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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68년의 청춘을 이야기 할 때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아마 80년대의 청춘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캠퍼스에서는 낭만을 앞세우기 이전에 등교 및 시험 거부, 데모, 노선의 충돌 등으로 지금의 마흔을 앞둔 사람들에게 쉽게 드라마틱한 추억담으로 입에 오르 내리는 그 이야기들의 시공간이 장편소설 <독학자>의 무대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안에는 학구열은 있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를 갖고 좀 더 깊이 있는 학문에의 열정과 문제제기에의 열망을 가진 주인공이 있다. 그는 오직 책을 덮고 술과 데모와 민주주의에만 몰두하는 행동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회의와 괴리감을 느끼고 대학생활의 무의미에 방황하던 중, 같은 대학에 다른 과에 소속된 S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그와 정신적 사랑과 우정을 쌓아간다.
S군은 상아탑 속에 갖힌 대학생이기도 하고 냉철한 카운셀러이기도 하고 당당한 솔로이기도 하며 외곬수의 지식인이기도 하다. 고독을 즐기고 싶지만 아무런 문제 없는 교육자 집안의 자매 많은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름은 그를 철저히 냉소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 있으며 전쟁 이후의 풍요를 환경적으로 물려받은 그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물질적 욕망에 대해서는 초월한 듯 하며, 앞 부분에 부여 되어야 할 몫은 고스란히 지식욕과 사유에 스며 들어 그를 몽상적 지식인의 개성을 다지게 한다.
주인공 나의 관찰자 혹은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지만 소설의 제목에 드러나는 <독학자>는 말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입에서 씹히는 S군이 제목을 감당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우연히 타과 강의를 들으면서 수업 중에 던지는 질문이나 항간의 소문이나 항상 홀로 행동하는 S군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고, 결국에는 주인공은 S군과 친구가 된다.
언제나 건조하고 냉정한 S군을 동경하며 S군의 집단 (아버지가 교수이며 친척분도 교수이며, 주말이면 요리가 취미인 아버지의 솜씨로 가족이 한데 모여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식사 후에는 마치 디저트를 먹듯 친척 분과 함께 러시아 정치에 관한 토론을 밀도 있게 펼치는...) 속에 조금씩 발을 들여 놓게 되면서 주인공은 소극적인 군상에서 점점 적극적인 군상으로 거듭난다.
S군을 통해 S군의 친척이자 S군의 사상적 교류자였던 P교수를 알게 되면서 경외하는 지식인과 소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사유하는 동안 점점 주인공은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이후 주인공은 S군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학교를 그만두기로 하며 글은 끝을 맺는다.
자퇴 후 앞으로 마흔까지 이런저런 생계를 책임질만한 일들을 하면서 남은 시간은 온통 외국어 공부와 책에 매진하며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하되, 말하지도 쓰지도 않겠다던 주인공의 굳은 결심은 내 마음 한구석을 뒤흔들었다.
<독학자2>가 나온다면 아마 현 <독학자>에서 말하는 이였던 지금의 주인공이 제목을 책임지는 인물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마흔이 된 주인공의 인생이야기를 훗날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십년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다릴 것 같다.
