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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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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많다. 없는데 있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 알면서 모르는 척……, 이밖에도 많이 있겠다. ‘척’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걸까. 이 세상에 그런 거 안 하는 사람 없다. 거의 가끔 그러지만 언제나 ‘척’하면 힘들 것 같다. 이 책 제목은 ‘척하는 삶’이다. 한국계 미국사람 이창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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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많다. 없는데 있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 알면서 모르는 척……, 이밖에도 많이 있겠다. ‘척’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걸까. 이 세상에 그런 거 안 하는 사람 없다. 거의 가끔 그러지만 언제나 ‘척’하면 힘들 것 같다. 이 책 제목은 ‘척하는 삶’이다. 한국계 미국사람 이창래가 쓴 두번째 소설(1999)이다. 두번째 소설이 왜 이제야 나온 건가 했는데, 이번에 나온 건 개정판이다.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소설은 처음 보았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보고 작가는 우리나라 사람 이름인데 옮긴이가 있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작가가 바로 이창래다. 그때 바로 봤다면 좋았을까. 아주 조금 관심이 갔지만 그러고 말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미국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가보다. 이 책으로 상도 받고 노벨문학상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상을 받은 작품이 모두 재미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밝지 않은 어두운 삶을 파고드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상 받은 소설을 보면 그런 게 더 많다.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했다. 그것도 뭔가 있는 척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내가 잘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 나는 잘 모른다. 여기 나오는 사람 닥 하타는 무슨 척을 하는 걸까. 책을 다 본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겠지만, 한번 보고 잘 아는 사람 부럽다. 이 책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적은 사람도.

얼마전에 책을 꾸준히 본 지 십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시간은 뭐였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은 그만해야겠다. 시간과 무언가를 아는 게 꼭 비례한다고 할 수 없으니까. 닥 하타도 오래 살았지만 달라진 게 없지 않나. 아니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야 조금 바뀌었다. 그러니 닥 하타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헛된 건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했고 그러기도 했다. 닥 하타, 이름이 닥이고 성이 하타인가 할지도 모르겠는데 아니다. 닥은 닥터(doctor 의사)를 줄인 거다. 이 사람은 의사가 아니다. 예전에 의료 기계를 팔았다. 지금 사는 베들리런에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다. 의사였던 적이 있다.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전쟁) 때 프랭클린 하타는 군의관으로 일했다. 그때는 구로하타였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어렸을 때는 한국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복잡하구나. 한국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사람한테 입양되고 일본사람으로 살아가다 전쟁에 나가고, 나중에는 미국에 가서 미국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닥 하타는 일을 그만두고 커다란 집에서 혼자 살아가는 70대 남자다.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는 쓸쓸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다 그렇게 보이는 건지. 베들리런 사람은 모두 닥 하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애썼기 때문이기는 하다. 닥 하타는 미국에 와서 한국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일어난 일, 더 옛날인 전쟁 때 군의관으로 한국사람 위안부를 관리했던 일을 생각한다. 한국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운 건 어떤 속죄의 뜻이 있었나 했다. 군의관일 때 위안부였던 끝애를 도와주지 못해서. 이 생각은 책을 보기 전에 했다. 책 뒷면에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왜 이런 말을 썼을까. 끝애가 바란 건 죽음이었다. 끝애는 전쟁이 끝난다 해도 자신이 살아가기 어려울거라 생각했다. 실제 그때 죽임 당한 사람 많을 거다. 살아남은 사람은 손가락질 받고 살았을 거다. 일본군인은 우리나라 여자가 자원한 거라고 생각했을까. 여기에 나온 일본군 그리고 구로하타는 그렇게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놀랐지만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내가 구로하타나 일본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도 다른 일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구로하타가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밖에 못하다니. 그때 구로하타 같은 사람 많았을 것 같다.

미국에서 살면서 닥 하타는 많은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었다(좋은 사람인 척하는 건가). 사람이 모든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기는 어렵다. 닥 하타는 왜 그랬을까. 딸 서니한테도 좋은 아빠이고 싶었는데 그건 잘 안 되었다. 닥 하타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렸을 때 일본사람한테 입양되고 일본사람으로 살아간 게 닥 하타를 힘들게 한 건 아닐까. 서니를 데려다 키운 건 자신의 식구가 갖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끝애와 이루지 못한 일. 닥 하타는 품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은 왜 그랬는지. 닥하타가 그것을 덜 생각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싶기도 하다. 그랬다면 서니가 비뚤어지지 않았을지도. 서니는 서니대로 쓸쓸했구나. 사람은 누구나 쓸쓸하다. 부모한테 버림받든 버림받지 않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부모한테 버림받은 사람이 느끼는 쓸쓸함은 모른다. 닥 하타와 서니는 그 마음을 이겨내느라고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닥 하타는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어했고, 서니는 그 반대였다. 서니가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부모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닥 하타와 서니 사이는 옛날보다 좋아졌다. 그것은 참 다행이다.

전쟁이 끝나고 구로하타는 어떻게 살았을까. 의사가 되는 공부는 못했나보다.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간 걸까. 그것은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건지도. 어쩌면 그동안 감옥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전쟁)때 군인이었던 사람은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던 것 같다. 자신을 잘 모르는 곳에서 프랭클린 하타로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건지도. 그것을 70대에 하게 된 듯하다.



희선




☆―

(……)내가 사기꾼이고 겁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 믿음, 그들의 특별한 존경과 신뢰를 탐내지 말아야 했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379쪽)


“우리는 지금 여기 있잖아요, 안 그래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든 간에.”

