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늘 내 말은 비석처럼 차가워지고
당신은 종이에 물을 뿌려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묻어 나온 것들은 간혹, 당신이 읽어 낼 수 없는 나의 여 백이거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지는 먹구름이거나 나는 여기서 쉼, 표를 찍는다
당신을 쓸며 간 바람의 필체를 그냥, 흔들림이라 말할 수 없듯이 누웠다 일어나는 일은 내게 오래도록 잠수했다 물 위로 떠오르며 내뱉는 호흡 같은 것이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일 그것은 흐르고 흘러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 온다 가지 않는 비가, 내 역사를 소란스럽게 두드리 며 간다
당신이 책을 덮은 뒤에 내 체온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다 - p. 80~ 81 <이 말을 당신의 의자에 앉아 쓰고 있다> 전문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책이 된다. 그리고 비를 만나고 빗소리를 듣는다. 진짜 비가 내리는 깊은 밤에 읽게 되다면 더 좋겠다. 비가 오면 나는 이 시집을 꺼내들고 귀를 열어 빗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럼 그 밤에 나는 슬픔을 달래주는 시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이다. |
|
시집의 제목이 풍기는 느낌이 너무 신선했다. <시소의 감정>이라는 다소 낯선 제목을 싱그럽게 해 준 것은 초록색과 함께 한 겉표지의 디자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시집과의 대면을 앞두면서 시가 참 맛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를 맛있게 읽는 방법은 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고, 주변의 분위기를 맞춰 주는 것이다. 거기다 이왕이면 소리를 내서 읽으라는 많은 분들의 충고를 따른다면, 내가 이 시집과 대면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읽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나의 시 읽기는 부끄러움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권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경이로움이 시인에게는 더 가중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꾹꾹 눌러 쓰고,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내는 그들의 노고가 어떠한지 시를 읽어보면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런 시를 마주한 독자는 그 시들을 읽는 태도가 어떠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그 노고를 들춰내기 민망할 정도로 스르륵 읽어가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시를 음미하거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내게는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그렇게 무작정 읽어내려 가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 시집을 덮어 버릴 때가 많다. 이렇게 읽는 것이 무의미 하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렇기에 한 권의 시집을 읽어 내는 것은 아주 단시간이거나 장시간일 때 두 상황뿐이다. 김지녀의 첫 시집을 읽는 것은 후자에 속했고, 부끄러움을 벗겨냈을 때 진정한 시 읽기가 되었노라 고백하는 바이다.
<시소의 감정>에 실린 시들을 맛있게 읽은 것은 중간부터였다. 시집을 한두 편씩 읽으며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다, 시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갈망이 일어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확실히 소리 내어 읽을 때는 목이 좀 아프고 갈증이 나긴 하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읽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맛이 났다. 똑같은 시 임에도 소리를 내어 읽을 때는 시어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와 닿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시어에 소리가 닿지 못했을 때의 존재감 상실이, 소리를 덧입혔을 때 이렇게 생생하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종종 소리 내어 읽는 시의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시가 지난하게 다가올 때 소리를 입혀보니 현격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나간 시들을 다시 들춰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다가오는 시들 또한 그렇게 읽다 보니 시가 참 맛깔나게 느껴졌다.
김지녀의 첫 시집인 만큼, 내게도 낯선 시인이었다. 그러나 낯설다는 느낌에서 오는 생경함이 아닌, 그녀의 시 자체는 무척 독특했다. 정갈한 느낌이 든다고는 할 수 없지만, 톡톡 튀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들이 많았다. 처음 그녀의 시를 읽어갈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아 적이 당황스러웠다. 시를 읽기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그 안의 메시지와 함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내어 읽으니 내가 지나쳤던 느낌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시인만의 독특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 시인마다 시가 모두 다른 색깔을 내는 것은 당연할지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발견하고 독자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해주는 시의 나열이었다.
그녀의 시에는 나의 생뚱맞은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만족시켜 주는 시들이 많았다. 종종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서 저 나무는 몇 백 년의 세월을 하면서,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일깨우듯 <천 년 동안, 그늘>이란 시에서 '당신들은/천 년의 나무를 보고/사진을 찍고/싸움을 하고/시간의 구멍/그것을 메운 시멘트에 대해 얘기하지' 라며 나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의 생각을 통해 나무의 삶과 인간을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였다. 또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직접제시보다 비유를 통해 내면을 노래하는 시들도 많았다.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알기 위해선/세모난 구멍이 필요해' 라고 표현하면 수박을 상상하듯이, 수박의 내면과 수박이 맞이하는 여름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교만하고 완고한 뒤통수>에서는 한 낮과 한 밤을 재미나게 표현한 것 또한 그랬다. '내가 눈 뜰 때 너는 눈 감는다//한 낮이 한 밤에게 돌아서서//(중략) 한 세계가/벽 쪽으로 돌아눕는다'라고 노래한 시를 만나면 자연스레 낮과 밤을 떠올리고, 상상의 언저리에 남겨진 생각들을 시인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저자만의 이런 독특한 시의 세계는 소리를 내어 시를 읽고 음미했을 때 발견 한 것들이었다. 그랬기에 소리의 유무가 시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의 존재가 어떻게 달라지는 것인지 확연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작품 해설을 해 주신 서동욱 교수는 '일상 속의 평범한 사물을 선택해, 기성의 어떤 의미나 이론이나 은유 또는 상징에 매개되는 일을 피하면서 그 사물 자체에 몰두하는 것은 김지녀 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라고 했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 속의 사물을 파악해 명쾌하게 특징을 잡아 주고 있어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한 권의 시집을 만나고,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사람의 시인을 알아간다는 것은 이토록 나날이 다른 매력을 안겨 주고 있으니, 시에 대한 무지를 들고서라도 멀리 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이런 만남이 끊이지 않고 내게 찾아와 주길 바라며, 시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
|
시는 고통 받고 그것을 감내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너무 조금 밖에 죽지 못했'거나, '목이 말랐고 목매달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 그 뿐만이 아니다. 시인은 그와 동시에 어떤 '소리'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하는데 그 소리들은 한결같이 앞에서 언급한 상처 받고 고통 받은 나를 위로하고 달래는 방식으로서의 '소리'이다. 상처 받은 나의 '소리는 얼룩져 있'는데, 그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에서 그대로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이 절망의 상태조차도 '어떤 무늬로든 소리 낼 수 있'다고 씀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시인은 '나를 위해 노래'하고 '서로의 손뼉을 치며 노래'하기도 하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기다리'기도 한다.
얼룩진 나와는 달리 날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당신도 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더 이상 칙칙한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은,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 그런 나를 위해 노래 불러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얼룩진 얼굴들을 알고 있다. 또한 여전히 나의 얼굴도 소리도 얼룩져 있다. 그래서 시인의 상처와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시인은 주저앉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그 얼룩진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기다릴 뿐이다. 우리가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왜 중심을 잃고 어지러워 하는지를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