스물 두살부터 마흔까지, 이십년에 가까운 그 미완의 생이 부디, 젊은 날의 다짐처럼 꿋꿋하고 안녕하길!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누구보다도 불행을 잘 알고 있다고 느낀다. 불행은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매일 ㅜㄹ행과 기꺼이 한 잠자리에 눕기 때문이다. 불행은 이 시대의 확인이자 기준이다. 불행이 없다면, 도대체 정말로 얼마나 불행해질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불행한 시대란 불행의 사회학이다. 불행이 독가스처럼 팽배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먼저 마시지 못해 아우성이다. 그 일상적인 친근함과 끈끈함 때문에 불행을 떠날 생각은 감히 할 수도 없다. 그 익숙함과 공유의식은 장엄한 합창과 구호, 예식에 즐겨 애용된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지 못하다면, 정말로 불행해지는 것이다. 선구자, 혁명가, 테러리스트, 폭도, 구경꾼들, 독재자, 장기 집권자, 예언자, 정치적 자살자 혹은 살인자, 그들 온갖 종류의 정적들, 그들은 매우 광기 서린 불행한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으로 시대의 불행을 창조한다. 그들의 넓게 펼쳐든 검은 망토 아래 쥐색 열망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든다. |
| 독학자는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터넷 검색에 의해서였다. 다들 과외다 그터디다, 모두 모여서 공부하는 데 익숙한데 나 같이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은 없을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이 책을 발견한 것이다. 당연히 공부방법의 책이리라 생각했는데 이 책의 분류는 문학, 소설이었다. 이 책이 나의 목적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읽고 싶은 호기심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감동으로 충족되었다. 이 책에서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대학과 그 구성원들, 그리고 사실상 비판에서 제외되어왔다고 해도 무방할 학생들. 나도 지금까지 긴 시간을 살아 온 것은 아니나 인간의 오만함은 뼈저리게 체험해봤다. 다들 서로를 무시하고 언제나 비판이라는 미명하에 비난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 전통적이고 배타적인 문화에 치를 떨던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내 자신을 그대로 던져버리게 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대중메체의 단편적이고 가벼운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한 가지 주관적인 평을 달자면 주인공의 문제이다. 이 주인공은 절친한 친구의 비판도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독학자의 길을 택한다. 어쩌면 친구가 그를 먼저 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오만한 주인공은 그가 남에게 겨눈 그 비판의 칼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점은 의문이다. 끝으로 정말 아쉬운 단점이 하나 있다. 물론 이러한 단점은 현대의 거의 모든 한국소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술성에 빠진 나머지 언어를 아름답게 구사하려기 보다는 무의미하고 무규칙한 언어의 남발이 많은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독자들은 책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문학이 문법에도 어긋나는 막연한 언어로 구성되기 보다는 그 내용을 통해 독자와 함께 숨쉴 수 있는 유기체이길 바란다. 본인이 이 책에 빠진 이유도 이 책의 난해한 문장구조가 아닌 그 내용의 공감대형성때문이었다. |
| 이 책의 이야기는 간단한듯 하지만 복잡하다. 대학교육에 환멸을 느낀 ''나''가 대학을 자퇴하고 은둔해서 독학하려는 얘기-라고 하면 무척이나 간단한거고, ''S''라는 그의 대학친구가 개입되면 얘기가 엄청 복잡해진다. ''S''는 영문과 학생인데 ''나''와 정신적으로 진정한 교감을 나누는 친구다. 작가는 후기에 그들의 사랑을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여기서 사랑이란 정신, 영혼의 사랑이 아닐까.(뭐, 동성애를 말함은 결코 아닌듯 싶다.) 난 처음엔 ''나''의 세상을 다 안다는 식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혐오감이 들었지만, 점차로 그의 현실 인식 상황에 굉장히 공감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대학을 입학할 처지기에 더욱 절실했던 것 같다.(하지만 이 소설의 시대는 70년대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S''와 나누게 되는 정신적 교감이 진정으로 부러웠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이 책을 권하기도 하였다.^^ 혀의 차가운 고독이 불러일으키는 문장에의 갈증!(...생략, 이부분에서는 그리하여 글을 쓰겠다고 서술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서투르게 목마르지 않으리라. 이것은 ''S''의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내 상황과 끔찍하리만큼 흡사해서 폰에다가 메모해 놨었다. 내 혀도 ''S''못지 않게 심하게 고독에 메말라 있었던게다. ''S''는 혀의 갈증을 글로써 표현하게다 하였으니만큼 나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일기, 혹은 이메일이라는 형식을 빌려서라도. 아무튼 이 소설을 읽은것에 나는 굉장히 즐거웠다. 배수아가 말하려 했던것을 곱씹어 생각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그들처럼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지 고민하게끔 해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놀이와 향락문화에 젖어 있는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 독학자는 천천히 사색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흔히 하듯이 속독에 가깝게 읽어내리다가는, 어느 순간 무얼 읽고 있었는지 헤메이고 만다. 사고의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인데, 그만큼 문장 문장의 요소마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탓이다. 그건 엄청난 지식을 담았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닌, 언젠가 나도 떠올렸던, 절실히 느꼈던, 어떤 몽상들이 나열된 탓이 크다. 마치, 수험생 시절 너무 열심히 파고든 나머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가 뭘 외우고 있었는지 어디까지 공부한건지 알 수 없게 되버린- 표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같다고 할까.