나는 생각을 멈춘다. 행복한 마음으로. 나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하는 누군가와 있을 때 느끼는 그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맛을 오랫동안 고대해 왔기 때문에. 꼭 행복하거나 짜릿하거나 기쁨이 넘치는 느낌은 아니지만, 충분히 기분 좋은 느낌. 틀림없이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잘 아는 느낌이겠지만, 서니와 나 같은 사람들, 어떤 면에서는 똑같이 고아인 두 사람은 천천히 발견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 배워가야만 하는 느낌. (464쪽)


이달의 사락 n***8 2014.10.04. 신고 공감 3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척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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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인상적입니다. A gesture life... 그래서 '척하는 삶'이 된 거겠죠? 달리보면 보여지는 삶이라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아니 책을 읽고 나면 척하는 삶=보여지는(보여지기 위한)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진행됩니다.군의관인 구로하타 소위가 2차세계대전 당시 랑군(지금의 미얀마겠죠?)에게 겪은 이야기. 그리고 프랭클린 하타(닥 하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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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인상적입니다. A gesture life... 그래서 '척하는 삶'이 된 거겠죠? 달리보면 보여지는 삶이라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아니 책을 읽고 나면 척하는 삶=보여지는(보여지기 위한)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진행됩니다.
군의관인 구로하타 소위가 2차세계대전 당시 랑군(지금의 미얀마겠죠?)에게 겪은 이야기. 그리고 프랭클린 하타(닥 하타)가 되어 미국의 베들리런에서 사회적 명망을 얻고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 사실 이 현재는 다시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의 삶과 한국인 입양아 서니를 양녀로 맞아들여 그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의 갈등이 또 한 줄기를 이룹니다.

작품 뒷 표지를 보면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에 충격을 받아 집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위안부 문제를 주로 피해자 입장에서 다뤘다면 이 책에서는 가해자인 일본인(사실 구로하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에 입양된 것이죠.)의 시선에서 다뤄지는 게 의의라고 하더군요. 랑군에서의 생활은 참혹합니다. 제국의 수호자로서 영광스럽고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거기에 젊은 혈기가 넘치는 이들이 모여 있으니 해소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위안부가 오게 되죠. 그 곳에서 구로하타는 끝애(K)를 만나게 됩니다. 뭔가 기품있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마음을 뺏기고 되지도 않을 사랑과 영원을 약속하죠. 하지만 K는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꿈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K는 탈출도 불가능함을 알고 있죠. 결국 그녀가 이 지옥의 구덩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전쟁의 참상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가혹한 구타와 너무나 쉬운 살인, 살인의 행해지는 현장에서의 인간적인 가책(엔도 상병), 그리고 인간을 수단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군의관(오노 대위), 그런 오노 대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군의 위계질서 때문에, 여린 마음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위안부에게 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양심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위안하는 구로하타. 전쟁이란 것 자체가 인간적인 삶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상황임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튼 전쟁에서 살아남은 프랭클린 하타(구로하타)는 미국으로 건너와 베들리런에서 의료기판매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나름 성공한 삶을 살게 되죠. 그리고 자신의 명예에 걸맞는 일을 하는데 바로 입양입니다. 혼자 사는 남자가 입양한 아이는 한국인 서니. 이 둘의 기묘한 동거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하타는 존경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딸도 그에 걸맞은 사회적 의무를 지녀야 합니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교양이 있으며 적당히 자신의 이익도 양보할 줄 아는... 하지만 서니는 이런 강요아닌 강요된 삶에 반발하죠.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고 말이죠. 결국 이 부녀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닥 하타. 서니도 떠나고 의료기 사업도 접고 베들리런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고풍스런 저택에 화재가 발생하지만 판매에는 거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 하타에게 애 엄마가 된 서니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 기른 정을 외면할 수는 없겠죠...

다시 책의 제목인 '척하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하타는 정말 모범적이고 성실한, 양심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려 애쓰는 인물로 보입니다. 군의관으로서 전쟁에 참가했지만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부하의 고민도 잘 들어주고 상사의 명령에 성실히 따릅니다. 뜻밖에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도 충실하려 합니다.
미국에 와서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로서 하타는 딸에게 예의와 교양을 전수합니다.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 삶에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앤 히키부인(자신의 의료점을 인수한 사람입니다.)의 남편과 심장병으로 생명이 다해가는 그녀의 아들을 위해 거액의 기부금을 약속하는, 정말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만 사랑하는(것으로 보이는) 메리 번스를 만나서는 본능적인 인간보다는 체면와 예의를 중시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하타의 삶의 자신의 곁에 있던 여자를 끝내 지키지 못합니다. 군의관으로서 만났던 K는 비참한 죽음을 맞고, 한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메리 번스와는 이어지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딸인 서니는 결국 곁을 떠나고 맙니다. 또한 이상하게 친밀한 감정을 느꼈던 앤 히키도 죽음을 맞고... 어쩌면 K의 죽음이 여자에 대한 그의 트라우마를 형성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음 속 감정을 내비치는 삶이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주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는 더욱 타인에게 친절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리고 자신과 밀접한 사람에겐 마음을 감추는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놀라운 사람으로 비춰진 것일지도...

