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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한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많다. 없는데 있는 척, 모르는데 아는 척,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 알면서 모르는 척……, 이밖에도 많이 있겠다. ‘척’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걸까. 이 세상에 그런 거 안 하는 사람 없다. 거의 가끔 그러지만 언제나 ‘척’하면 힘들 것 같다. 이 책 제목은 ‘척하는 삶’이다. 한국계 미국사람 이창래가 쓴 두번째 소설(1999)이다. 두번째 소설이 왜 이제야 나온 건가 했는데, 이번에 나온 건 개정판이다.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소설은 처음 보았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보고 작가는 우리나라 사람 이름인데 옮긴이가 있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작가가 바로 이창래다. 그때 바로 봤다면 좋았을까. 아주 조금 관심이 갔지만 그러고 말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미국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가보다. 이 책으로 상도 받고 노벨문학상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상을 받은 작품이 모두 재미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밝지 않은 어두운 삶을 파고드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상 받은 소설을 보면 그런 게 더 많다.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했다. 그것도 뭔가 있는 척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내가 잘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 나는 잘 모른다. 여기 나오는 사람 닥 하타는 무슨 척을 하는 걸까. 책을 다 본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제대로 못 봐서 그런 거겠지만, 한번 보고 잘 아는 사람 부럽다. 이 책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적은 사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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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인상적입니다. A gesture life... 그래서 '척하는 삶'이 된 거겠죠? 달리보면 보여지는 삶이라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아니 책을 읽고 나면 척하는 삶=보여지는(보여지기 위한)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닥 하타의 삶에서 제 자신의 삶을 봅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 속 마음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망. 그러다 보면 정말 소중한 내 가족에게 소홀해지는 삶... 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남에게 보이는, '척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닥 하타에게 공감이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싶지 않은 내면적 거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의식하며 사는 삶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에 소홀하거나 정작 사랑스럽게 대해야 할 대상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지요. 닥 하타도, 저도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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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 이창래 / 알에이치코리아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춘다'는 변명의 삶
실제의 자아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교묘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척 뿐인 삶'이라고 하면 너무 갔지만, '척하는 삶'이라는 말의 위화감이 거의 들지 않는 걸 보면, 지금도 우리는 이런 삶과 너무도 당연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척'을 하며 사는 까닭, 그 이유는 꽤 다양하겠다. 물질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이유를 내 자신이 아닌 밖에서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유를 밖으로 돌리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놀랍도록 대단한 소설, 이창래 작가의 『척하는 삶』은 아마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보이고 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하면서, 닥 하타라고 불리며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그는 너무나 편안하게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입양한 딸, '서니'는 그를 겉돌고 있다. 온갖 필요와 사랑을 모두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딸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왜 또한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지 의문이다. 그 이유가, 그의 회상 속에서 밝혀진다. 그는 미국에서 살게 된,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어딘가 너무나 복잡하지 않은가. 그는 초반부터 말하기를, 그 작은 동네에 터전을 마련하면서도 '끼어들 수 없다는 느낌'과 어색한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닥 하타, 라고 존경어린 말을 건네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중간 속에서 머무르는 주변인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현재 '닥 하타'의 삶을 살고 있는 시점과 과거의 젊은 시절, 일본군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던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 서술은 담담하며 침착하지만, 과거의 시점은 너무나도 강렬하다. 일본군에 있었던 '위안부'와 그곳에 있었던 사랑하는 여자 '끝애'와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그는 그곳에서도 마치 지금의 주변인과 같은 삶을 산다. 위안소의 여자들을 필요치 않았지만, '끝애'라는 여인은 '필요'했고 소유하려 했다. 어디까지나 중간인으로서 존재했고, 사랑했던 여인마저 구하지 못했다.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삶을 지배했을까. '척 뿐인 삶'을 증오하며 자아와 완벽하게 일치하길 원했던 '끝애'의 행동 (입양딸인 '서니'는 그녀와 닮았다. 그리고 역시 그와 맞춰가질 못한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나는 그가 죄책감에서 '척하는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전부터, 그래왔는데도.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이유를 밖으로 돌리면서 위치를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언급될 때, 철저히 거부했다. (닥 하타라는 이름도, 결국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는데도.) 놀랍도록 담담하고, 마치 감정이 없어보이는 문장은 이런 그의 행동을 묘하게 소름끼치게 했다. 그토록 큰 풍파를 겪었지만 너무도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약간은 아찔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며 살아왔고, 중간인으로서의 삶을 다하면서 세계와 자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는, 어느새 자신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그 균형을 교묘하게 맞추어나갔던 것이다. "지금은 똑똑히 보이지만, 사실 나는 그 상황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동시에 순진하지 않게 더 큰 과정들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414p)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쓴 『척하는 삶』속에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민감할 수 있는 그런 주제와 한국인의 한(恨)을 노골적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묘사하는데도),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분출하지 않고 조금씩 터뜨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서술을 통해, 외적인 상황보다 내적인 감정을 더욱더 충실하게 보도록 만들고 있어서 참 좋았다.