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독특한 문체를 구사했기 때문이기도 할터이다. 의도된 듯한, 깊이 있는 읽기가 필요한 책. 철학서도 아니고 이론서도 아니나- 내 가까이서 느꼈던 동질감이 너무 커서 농도짙은 읽기가 필요한게다. 배움의 터가 되지 못하는 대학. 80년대 후반에는 사회운동의 집합체였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는 취업활동을 위한 곳이 되버린 허울뿐인 대학. 독학자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던 문제들에서 과감히 벗어나 몽상으로 끝났을 어떤 것을 실현에 옮긴 젊은이에 대한 얘기다. 여기, 주인공이 꿈꾸는 세상이 있다. [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그곳의 밤은 길고도 길며 달빛이 사람들의 고요한 이마로 찾아든다. 사람들의 대화는 마치 라틴어 기도문과 같이 엄숙한 문법을 준수한다. 모든 사람은 오직 생계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일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화려한 옷이나 번쩍이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종교와 신성을 존중하기는 하나, 아무도 신자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과 예술을 너무나 사랑하나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즉물적인 대학을 벗어나 스스로 설계한 배움이 있는 대학이 있다. [ 마흔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중략)...........그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주인공은 분명 '몽상가'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쉬이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며 다만 꿈꿀뿐이다. 그리고 여기 독학자가 꾸는 꿈은 책을 사랑하고, 문학에 경배하고, 지식에 목마른, 대학을 나온 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얘기들로 가득하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권위적인 과거 그대로를 답습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직 취업만을 위해 대학에 가고 돈에 얽매이고 사회적 지위에 맹목적이다 못해- 윤리적 가치관마저 잃어버린 중심없는 우리들과 다를바가 없음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인가. S가 가졌던 의문을 우리 또한 가져봤고, 가지며 살아자기 않던가. 내 자신의 위치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길을, 의문을 보여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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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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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휴학을 하기 전, 어떤 교수님이 이 책을 강의 중에 소개해주셨다. 이후 나는 깊은 고민 끝에 대학원 휴학을 결정했고 홀로 공부를 해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위험한 독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이 책이 자꾸 떠올랐다. 다행히 가까운 알라딘에 재고가 있어서 구입한 뒤, 휴학을 자축 혹은 자조하면서 기념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책에는 지독한 독학자 두 사람이 등장한다. 나와 S라는 친구가 그들이다. 그들은 정말 지독하다 싶을 만큼 자신들의 학문적 열정에 빠져들어 있는 대학생들이다. 내가 대학을 갓 입학했을 때 꿈꾸었던 진리의 상아탑으로서의 대학을 그들은 다니고 있다. 대학이 진짜 그런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시간과 환경을 추구해서다. 소설 속 배경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참일 때, 대학에도 그런 바람이 불어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을 하러나갔던 시절이었다. 수업을 듣고 착실히 공부하는 것이 만인의 적이 되는 행동이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착실하게 수업을 듣는다. 간혹 교재를 읽어내려가는 수준의 질낮은 강의 때문에 분노하거나 자신에게 더 맞는 공부를 위해 전과를 하려고 분투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공부는 환경의 척박함때문에 멈추는 법 없이 계속된다.
위 인용은 '나'가 동경하게 되는 S의 친척인 P교수의 말이다. 나는 P교수의 지성과 품위에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고 그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의 학구열과 지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P교수는 건강이 악화되어 나와 진정한 교류를 나누기도 전에 죽고만다. 나와 S는 여러가지 상실감을 느끼면서 스무살을 보낸다. 나는 결국 전과에 실패하고 대학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육체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지속하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40세까지 결혼이나 사랑,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계하지 않고 공부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친구 S는 그를 말려보지만 나의 태도는 굳건하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친구 S와 대학을 떠나고 완전히 혼자가 되기로 한다. 그 교수님은 왜 이 소설을 빌어 위험한 독학자가 되기를 경계하라고 하셨을까. '나'의 자의식과 지성의 눈으로 비춰진 세계와 인간은 어느 정도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아상을 가진 사람들처럼 위험하고 조금 무모해보인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고 나름의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보이며 근거가 있는 비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잘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무모한 순수랄까 지독하게 자기 자신인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어쩐지 해롭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왜 독학자란 위험한 것인가 생각한다. 왜 위험한가. 나는 학기 도중 휴학을 해버려서 교수님의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나'와 S처럼 열정적이지 못했다. 학부 때도 한번도 그랬던 적은 없었다.