하타의 삶은 타인이 보기에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보여지는 삶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어린 나이에 파악한 서니는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그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지요. 메리 번스 역시 그것을 알고 이별을 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보여지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욕망에 충실한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닥 하타의 삶은 척하는 삶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읽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49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도 문제지만 소설의 상당 부분이 닥 하타의 내면과 그가 보고 느낀 내용을 서술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작가의 의도겠지만) 주인공인 닥 하타의 삶에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의 삶과 시선을 따라가면서 읽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읽는 속도가 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며 읽게 되니, 분명 괜찮은 삶으로 보이지만 결코 모델로 삼고 싶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여지는 삶이라는 것은 결국 언젠가 그 허상이 드러날 것이고 그것이 또다른 상처가 될 것임을 짐작합니다. 물론 작품 속에서 그런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서니가 훨씬 더 가깝게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서니의 삶은 젊은 날의 반항 혹은 일탈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항의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서니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누구의 삶의 옳은가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척하는 삶'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닥 하타의 삶에서 제 자신의 삶을 봅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 속 마음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망. 그러다 보면 정말 소중한 내 가족에게 소홀해지는 삶... 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남에게 보이는, '척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닥 하타에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싶지 않은 내면적 거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의식하며 사는 삶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에 소홀하거나 정작 사랑스럽게 대해야 할 대상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지요. 닥 하타도, 저도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삶에서 정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길을 걷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다만 앞서 간 발자국이 뒷 사람에게 하나의 이정표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 내 삶을 보고 자라는 2세에 대한 생각 등을 하다 보면 또 자연스레 움츠러들 수밖에 없겠지만... '척하는 삶'을 읽으며 떠오른 '반면교사'. 이것은 닥 하타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에서 출발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안부의 참상은 주인공 닥 하타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경험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위안부의 생활을 다룬, 상당히 사실적으로 다룬 면에서는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일본과 일본인의 만행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그들의 과거를 다시 한 번 불러내 소설로 형상화한 작가 이창래의 공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반추를 이끌어낸 이 소설의 공도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인간적인 삶인가?'에 대한 생각을 읽는 내내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b******8 2016.01.2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척하는 삶』 이창래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척하는 삶』 이창래" 내용보기
『척하는 삶』 이창래 / 알에이치코리아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           실제의 자아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교묘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척 뿐인 삶'이라고 하면 너무 갔지만, '척하는 삶'이라는 말의 위화감이 거의 들지 않는 걸 보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삶과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척하는 삶』 이창래" 내용보기

『척하는 삶』 이창래 / 알에이치코리아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

 

 

 

 

  실제의 자아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교묘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척 뿐인 삶'이라고 하면 너무 갔지만, '척하는 삶'이라는 말의 위화감이 거의 들지 않는 걸 보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삶과 너무도 당연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척'을 하며 사는 까닭, 그 이유는 꽤 다양하겠다. 물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이유를 내 자신이 아닌 밖에서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를 밖으로 돌리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놀랍도록 대단한 소설, 이창래 작가의 『척하는 삶』은 아마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보이고 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하면서, 닥 하타라고 불리며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그는 너무나 편안하게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입양한 딸, '서니'는 그를 겉돌고 있다. 온갖 필요와 사랑을 모두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딸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왜 또한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가, 그의 회상 속에서 밝혀진다. 그는 미국에서 살게 된,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어딘가 너무나 복잡하지 않은가. 그는 초반부터 말하기를, 그 작은 동네에 터전을 마련하면서도 '끼어들 수 없다는 느낌'과 어색한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닥 하타, 라고 존경어린 말을 건네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중간 속에서 머무르는 주변인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현재 '닥 하타'의 삶을 살고 있는 시점과 과거의 젊은 시절, 일본군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던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 서술은 담담하며 침착하지만, 과거의 시점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일본군에 있었던 '위안부'와 그곳에 있었던 사랑하는 여자 '끝애'와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그는 그곳에서도 마치 지금의 주변인과 같은 삶을 산다. 위안소의 여자들을 필요치 않았지만, '끝애'라는 여인은 '필요'했고 소유하려 했다. 어디까지나 중간인으로서 존재했고, 사랑했던 여인마저 구하지 못했다.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삶을 지배했을까. '척 뿐인 삶'을 증오하며 자아와 완벽하게 일치하길 원했던 '끝애'의 행동 (입양딸인 '서니'는 그녀와 닮았다. 그리고 역시 그와 맞춰가질 못한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나는 그가 죄책감에서 '척하는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전부터, 그래왔는데도.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이유를 밖으로 돌리면서 위치를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언급될 때, 철저히 거부했다. (닥 하타라는 이름도, 결국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는데도.) 놀랍도록 담담하고, 마치 감정이 없어보이는 문장은 이런 그의 행동을 묘하게 소름끼치게 했다. 그토록 큰 풍파를 겪었지만 너무도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약간은 아찔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며 살아왔고, 중간인으로서의 삶을 다하면서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그 균형을 교묘하게 맞추어나갔던 것이다.

"지금은 똑똑히 보이지만, 사실 나는 그 상황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동시에 순진하지 않게 더 큰 과정들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414p)​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쓴 『척하는 삶』속에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민감할 수 있는 그런 주제와 한국인의 한(恨)을 노골적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묘사하는데도),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분출하지 않고 조금씩 터뜨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서술을 통해, 외적인 상황보다 내적인 감정을 더욱더 충실하게 보도록 만들고 있어서 참 좋았다.

 

 

 

▒ 담아두는 문장

 

​▒​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모두가 이따금씩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다니는 거리나 가게에서, 또는 다른 경우라면 은은하고 푸릇푸릇한 공원 그 이상일 수 없는 곳에서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한다.)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리하는 것,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내가 이 타운에서 나 자신을 위해 꾸준하게 조성해 온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늘 원해 왔다. (...)