▒ 담아두는 문장
▒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모두가 이따금씩 느낄 수 있는 어색함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다니는 거리나 가게에서, 또는 다른 경우라면 은은하고 푸릇푸릇한 공원 그 이상일 수 없는 곳에서 주변 환경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한다.)에 대해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궁리하는 것, 내 생각이든 남의 생각이든 나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생각을 좋아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내가 이 타운에서 나 자신을 위해 꾸준하게 조성해 온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 있기를 늘 원해 왔다. (...) 그런데 이 모든 조화로운 관계에 당혹스러운 측면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실제로 지금도 생겨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지만, 뭔가가 진행 중인 것만은 틀림없다. 집 밖으로 나가 마당을 걸으며 지붕의 예각, 따뜻한 색깔, 시간이 아로새겨진 전면을 살필 때마다, 마치 처음 보듯이 새로운 눈으로 볼 때마다, 평생 가야 이런 집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6p)
▒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말소리가 느낌보다 더 깊다. 나는 이제 뭘 '본다'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한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116p)
▒ 나는 선량한 닥 하타에서 괜찮은 노인네에서 저 늙은 동양인이 누구냐로 바뀌었다. 그 질문 (지난 여름 처치 스트리트의 새 식당에서 점심 값을 치르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에는 심각한 악의나 편견은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의아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처량하게 자신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는 일, 심지어 한창 때는 적당한 위치를 확보했던 사람들조차 겪는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내 경우는 시간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것과도 다르고 현대 생활에서 늙어 가면서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냐 하는 것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실로 남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라는 단순한 항상성. 따라서 나와 같은 사람은 사소한 손실들은 받아들이면서, 삶에서 생기는 위안들에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의견이나 감정이 날카로운 사람이라 해도 적어도 나를 속속들이 알고는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280p)
▒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에서도 순수의 맛이 나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을 알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기만적이고 위험한 바람이다. 하물며 삶의 가장 먼 영역에 다가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기억의 모든 조각과 부스러기를 갈망해야 마땅하다. 마침내 자신이 겪은 일들의 우연성이라든가 정황이라든가 얄궂은 면을 인식하고, 그런 일들이 많은 경우 필연적이었음을 인정해야 마땅하다. 어떤 신이 허락을 한다면, 이 모든 일들을 확고하게 움켜쥐고, 그런 풍부한 경험들을 살아냈으니 나는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경험들 때문에 자신이 되풀이하여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고, 가장자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서는 걸음에 어울리게 살짝 고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멈추는 것, 뒤로 도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면 발끝으로 땅을 파며 뛰쳐나가, 노인네처럼 뻣뻣한 자세로 돌아다니다가 절벽 너머로 뛰쳐나가는 것. 툭 튀어 오른 첫번째 바위만 제대로 피해 그대로 자유 낙하를 할 수 있다면, 그 짧은 비행을 즐길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감사할 것이다. (4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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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은 가시권이 매우 넓다. 이 소설은 가족, 민족, 국적, 인종, 세대 갈등, 노년, 위안부, 양심 문제 등 인간 실존에 대해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국인이었으나 일본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천황을 위해 일본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가 미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인 소녀를 입양했다. 우리가 어떻게 보든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전혀 없다. 입양되어 미국에서 자란 서니(내 귀에는 자꾸만 '선희'로 들리던) 또한 그렇다. 애국심이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자긍심은 '상상의 공동체주의'다. 생존본능에 가까워 그 땅에서 태어나 살아왔다면 사실상 벗어던지기 어렵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 피부 색깔과 성별, 언어로 인해 규정되는 틀은 타국에서 쉽사리 공격 거리가 된다. 숨기고픈 과거는 함묵하며 인정받기 위해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척하기'에 골몰한다.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살고 있을까.