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새로 얻었지만 나는 포기했다. 책임감이 없다고 누군가 비난할지 모르겠다. 맞다. 나는 책임을 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밝힐 수 있는 것까지가 내가 질 수 있는 책임이었다. 막연히 문학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싶어서 대학원으로, 학교로 돌아왔으나. 진짜 학습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 내가 왜 문학을 하려고 하는지, 내가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알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으니 독선으로 오해받아도 좋으니 이 책의 인물들처럼 강렬한 힘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세계에서 미적지근하게나마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없었다. 나에게 꼭 그것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내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모르게 되었다. 나의 꿈은 너무 오래되었다. 그리고 내 꿈이 돈이 들지 않는 가난한 것인줄 알았는데 가장 비싼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움켜쥐기에 너무 비싼 꿈. 내 능력과 자질로는 너무 벅찬 것, 돈이 되지도 행복이되지도 자랑이 되지도, 삶의 등불이 되지도 못하는, 이 꿈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해. 보류해두었다. 그리고 나의 표류가 시작되었다. 나는 독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위험해지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혼자일뿐,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와는 정 반대의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40세까지 빡빡하게 공부하겠다는 그런 돌처럼 단단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 평생, 혼자서 해야할 공부가 너무 많다는 것, 내가 몰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뿐이다. 친구도 버리지 않고, 내가 조금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일을 찾아 헤맬 것이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하니까. 집도 이사해야하니까.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알고 싶은 지식이 담긴 책들을 사야만 할테니까. 그렇게 흐르는 대로 살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그러나 독학자의 위험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나를 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얼마나 희미하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는지, 배움에의 욕망이 가벼운 바람에도 얼마나 힘없이 스러지는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은 그런 이로움이 있다. 내가 작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은 결코 아주 작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늘의 희망은 이만큼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동안 즐거웠다. 교수님께 감사를... |
| 내 기억 속의 배수아는 첫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문장 안에 있다. 1995년에 나왔으니 벌써 10년이다. 이 지난한 시간 동안 배수아는, 왕성하게도 작품을 쏟아냈다. 부지런하게 자신의 이력을 채워나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문단에서는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배수아가 한국 문단을 왕따시키고 있는 듯하다. 말 그대로 '독학자'의 자세로 고고하게 소설만 써나가고 있는 셈. 95년에 나는 배수아가 은근히 좋았다. 아련하고 알싸한 느낌과 통통 튀는 젊음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 그녀는 아름답고 화려한 젊은 시절에 아무도 사가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사과를 팔고 있는, 저기 풋기 사라져 서서히 시큼하고 물큰하게 썩어가는 인생을 예감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느낌이다. 이 소설 <독학자>는 재기발랄한 신인작가의 첫 소설 같은 인상이다. 다분히 현학적이고 치기어린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얼마만큼의 치열함으로 역겹고 지리멸렬한 대학의 공부를 떠나 자기만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주인공의 단상 -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단상이거나 학문적 사유의 기록으로 보인다. - 이 소설의 줄거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소설로 즐기지 않고 편안하게 에세이를 읽는 듯한, 번역한 서양의 학문을 접하는 듯한 느낌으로 읽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본다면 모든 목소리는 거짓말이다. …… 문학은 의사소통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나 궁극의 의사소통은 결국 문학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 문학은 대화가 아닌 편지이다. 문학으로 대화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서로 알지 못하며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난 일이 없거나. 그런 경우에만 진실로 나는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90쪽)위와 같은 문장에 대해 나는 공감한다. 다만 주인공은 문학이 아니라, '공부하는 자'로서의 삶을 욕망하는 존재이기에 '문학'이라는 공부와는 좀 방향이 다른 듯 하지만 궁극으로는 통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91쪽에 등장하는 '침묵은 단순히 '말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며 그것과는 정반대의 강변에 서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어디서 본 것 같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한참 떠들어 봤지만 찾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사유의 연장이다. 어떤 형태든지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깊고 고요한 서재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아서 책은 전혀 펴보지도 않은 채 하루 종일 연필이나 깎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본문 56쪽) 라는 문장은 내게는 다다르고 싶은 환타지다. 