그런데 이 모든 조화로운 관계에 당혹스러운 측면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실제로 지금도 생겨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지만, 뭔가가 진행 중인 것만은 틀림없다. 집 밖으로 나가 마당을 걸으며 지붕의 예각, 따뜻한 색깔, 시간이 아로새겨진 전면을 살필 때마다, 마치 처음 보듯이 새로운 눈으로 볼 때마다, 평생 가야 이런 집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6p)

 

 

▒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말소리가 느낌보다 더 깊다. 나는 이제 뭘 '본다'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한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116p)

 

 

▒ 나는 선량한 닥 하타에서 괜찮은 노인네에서 저 늙은 동양인이 누구냐로 바뀌었다. 그 질문 (지난 여름 처치 스트리트의 새 식당에서 점심 값을 치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에는 심각한 악의나 편견은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의아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처량하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일, 심지어 한창 때는 적당한 위치를 확보했던 사람들조차 겪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시간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과도 다르고 현대 생활에서 늙어 가면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라는 단순한 항상성. 따라서 나와 같은 사람은 사소한 손실들은 받아들이면서, 삶에서 생기는 위안들에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의견이나 감정이 날카로운 사람이라 해도 적어도 나를 속속들이 알고는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280p)

 

 

▒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에서도 순수의 맛이 나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을 알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기만적이고 위험한 바람이다. 하물며 삶의 가장 먼 영역에 다가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기억의 모든 조각과 부스러기를 갈망해야 마땅하다. 마침내 자신이 겪은 일들의 우연성이라든가 정황이라든가 얄궂은 면을 인식하고, 그런 일들이 많은 경우 필연적이었음을 인정해야 마땅하다. 어떤 신이 허락을 한다면, 이 모든 일들을 확고하게 움켜쥐고, 그런 풍부한 경험들을 살아냈으니 나는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경험들 때문에 자신이 되풀이하여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장자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서는 걸음에 어울리게 살짝 고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멈추는 것, 뒤로 도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면 발끝으로 땅을 파며 뛰쳐나가, 노인네처럼 뻣뻣한 자세로 돌아다니다가 절벽 너머로 뛰쳐나가는 것. 툭 튀어 오른 첫번째 바위만 제대로 피해 그대로 자유 낙하를 할 수 있다면, 그 짧은 비행을 즐길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감사할 것이다. (4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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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 2014.1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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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당당하기보다 부끄러워할 게 더 많다 - 이창래 『척하는 삶』
"삶은 당당하기보다 부끄러워할 게 더 많다 - 이창래 『척하는 삶』" 내용보기
좋은 소설은 가시권이 매우 넓다. 이 소설은 가족, 민족, 국적, 인종, 세대 갈등, 노년, 위안부, 양심 문제 등 인간 실존에 대해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한국인이었으나 일본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천황을 위해 일본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 소녀를 입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전혀 없다.
"삶은 당당하기보다 부끄러워할 게 더 많다 - 이창래 『척하는 삶』" 내용보기

좋은 소설은 가시권이 매우 넓다. 이 소설은 가족, 민족, 국적, 인종, 세대 갈등, 노년, 위안부, 양심 문제 등 인간 실존에 대해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국인이었으나 일본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천황을 위해 일본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 소녀를 입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전혀 없다. 입양되어 미국에서 자란 서니(내 귀에는 자꾸만 '선희'로 들리던) 또한 그렇다. 애국심이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자긍심은 '상상의 공동체주의'다. 생존본능에 가까워 그 땅에서 태어나 살아왔다면 사실상 벗어던지기 어렵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 피부 색깔과 성별, 언어로 인해 규정되는 틀은 타국에서 쉽사리 공격 거리가 된다. 숨기고픈 과거는 함묵하며 인정받기 위해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척하기'에 골몰한다.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살고 있을까.

 

 

중산층의 노년에 대한 성찰은 필립 로스 『에브리맨』과 비슷하면서, 로스가 유대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듯이 이창래는 동양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다.

전쟁 중에 군의관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나면 의사가 될 꿈을 꿨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클린이 되었다. Doc(doctor 약자) 하타로 불리며 평생 의료기기 판매상을 했고 은퇴했다. 위안부 K와의 일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굳이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원하는 가족이 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도 잘 살든 어렵게 살든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더 비참하게는 열심히 살고자 하고 사랑하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불운이 닥친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랭클린이 지금껏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인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의 삶을 떠나 미국에 왔어도 프랭클린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민으로 평생 체제에 순응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서니는 더 반항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클린과 서니의 어긋난 관계도 그들의 남은 생의 결과도 각자의 선택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들과 얽히게 되고 궤도가 달라지고 마니까. 삶을 '언제나 지금부터'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은 지난 삶의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다시 바꿀 용기와 각오를 위해서일 것이다. 프랭클린의 삶과 의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고 앞으로의 선택은 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방향성은 이 소설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데, 둘러보면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과 개인의 영달만 꾀하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은 매우 올곧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문제, 그것을 담은 문장들은 변함없이 현실적이고 현재와 닿아있다.

 

 

ps) 가혹한 피해자였기에 그랬을 테지만 위안부 k, 여성을 너무 신성시 다룬 게 아닌가 싶다.

괴롭고 아픈 이야기를 찬찬히 그리고 우아하게 다루는 건 재능이 아니라 작가의 자질에 속한다. 그의 문체는 따라 읽으며 자연스레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비교되는 것도 이해된다.

 

1.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할 때조차 완벽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 아는 일이지만, 과거란 결국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어서 너무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십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절대 진실을 비추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2.