중산층의 노년에 대한 성찰은 필립 로스 『에브리맨』과 비슷하면서, 로스가 유대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듯이 이창래는 동양인이자 미국인의 삶을 그렸다. 전쟁 중에 군의관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나면 의사가 될 꿈을 꿨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클린이 되었다. Doc(doctor 약자) 하타로 불리며 평생 의료기기 판매상을 했고 은퇴했다. 위안부 K와의 일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굳이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두 사람은 원하는 가족이 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도 잘 살든 어렵게 살든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더 비참하게는 열심히 살고자 하고 사랑하려 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불운이 닥친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랭클린이 지금껏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인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의 삶을 떠나 미국에 왔어도 프랭클린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주민으로 평생 체제에 순응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서니는 더 반항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랭클린과 서니의 어긋난 관계도 그들의 남은 생의 결과도 각자의 선택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것들과 얽히게 되고 궤도가 달라지고 마니까. 삶을 '언제나 지금부터'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은 지난 삶의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라 다시 바꿀 용기와 각오를 위해서일 것이다. 프랭클린의 삶과 의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고 앞으로의 선택은 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방향성은 이 소설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데, 둘러보면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과 개인의 영달만 꾀하는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소설은 매우 올곧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문제, 그것을 담은 문장들은 변함없이 현실적이고 현재와 닿아있다.
ps) 가혹한 피해자였기에 그랬을 테지만 위안부 k, 여성을 너무 신성시 다룬 게 아닌가 싶다. 괴롭고 아픈 이야기를 찬찬히 그리고 우아하게 다루는 건 재능이 아니라 작가의 자질에 속한다. 그의 문체는 따라 읽으며 자연스레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와 비교되는 것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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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와 오에 겐자부로를 섞어놓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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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면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 젊은 남자를 대신해서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그녀의 거기 있음 그 자체에 끌렸다고 말하겠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이 결국 아름다움 같은 것조차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는 그때 그것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그저 그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또 그녀의 잠든 정신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러면 그녀가 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pp.333-334)
<가족>과 <척하는 삶> 중에 고민하다 이 책을 집어든 건 위안부(이 단어 너무 싫지만)라는 소재를 다룬다는 소개글 때문이다. 나와있는 작품 중 제일 먼저 읽었지만 작가의 작품 연대기상 가장 최근작인 <생존자>에서 보여준 한국전쟁의 참상과 정체성 잃고 헤매는 삶이 가혹한 반면 강렬하기도 해서 지금까지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읽는 동안 무척 고단한 시간을 경험하게 되지만 읽고나서 내가 처한 상황을 감사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문학의 역할을 체험하기란 어렵다. 한국계 일본인이자 미국으로 이민하여 반평생을 산 한국계 딸을 입양한 아버지,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이력의 70대 남자 닥 하타가 주인공이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당시 한국인 위안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이창래 작가가 비극을 다루는 방식은 현재형과 과거형의 절묘하고도 신비로운 조화로부터 온다. <생존자>가 고아원 원장 부인 실비의 끔찍한 과거와 상처, 한국전쟁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헤매다 죽기 직전 고아원으로 오게 된 준의 파란만장한 삶, 미군 병사 헥터의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과거에서 끄집어내면서도 현재 고아원에서 마주하는 그들의 불안한 삶을 교차시키는 반면, <척하는 삶>은 이보다 훨씬 단순한 구성이다. 늙은 닥 하타가 한국 위안부의 고단한 삶과 군대의 부조리, 피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한 여자와의 삶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그러니 이창래 작가의 작품 속에서 비극은 이미 지나간 일인 동시에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진행되는 일이다.
그녀에게 약간의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을 것이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탈출이라도 도왓을 것이다. 그녀가 요청한다면, 또는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면, 다른 인간을 해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느낌이란 얼마나 특별하고 가혹한 것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순수한 것인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만족을 얻은 남자는 평범하든 잔인하든 인간적이든 어떤 행동이라도 아주 쉽게 결심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의적인 의지로 영원히, 영원히 자신의 기억에 남을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p.361)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살아남아 돌이키면 지나간 비극이 된다. 상흔이 너무나 커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생존자>의 세 주인공들에 비하면, 닥 하타 역시 입양아로 뿌리를 알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직접적인 가족의 참상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꽤 평온한 삶을 산다. 물론 전쟁 중 부대에서의 가차없는 상황들은 그를 더 괴롭게 몰고갔지만 그의 가장 큰 적은 지독한 외로움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소재와 비극은 최근으로 올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상황의 끔찍함을 시각화하기보다는 시간이 흐르고 위치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기억에 대해 그린다. 닥 하타의 비극이 하나 더 있다면 그건 혼자 사는 남자에게는 불가능했던 입양, 고집스럽게 얻은 한국인 여자아이 서니와의 갈등이다. 닥 하타가 서니를 입양한 이유도, 서니가 닥 하타에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겉돈 이유도, 그저 짐작할 따름이지만 버려졌다는 상처와 외로움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고 목적을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p.116)
처절한 묘사와 절절한 감동이 버무려진 비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창래 작가의 장점은 역시 시공간을 간통하는 비극의 보편성에 있으며, 건조하면서도 따끔하게 건드리는 신랄한 상황 혹은 역사(전쟁)에 대한 묘사에 있다. 입양과 전쟁과 기억.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단순한 진리는 끔찍한 기억 앞에 늘 거짓말 같다. 미국으로 이민한 닥 하타가 의료 기기를 파는 마을의 의사 노릇을 톡톡히 하며 딸 서니 빼고는 누구에게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타운의 훈훈함을 두고 제목 '척하는 삶'을 붙인 듯하다. 실제로 부조리하고 부도덕적인 일 앞에 놓였을 때 적극적으로 옳다고 믿는 선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닥 하타 역시 과거 위안부였던 끝애를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처럼 지금도 유일한 딸 서니의 인생 하나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겉모습만으로 존경의 위치에 서 있다고 느낀다. 군의관이었던 시절, 서니의 아버지로서의 시절, 의료 기기 가게를 팔아넘긴 부부의 불치병 아들의 간호라는 불행까지 삶은 어느 순간도 더 쉽거나 더 나은 적이 없다.
