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부터 책이라는건 그 나이에 맞게 읽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든다. 박경리나 은희경의 소설들을 읽을 때면 느껴지는 이상 야릇한 이질감 을 동반한 감정들을 접할 때면 이들의 책은 내가 좀더 나이를 먹어 세상에 좀더 구른(?)후 아 이런게 삶이구나 라는 느낌이 쬐끔이나마 들기 시작할 떄서야 이해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양귀자의 모순을 읽은 후 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를 볼때면 나는 아직 정신적 성숙이 덜 이루 어 졌음을 반문 할 때가 종종 있다.
요즈음의 난 예전 내가 읽기를 포기 했던 여럿의 책들을 다시 펼쳐보며 읽기를 중도 포기했던 책들의 리스트를 줄여나가고 있다. 1984년이 그러 했고 데미안 또한 그러한 목록중 하나이다. 이번 달이 가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전날의 섬에 도전할 생각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에 벌써 3번째로 포기한 책이 있으니 도스도예프스키의 백치! 이책은 정말 끝까지 읽는게 고문인 정도이니..까라마조프의 형제들보다 더 읽기 힘들고 악령보다 더 재미가 없으니...향후 3년동안엔 다시 펼칠 일이 없을 것이라 사료된다.
다시 데미안으로 돌아가서.
고등학교시절 (1학년 시절)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책읽기를 강요 받았었던가. 게다가 그 청소년 권장 도서라는 것들이 옛날 사람들의 문어체 글들에다 반강제 성까지 띄고 있었으니 이거이 참 읽어도 먼 내용인지도 모른 채 책장만 넘기다 포기했더 랬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갑자기 먼 바람이 불었던지 우연히 구경 나간 서점에서 데미안을 꺼내 들었다.
데미안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머리속에 각인시키는 문구가 있다. 바로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대목을 주목할 것이고 헤세 자신이 데미안에서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이 문장이 아닐 까 한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는 아무도 이해 할 수없고 이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세계를 깨뜨리고 밖으로 나옴으로서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자아를 깨닫고 어른이 된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그런 정신의 자아를 깨닫고 소년이 어른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자 이다.
마지막에서 싱클레어가 본것은 데미안과 동일시된 자아 였으며, 데미안은 곧 알을 깨고 태어난 모든 자아의 표상이다.
그저 한번 정독을 했음으로 이 책을 모두 이해 하기란 정말 힘이 든다. 게다가 한번의 정독 만으로 난 데미안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우수운 일일 것이다. 아직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채 알을 꺠고 나오지 못한 나에게 데미안은 또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고 아직 자아를 찾지 못한 채 떠도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데미안은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