히키 부인은 좋게 봐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게 봐 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였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입장에서도 쓸데없이 되풀이해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그래야 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3.

은퇴를 하게 될 때 부딪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리브 크로퍼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없다. 설사 그녀가 그녀 표현대로, ‘전방 180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신경 쓸 것 전혀 없는 최고 수준의 콘도’를 찾아 준다 해도 그녀의 일은 거기서 끝이 난다. 내가 괜찮은 거처를 가지게 된다 해도, 거기서 어떻게 살지, 그리고 거기서 왜 살아야 하는지는 나 혼자 궁리해야 할 문제다. 흔히 말하는 은퇴 후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에는 쉽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낚시를 하지 않고, 브리지도 하지 않는다. 작은 인형이나 이국적인 새나 골동품 장난감을 수집하지도 않는다. 술맛을 음미하는 사람도 아니다. 춤도 출 줄 모르며, 춤 하면 떠오르는 어떤 동반 관계라는 것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복잡한 동시에 모호하게 여겨질 뿐이다.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침대에서 책을 읽는 것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만, 내가 그런 데서 듣고 보게 되는 것들 대부분은 나처럼 늙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 속 편한 일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아마 남는 것은 골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생 골프를 여남은 번밖에 쳐 보지 않았고, 그나마 늘 의료 기기 도매상들하고만 쳤다.

 

 

4.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가장 크게 우려했던 것은 모두가 이따금씩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다니는 거리나 가게에서, 또는 다른 경우라면 은은하고 푸릇푸릇한 공원 그 이상일 수 없는 곳에서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한다)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리하는 것.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내가 이 타운에서 나 자신을 위해 꾸준하게 조성해 온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늘 원해 왔다.

 

 

5.

우리는 그 말에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기침이 자꾸 나왔지만, 레니 바네르지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순간들이라는 것이 꼭 적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 그렇게 ‘가치’가 충만하고 묵직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이면 된다. 이 경우에는 나와 레니가 다시 한 번 농담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가벼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일 뿐이다.

 

 

6.

만약 그때 단 한 가지만 달라졌더라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를 들어 아이 아버지가 총격전에서 살아남았더라면? 아이 어머니가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면?

 

요즘에는 사람의 유년기가 놀랄 만큼 취약한 시절이라는 것에 대하여 공적인 논의와 토론이 아주 많다. 시기와 상황이 사람의 성격과 관점, 심지어 행동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멋대로인 아이가 공동체의 생산적인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도와야 하며, 이것을 무시하면, 기본적으로 훌륭한 본성을 가진 아이라도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적 상호 작용에서 곤란을 겪을 수 있고, 심지어 병적이 되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 근래의 통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아버지 없이, 낙인찍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베로니카는 어떻게 이렇게 나름 훌륭하게 성장한 것일까? 아이의 어머니인 코모 경관은 어떻게 했길래 딸의 마음에서 타고난 기품과 선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베로니카든 다른 사람들이든 실제로는 신의 뜻에 따라, 또는 약간의 우연에 따라 한 가지 기질, 딱 한 가지 기질만 지니고 있을 뿐이고, 겉보기에 변종으로 보이는 것들은 각각의 윤곽, 일상적인 장식물에 불과한 것일까?

 

 

7.

은퇴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이곳의 집단 기억이 내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짧다는 것, 그리고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선량한 닥 하타에서 괜찮은 노인네에서 저 늙은 동양인이 누구냐로 바뀌었다. 그 질문(지난 여름 처치 스트리트의 새 식당에서 점심 값을 치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에는 심각한 악의나 편견은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처량하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일, 심지어 한창 때는 적당한 위치를 확보했던 사람들조차 겪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시간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과도 다르고 현대 생활에서 늙어 가면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라는 단순한 항상성. 따라서 나와 같은 사람은 사소한 손실들은 받아들이면서, 삶에서 생기는 위안들에 행복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의견이나 감정이 날카로운 사람이라 해도 적어도 나를 속속들이 알고는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8.

서니 의료 기기도 지금처럼 속이 반쯤 빈 채 문을 닫는 대신, 활기로 인해 눈부신 곳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환상적인 상상이 펼쳐지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너무 복에 겨운 상상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슨 명예나 부의 측면에서 복을 누리는 상상은 아니다. 그저 매일 밤 가게를 나오면서 슬쩍 돌아보았을 때, 그곳이 우리를 담아 줄 만한 그릇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 일본인 부부의 손을 잡고 정규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영광스러운 전쟁으로 일컬어지던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에, 그것도 매우 품위 있는 타운에 정착하기까지. 그것이 내 오랜 어리석음, 나의 연이어 온 실패는 아닐까?

 

 

9.

그러한 존재로서 나는 만일 서니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나를 비난했다 해도 그 애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 애 인생에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해 재고해 보고 어렸을 때처럼 강한 눈빛을 나에게 번득인다 해도, 아마 나는 그것을 환영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내 집으로 돌아와 그 애의 아들과 함께 보낸 편하고 즐거운 시간들의 여파 속에서 내 집이 훨씬 더 거대하게 자라 버렸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훨씬 더 작아졌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와 더불어 내 인생이 갑자기 다시 잠정적인 것이 되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실제로 나는 마치 젊은이처럼 내 인생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해 열려 있다는 느낌, 그만큼 취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늘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던 존재 상태였다. 사람들의 취약한 상태는 오랫동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물론 나는 전쟁 중에 임무를 수행하면서 죽음과 연약함을 목격할 때마다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을 맞아 무딜 대로 무디어진 남자들의 의지는 어떤 종속적 상태를 피해 가지 못했다. 들을 귀와 볼 눈만 있으면 무력하게 빠져들고 마는 그 비인간적인 행위들.