대부분이 착실한 일상이므로 위안부 끝애와의 군의관 시절 사연은 중간 즈음 한순간 등장한다.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하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동시에 아픈가. 닥 하타는 매일 수많은 군인들의 욕정을 받아내는 뿌리가 같은 여자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을 지닌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그 여자들의 삶까지 구할 수는 없었다. 끝애가 언니의 목숨을 담보로 구해진 후 결국 언니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닥 하타 역시 이후의 삶을 무언가에도 바칠 수 없어 외로움에 떨며 지냈다. 책임은 연민과 동정의 몫이기에는 너무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가해자와 방관자가 느끼는 고통의 강도는 분명 달랐으나 피해자에게 그 결과는 같았다. 마음과 영혼과 소극적 행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외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소설은 결국 아픈 곳을 건드린다. 척하며 살아야 한다고 삶을 버릴 것인가. 인간은 강하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은 더 질기다. 마침내 책장을 덮으며 이 성긴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디에 뿌리와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삶의 화살표를 제대로 가슴에 새기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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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은 프랭클린 구로하타. 재미작가 이창래의 소설 『척하는 삶(A Gesture Life)』(1999)의 주인공인 그는 미국의 한 도시에 사는 은퇴한 노인이다. 이웃들은 그에게 친절하다. 사람들은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일을 했던 그를 ‘닥(Doc) 하타’라고 부른다. 그의 삶은 누가 보기에도 모자랄 것이 없다. 그러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회상의 서두에 그는 이렇게 적는다. “과거란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구로하타는 스스로를 향해 묻는다. 나는 일본인인가? 아니다, 단지 살기 위해 일본인이 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국인인가? 그것도, 아니다. 고향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 내 삶은 그저 ‘척하는 삶’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반기를 드는 ‘서니’를 보면서 구로하타는 뒤늦게 혼란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그는 주체적인 결정을 하지 못한다. 단지 생존을 위한 선택 외에는 해본 적이 없으므로. 일시적으로 썼던 가면을 그는 벗지 못한다. 가면은, 이미 그의 살갗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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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비극을 보고 그것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것을 잊지도, 극복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주인공은 위안부의 참상을 전쟁 중에 보았고, 그것을 잊으려 혹은 속죄하려 한국인 딸을 입양했지만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가족의 삶 또한 쉽지 않게 흘러갑니다. 왜 비극은 그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악몽이 될까요? 그 비극을 만든 사람들은 속죄하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갈텐데 말입니다. 인생이 누구한테만 끊이지 않는 고통이어야 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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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순전히 제목이 재밌어서 샀다
척하는 삶이라니
살면서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는 법인데
작가는 어떤 척을 이야기하는 걸까
궁금해서 구매했다
물론 구매해놓고 읽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나도 내 삶에서 굉장히 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척 하다보니 책 읽는 것도
이렇게 늦어졌다
그리고 잡자마자 빠져들듯 했다
개인적으로 찾아봤을 때 이창래의 작품이
번역이 그닥이란 말이 있었는데
다행히 이 작품은 그렇진 않았던거 같다
다만 내 마음이 좀 먹먹했을 뿐
재밌다
이런 내용일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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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창래 작품들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주문해서 또 읽고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에 관심이 생기네요.
내용을 전체 훑고, 두번째 읽을 때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읽고 세번째는 어떤 주제를 정해서 읽고 계속 읽고 있어요.
이창래 작가들의 작품들을 요즘 곱씹고 있습니다.
원서도 도전해볼까 생각중이네요.
요즘 이 작가한테 묘하게 끌리네요.
재밌습니다. 감동도 있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