감옥에서 책만 읽을 수 있다면! 배수아의 소설이나, <독학자>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이나, 궁극적으로는 목적이 없어 보인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어떤 성취나 정열이나 꿈을 있어서 맹렬하게 몰입하고 치열하고 고독하게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공부'가 정말 하고 싶기 때문에, 정말로 원하는 삶이기 때문에 공부만 하려고 드는 게 아닐까 한다. '목적 없는 공부', '공부의 목적'을 되새기니 깊은 화두가 될 듯도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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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독학자란 소설은 그 이전 배수아의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문장과 언어를 느끼게 한다. 장문으로 이어지는 관념적이면서 자기사색적인 냄새가 다분히 풍기고. 조금은 난해한 문장과 관념적 독백들이 읽고 있는 나의 가독성을 늦추는 작용을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주제와 제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일독할만한 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주내용이라면 아마 당시 화자의 대학생활때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연계되어 흐르고 있는 대학생활의 환멸과 갈등. 고뇌 그리고 떠남을 주요 테마로 엮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를 들라면 아마 지금의 나의 상황.-대학생-에 딱 맞는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공감적인 내용들이 많았고 밑줄 그며 생각해 보암직한 부분들도 있었다.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왕따처럼 홀로 지적희열에 빠져 있는 화자와 s,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나가는 주변 인물들. 다른 소설과 다른 점은 아마 등장인물들의 소수화에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단순한 모티브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모티브를 가지고 소설화했다는 것자체가 또 하나의 매력점을 줄 수 있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의 대학생활의 마감이 끝으로 마감되는 소설은 묘한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며 작별을 고하는 듯 느껴졌다. 지적열의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마흔살이 될때까지 생계를 지탱하는 것 외에는 오로지 공부하는데 매진할 것이다. 친구도 텔레비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흔 살이 될때 비로소 자신만의 대학에서 졸업을 할 것이다." 이 말에 혹해 단박에 이 소설을 구입해 읽은 유혹 구절입니다. |
2004년 열림원에서 나온 배우아의 장편소설 <독학자>는 위의 발췌문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어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언어를 통한 정신성장을 바라는 주인공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자면 지독한 아웃사이더이다. 하지만 이는 외부의 시선뿐만아니라 주인공 자신의 선택이기도 하였다.
<독학자>의 주인공의 사유는 언어와 그를 둘러싼 사회에 놓여있다. 그의 사유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주인공 자신이 "인간의 이성이란 단지 모든 사건이 진행된 다음에 그 역사를 기록하는 데나, 마치 자신이 스스로 해낸 것처럼 뽐내면서, 쓰일뿐이라고 결론 짓는다면 나는 편협한 회의주의가 인가" 라는 말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사유는 다소 회의적으로 보이는 것이 글을 읽고 있었던 나의 솔직한 심정인것 같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충분히 '사유할' 만하다.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 그로부터의 사유가 우리의 정신의 폭을 넓히는 인문,철학 정신의 출발 아니던가.
위 의 발췌문 처럼, 주인공의 사유는 우리가 당연시 여겼거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질문할'만 하다.
주인공은 결국 독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가가 밝힌 것 처럼 주인공은 사막처럼 혼자 남겨진다. 작가는 이를 위해서 주인공과 독자의 거리두기를 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그 거리두기는 성공하였다고 생각된다.
소설은 서사보다는 주인공의 사유를 따라가고 그 사유의 동행이 되는것이 즐겁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타인의 생각을 읽어나가는 것이 행동을 읽는 것 보다 힘들어서일것이다. 주인공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진보'는 그 자체로 그에게 목적성을 지닌다. 정신적으로 진보하여 무엇을 하겠다 보다는 그것 자체를 추구하는 그의 모습은 보통의 사람인 나에게는 조금 허무해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의 의도이고 나는 그것을 보통의 사람처럼 느껴버린 것이 아닐까.
언어를 위한,언어에 의한 책이다. 주인공이 선택한 삶과 그가 사유했던 철학들을 따라가다보면 언어의 홍수에 길을 잃는 느낌을 받는다. <독학자>는 본 소설이 가지는 무게보다 본 소설을 읽고 다른 소설과 글을 읽게 될때 우리는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 가를 질문하게 만든 다는 점이 우리에게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
| 이 책을 읽으며 느낀것은 마치 지붕옆에 있는 나만의 비밀 다락방에서 마음적 지적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배수아의 글이 이토록 집요하고 정곡을 찌르는 관념적 어휘들로 무장되어 있었나 싶다. 책 뒷표지에 쓰인 몇줄의 글에 반해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아주 좋은 독서경험이 되었다. 특히 주인공이 노교수의 죽음후 감상에 빠져 있을때 그의 노 부인 '경희'를 찾아갔다가 문앞에서 훅~하고 끼치는 그녀의 사람냄새를 맡고 늙고 초라해진 한 노인앞에서 느끼는 현실감은 매우 효과적이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선택된 언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라는 작가 자신의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지적 유희의 멋진 경험이 될것이다. 어딘가에서 노교수나 's'와 같은 지적 동경의 대상을 찾아헤매는 이라면 더욱.... |