 

 

10.

우리는 좀 더 전방으로 이동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랑군 여행은 짧은 마지막 위로 휴가였다. 빛이 사그라지지 않는 해변의 어스름 속에서 묘하게도 전쟁이 그렇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젊은 남자라 해도 공동의 목적을 앞에 두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동료 의식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사실 이보다 더 진정한 증명의 시간은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오노 대위가 나를 부를 때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심하게 쌓아 올린 모든 인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안쓰러운 고갈 상태에서는 순수한 증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솟구쳐 오르며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때 오노 대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1.

그는 운송부에 근무하는 상병이었다. 보통의 괜찮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위안부를 생경하게 ‘조센삐’라고 불렀다. 여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다가 천한 해부학적 욕설을 덧붙인 말이었다. 물론 나는 그가 동료들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그런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다 해도 그는 실제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사용했다.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짐승 이야기를 하듯. 때문에 나는 잠시 몸이 얼어붙었다. 물론 나는 그 여자들을 짐승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때 내 시야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내 생각은 부자의 생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자기 집이나 소유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인들을, 그들의 노력과 몸부림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부자. 그들을 그의 삶이라는 메커니즘의 부품으로만, 매일 밤낮없이 꾸준히 돌아가는 기계로만 보는 부자.

몇 분 뒤에 나는 그 병사를 찾아내 그의 태도와 그런 용어 사용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내 질문에 당황하여 말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위님.”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수줍어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제 말이 사실 아닙니까?”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생각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아마 여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살덩어리들로. 사라지기 전에 얼른 가져야 할 짧고 따뜻한 쾌락으로. 그것이 전시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K를 만나면서 나는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녀를 보존할까, 어떻게 그녀를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모든 일로부터 떼어 놓을까를 생각했다.

 

 

12.

“자, 그 아이를 위하여 뭘 할까?”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바는 먼 미래다. 그 아이의 교육, 훈련, 직업.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것들.

그러나 서니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애가 얼마나 자제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신앙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이 아이 내부에서 용서의 비밀 창고 같은 것을 발견한 것 같다. 내 창고는 이미 오래전에 바닥이 났는데. 어쩌면 용서는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 현재 어떻게 되었다 해도, 아무리 찌꺼기만 남고 빈약하다 해도, 원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가없이 늘 새로워진다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서니가 마침내 입을 연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요. 만일 첫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토머스는 낳지 못했을 거예요. 토머스고 누구고 아무런 존재도 없었겠죠.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래, 물론이지.”

 

 

 

g******i 2020.09.0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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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여행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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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와 오에 겐자부로를 섞어놓은 느낌.표지와 너무도 다른 담담한 문체. 조근조근 얘기하면서 어떤 충격적인 과거 이야길 펼쳐 놓으려고 이러시는가 기대와 함께 두려워지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과거를 덮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니 ‘척하는 삶‘이 맞긴 한데, '척하는 삶'이란 표현을 조롱투로 쓰는 걸 생각할 때 작가가 이것도 염두에 둔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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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와 오에 겐자부로를 섞어놓은 느낌.
표지와 너무도 다른 담담한 문체. 조근조근 얘기하면서 어떤 충격적인 과거 이야길 펼쳐 놓으려고 이러시는가 기대와 함께 두려워지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과거를 덮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니 ‘척하는 삶‘이 맞긴 한데, '척하는 삶'이란 표현을 조롱투로 쓰는 걸 생각할 때 작가가 이것도 염두에 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인상적이긴 한데 표지가 작품 홍보에 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할까. 나부터도 그랬다. 다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삐뚤어진 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입장에서도 쓸데없이 되풀이해 생각하기보다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나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그래야 함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g******i 2017.03.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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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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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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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또 그녀의 잠든 정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녀가 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pp.333-334)

 

<가족>과 <척하는 삶> 중에 고민하다 이 책을 집어든 건 위안부(이 단어 너무 싫지만)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소개글 때문이다. 나와있는 작품 중 제일 먼저 읽었지만 작가의 작품 연대기상 가장 최근작인 <생존자>에서 보여준 한국전쟁의 참상과 정체성 잃고 헤매는 삶이 가혹한 반면 강렬하기도 해서 지금까지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읽는 동안 무척 고단한 시간을 경험하게 되지만 읽고나서 내가 처한 상황을 감사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문학의 역할을 체험하기란 어렵다. 한국계 일본인이자 미국으로 이민하여 반평생을 산 한국계 딸을 입양한 아버지,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이력의 70대 남자 닥 하타가 주인공이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당시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이창래 작가가 비극을 다루는 방식은 현재형과 과거형의 절묘하고도 신비로운 조화로부터 온다. <생존자>가 고아원 원장 부인 실비의 끔찍한 과거와 상처, 한국전쟁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헤매다 죽기 직전 고아원으로 오게 된 준의 파란만장한 삶, 미군 병사 헥터의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과거에서 끄집어내면서도 현재 고아원에서 마주하는 그들의 불안한 삶을 교차시키는 반면, <척하는 삶>은 이보다 훨씬 단순한 구성이다. 늙은 닥 하타가 한국 위안부의 고단한 삶과 군대의 부조리, 피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한 여자와의 삶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그러니 이창래 작가의 작품 속에서 비극은 이미 지나간 일인 동시에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진행되는 일이다.

 

그녀에게 약간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탈출이라도 도왓을 것이다. 그녀가 요청한다면, 또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면, 다른 인간을 해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란 얼마나 특별하고 가혹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순수한 것인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만족을 얻은 남자는 평범하든 잔인하든 인간적이든 어떤 행동이라도 아주 쉽게 결심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의적인 의지로 영원히, 영원히 자신의 기억에 남을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p.361)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살아남아 돌이키면 지나간 비극이 된다. 상흔이 너무나 커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생존자>의 세 주인공들에 비하면, 닥 하타 역시 입양아로 뿌리를 알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직접적인 가족의 참상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꽤 평온한 삶을 산다. 물론 전쟁 중 부대에서의 가차없는 상황들은 그를 더 괴롭게 몰고갔지만 그의 가장 큰 적은 지독한 외로움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소재와 비극은 최근으로 올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상황의 끔찍함을 시각화하기보다는 시간이 흐르고 위치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기억에 대해 그린다. 닥 하타의 비극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혼자 사는 남자에게는 불가능했던 입양, 고집스럽게 얻은 한국인 여자아이 서니와의 갈등이다. 닥 하타가 서니를 입양한 이유도, 서니가 닥 하타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겉돈 이유도, 그저 짐작할 따름이지만 버려졌다는 상처와 외로움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p.116)

 

처절한 묘사와 절절한 감동이 버무려진 비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창래 작가의 장점은 역시 시공간을 간통하는 비극의 보편성에 있으며, 건조하면서도 따끔하게 건드리는 신랄한 상황 혹은 역사(전쟁)에 대한 묘사에 있다. 입양과 전쟁과 기억.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단순한 진리는 끔찍한 기억 앞에 늘 거짓말 같다. 미국으로 이민한 닥 하타가 의료 기기를 파는 마을의 의사 노릇을 톡톡히 하며 딸 서니 빼고는 누구에게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타운의 훈훈함을 두고 제목 '척하는 삶'을 붙인 듯하다. 실제로 부조리하고 부도덕적인 일 앞에 놓였을 때 적극적으로 옳다고 믿는 선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닥 하타 역시 과거 위안부였던 끝애를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처럼 지금도 유일한 딸 서니의 인생 하나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겉모습만으로 존경의 위치에 서 있다고 느낀다. 군의관이었던 시절, 서니의 아버지로서의 시절, 의료 기기 가게를 팔아넘긴 부부의 불치병 아들의 간호라는 불행까지 삶은 어느 순간도 더 쉽거나 더 나은 적이 없다.

 

대부분이 착실한 일상이므로 위안부 끝애와의 군의관 시절 사연은 중간 즈음 한순간 등장한다.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하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동시에 아픈가. 닥 하타는 매일 수많은 군인들의 욕정을 받아내는 뿌리가 같은 여자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을 지닌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그 여자들의 삶까지 구할 수는 없었다. 끝애가 언니의 목숨을 담보로 구해진 후 결국 언니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닥 하타 역시 이후의 삶을 무언가에도 바칠 수 없어 외로움에 떨며 지냈다. 책임은 연민과 동정의 몫이기에는 너무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가해자와 방관자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분명 달랐으나 피해자에게 그 결과는 같았다. 마음과 영혼과 소극적 행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외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소설은 결국 아픈 곳을 건드린다. 척하며 살아야 한다고 삶을 버릴 것인가. 인간은 강하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은 더 질기다. 마침내 책장을 덮으며 이 성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디에 뿌리와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삶의 화살표를 제대로 가슴에 새기며.



s*****d 2014.06.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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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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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프랭클린 구로하타. 재미작가 이창래의 소설 『척하는 삶(A Gesture Life)』(1999)의 주인공인 그는 미국의 한 도시에 사는 은퇴한 노인이다. 이웃들은 그에게 친절하다. 사람들은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일을 했던 그를 ‘닥(Doc) 하타’라고 부른다. 그의 삶은 누가 보기에도 모자랄 것이 없다. 그러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는 아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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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프랭클린 구로하타. 재미작가 이창래의 소설 『척하는 삶(A Gesture Life)』(1999)의 주인공인 그는 미국의 한 도시에 사는 은퇴한 노인이다. 이웃들은 그에게 친절하다. 사람들은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일을 했던 그를 ‘닥(Doc) 하타’라고 부른다. 그의 삶은 누가 보기에도 모자랄 것이 없다. 그러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회상의 서두에 그는 이렇게 적는다. “과거란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프랭클린 구로하타. 그는 원래 한국인이었다. 일제 식민지기에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민한 그는 일본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우연히 자식 없는 일본인 부부의 집에 얹혀 살게 되고, 부부는 그를 자식처럼 대해준다. 그 가정에서 구로하타는 일본인으로 성장한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징집된다. 전선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구로하타는 한국인 위안부인 ‘끝애’와 가까워지지만 그들의 관계는 곧 파국에 이른다. 전쟁이 말기에 이르자 일본군은 후퇴할 때마다 증거를 인멸하고자 위안부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끝애’는 일본군에게 죽기 싫다면서 구로하타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탁을 외면한다.

그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끝애’를 비롯한 전선의 위안부들은 일본군에게 사살된다. 일본군의 만행에 질린 구로하타는 미군에 투항하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이주한다.

미국에 정착한 구로하타는 비상한 두뇌로 의료기기를 다루는 사업에서 성공해 많은 돈을 벌고 ‘프랭클린’이라는 미국식 이름도 얻는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됐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생존이야말로 그가 직면한 유일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부를 축적한 구로하타는 한 아이를 입양한다. 그런데 ‘서니’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한국인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고 그들 중 상당수가 해외로 입양됐는데 공교롭게도 구로하타가 입양을 신청한 시기와 맞물린 것이다.

구로하타에게 한국은 처절한 가난만이 기억으로 남은 아픈 곳이었다. 그는 입양한 딸 ‘서니’에게 풍족한 삶을 보장해주고 그녀를 우아하고 고상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고자 마음먹는다. 그러나 ‘서니’는 자신의 삶에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구로하타와 사사건건 충돌하고, 구로하타는 입양한 딸과 갈등을 겪으면서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식 개인주의를 제대로 내면화하지 못한 자신을 자각한다. 자신은 어디에서나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가족’이 생기자 자신도 모르게 동양식 사고에 갇힌다. 

구로하타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나는 일본인인가? 아니다, 단지 살기 위해 일본인이 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국인인가? 그것도, 아니다. 고향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 내 삶은 그저 ‘척하는 삶’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반기를 드는 ‘서니’를 보면서 구로하타는 뒤늦게 혼란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그는 주체적인 결정을 하지 못한다. 단지 생존을 위한 선택 외에는 해본 적이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썼던 가면을 그는 벗지 못한다. 가면은, 이미 그의 살갗이 돼버렸다.

 

이창래 장편 소설 『척하는 삶』 표지 이미지. 필자 제공
구로하타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뒤흔든 여성 ‘메리’를 만나지만 그녀와의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로하타는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지 않는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는 것을 외면하면서 살아온 삶의 관성에서 그는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에서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이창래는 1965년, 3살 때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재미교포 2세다. 예일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 정착한 작가는 줄곧 미국식 교육을 받고 영어로 창작을 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많은 차별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고등교육을 받고 명문대에 진학했어도 차별은 집요했다. 작가의 첫 소설 『영원한 이방인』과 두 번째 소설 『척하는 삶』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바탕이 됐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성장하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프랭클린 구로하타’라는 남자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알레고리로 확장된다. 그의 회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식민지, 분단, 전쟁의 시기를 통과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답하지 못하는 ‘프랭클린 구로하타’의 모습은 현대사를 아프게 통과했던 다양한 실존인물들이 투영된 페르소나다.

또한 이 소설은 ‘척하는 삶’에 길들여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국인(일본인)보다 더 미국인(일본인)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 않은가(광복절에 일장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라). 구로하타의 회상이 진행될수록 ‘나’라는 일인칭은 종종 ‘그’라는 3인칭과 혼용된다. 인칭의 변화와 함께 이 소설은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어쩌면 당신도 지금 타인을 연기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창래.  연합뉴스

 

YES마니아 : 로얄 2*****h 2021.01.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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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본 사람의 비극을 잊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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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비극을 보고 그것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것을 잊지도, 극복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주인공은 위안부의 참상을 전쟁 중에 보았고, 그것을 잊으려 혹은 속죄하려 한국인 딸을 입양했지만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가족의 삶 또한 쉽지 않게 흘러갑니다.왜 비극은 그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악몽이 될까요? 그 비극을 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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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비극을 보고 그것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것을 잊지도, 극복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주인공은 위안부의 참상을 전쟁 중에 보았고, 그것을 잊으려 혹은 속죄하려 한국인 딸을 입양했지만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가족의 삶 또한 쉽지 않게 흘러갑니다.

왜 비극은 그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악몽이 될까요? 그 비극을 만든 사람들은 속죄하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갈텐데 말입니다. 인생이 누구한테만 끊이지 않는 고통이어야 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d*****6 2018.07.1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eBook
마음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
"마음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 내용보기
이 책은 순전히 제목이 재밌어서 샀다 척하는 삶이라니 살면서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 법인데 작가는 어떤 척을 이야기하는 걸까 궁금해서 구매했다  물론 구매해놓고 읽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나도 내 삶에서 굉장히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척 하다보니 책 읽는 것도 이렇게 늦어졌다  그리고 잡자마자 빠져들듯 했다 개인적으로 찾아봤을 때 이창래의 작품이 번역이
"마음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 내용보기

 

이 책은 순전히 제목이 재밌어서 샀다

 

척하는 삶이라니

 

살면서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 법인데

 

작가는 어떤 척을 이야기하는 걸까

 

궁금해서 구매했다

 

 

물론 구매해놓고 읽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나도 내 삶에서 굉장히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척 하다보니 책 읽는 것도

 

이렇게 늦어졌다

 

 

그리고 잡자마자 빠져들듯 했다

 

개인적으로 찾아봤을 때 이창래의 작품이

 

번역이 그닥이란 말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 작품은 그렇진 않았던거 같다

 

다만 내 마음이 좀 먹먹했을 뿐

 

 

재밌다

 

이런 내용일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h*******1 2018.05.2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읽고 또 읽어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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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창래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주문해서 또 읽고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에 관심이 생기네요. 내용을 전체 훑고, 두번째 읽을 때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읽고 세번째는 어떤 주제를 정해서 읽고계속 읽고 있어요. 이창래 작가들의 작품들을 요즘 곱씹고 있습니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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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창래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주문해서 또 읽고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에 관심이 생기네요.

 

내용을 전체 훑고, 두번째 읽을 때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읽고 세번째는 어떤 주제를 정해서 읽고

계속 읽고 있어요.

 

이창래 작가들의 작품들을 요즘 곱씹고 있습니다.

 

원서도 도전해볼까 생각중이네요.

 

요즘 이 작가한테 묘하게 끌리네요.

 

재밌습니다. 감동도 있구요.

c*****s 2016.07.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